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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제 7장 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다. 본문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 7장 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다.
사랑
2021. 10. 5. 11:29
가슴은 예수가 즐겨 다루던 주제였다. 그는 이 주제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주제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슴을 언급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에게 가슴은 참으로 신성한 장소였고, 예수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홈그라운드처럼 느끼는 듯했다.
"가슴은 당신을 신이나 우주와 연결시켜주는 고리요. 그것은 당신만의 독특한 경험과 자각과 품성의 중심을 당신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것과 통합시켜주죠"
이런 진술을 받아들였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가슴은 우리의 홈그라운드이기도 하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삶 속으로 펼쳐져나오고 우리가 지닌 불멸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것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
"가슴은 끌어당기고, 말이 없으며, 고요합니다. 거기에 있을 때의 느낌은 평화로운 하늘 호수에서 휴식하거나 텅 빈 공간 속을 떠나닐 때의 그런 느낌입니다. 가슴은 자력 중심이어서 당신의 모든 생명 에너지가 이 위대한 발생장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가슴을 권능 있게 하면 그만큼 당신의 에너지 수준도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으로 높아지죠. 또 당신이 명확성과 결단과 확고부동함, 의향과 고요와 존중, 정의와 친절, 위대성을 인식하는 능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가슴 안에서고요."
어느 날 가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는 나더러 장대한 삼각형을 나타내기 위해 그렸던 그 그림을 다시 가져와보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그림을 완성하려면 그려 넣어야 할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지시했다.
"삼각형의 가운데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시오. 동그라미 안쪽은 그냥 빈 채로 놔두고. 빛이 원주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으로 그려보시오. 이렇게 하면 삼각형의 중심과 함께 그것이 무한히 뻩어나가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지요"
그건 정말로 그래 보였고, 삼각형 역시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춘 것처럼 느껴졌다. 예수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것이 실존유형 안에서 가슴이 어느 지점에 놓이는가를 시각적으로 설명한 것이오. 가슴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무한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고요와 평화의 중심점이오. 어떤 존재가 무한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내면과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수준의 잠재력을 동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 자신인 사랑과 한 영과 금강입자들이 가슴의 안내를 받아 자신들의 실존유형을 조립하니까요. 한 사람의 영혼은 그의 삶을 이루는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들, 경험과 행위와 희망과 꿈들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오. 가슴은 삶으로도 통하고 저 너머 영원으로도 통하는 영혼의 입구죠. 가슴은 모든 고귀한 앎의 초시간적이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근원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힘과 외부의 힘이 대등한 한 지점이요. 그래서 가슴 안에서는 신의 의지와 당신 자신의 의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죠"
예수가 설명하고 있는 '가슴'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전지전능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그토록 경이롭고 중요한 것에 왜 굳이 신체기관의 이름을 붙였는지를 물었다. 설사 그 기관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또 숱한 전설과 이야기들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도 말이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것은 생명을 준다는 강력한 함축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 심장한 비유입니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이해를 그냥 확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퀴의 축이나 태풍의 눈 부위가 갖는 상대적인 고요처럼 당신 안에는 당신 삶의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 구성요소들이 공동의 목적, 단순한 조화 속에 함께 거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공간상이나 시간상, 구성물질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소. 몸의 가슴은 이것의 존재를 신체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것이 어떤 질의 생명력을 만들어내는가는 당신 혈액의 활력과 강인함으로 알 수 있고요. 피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장차 이루어질 의학상의 발견들이 이 사실을 확인해줄 것입니다. "
이렇게 그가 가슴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주기 위해 말을 이어갈수록, 그의 말들은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지녔던 협소한 전제조건들과 비교되면서 갈수록 광채를 발했다.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내가 지닌 이런 전제조건들 중 거의 어느 것도 참된 앎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하더라도 우리 문화에서 가슴보다 더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슴으로 축하하면서 휴일을 갖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어버이날 기념일들일 있고, 우리 가슴의 헌신이 가져온 이런저런 측면들을 축하하는 경우들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컨츄리 뮤직은 상처받은 가슴을 위해 노래하고, 카운슬러들은 그 상처받은 가슴들을 치유하고자 애쓴다. 또 빌보다 차트와 신문광고, 개 사료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팔기 위한 텔레비전 광고들 역시 가슴의 권능을 일깨우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가슴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얼마나 작은가! 우리 몸의 가슴만 해도, 의사들은 인간의 이 신체기관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는 사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길어진 우리의 수명과 더 커진 우리의 몸 크기를 설명해준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심장질환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잘 팔리는 천국행 열차표인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몸의 심장이 은밀하고 멋진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관인 건 분명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차원들 대부분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에 반에 동양의학과 동양철학은 우리 몸과 우리의 심장을 함께 감싸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에너지장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이 복잡하고 난해한 전기 에너지장이 심장의 생명력을 키워주는 원천이란 증거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떠오르고 있다. 이 주제를 가장 깊이 파고든 침술 분야의 연구들은 몸의 내부와 둘레의 경락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 이 매력적인 주제는 서양과학과 의학을 보완해주는 지식의 신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또 대중 심리학에서 의미를 끌어내어 심장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살아가는 데 있어 우뇌적인 접근 방식과 좌뇌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를 아루는 연구나 상담치료, 참조문헌들도 대단히 많다. 이들은 우뇌적인 사람들이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한다. 달리 말하면 우뇌적인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직관적이고 동정적이고 추종적인 반면, 죄뇌적인 사람들은 놀리적이고 분석적이며 경쟁적이고 주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은 자주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을 여성적인 것으로, "논리적인 사람들"을 남성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극단으로까지 진행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 두뇌가 가진 이원적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관찰들에도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참진리는 그런 협소한 가정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미치는 반향에 있다 그런 발상들이 비춰주는 것 중 하나는 우리 문화에서 가슴이란 건 대체로 우리 존재의 감정적이고 동정적이고 직관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슴이 가진 권능의 스펙트럼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위에거 말한 가슴에 대한 고찰들 모두가 중요하고 유효하지만, 하나하나 별개로는 불완전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그 모두를 다 합친다 해도 그것들만으로는 예수가 말했던 성스런 가슴에 필적할 수 없다.
우리의 대화가 있고 나서 요 몇 년 사이에 가슴에 대한 이해 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나는 학자이자 과학자인 칠턴 피어스의 첫 논문을 읽고 대단히 기뻤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여러 분야의 연구들을 모아 가슴이 인간 존재의 중심 지성임을 확인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심장 세포의 60%에서 65%가 기존 견해와 달리 근육세포가 아닌 신경세포이다. 심장의 이 신경세포들은 뇌세포들과 같을뿐 아니라 뇌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신경전달 물질 및 같은 연결관계를 갖는다. 신경절이라 불리는 이 연결고리들은 몸의 모든 주요기관에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피어스는 심장이 몸 주위 2.4m에서 3.6m까지 퍼지는 전자기 영역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영역은 파동과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아무리 미세한 지점에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뇌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내적 체험을 창조하기 위해 자원을 끌어내는 전자 스펙트럼 전체를 이 '심장 영역'이 공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예수가 내게 여러 번 말해준 흥미진지니한 한 설명을 기억나게 해주었다.
"개개인들 속에는 그 존재의 신체적 영적 감정적 지적 의도적 구성요소들이 완벽한 공시성을이루는 한 지점이 있소, 이 지점에서는 요소나 시간, 공간, 조건 면세서의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과 죽고 난 직후. 그리고 그 사람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완벽하게 일치할 대는 ㄴ그 사이 어느 때라도 맛보게 되는 '제로 지점'이요. 이 성스런 자리에서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와 영원히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심하게 타락했는가에 관계 없이요. 그 지점은 참된 단순성의 지점이기에 아버지의 완벽한 교감을 나눌 수도 있소, 당신이 그렇게 할 때마다 당신의 삶은 갱신되거나 변화될 거요.
가슴은 자력 회오리여서 본질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축복들이 이를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통합되고 생명력으로 집중됩니다. 이렇게 모아진 힘은 전자기의 법칙에 따라 생명에너지로 전환되죠. 본질적으로 자기적인 가슴은 끌어당기고 받아들이는 무구한 자각을 매개로 할 때 가장 잘 작동합니다. 나누고 튕겨내고 심판행동들은 가슴으로 들어가는 문을 당신의 등 뒤에서 닫아버리고 말죠.
그러니 당신의 가슴을 강하게 하려면, 먼저 무구함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슴을 권능 있게 할 수록 그것은 당신에게 더 넓은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그냥 삶에 대한 열정이 더 커지고, 더 편하게 자고, 더 소화가 잘되는 정도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건 가슴이 그 사람의 건강과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가슴의 중요성과 그 성과를 더 많이 긍정할수록, 당신의 삶은 더 풍성한 열매들을 수확하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은 더 과감한 변화들을 이뤄내는 데 필요한 에너지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당신의 가슴을 찾아감으로써 얻게 된 성과가 당신의 가장 황당한 꿈까지도 능가하게 될 거구요. 당신이 지닌 에너지 수준도 그 형태와 성질에서 바뀔 테고요"
이러할진대 힘에 그토록 몰두하는 우리 세상이 가슴에대해서 거의 모르고 잇다는 건 아이러니가 인겠는가? 예수가 말했듯이 "가슴 중심은 인간이 지닌 권능의 참된 원친"인 마당에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나는 그 당시 내 관심을 강하게 끌고 있던 한주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우주의 권능power(힘,권력으로도번역-옮긴이)이 사랑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 지금은 성스런 가슴이 인류에게 주어진 권능의 중심이라고 하셨고요. 그런데 힘이 그토록 긍정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면, 왜 지금의 지구에 그토록 힘들고 파괴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건가요?"
"그 문제는 권능 때문이 아니라 대리 권력 때문이오!"
나는 예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추측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시 그에게 물었다
대리 권력이란 게 뭐죠?
으레 그렇듯이 예수는 완벽한 이해를 위한 기준을 세우는 것에서 가르침을 시작했다.
"참된 권능은 신과 더불어 거하는 데다 본디부터 타고나는 것이요. 이 권능은 창조주와의 지속적인 연결을 통해 개별 존재들과 모든 생명체들에게 이전되어 개개 생명체가 본디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식이 됩니다. 이 권능은 사랑을 부정하고 신에게서 분리되는 경우를 제회하고는 잃거나 더럽혀지지 않죠.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권능은 순수하니까요.
반면에 대리 권력이란 인간이 주조나 권위, 혹은 자기 외부의 세력들에게 위힘한 힘이요. 대리 권력이 환경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을 키울 수는 있소, 하지만 대리 권력이 타고난 권능이 가진 권리들까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쉽사리 부패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사업체를 세울 때 그 두 사람은 대리 권력을 만들어내죠. 그 대리 권력을 대리 권력 자체로 이해하고 두 사람이 동등하게 그것을 감독할 때, 그들의 만들어낸 구조는 쓸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강탈해서 그 대리 권력을 오직 자신의 것으로만 삼게 되면, 그건 틀림없이 부패하고 말겠죠. 또 아이들으 교육도 부모들로부터 위임받은 대리 권력입니다. 그것이 부모들의 가치관과 소망을 반영하는 한, 그 권력은 적절한 관리를 받는 셈이지만, 만일 그것이 부모 자식간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권한을 갉아먹는 식으로 이용될 때는 문제가 생긱도 맙니다.
정부 또한 국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 권력이요. 정부가 국민들의 필요에 봉사하고 자신을 존립하게 해준 국민들의 천부적인 권리를 존중한다면, 그 대리 권력은 쓸모가 있소. 하지만 그 대리권력이 국민들의 전부적 권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부패가 시작될 수밖에 없소
이런 대리권력은 통상 무력 사용과 강제적인 복종과 억압, 그리고 속임수로 보완되곤 하죠. 대리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에너지를 천부적인 권리에서 끌어냅니다. 따라서 천부적인 권리를 존중하고 공공연하게 인정한 대리 권력은 확장된 효과적 권위일 수 있소, 하지만 무력과 속임수가 우선순위를 뒤집어 대리 권력이야말로 진짜 권능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주게 되면, 개벼룩이 개를 소유하려고 하면서 위협과 처벌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상황이 펼져지게 되는 거죠.
그런 억압적인 상황에서는 타고난 권능으로 뒷받침되는 주권들을 선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모든 참된 해방자들이 갖는 힘이 바로 이런 거료. 이것이 1776년에 당신 나라 건국의 아버지들이 했던 일이고, 노예제를 철폐할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와 가족과 직장과 개인의 삶들 안에서도 일어났고, 한 개인이 가슴으로 되돌아가 창조주가 거기에 놓아둔 천부의 권능을 활성화할 때도 일어났소. 때로는 대리권력이 반격을 가해오기도 하죠. 하지만 대리권력은 그 자체로는 어떤 권위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 이길 수가 없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천부의 권능과 대리 권력간의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존중ㅇ할 책임이 있소. 당신의 타고난 권능은 신의 자녀가 되는 것에, 그리고 당신 자신이 사랑과 성스런 가슴을 통해 아버지의 맺은 영원한 서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여러 정체성들, 특히나 사회적 신분이나 업무 경력, 출세 정도를 나타내는 자기 정체성들에 권위를 위임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자기 정체성들이 타고난 권능에서 나오는 권리들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면서 당신의 삶을 지휘하고 소유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소, 당신들의 언어에서 '에고'라는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만, 에고와 관련되어 야기되는 문제상황들을 가장 잘 설명해준는 건 그런 대리 정체성들이 영혼의 참 자아를 대신함으로서 나타난 결과라는 해석이요
당신 존재의 깊은 곳에는 당신만의 성스런 중심이 있소. 그것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고요하고 차분한 방이요. 당신의 타고난 권능은 이런 연결을 통해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이런 앎이 당신의 삶에 대해 갖는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오. 가슴 자체에 대한 앎은 당신의 삶에 더없는 자리요.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기도의 본질이오. 내가 제자들에게 벽장 속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했을 때,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말 그대로의 의미로 이야기했던 것이오. 외따로 떨어진 고요한 곳이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소. 이제부터 자기 존재의 내면에서 들어가려는 그 성스런 방에 어울리는 장소를 고르시요.
성스런 가슴은 우리 몸에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소, 이 위치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척추와 심장 사이, 심장에서 위로 2.5센치미터에서 7.5센치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소, 이것은 그 사람의 신체 비율과 성스런 가슴보다는 약간 아래쪽에 있는 그 사람의 중력 중심에 따라 좌우되죠. 심장은 전체로 보면 몸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긴 하지만. 심장의 진짜 축은 몸의 정가운데에 있습니다 사실 성스런 가슴은 필멸의 삶과 영생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이요. 이것의 이미지를 그려 보려면 당신의 몸을 관통하면서 하늘에서 땅까지 뻗는 사랑과 생명과 빛의 수직축을 그려보고 나서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대표하는 사건들로 점철된 수평축에 의해 교차하는 모습을 떠올리시오. 신성한 안내는 완벽한 합일과 제로저항의 이 교차점에서 세속의 모든 가능성들을 포용하고 있죠.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비유는 부모와 아이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얼싸안는 무구한 포옹이오.
가슴이 건강과 활력으로 가득할 때, 그곳은 있기에 가장 자연스런 자리요. 하지만 그것이 무시당하고 버림받게 되면, 다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이 쌓여갑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가슴에는 당신의 참된 품성과 당신 자신인 사랑의 자국이 찍혀 있다는 거요. 가슴이 당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이것뿐이오. 따라서 당신이 거짓된 정체성이나 사이비 합의, 순수하지 못한 생각들, 불필요한 여분의 짐다발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해봤자 당신은 거기에 맞는 열쇠를 내놓지 못할 거요.
당신은 가슴 안에 있을 때 가장 가치 있는 존재요. 그곳은 사실 당신의 집이고, 당신 존재의 중심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가슴의 보안시스템은 결코 호락호락하지가 않소. 그것은 신의 의지에 따라 당신이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상이나 가식, 판단 따위는 모두 정문에서 압수 당하고 말죠 .하지만 당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식 또한 이렇게 어린아이로서가 아니겠소?
가슴으로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소, 쉬운 쪽은 당신의 경계심이 크고 고요한 호수 속에 던진 자갈돌처럼 되게 놔두면서 확고하면서도 순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고요와 공허 속으로 흘러들어가 편안히 안착하는 거요. 이것이 존재전체가 하나임을 지켜볼 수 있는 고요한 묵상의 방법이오, 이것은 당신의 성스런 자리요.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불멸, 당신 자신과 신을 연결하는 중심축이니까요.
다른 방법은 좀더 어렵소, 어느 쪽이든 당신이 더 가까이 가도록 해주긴 하지만요. 그것은 그 자체로 정화하고 바뀌는 과정입니다. 말하자면 직접 가슴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본래의 성스런 중심으로 재임명하는 과정이요. 이 접근방식으로 하면 당신은 가슴에 무한과 성령, 그리고 아버지와 교감할 수 있는 통로를 설치하는 셈이 됩니다.
우선 시작단계에서는 에너지가 당신 몸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것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하오. 그것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고치 비슷한 거요. 그런 다음에는 당신 마음의 눈으로 그 원의 뒤쪽에서 척추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시오. 등을 마주보는 이지점에서 마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때 처럼 당신의 척추를 위 아래로 쭉 흝어보시오.
당신이 찾아낸, 가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처음에는 아주 작을 수도 있소. 하지만 일단 들어서고 나면 그것은 순식간에 넓어져 당신 앞에는 무한이 펼져지게 될 거요. 그 입구가 워낙 빈틈없이 막혀 있어서 그것의 존재를 느낌으로 밖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곳이 입구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 비유해서 말하면 그 앞의 큰 바위를 치워내야 합니다. 그러하고 좌절하지는 마시오.... 입구는 거기에 있으니까요. 당신이 살피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국 그것을 찾아낼 것이고, 당신이 두드리면 그것은 열릴 것이요.
당신이 처음 보게 되는 광경에 충격받지 마시오. 그 입구로 들어셨을 때 아마도 당신은 우주의 차고 어두운 공기를 느낄 거요. 영은 몸보다 찬 편이라 몸이 오싹해지는 경우도 자주 있소, 또 그입구에서 불타는 관목을 보거나, 입구가 불길에 에워싸여 있는 모습을 보거나, 건장한 천사가 칼을 들고 입구를 지키는 모습을 보거나 느끼는 경우도 있소, 아니면 뭔지 모를 경외심 때문에 들어가기가 주저되면서, 비유해서 말하면 왠지 신발을 벗고 끓어앉거나 아니면 목욕재계를 하고 싶을 수도 있소, 이런 것을 인식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부정하거나 달아날 거요 왜냐하면 그들이 느끼는 경외심이란 신과의 연결에 다름 아니니까요.
이런 식으로 해서 가슴 입구로 들어가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위해 태초부터 거기에 놓여 있던 지혜를 물려받을 겁니다. 성스런 가슴에 대한 의식을 열게 되면, 지금까지 당신이 잃고 있던 여러 차원의 지성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니까요. 아니 가장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내면의 평화와 참된 이완은 경험할 수 있을 거요"
예수는, 가슴은 우리가 그것을 찾든 아니든, 혹은 인정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언제나 우리 삶을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우리를 아버지와 연결해주는 성스런 고리이고, 언제나 우리의 고귀한 지성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당신의 가슴을 통해서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내면의 성소를 자주 방문하면 할수록 그것과 당신,또 창조주와 당신의 관계는 더 긴밀해집니다.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 기도요.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바라는지 다 알고 계시니,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내가 내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문은 무엇보다 아버지와 자녀, 즉 천국과 지상간의 결합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었소, 이 상스런 결합을 공경하는 것이 가슴의 기능이죠"
예수의 기도문은 인간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인간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개사되곤 했다. 그 기도문은 본래 아람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 고대어를 조심스럽게 연구하면 익숙한 우리말 기도문을 좀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여러 번역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오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
아멘"
"결합이 강할 때는 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말로 기도하는가는 그 성스런 가슴에 몸소 있는 것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소. 내가 내 사도들에게 주었던 기도문은 기도하는 사람을 성스런 가슴으로 직접 데려가도록 한다는 데 그 특질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에 포함된 의미를 경건하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효과를 맛볼 수 있죠.
그 기도문의 용어 자체는 정확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번역문들 중에는 '빚' 대신에 '죄'라고 쓴 경우들도 있지만요. 이건 맞지 않소. 당신이 죄의 개념이나 용어를 그 방안으로 가져갈 수 없듯이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문 앞에서 당신이 진 빚을 탕감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올바르고 적절한 일이지만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그렇기를 바란다는 전제하에서 당신 또한 완벽과 풍요 속에 거하기를 바라시죠.
합일과 완벽 속에 거하는 아버지는 어떤 죄도 알지 못합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당신들 서로간에서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제를 화나게 했다면 먼저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내가 말했던 이유가 이거요. 그런 다음에야 그의 가슴이 순수해져 자신의 사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가슴을 정화할 때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내가 '순수한 가슴에 축복 있기를, 그들은 신을 보리니'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요.
내가 말했던 사원이란 대부분의 경우, 건축물로서의 사원이 아니라 성스런 가슴을 가리키는 것이었소. 내가 하늘왕국을 지칭할 때 분명히 그러했듯이. 내가 말했던 사원이란 신과 인간이 결합하는 완벽영역. 성스런 가슴 속에서 발견되는 완벽영역을 말합니다. 신은 완벽의 저자요. 완벽이 머물때, 천국이 열립니다. 인간이 이 완벽으로 들어가는 문이 성스런 가슴이오. 먼저 이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오.
그 성스런 침묵 안에서 당신은 법열과 고요를 경험하면서 치유받거나 양육받을 수도 있고, 당신 앞에 펼쳐진 무한을 볼 수도 있소. 무한에 대한 이런 관점이야말로 고귀한 자각의 원천이요. 그 것은 당신과 당신 자신인 사랑을 존재 전체의 영원한 광활함 속에서 '존재'의 한 단위로 존중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정행(正行)의 길로 안내해주는 지성의 특정차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여기 이 소중한 지혜의 중심에서요. 지성에는 일곱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가슴 중심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갑니다. 당신은 처음에는 그것들을 삶의 원리로 여길 테지만, 그것들을 충분히 습득하게 되면 위대한 앎과 능력의 차원들로 보게 될 거요. 그 차원들이란 합일과 사랑과 삶, 공경, 정직, 정의, 그리고 친절이요. 이해의 이 차원들을 통해서 가슴은 무한대의 출발점에서 나오는 무한대의 결과들을 이뤄줄 무한대의 방식으로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소. 이런 게 가슴의 역량이오.
물질 존재를 포함하여 모든 현실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무한에서 솟아납니다. 무한은 일차 원인으로서 신과 일치하죠. 신의 자녀인 당신 또한 무한과 일치하고요. 무한은 신의 한없는 잠재력으로. 이 잠재력은 처음에는 자각으로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는 사랑으로, 다시 그 다음에는 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무한대로 배열되는 금강입자들의 무한한 공급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신의 한 측면으로서 당신들은 무한의 일부이지, 거기서 기인한 구조의 일부가 아님을 잊지 마시오. 만물의 질서 속에서 당신이 갖는 이런 위치 덕분에 당신은 무한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고, 물질 실존의 광할함에 압도당하는 일 없이 그것을 관찰할 수 있소. 이것이 당신이 복제와 모사와 유사성으로 가득한 우주 속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개인일 수 있는 방식이요.
당신은 영원히 당신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 우주로서는 무한의 일부인 당신을 포용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신의 무한을 확장시켜주는 팽창점이요. 당신이 무한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고지가 바로 당신 가슴이고요. 가슴은 당신이 신에게서 받은 선물이요. 그것은 당신과 아버지를 영원히 묶어주는 끈이요"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물었다. "우리는 본래 하나가 아니가요? 그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은 이미 존재하는 거고요. 왜 다른 것이 필요하죠?"
"만일 당인이 스피커가 하나여서 모노 사운드인 라디오를 가지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완벽하고 무한한 사우드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사람들은 그 라디오가 스데레오이기를 바라지 않겠소? 사실 거룩한 아버지는 무한의 근원인 하나이고, 한 무한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위대함은 그 너머로 확장하여 스테레오적 무한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냈소!
그는 자신의 자녀를 통해서 이것을 이뤄냈소! 보다시피 아버지의 단독 무한은 그 자녀에 앞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녀와 함께하는 것이 스테레오 우주의 살아 있는 본질이요. 자녀가 없다면 스테레오적 실존, 다시 말해 무한대의 관점에 무한대의 원리를 덧붙여 만들어내는 현상은 있을 수 없소! 따라서 당신들은 우주의 비옥함이자. 그 모든 것의 깊고 깊은 완결이오. 이 때문에 당신들의 개성과 자기 인식을 존중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당신들이 생각하고 상상할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이 자기 인식에서니까요. 그 안에는 당신들이 무한과 창조의 부차적 근원일 수 있는 권리가 담겨 있소.
자기 인식이 없다면, 당신들은 예정된 조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도관(導管)에 지나지 않을 거요. 자기 인식은 무한의 이차적인 근원이 될 수 있는 당신들의 능력에 불을 붙이는 점화장치요. 당신들에게 확장된 실존 차원들을 제공하는 것이 이 무한과의 교감이오. 우주는 창조주도 안식할 수 있고 피조물도 자유로울 수 있는 일종의 협력관계요! 그것은 당신이 형제들의 눈을 아버지의 눈으로 들여다본다면, 다른 사람들과도 체험할 수 있는 교향악적인 관계요.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무한의 교향악적 윤택함을 키우고 있는 것이요"
내 경험에서 볼 때 우리가 이런 교향악적인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무심함과 냉담함 때문인 듯 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경멸이나 혐오, 질투 때문에. 아니면 단순히 동료 인간들이 삶에 대해 갖는 가치를 알아치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간과하곤 한다. 이런 생략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는 유머 한 토막이 있다.
어느 마을에 많은 재산과 비옥한 농장을 가진 농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해에도 비록 일이 힘들긴 했지만 그의 농사는 풍작이었다. 수확철이 다가온 어느 날. 그가 앞으로 거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트랙터 옆에 서 있노라니, 목사 한 사람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의 옆에 차를 세웠다. 그 자상한 목사는 감탄의 몸짓을 하며 말했다. "아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농장을 참으로 아름답게 축복해주셨군요" 농부가 대답했다 "그래요. 목사님, 하나님 덕분이죠. 그래서 저도 수도 없이 이런 축복을 내려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지요. 하지만 당신이 뭘 알겠소? 당신도 그가 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해버릴 때를 봤어야 하는 건데!"
예수가 말했다. "무한을 계속해서 확장하는 데 있어 당신들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요. 당신들은 별도의 차원이요! 가슴은 이 별도의 차원을 이루게 해주는 문이고요. 그것은 당신들의 고귀한 지성이 시작되는 지점이요"
예수는 살아가는 동안 의식을 만들어내고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구사하는 데는 여러 수준과 여러 성질의 지성이 관계한다고 설명했다. 그 중 최고의 지성은 사랑 자체다. 왜냐하면 실존의 최고 신비와 해결책들은 쥐고 있는 건 사랑뿐이니까.
인간에게 가장 낮은 지성은 생체발생적인 지성으로 이 지성은 생존을 위한 충동을 제공할 뿐 아니라 몸의 기능들을 관할한다. 하지만 생체발생적인 지성은 죽음을 극단으로 두려워하고 환경에 적대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참된 삶을 꾸려갈 방책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생체발생 지성이 철학을 세울 때, 도덕은 처벌과 죄의식의 산물이 되고, 권력은 영토적 요소가 되며, 인종적 정치적 사회적 유사성이 그 사회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토대가 되고, 신은 생존투쟁에서 당파적인 동맹군으로 여겨진다. 물론 신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는 전제 하에서.
다행히도 이 수준의 지성 위에 삶에 대한 훨씬 더 넓은 인식과 정보를 모으고 소화할 수 있는 정신(마음으로도 번역)이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의식 차원에서 더 많이 자각할수록 생체발생적인 지성의 협소한 시야는 정신능력과 자질이라는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대체된다. 예수는 정보를 소화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논리로 체험을 정리해내는 광대한 기억은행이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의 가장 위대한 산물은 합리성이고, 그것의 가장 큰 한계는 구조적 개념들에 대한 의존성이다.
"정신은 흡사 컴퓨터 시스템처럼 이진법을 써서 선택적 기능들이 전기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는 통합 장치요. 정신의 지성은 그것이 봉사하는 환경이 만들어낸 앎의 체계입니다. 그 환경은 그 사람의 하루 생활만큼 작을 수도 있고, 우주만큼 클 수도 있소, 정신이 확장하는 듯한 외관을 지니는 것은 그 최소의 시스템 안에 더 큰 시스템과 연결되고 결국에는 더 큰 시스템을 불러오는 패턴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아무리 그래도 정신은 하인이요. 따라서 그것은 고급한 정통 지성을 갖지 못합니다."
정신이 철학을 세우려고 할 때는 이상적 형태라는 관념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 때문에 그것의 공리들은 자주 삶의 실제 현실에 미치지 못하고 만다, 정신은 타당성과 정확성, 개혁이라는 개념들로 도덕성을 보고, 권력을 지식에 대한 독점적 통제로 여긴다. 정신에게 사회는 서열식의 관리구조이고, 법은 공정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정확성의 문제다. 정신의 지성이 신이라는 실체에 대해 좀이라도 생각할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불완전을 판단하기 위해서 불완전에서 완벽을 분리해낼 수 있도록 설정된 이상화된 개념들을 통해서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그의 환경 안에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인간에게 자연의 힘을 지배할 수 있게 해준 쓸모 있는 하인이다. 정신은 우주에 대한 광범한 정보군을 주었고, 그것을 숙고해볼 여유를 주었다. 이 같은 봉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도 정신에는 존중할 점이 많다.
하지만 정신으로서는 삶을 전혀 동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인류의 대군단이 마지못해 하면서도 생체발생적 지성이 제공하는 삶의 설명 족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무어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생체발생적 지성은 친숙한 작은 범위들 안에서는 적어도 생명지향적이고 협력적이 아닌가! 예수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선언을 할 때 우리 논의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 이런 식의 고찰이었다.
"인류는 시급하게 가슴의 고귀한 지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신만으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줄 수 없는 데다가, 발생적 지성이 오늘날의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력과 결합하면 인류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 때문이오. 정신에 비해 가슴은 최고의 단순성과 공시성에 근거한 지성의 작용이요. 그 바탕은 존재 전체와의 합일된 관계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인식하는 자각 중심이고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지성의 수준들을 요약해서 말하면, 생존과 논리, 공시성과 사랑이 그것이용. 개개인의 삶 속에는 이 네 가지가 모두 들어 있소. 물론 사람마다 자신에게 갖아 많이 도움이 되는 한 수준에 중점을 두긴 하지만요. 만일 그 사람이 가슴의 지성(공시성의 지성-옮긴이)이나 고귀한 사랑의 지성에 대해 거의 모른다면, 그는 다른 가능성들 중 하나에 집중할 테고요.
생존적인 지성이 물질 삶을 유지하고 환경과 감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데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논리적 지성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우주선을 제작할 수 있소, 하지만 어느 쪽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성과 결합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소, 그런데도 주어진 역량으로 넘어서 그것들을 적용했을 때는 파멸적인 결과가 불가피하죠.
궁극에서는 무한히 연결된 단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 영이오. 아마도 이것을 위대한 우주 정신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거요. '지성'이라는 용어 쪽이 그것의 기능과 삶에 대해 갖는 그것의 유용성을 더 정확하게 표현해주긴 하지만요. 반면에 정신은 엄밀하게 말해서. 우회성과 자족적 통합성과 독점적 적용 대문에 적어도 최소한의 구조는 지니기 마련이오.
무한을 이해할 수 있고, 하늘과 땅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는 건 오직 가슴의 단순성뿐이오. 가슴은 흡사 바퀴의 축처럼 균형의 중심에서 이해의 일곱 동심원으로 자신의 자각을 펼쳐갑니다. 지성의 이 각 차원들은 앞선 차원이나 차원들 위에 세워져 그것들을 완성시키죠"
지성의 첫 번째 차원은 합일이다.
이것은 모든 삶 속에는 합일하는 힘인 오직 한 신, 한 권능만이 있다는 근원적인 자각이다. 이 자각은 영의 단일성을 긍정하고, 연륜의 지혜를 드러내며, 더 넓은 세상질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합일을 중요시할 때, 모든 실존 속에 퍼져 있는 인과의 유형들을 이해하게 되는데, 가슴의 지성은 원인과 결과가 단순히 일직선적인 결말 이상임을 드러내준다. 전체에게 도움되는 행동을 하면 전혀 다른 방식이면서도 그 대가를 지불받는 사람에게 도움되는 방식으로 보상받듯이
"최고의 지성인 합일에 선(善)보다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없소. 물이 자신의 수위를 찾듯이, 선도 자신의 적용 수위를 찾습니다 합일의 권능 덕분에 남을 해칠 의도로 취해진 행동조차 신은 선의 형태로 바꿀 수 있소.
또한 합일은 지성의 근원이요. 합일은 앎을 통합하고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니까요. 이것이 바로 지혜의 시작이요. 통합은 성공적으로 생각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리인 데다가, 우선순위가 없다면 중점을 두고 가치를 둘 것이 삶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이것은 당신이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지배와 관련된 핵심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더 높은 지성으로 바뀝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지배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사업에서부터 군사 분쟁에 이르기까지 지배의 문제에는 경쟁이 따라다니죠. 개인의 삶에는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다툼이 있고요. 이런 것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배를 다투는 경쟁에는 이렇게 명백한 것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식탐과 같은 집착적인 충동들은 몸의 자연스런 기능과 경쟁하여 지배력을 손에 쥐려는 것에 지나지 않소 이런 목록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죠. 그 사람이 신을 자기 삶의 합일력으로 허용할 때까지 그 경쟁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소.
모든 집착과 충동은 허구적 지배와 대리 권력이 만들어낸 결과요. 개중에는 가장 강한 지배는 한 개인이 직접 자신의 권리를 유보시키는, 꾸며진 정체성들의 지배일 거요. 그것은 당신을 헤매게 만들고, 당신의 시간과 희망, 당신의 꿈과 사랑을 죽이는 가짜 지배요. 그런 가짜 지배가 없다면 당신은 온몸에 무한한 지혜가 넘칠 것이고, 그런 무한한 지혜를 사용할 여유를 가질 것이오. 신이자 하나이자 궁극인 합일이 현존 할 때, 당신은 자신의 삶과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권능을 가집니다 "
예수는 우리더러 가슴으로 있으면서 합일의 원리에 대해 명상하고, 신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권능임을 선언해보라고 제안했다. 우리가 이런 자각에 자신을 더 많이 열수록 다른 것들이 우리를 통제할 능력은 더 줄어든다. 그러고 나면 신의 권능이 가슴을 통해 우리에게 옮겨옴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슴 안에 존재하는 지성의 두번째 차원은 사랑이다.
"사랑은 우주의 권능이요. 따라서 당신의 삶에서 가장 큰 방어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호하고 영예롭게 하고 존중하는 것이오. 당신이 명확성을 가지고 이 원리를 계속 유지하면, 당신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오. 이것은 당신의 모든 목적이 사랑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지향 이상의 것이오. 그것은 지성적이고 의미 있는 삶의 차원이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있음의 본질이오. 목적에 헌신하면서 움직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높은 지성을 갖지요. 그렇게 자신의 참된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되고요.
가슴의 지성은 누적됩니다. 합일은 인식함으로써 우선순위가 설정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사랑이 목적을 부여하죠. 게다가 사랑은 그런 목적들을 양육하고 증대하고 적용할 그 사람의 본능을 키워줍니다. 사랑은 존재방식이기도 하고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삶을 점화시킵니다. 살은 삶을 맛나게 하고 믿음과 희망을 지탱해주죠. 삶이 자주 힘겨운 패키지들로 교훈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배움이 이루어지려면 용서가 이루어지고 사랑이 복구되어야 합니다 이 배움에 불을 붙이는 게 사랑이요.
오직 사랑을 가지고서만 배움은 이루어질 수 있소. 이것이 힘겨운 고난의 학교로부터 뭔가를 받아서, 그것을 당신의 영원한 소득으로 바꾸는 방법이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난 이제 다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난 그 교훈을 완전히 소화했어, 난 그 의미를 알아'라고 말할 수 있을 거요.
사랑은 삶에 확실성을 가져다주기에, 당신의 사랑이 명확하고 후회나 잘못된 소망으로 오염되지 않을 때, 당신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확신을 갖게 될 거요.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는 건 열정을 불태울 연료를 갖는 셈이요. 열정은 살아가는 연료가 되지요.
사랑이 당신 존재의 권능이자 참된 자신의 본질임을 깊이 숙고하시오. 이 원리들을 진지하게 적용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랑과 삶에서 성공할 것이오"
가슴속 지성의 세번째 차원은 삶이다.
"삶이란 움직이는 사랑이오. 삶이 바라는 것은 의미 있는 체험이고 행복이며, 성취이고 지속이오. 삶에는 내재된 지성이 있소.
삶을 따르고 생에 기여하고 삶이 당신에게 보여주는 길을 따르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시오. 이 단순한 과정 안에 위대한 지혜가 있소, 내가 내 제자들에게 생명을 따르고, 죽은자는 죽은 자가 묻게 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오. 지나간 잘못, 이미 죽은 잘못에 머물면 대단히 비싼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오. 당신의 길을 밝혀주고 당신의 미래를 열어주는 건 삶과 생이오. 백미러를 통해 삶을 보지 말고, 앞쪽을 보면서 무구한 인식으로 현재 순간의 가능성들을 찾으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삶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당신 자신인 사랑이 어떻게 삶에 더 잘 개입 할 수 있게 해주는지에 대한 타고난 지성을 개발할 것이요. 어제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자신과 남들을 용서하시오. 내가 말한 '죽은 자'의 의미가 이것이오.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당신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시오. 삶이 있는 자리가 여기이니까요.
지금 순간을 성스런 것으로 여기시오. 이렇게 하는 것으로 당신은 삶을 체험의 전개로 보고 그것의 모든 측면을 존중하시오 삶은 당신 뒤에 있지 않고 당신 앞에 있소, 그것은 역사나 추억이 아니오, 당신 눈앞에서 탄생하고 잇는 바로 그것이 삶이오. 이것을 알 때, 당신의 지성은 필멸 구조의 공리들로 가득한 정체된 지식 덩어리가 아니라 역동적인 권능이 될 것이오"
가슴속 지성의 네 번째 차원은 공경이다.
공경이란 용어는 오늘날 서구에서는 그 의미를 크게 상실했지만, 동양에서는 아직도 공경이 영예의 대단히 중요한 차원이다. 그 전에도 공경이란 말을 언제나 그 어원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오던 나로서는 예수가 그것을 지성의 한 차원으로서 언급했을 때 귀가 쏠깃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공경과 자신에 대한 공경, 형제들에 대한 공경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공경에서 시작합니다 공경은 영예롭게 하는 것의 한 측면이오. 공경은 단순히 영예롭게 하는 것 이상이긴 하지만요.
우리가 영 속에서 하나라 해도 개개 존재는 그 사랑과 목적과 삶에서 각기 다릅니다 개개인에게 속한 독특한 자질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능력과 자유와 책임을 그 개인에게 부여하죠. 개개인과 삶의 개개 측면에는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독특성이 있소, 따라서 당신이 지상에 가져오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가져다줄 수는 없다오. 공경은 당신과 창조주가 협정을 맺었고, 당신이 삶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대답과 자원이 이 협정 속에 있다는 걸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이 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최고의 지성인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게 만들죠.
이것을 알면 당신은 걱정거리들은 내려놓을 힘을 갖게 됩니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것들 대부분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니까요. 물론 시련들 중에는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들도 있소. 그 나머지는 바꾸려 할 경우, 집중과 결단이 필요한 것들이고요.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온통 걱정하는 데만 쏟아서야 이런 자질들을 소유할 수가 없죠. 평온은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는 데서 옵니다. 불평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니 불평하지도 말고요 또 자기 연민에 젖지도 마시오. 이 또한 자신에게 무례한 짓이니까요.
신의 자녀가 왜 자신에게 유감스러워합니까? 자기부정이란 게 바로 이런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 부정하는 것이 자신을 얼마나 권능 없게 만드는지 알고 있습니까?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는 데서 인내심을 키워지고, 적절한 타이밍이 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위대한 지성이 있습니다. 당신의 계획이 펼쳐지고 식탁에서 당신의 자리가 정해지려면 먼저 다른 문제와 다른 필요들을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소, 만사를 그 중에서도 특히나 신성한 질서를 공경함으로써 당신은 평화와 인내를 얻을 것이요. 이로써 당신은 자신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고, 이는 당신이 최고조의 자부심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줄 거요. 가장 자부심 높은 행동이 바로 성스런 가슴을 당신이 신과 협약을 맺은 자리이자 더 높은 지성에 접근할 수 있는 자리로 보고 공경하는 것이요"
지성의 다섯 번째 차원은 정직이다.
"정직해지면 무구한 인식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무구한 인식이란 생전 처음 애벌레를 보는 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다. 예수는 무구한 인식이 모든 새로운 발견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체fiter 역할을 하는 개념들을 옆으로 치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이 무구한 인식을 통해서이다.
"하늘왕국에 들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내가 말했던 이유가 이것이요.
정직 없이는 높은 지성도 존재할 수 없소, 정직은 여러 면에서 지성의 다른 차원들을 합계한 것이요. 정직해지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지성에 접근이라도 할 수 있겠소? 상황이 정직하게 평가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수로 지성을 삶에 적용할 수 있겠소? 정직은 지성의 한 측면이 아니라 주로 도덕을 위한 지침으로 여기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요. 정직은 과학과 법, 사회운영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에 해결책을 가져다줍니다. 정직이란 '그게 뭐지?'라는 가장 간단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있는 그대로의 검열 받지 않은 대답이 따라 나오는 것이요.
남을 속였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정직의 자기 토대를 파괴하는 것이니까요. 정직은 지성의 원천인 반면에 부정적은 어리석음의 원천이요. 따라서 과학이나 연구, 기획에서의 첫 단계는 정직과 정직한 진행을 위한 토대를 세우는 것이요. 이에 비하면 이론은 부차적이요. 연구자들이 이론을 증명하는 데 들이는 시간만큼 정직의 토대를 세우는 데 시간을 들였다면, 훨씬 더 많은 배움을 이뤄낼 수 있었을 거요. 사회 운영 역시 마찬가지요. 정직은 예컨대 유용한 예산과 투자, 생산 따위를 수립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요.
부정직한 사람에게는 많은 문이 닫혀 있습니다 설사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기 기만의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가 없소. 습관이나 관계, 아이디어, 경력, 계획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정직이 당신을 데리고 갈 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경우는 없소, 정직에 대한 묵상은 당신 가슴의 방과 지금까지 당신에게 숨겨져 있던 삶의 기회들을 열어줄 겁니다"
지성의 여섯 번재 차원은 정의다.
정의는 모든 문명과 모든 문화의 토대이다. 정의가 없어지면 문명도 무너진다. 정의는 도덕이나 법의 단순한 집행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또 정의는 공정한 시합이자. 공정한 거래의 황금률이다.
"정의는 가장 기본입자들에서 가장 복잡한 인간 상황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의 토대요. 정의는 거래와 균형의 지성입니다. 균형이 유지되면 건강이 유지되죠. 이것은 건강한 사람에게 건강한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우에 사실이요.
균형 잡힌 거래와 공정한 거래를 통해서 당신은 삶 및 남들과의 관계에서 지헤를 키울수 있소, 그 프로젝트가 성과 있는 것일지. 아니면 그 업무가 당신에게 맞을지처럼 발상들의 타당성에 본능적으로 유의하게 될 거고요. 또 임금과 가격책정에서 공정성을 기하는 법도 알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은 결국 균형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그런 균형을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를 보증하고요 가슴속에는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성의 특별한 차원이 있소."
예수는 소비자가 어느 정도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작금의 경쟁적 가격책정법이 반드시 정확한 가치 책정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성명했다.
"어떤 것에나 나름의 공정한 가격이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대체율(代替律) 다시 말해 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과 노력과 능력이 들어갔는가에 따라 정해질 때라야 정의롭다고 할 수 있소, 너무 적게 지불하거나 너무 많이 지불하는 경우 어느 쪽이나 거래행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둘다가 균형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습니다"
나는 아직도 물건값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것이일상화되어 있는 많은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약간 뜬금없이 물었다. "우리는 모두 가격들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나요?"
얼굴 가득 번져가는 웃음으로 뜬금 없는 그 대답을 똑같이 돋보이게 하면서 예수가 대답했다.
"당신이 높은 가격만이 아니라 낮은 가격들에도 똑같이 이의를 제기하는 한에서만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가격이나 여타 거래에 토를 다는 것은 참된 정의가 아니어서 가슴의 지성을 약화시키죠. 정의는 공정성의 원리이니 양쪽으로 다적용합니다!"
예수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고 2,3년 후에 나는 예수의 이런 진술에 주석이 될 만한 아주 흥미로운 책 하나를 발견했다. 그 책의 자자는 거래하는 것은 이득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예수가 준 가르침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는 염가판대를 즐기는 내습성을 버리고 진심으로 원리를 적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일이나 깜짝 판매, 벼룩시장 알뜰장터 같은 것들은 이 법칙에 예외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가 평가절하한 것을 마치 공정한 시합인 듯이 여긴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나는 공정성의 참된 권능을 발견할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신 나는 새로운 그림에 착수하려던 참이어서 몇 폭의 캔버스를 구입해야 했다. 내가 사용하는 캔버스는 대단히 섬세한 벨기에산 린넨으로 대략 90센티미터에 60달러에서 90달러 정도 나갔다. 가격이 워낙 비싼 탓에 나는 필요량 이상을 넘어서 많은 양의 여분을 비축해둘 수가 없었고 이런 사정은 윌 지역의 미술용품 공급업자의 경우에도 동일했다. 이 때문에 나는 그 가게에 야드 단위로 구입할 수 있도록 잘라서 파는 두루마리가 있는 걸 언제나 희소식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내가 전화를 건 날 아침에도 그런 두루마리가 있었다. 나는 반가워하면서 "곧바로 가서 2미터쯤 사겠다"고 약속했다.
그 가게에 도착하여 가게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는 곧바로 내가 부탁한 2미터의 린넨을 잘라왔다. 나는 그것의 가격 범위를 알고 있었던 데다가 이것이 지역 가게들에서 내가 원하는 재질의 재로를 찾아낼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값이 얼마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건네준 계산서에는 2미터의 가격이 30달러로 매겨져 있었다 주저없이 나는 말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이런 나의 반응에 놀란 그가 반문했다 "너무 비싼가요?"
"아니요 천만에요. 너무싸요. 이건 최저가보다도 훨씬 싸요! 카탈로크를 가져와서 한번 보세요"
그의 손가락이 도매물품 카달로그의 목록들을 흝어가는 동안 나는 청구서의 가격이 그가 제시하는 경우 30달러가 아니라 190달러는 되어야 한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내가 지불하고 싶은 건 정당한 가격이라고 그를 납득시키면서, 나는 그가 캔버스를 미터 단위로 팔아도 손해가 아니란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의 실수에 당황해서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손님이 그의 관심사에 마음쓰는 게 놀라워서 그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내 제안에 반대했다.
"아니오, 당신은 30달러만 내면 됩니다"
나도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당한 가격으로 계산해야죠"
그는 종이에 뭔가를 갈려쓰더니 한 손을 벌리면서 말했다."천만에요! 나는 미터당 15달러에 그 두루마리를 팔아치우려던 참이었소
이렇게 우리의 실갱이는 이미 우정의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캔버스 값보다 더 중요했다. 나는 그에게 금액 전체를 지불하려 했고, 그는 그것을 받다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신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가게 안의 다른 물건들을 사는 것으로 그가 받아야 할 돈을 되돌려주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의 손해를 벌충해줄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각별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그는 언제나 세일 물품이나 물량을 내게 알려주길 좋아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유괘한 체험이어서, 나는 모든 곳에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염가판매 하는 상품을 보면, 먼저 '당신은 정말로 이 가격에 팔아도 괜찮다고 믿나요?"라고 묻곤 한다. 이런 물음은 공정하고자 하는 진솔한 바램을 표현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면 자주 감탄할 만한 이리들이 벌어지곤 한다. 여기에는 또한 정의의 또 다른 측면인 필연적 귀결이 존재한다. 즉 정의를 주는 것으로 정의를 받는다는 귀결이.
이 체험에서 더 큰 교훈은 예수가 사랑과 거래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거래에서나 그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요소이자 에너지이면서 자발성은 사랑이요. 무력이나 속임수로는 훔치거나 약탈하거나 침해할 수 있을 뿐이오. 사랑 없이는 어떤 참된 거래도 있을수 없소. 당신은 자신이 물건을 거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로 거래하고 있는 건 사랑이요. 당신은 우정과 영적 교감과 신의와 믿음,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가치들을 거래하고 있는거요. 정의가 사라지면, 믿음도 사라집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문명도 가버리고요.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이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도 알다시피 누구나가 아버지와 맺은 협약에 따라 자기 나름의 특별한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장점을 공정하게 추구하는 것으로 당신은 당신만의 기회와 장점들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는 축복을 입는 거요.
누구에게나 나름의 장점들이 있소, 그것들을 발견하려면 먼저 공정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잠재워야 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라면 '나에게는 아무런 장점도 없어'라고 항의할지 모르지만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에게 강점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오히려 사람들은 그녀가 약점이란 약점은 다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요.
보다시피 이것이 세상을 물려받는 온유한 자들의 법칙이오. 장점을 불공정하게 추구하려는 모든 욕구를 완전히 잠재울 때,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점들의 금광 안에 자신이 앉아 있음을 알게 될거요. 당연히 이 금광은 가슴의 무구함 속에서만 찾을 수 있소"
이 이야기를 듣자 한 사례가 내 머리에 떠올랐다. 범죄적 삶을 살던 한 남자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실 그는 별이 여러개인 누범이었다. 결국 판사는 그가 확실하게 개과천선할 때까지 더 이상 가석방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법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다른 수감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그 감옥에서 가장 진취적으로 자기변신을 시도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야기를 줄여서 말하면, 그는 지금 뉴욕 변호사 협회의 저명 인사이자. 인간의 범죄 성향과 교도소 교회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저자이다. 그는 지금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맨 밑바닥'에 도달하여 장점을 불공정하게 추구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례는 내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정의는 처벌이나 법의 집행과 관련해서 주로 이야기되는데. 이제 보니 그건 이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주제군요"
예수는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의를 행해야 할 이유가 범죄를 막는 데 있을 뿐이라면, 그걸 높은 지성으로 간주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정의의 진짜 목적은 뭔가르 막는 게 아니요! 오히려 정의는 조정 및 결단에 관한 문제요. 정의는 선을 살찌우고 결코 끝나지 않는 거래를 관리하는 삶의 방식이요! 그럼에도 불의가 판치면 범죄가 득세하죠. 개인의 건강에 비유하면, 범죄라는 질병은 여러 해 동안의 스트레스와 건강하지 못한 생활 후에 심각한 심장 장애가 오는 것과 같은 거요.
정의는 물과 같아서, 그 흐름을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공정성과 거래가 있는 한, 자기 나름의 참된 수위를 찾아냅니다. 필사적인 조치가 자주 취해지는 건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요. 범죄 행위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사회가 정의로우면, 그런 범죄행위가 자랄 토양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물었다 '일반인들의 경우라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규칙을 따르지만, 정의에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대다수 사람들은 그냥 규칙을 어기지 않는 방식으로 눈앞의 기회들을 찾을 뿐이죠. 보통 사람이 삶에서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로를 흉내내거나 서로에게 화내지 말고 아버지에게 하듯이 서로를 대하시오. 당신들은 신의 자녀들이오, 신과 다시 연결되시오. 사람마다 창조된 이유가 다르고 특별하기 마련이오. 이 진실속에서 누구나 자신의 장점과 자신의 정의를 찾아낼 것입니다"
정의의 지성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자연스런 균형을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다. 우주의 광할함과 우리의 관여가 초래하는 그 얽히고 설킨 복잡성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무슨 수로 균형을 가져오는 더 깊은 차원의 힘을 항상 알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지성적인 생에는 주고 용서하는 것이 기본요소가 된다.
친절이 도입되는 부분이 여기이다. 은혜의 표현으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하게는....지성으로서의 친절이 .
지성의 일곱번째 차원은 친절이다.
"친절은 어린이나 노약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신의 의지요. 당신의 선은 친절을 통해서 강화됩니다. 당신이 이 권능을 알고 사용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지혜로운 관라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의지요. 친절한 행동은 당신 자신의 풍족함을 키워 줍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줌giving이 몇 배로 늘어나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요.
지금 세상에는 친절이 그다지 자주 언급되는 덕목도 아니고, 그것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요. 오히려 그것을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베푸는 유화책, 다시 말해 그들의 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보고 친절을 경멸하는 경우들도 있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친절을 받아들이길 난처해하죠. 하지만 당신이 친절을 가슴으로 묵상해보면, 그보다는 훨씬 더 흥미있는 주제란 걸 알게 될 거요.
세상은 친절을 삶에 대한 보상, 즉 그 험난한 현실을 막아주는 자상한 보호행동이라고 여기곤 하는데, 사실 친절은 삶의 가슴이요. 그것은 삶을 견딜 만하게 하고, 의미 있게 하고, 감칠 맛 나게 하죠.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친절이 무엇일까?'를 묻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소, 구체적이 되시오. 이것이 친절이라는 지성의 문을 여는 열쇠요. 친절과 관련된 일반론은 애정에 찬 감정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는 적용할 수가 없소. 아마도 당신은 주어지는 그 대답들이 당신의 의문을 이끌고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 놀랄 거요"
잠시 생각해보니, 우리가 친절에 대해 얼마나 많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편의적으로 사회적 예절과 배려를 친절의 한계로 설정하고 있는가? 참된 개입은 회피하면서 보여주는 관심이 얼마나 진심어린 것일 수 있을까? 따뜻한 포옹과 단호한 '안 돼'가 더 큰 친절인 경우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치하고 있는가? 제한하고 금지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더 큰 친절이었을 때도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탐닉에 빠져들곤 했던가? 자러 가는 것이 더 큰 친절이었을 때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밤새 걱정하며 거실을 거닐곤 했던가? 용서하고 놓아버려야 했을 때도 우리는 얼마나 빈번히 복수를 궁리하곤 했던가?
"친절이라는 지성을 발달시키려면, 명예나 인정받기 위해서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연(緣)에도 얽매임 없이 진실로 주고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래나 통제를 위해서만 자신의 공물을 보유하는 사람은 얼마 안 가 친절이라는 지성을 잃고 맙니다.
다음으로는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친절한 것이 나약함을 나타내거나 무절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죠. 아니면 하루 종일 초콜릿을 먹고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것은 친절이 아니라 삶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능하게 하는 그런 습관들이 존재하는 건 그 사람들이 친절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요.
친절에 노크하는 건 말 그대로 신의 지성에 노크하는 것과 같소, 당신 자신에게 친절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당신은 남들에게 친절한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될 거요. 자신과 남들에게 친절해지는 게 신의 의지요"
이 순간 나는 자신이 친절을 오직 온유함이나 자상함 정도로만 여겨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절은 그런 것들을 훨씬 넘어선다는 놀라운 깨우침 앞에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절이란 게 뭐죠?"
"친절은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오. 친절은 보살피고, 돕고, 해로운 행동을 금하고, 함께 나누고, 삶을 작동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으 배려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선한 의지요. 친절은 움직이는 강인함이요. 친절을 보여주게 만드는 확신은 어떤 상황에서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죠. 당신의 참된 잠재력을 죽이는 대신 그것을 발휘하게 하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할지 생각해보시오. 당신을 해롭게 하는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푸는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친절은 강인함을 키우고, 강인함은 더 큰 친절을 키웁니다"
예수의 이런 진술은 그것의 진실성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상황을 내 머리 속에 떠올려 주었다.
언젠가 나는 차에 치인 작은 개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아픔이 너무 심하면 공격적인 행동을 불러올 수 있으니 다친 짐승에게 손 대지 말라는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듣긴 했지만, 그 순간에는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측은함이 앞선 나머지, 그렇게 앞뒤를 재는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개를 안아서 동물병원으로 데려갔다. 사실 그 개는 으르렁거리면서 약간 물기까지 했지만, 이렇게 하는것이 그 작은 개에게 도움이 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내 확신에 비하면 그 정도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친절한 이 행동은 그 개의 생명을 구해주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친절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안내해주는 전조등으로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보아야 한다. 이 친절에는 쓸모 없는 것을 제거하는 행동이 포함될 때도 있다. 1978년에 내가 그리고 있던 한 그림에도 이런 식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 필요했다.
그 그림은 밝은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한 다발의 풍선들을 들고서 맨발로 달려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소녀의 뒤에는 돌담이 있고, 그 너머 멀리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문제가 많은 대단히 복잡한 그림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림에만 온통 에너지를 쏟아붓다보니 밤을 꼬박 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은 달랐다. 내 그림은 갈수록 심각해져갔고 그만큼 내 기운도 빠져갔다. 나는 그 구도의 꼭대기 부분을 해결할 아무런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림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를 놓고 몇 시간이나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서 그랬든지는 상관없었다. 나는 칼을 손에 쥐고 그림으로 가서 위쪽 반을 잘라냈다. 그것은 일종의 안락사였다! 남아 있는 건 치마와 달리는 발뿐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건 매력적이고 참신했으며, 내 번뇌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건 내가 그날 밤 나 자신과 그림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친절한 행동이었다. 또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지만, 그것은 내 미래를 위한 행동이었다. (봄의 비행)이라고 이름 붙인 이 새로운 소형 그림은 내가 그렸던 (어린 양과 사자)이전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림이 되었다. 이 그림 덕분에 나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출판사와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은 1980년작 미술 포스터의 하나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코머셜 마르뀌 라이트)에 내 이름이 6개월 동안이나 내걸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분명히 친절은 기묘한 패키지로 묶여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입증해준다 그것은 자주 주는 사람과 받은 사람 둘 다를 놀라게 한다!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면, 10여 년 전에는 없엇던 방식으로 사람들이 친절에 눈떠가고 있음을 보여주는증거들이있다. 그런 증거들 중하나가 기업들이 이제 친절의 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비자 입장에서' '사용자 입장에서' 같은 시장 개념들이다. 현실적이 되자! 당신 같으면 불친절한 상점과 상냥한 상점 중 어느 쪽에서 물건을 사겠는가? 당신 같으면 북돋우는 분위기의 기업과 착취하는 분위기의 기업 중 어느 쪽에서 일하겠는가? 어느 기업이 개인의 능력을 더 많이 키워주겠는가? 어느 기업이 생산품이 당신에게 더 큰 도움이 되겠는가? 당신이라면 직원을 적대시하는 방식으로 경영되는 기업이 만들어내 자동차를 갖고 싶겠는가?
예수는 우주를 섬세하고 현명하게 다룰수록 멋지게 작동하는 섬세한 장치에 비유했다. 친절은 무력한 약자에게 베푸는 보살핌만이 아니다.
"친절은 가슴지성, 다시 말해 삶 자체를 이롭게 하려는 신의 의지의 마지막 차원이요. 내가 말하는 지성은 메마르고 냉담한 정신적 추론과는 다릅니다. 참된 지성은 삶에 명확성과 열망을 가져오는 확신과 이해에 지나지 않소 그래서 달리 말하면, 성스런 가슴 속에는 이해를 가져오고 삶을 꾸리는 데 중점을 두는 합일과 사랑, 삶, 공정, 정직, 정의, 친절이라는 일곱 가지 열망이 있다고도 할수 있소, 이것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영혼의 참 앎인 자비를 만들어내지요"
[출처] 끝없는 사랑 280쪽 지성의 일곱 번째 차원은 친절이다.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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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34와 시편 82:6절을 참고 “예수께서 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너희는 神들이다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 느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神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였도다” 너희는 신의 아들과 딸로 태어 났다. 왜냐하면 네 안에 그리스도 신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깨달아 질 때, 네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고요하라. 그리고알라. 내가 곧하나님임을(시편 46:1
제 7장 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다.
사랑
2021. 10. 5. 11:29
가슴은 예수가 즐겨 다루던 주제였다. 그는 이 주제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주제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슴을 언급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에게 가슴은 참으로 신성한 장소였고, 예수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홈그라운드처럼 느끼는 듯했다.
"가슴은 당신을 신이나 우주와 연결시켜주는 고리요. 그것은 당신만의 독특한 경험과 자각과 품성의 중심을 당신의 이해를 넘어서 있는 것과 통합시켜주죠"
이런 진술을 받아들였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가슴은 우리의 홈그라운드이기도 하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삶 속으로 펼쳐져나오고 우리가 지닌 불멸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것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
"가슴은 끌어당기고, 말이 없으며, 고요합니다. 거기에 있을 때의 느낌은 평화로운 하늘 호수에서 휴식하거나 텅 빈 공간 속을 떠나닐 때의 그런 느낌입니다. 가슴은 자력 중심이어서 당신의 모든 생명 에너지가 이 위대한 발생장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가슴을 권능 있게 하면 그만큼 당신의 에너지 수준도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으로 높아지죠. 또 당신이 명확성과 결단과 확고부동함, 의향과 고요와 존중, 정의와 친절, 위대성을 인식하는 능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가슴 안에서고요."
어느 날 가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는 나더러 장대한 삼각형을 나타내기 위해 그렸던 그 그림을 다시 가져와보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그림을 완성하려면 그려 넣어야 할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지시했다.
"삼각형의 가운데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시오. 동그라미 안쪽은 그냥 빈 채로 놔두고. 빛이 원주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으로 그려보시오. 이렇게 하면 삼각형의 중심과 함께 그것이 무한히 뻩어나가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지요"
그건 정말로 그래 보였고, 삼각형 역시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춘 것처럼 느껴졌다. 예수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것이 실존유형 안에서 가슴이 어느 지점에 놓이는가를 시각적으로 설명한 것이오. 가슴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무한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고요와 평화의 중심점이오. 어떤 존재가 무한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내면과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수준의 잠재력을 동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 자신인 사랑과 한 영과 금강입자들이 가슴의 안내를 받아 자신들의 실존유형을 조립하니까요. 한 사람의 영혼은 그의 삶을 이루는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들, 경험과 행위와 희망과 꿈들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오. 가슴은 삶으로도 통하고 저 너머 영원으로도 통하는 영혼의 입구죠. 가슴은 모든 고귀한 앎의 초시간적이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근원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힘과 외부의 힘이 대등한 한 지점이요. 그래서 가슴 안에서는 신의 의지와 당신 자신의 의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죠"
예수가 설명하고 있는 '가슴'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전지전능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그토록 경이롭고 중요한 것에 왜 굳이 신체기관의 이름을 붙였는지를 물었다. 설사 그 기관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또 숱한 전설과 이야기들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도 말이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것은 생명을 준다는 강력한 함축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 심장한 비유입니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이해를 그냥 확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퀴의 축이나 태풍의 눈 부위가 갖는 상대적인 고요처럼 당신 안에는 당신 삶의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 구성요소들이 공동의 목적, 단순한 조화 속에 함께 거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공간상이나 시간상, 구성물질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소. 몸의 가슴은 이것의 존재를 신체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것이 어떤 질의 생명력을 만들어내는가는 당신 혈액의 활력과 강인함으로 알 수 있고요. 피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장차 이루어질 의학상의 발견들이 이 사실을 확인해줄 것입니다. "
이렇게 그가 가슴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주기 위해 말을 이어갈수록, 그의 말들은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지녔던 협소한 전제조건들과 비교되면서 갈수록 광채를 발했다. 나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내가 지닌 이런 전제조건들 중 거의 어느 것도 참된 앎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하더라도 우리 문화에서 가슴보다 더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슴으로 축하하면서 휴일을 갖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어버이날 기념일들일 있고, 우리 가슴의 헌신이 가져온 이런저런 측면들을 축하하는 경우들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컨츄리 뮤직은 상처받은 가슴을 위해 노래하고, 카운슬러들은 그 상처받은 가슴들을 치유하고자 애쓴다. 또 빌보다 차트와 신문광고, 개 사료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팔기 위한 텔레비전 광고들 역시 가슴의 권능을 일깨우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가슴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얼마나 작은가! 우리 몸의 가슴만 해도, 의사들은 인간의 이 신체기관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는 사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길어진 우리의 수명과 더 커진 우리의 몸 크기를 설명해준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심장질환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잘 팔리는 천국행 열차표인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몸의 심장이 은밀하고 멋진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관인 건 분명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차원들 대부분에 대해 모르고 있다.
이에 반에 동양의학과 동양철학은 우리 몸과 우리의 심장을 함께 감싸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에너지장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이 복잡하고 난해한 전기 에너지장이 심장의 생명력을 키워주는 원천이란 증거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떠오르고 있다. 이 주제를 가장 깊이 파고든 침술 분야의 연구들은 몸의 내부와 둘레의 경락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 이 매력적인 주제는 서양과학과 의학을 보완해주는 지식의 신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또 대중 심리학에서 의미를 끌어내어 심장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살아가는 데 있어 우뇌적인 접근 방식과 좌뇌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를 아루는 연구나 상담치료, 참조문헌들도 대단히 많다. 이들은 우뇌적인 사람들이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한다. 달리 말하면 우뇌적인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직관적이고 동정적이고 추종적인 반면, 죄뇌적인 사람들은 놀리적이고 분석적이며 경쟁적이고 주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은 자주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을 여성적인 것으로, "논리적인 사람들"을 남성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극단으로까지 진행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 두뇌가 가진 이원적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관찰들에도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참진리는 그런 협소한 가정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미치는 반향에 있다 그런 발상들이 비춰주는 것 중 하나는 우리 문화에서 가슴이란 건 대체로 우리 존재의 감정적이고 동정적이고 직관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슴이 가진 권능의 스펙트럼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위에거 말한 가슴에 대한 고찰들 모두가 중요하고 유효하지만, 하나하나 별개로는 불완전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그 모두를 다 합친다 해도 그것들만으로는 예수가 말했던 성스런 가슴에 필적할 수 없다.
우리의 대화가 있고 나서 요 몇 년 사이에 가슴에 대한 이해 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나는 학자이자 과학자인 칠턴 피어스의 첫 논문을 읽고 대단히 기뻤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여러 분야의 연구들을 모아 가슴이 인간 존재의 중심 지성임을 확인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심장 세포의 60%에서 65%가 기존 견해와 달리 근육세포가 아닌 신경세포이다. 심장의 이 신경세포들은 뇌세포들과 같을뿐 아니라 뇌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신경전달 물질 및 같은 연결관계를 갖는다. 신경절이라 불리는 이 연결고리들은 몸의 모든 주요기관에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피어스는 심장이 몸 주위 2.4m에서 3.6m까지 퍼지는 전자기 영역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영역은 파동과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아무리 미세한 지점에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뇌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내적 체험을 창조하기 위해 자원을 끌어내는 전자 스펙트럼 전체를 이 '심장 영역'이 공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예수가 내게 여러 번 말해준 흥미진지니한 한 설명을 기억나게 해주었다.
"개개인들 속에는 그 존재의 신체적 영적 감정적 지적 의도적 구성요소들이 완벽한 공시성을이루는 한 지점이 있소, 이 지점에서는 요소나 시간, 공간, 조건 면세서의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과 죽고 난 직후. 그리고 그 사람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완벽하게 일치할 대는 ㄴ그 사이 어느 때라도 맛보게 되는 '제로 지점'이요. 이 성스런 자리에서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와 영원히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심하게 타락했는가에 관계 없이요. 그 지점은 참된 단순성의 지점이기에 아버지의 완벽한 교감을 나눌 수도 있소, 당신이 그렇게 할 때마다 당신의 삶은 갱신되거나 변화될 거요.
가슴은 자력 회오리여서 본질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축복들이 이를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통합되고 생명력으로 집중됩니다. 이렇게 모아진 힘은 전자기의 법칙에 따라 생명에너지로 전환되죠. 본질적으로 자기적인 가슴은 끌어당기고 받아들이는 무구한 자각을 매개로 할 때 가장 잘 작동합니다. 나누고 튕겨내고 심판행동들은 가슴으로 들어가는 문을 당신의 등 뒤에서 닫아버리고 말죠.
그러니 당신의 가슴을 강하게 하려면, 먼저 무구함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슴을 권능 있게 할 수록 그것은 당신에게 더 넓은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그냥 삶에 대한 열정이 더 커지고, 더 편하게 자고, 더 소화가 잘되는 정도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건 가슴이 그 사람의 건강과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가슴의 중요성과 그 성과를 더 많이 긍정할수록, 당신의 삶은 더 풍성한 열매들을 수확하기 시작할 것이고, 당신은 더 과감한 변화들을 이뤄내는 데 필요한 에너지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당신의 가슴을 찾아감으로써 얻게 된 성과가 당신의 가장 황당한 꿈까지도 능가하게 될 거구요. 당신이 지닌 에너지 수준도 그 형태와 성질에서 바뀔 테고요"
이러할진대 힘에 그토록 몰두하는 우리 세상이 가슴에대해서 거의 모르고 잇다는 건 아이러니가 인겠는가? 예수가 말했듯이 "가슴 중심은 인간이 지닌 권능의 참된 원친"인 마당에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나는 그 당시 내 관심을 강하게 끌고 있던 한주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우주의 권능power(힘,권력으로도번역-옮긴이)이 사랑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 지금은 성스런 가슴이 인류에게 주어진 권능의 중심이라고 하셨고요. 그런데 힘이 그토록 긍정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면, 왜 지금의 지구에 그토록 힘들고 파괴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건가요?"
"그 문제는 권능 때문이 아니라 대리 권력 때문이오!"
나는 예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추측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시 그에게 물었다
대리 권력이란 게 뭐죠?
으레 그렇듯이 예수는 완벽한 이해를 위한 기준을 세우는 것에서 가르침을 시작했다.
"참된 권능은 신과 더불어 거하는 데다 본디부터 타고나는 것이요. 이 권능은 창조주와의 지속적인 연결을 통해 개별 존재들과 모든 생명체들에게 이전되어 개개 생명체가 본디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식이 됩니다. 이 권능은 사랑을 부정하고 신에게서 분리되는 경우를 제회하고는 잃거나 더럽혀지지 않죠.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권능은 순수하니까요.
반면에 대리 권력이란 인간이 주조나 권위, 혹은 자기 외부의 세력들에게 위힘한 힘이요. 대리 권력이 환경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을 키울 수는 있소, 하지만 대리 권력이 타고난 권능이 가진 권리들까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쉽사리 부패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사업체를 세울 때 그 두 사람은 대리 권력을 만들어내죠. 그 대리 권력을 대리 권력 자체로 이해하고 두 사람이 동등하게 그것을 감독할 때, 그들의 만들어낸 구조는 쓸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강탈해서 그 대리 권력을 오직 자신의 것으로만 삼게 되면, 그건 틀림없이 부패하고 말겠죠. 또 아이들으 교육도 부모들로부터 위임받은 대리 권력입니다. 그것이 부모들의 가치관과 소망을 반영하는 한, 그 권력은 적절한 관리를 받는 셈이지만, 만일 그것이 부모 자식간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권한을 갉아먹는 식으로 이용될 때는 문제가 생긱도 맙니다.
정부 또한 국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 권력이요. 정부가 국민들의 필요에 봉사하고 자신을 존립하게 해준 국민들의 천부적인 권리를 존중한다면, 그 대리 권력은 쓸모가 있소. 하지만 그 대리권력이 국민들의 전부적 권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부패가 시작될 수밖에 없소
이런 대리권력은 통상 무력 사용과 강제적인 복종과 억압, 그리고 속임수로 보완되곤 하죠. 대리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에너지를 천부적인 권리에서 끌어냅니다. 따라서 천부적인 권리를 존중하고 공공연하게 인정한 대리 권력은 확장된 효과적 권위일 수 있소, 하지만 무력과 속임수가 우선순위를 뒤집어 대리 권력이야말로 진짜 권능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주게 되면, 개벼룩이 개를 소유하려고 하면서 위협과 처벌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상황이 펼져지게 되는 거죠.
그런 억압적인 상황에서는 타고난 권능으로 뒷받침되는 주권들을 선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모든 참된 해방자들이 갖는 힘이 바로 이런 거료. 이것이 1776년에 당신 나라 건국의 아버지들이 했던 일이고, 노예제를 철폐할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와 가족과 직장과 개인의 삶들 안에서도 일어났고, 한 개인이 가슴으로 되돌아가 창조주가 거기에 놓아둔 천부의 권능을 활성화할 때도 일어났소. 때로는 대리권력이 반격을 가해오기도 하죠. 하지만 대리권력은 그 자체로는 어떤 권위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 이길 수가 없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천부의 권능과 대리 권력간의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존중ㅇ할 책임이 있소. 당신의 타고난 권능은 신의 자녀가 되는 것에, 그리고 당신 자신이 사랑과 성스런 가슴을 통해 아버지의 맺은 영원한 서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여러 정체성들, 특히나 사회적 신분이나 업무 경력, 출세 정도를 나타내는 자기 정체성들에 권위를 위임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자기 정체성들이 타고난 권능에서 나오는 권리들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면서 당신의 삶을 지휘하고 소유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소, 당신들의 언어에서 '에고'라는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만, 에고와 관련되어 야기되는 문제상황들을 가장 잘 설명해준는 건 그런 대리 정체성들이 영혼의 참 자아를 대신함으로서 나타난 결과라는 해석이요
당신 존재의 깊은 곳에는 당신만의 성스런 중심이 있소. 그것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고요하고 차분한 방이요. 당신의 타고난 권능은 이런 연결을 통해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이런 앎이 당신의 삶에 대해 갖는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오. 가슴 자체에 대한 앎은 당신의 삶에 더없는 자리요.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기도의 본질이오. 내가 제자들에게 벽장 속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했을 때,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말 그대로의 의미로 이야기했던 것이오. 외따로 떨어진 고요한 곳이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소. 이제부터 자기 존재의 내면에서 들어가려는 그 성스런 방에 어울리는 장소를 고르시요.
성스런 가슴은 우리 몸에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소, 이 위치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척추와 심장 사이, 심장에서 위로 2.5센치미터에서 7.5센치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소, 이것은 그 사람의 신체 비율과 성스런 가슴보다는 약간 아래쪽에 있는 그 사람의 중력 중심에 따라 좌우되죠. 심장은 전체로 보면 몸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긴 하지만. 심장의 진짜 축은 몸의 정가운데에 있습니다 사실 성스런 가슴은 필멸의 삶과 영생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이요. 이것의 이미지를 그려 보려면 당신의 몸을 관통하면서 하늘에서 땅까지 뻗는 사랑과 생명과 빛의 수직축을 그려보고 나서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대표하는 사건들로 점철된 수평축에 의해 교차하는 모습을 떠올리시오. 신성한 안내는 완벽한 합일과 제로저항의 이 교차점에서 세속의 모든 가능성들을 포용하고 있죠.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비유는 부모와 아이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얼싸안는 무구한 포옹이오.
가슴이 건강과 활력으로 가득할 때, 그곳은 있기에 가장 자연스런 자리요. 하지만 그것이 무시당하고 버림받게 되면, 다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이 쌓여갑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가슴에는 당신의 참된 품성과 당신 자신인 사랑의 자국이 찍혀 있다는 거요. 가슴이 당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이것뿐이오. 따라서 당신이 거짓된 정체성이나 사이비 합의, 순수하지 못한 생각들, 불필요한 여분의 짐다발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해봤자 당신은 거기에 맞는 열쇠를 내놓지 못할 거요.
당신은 가슴 안에 있을 때 가장 가치 있는 존재요. 그곳은 사실 당신의 집이고, 당신 존재의 중심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가슴의 보안시스템은 결코 호락호락하지가 않소. 그것은 신의 의지에 따라 당신이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상이나 가식, 판단 따위는 모두 정문에서 압수 당하고 말죠 .하지만 당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식 또한 이렇게 어린아이로서가 아니겠소?
가슴으로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소, 쉬운 쪽은 당신의 경계심이 크고 고요한 호수 속에 던진 자갈돌처럼 되게 놔두면서 확고하면서도 순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고요와 공허 속으로 흘러들어가 편안히 안착하는 거요. 이것이 존재전체가 하나임을 지켜볼 수 있는 고요한 묵상의 방법이오, 이것은 당신의 성스런 자리요.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불멸, 당신 자신과 신을 연결하는 중심축이니까요.
다른 방법은 좀더 어렵소, 어느 쪽이든 당신이 더 가까이 가도록 해주긴 하지만요. 그것은 그 자체로 정화하고 바뀌는 과정입니다. 말하자면 직접 가슴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본래의 성스런 중심으로 재임명하는 과정이요. 이 접근방식으로 하면 당신은 가슴에 무한과 성령, 그리고 아버지와 교감할 수 있는 통로를 설치하는 셈이 됩니다.
우선 시작단계에서는 에너지가 당신 몸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것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하오. 그것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고치 비슷한 거요. 그런 다음에는 당신 마음의 눈으로 그 원의 뒤쪽에서 척추를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시오. 등을 마주보는 이지점에서 마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때 처럼 당신의 척추를 위 아래로 쭉 흝어보시오.
당신이 찾아낸, 가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처음에는 아주 작을 수도 있소. 하지만 일단 들어서고 나면 그것은 순식간에 넓어져 당신 앞에는 무한이 펼져지게 될 거요. 그 입구가 워낙 빈틈없이 막혀 있어서 그것의 존재를 느낌으로 밖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곳이 입구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 비유해서 말하면 그 앞의 큰 바위를 치워내야 합니다. 그러하고 좌절하지는 마시오.... 입구는 거기에 있으니까요. 당신이 살피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국 그것을 찾아낼 것이고, 당신이 두드리면 그것은 열릴 것이요.
당신이 처음 보게 되는 광경에 충격받지 마시오. 그 입구로 들어셨을 때 아마도 당신은 우주의 차고 어두운 공기를 느낄 거요. 영은 몸보다 찬 편이라 몸이 오싹해지는 경우도 자주 있소, 또 그입구에서 불타는 관목을 보거나, 입구가 불길에 에워싸여 있는 모습을 보거나, 건장한 천사가 칼을 들고 입구를 지키는 모습을 보거나 느끼는 경우도 있소, 아니면 뭔지 모를 경외심 때문에 들어가기가 주저되면서, 비유해서 말하면 왠지 신발을 벗고 끓어앉거나 아니면 목욕재계를 하고 싶을 수도 있소, 이런 것을 인식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부정하거나 달아날 거요 왜냐하면 그들이 느끼는 경외심이란 신과의 연결에 다름 아니니까요.
이런 식으로 해서 가슴 입구로 들어가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위해 태초부터 거기에 놓여 있던 지혜를 물려받을 겁니다. 성스런 가슴에 대한 의식을 열게 되면, 지금까지 당신이 잃고 있던 여러 차원의 지성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니까요. 아니 가장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내면의 평화와 참된 이완은 경험할 수 있을 거요"
예수는, 가슴은 우리가 그것을 찾든 아니든, 혹은 인정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언제나 우리 삶을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우리를 아버지와 연결해주는 성스런 고리이고, 언제나 우리의 고귀한 지성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당신의 가슴을 통해서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내면의 성소를 자주 방문하면 할수록 그것과 당신,또 창조주와 당신의 관계는 더 긴밀해집니다.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 기도요.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바라는지 다 알고 계시니,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내가 내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문은 무엇보다 아버지와 자녀, 즉 천국과 지상간의 결합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었소, 이 상스런 결합을 공경하는 것이 가슴의 기능이죠"
예수의 기도문은 인간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인간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개사되곤 했다. 그 기도문은 본래 아람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 고대어를 조심스럽게 연구하면 익숙한 우리말 기도문을 좀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여러 번역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오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
아멘"
"결합이 강할 때는 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말로 기도하는가는 그 성스런 가슴에 몸소 있는 것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소. 내가 내 사도들에게 주었던 기도문은 기도하는 사람을 성스런 가슴으로 직접 데려가도록 한다는 데 그 특질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에 포함된 의미를 경건하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효과를 맛볼 수 있죠.
그 기도문의 용어 자체는 정확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번역문들 중에는 '빚' 대신에 '죄'라고 쓴 경우들도 있지만요. 이건 맞지 않소. 당신이 죄의 개념이나 용어를 그 방안으로 가져갈 수 없듯이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문 앞에서 당신이 진 빚을 탕감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올바르고 적절한 일이지만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그렇기를 바란다는 전제하에서 당신 또한 완벽과 풍요 속에 거하기를 바라시죠.
합일과 완벽 속에 거하는 아버지는 어떤 죄도 알지 못합니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당신들 서로간에서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제를 화나게 했다면 먼저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내가 말했던 이유가 이거요. 그런 다음에야 그의 가슴이 순수해져 자신의 사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가슴을 정화할 때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내가 '순수한 가슴에 축복 있기를, 그들은 신을 보리니'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요.
내가 말했던 사원이란 대부분의 경우, 건축물로서의 사원이 아니라 성스런 가슴을 가리키는 것이었소. 내가 하늘왕국을 지칭할 때 분명히 그러했듯이. 내가 말했던 사원이란 신과 인간이 결합하는 완벽영역. 성스런 가슴 속에서 발견되는 완벽영역을 말합니다. 신은 완벽의 저자요. 완벽이 머물때, 천국이 열립니다. 인간이 이 완벽으로 들어가는 문이 성스런 가슴이오. 먼저 이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오.
그 성스런 침묵 안에서 당신은 법열과 고요를 경험하면서 치유받거나 양육받을 수도 있고, 당신 앞에 펼쳐진 무한을 볼 수도 있소. 무한에 대한 이런 관점이야말로 고귀한 자각의 원천이요. 그 것은 당신과 당신 자신인 사랑을 존재 전체의 영원한 광활함 속에서 '존재'의 한 단위로 존중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정행(正行)의 길로 안내해주는 지성의 특정차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여기 이 소중한 지혜의 중심에서요. 지성에는 일곱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가슴 중심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갑니다. 당신은 처음에는 그것들을 삶의 원리로 여길 테지만, 그것들을 충분히 습득하게 되면 위대한 앎과 능력의 차원들로 보게 될 거요. 그 차원들이란 합일과 사랑과 삶, 공경, 정직, 정의, 그리고 친절이요. 이해의 이 차원들을 통해서 가슴은 무한대의 출발점에서 나오는 무한대의 결과들을 이뤄줄 무한대의 방식으로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소. 이런 게 가슴의 역량이오.
물질 존재를 포함하여 모든 현실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무한에서 솟아납니다. 무한은 일차 원인으로서 신과 일치하죠. 신의 자녀인 당신 또한 무한과 일치하고요. 무한은 신의 한없는 잠재력으로. 이 잠재력은 처음에는 자각으로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는 사랑으로, 다시 그 다음에는 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무한대로 배열되는 금강입자들의 무한한 공급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신의 한 측면으로서 당신들은 무한의 일부이지, 거기서 기인한 구조의 일부가 아님을 잊지 마시오. 만물의 질서 속에서 당신이 갖는 이런 위치 덕분에 당신은 무한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고, 물질 실존의 광할함에 압도당하는 일 없이 그것을 관찰할 수 있소. 이것이 당신이 복제와 모사와 유사성으로 가득한 우주 속에서 유일하고 독특한 개인일 수 있는 방식이요.
당신은 영원히 당신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 우주로서는 무한의 일부인 당신을 포용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신의 무한을 확장시켜주는 팽창점이요. 당신이 무한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고지가 바로 당신 가슴이고요. 가슴은 당신이 신에게서 받은 선물이요. 그것은 당신과 아버지를 영원히 묶어주는 끈이요"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물었다. "우리는 본래 하나가 아니가요? 그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은 이미 존재하는 거고요. 왜 다른 것이 필요하죠?"
"만일 당인이 스피커가 하나여서 모노 사운드인 라디오를 가지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완벽하고 무한한 사우드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사람들은 그 라디오가 스데레오이기를 바라지 않겠소? 사실 거룩한 아버지는 무한의 근원인 하나이고, 한 무한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위대함은 그 너머로 확장하여 스테레오적 무한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냈소!
그는 자신의 자녀를 통해서 이것을 이뤄냈소! 보다시피 아버지의 단독 무한은 그 자녀에 앞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녀와 함께하는 것이 스테레오 우주의 살아 있는 본질이요. 자녀가 없다면 스테레오적 실존, 다시 말해 무한대의 관점에 무한대의 원리를 덧붙여 만들어내는 현상은 있을 수 없소! 따라서 당신들은 우주의 비옥함이자. 그 모든 것의 깊고 깊은 완결이오. 이 때문에 당신들의 개성과 자기 인식을 존중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당신들이 생각하고 상상할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이 자기 인식에서니까요. 그 안에는 당신들이 무한과 창조의 부차적 근원일 수 있는 권리가 담겨 있소.
자기 인식이 없다면, 당신들은 예정된 조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도관(導管)에 지나지 않을 거요. 자기 인식은 무한의 이차적인 근원이 될 수 있는 당신들의 능력에 불을 붙이는 점화장치요. 당신들에게 확장된 실존 차원들을 제공하는 것이 이 무한과의 교감이오. 우주는 창조주도 안식할 수 있고 피조물도 자유로울 수 있는 일종의 협력관계요! 그것은 당신이 형제들의 눈을 아버지의 눈으로 들여다본다면, 다른 사람들과도 체험할 수 있는 교향악적인 관계요.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무한의 교향악적 윤택함을 키우고 있는 것이요"
내 경험에서 볼 때 우리가 이런 교향악적인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무심함과 냉담함 때문인 듯 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경멸이나 혐오, 질투 때문에. 아니면 단순히 동료 인간들이 삶에 대해 갖는 가치를 알아치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간과하곤 한다. 이런 생략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는 유머 한 토막이 있다.
어느 마을에 많은 재산과 비옥한 농장을 가진 농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해에도 비록 일이 힘들긴 했지만 그의 농사는 풍작이었다. 수확철이 다가온 어느 날. 그가 앞으로 거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트랙터 옆에 서 있노라니, 목사 한 사람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의 옆에 차를 세웠다. 그 자상한 목사는 감탄의 몸짓을 하며 말했다. "아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농장을 참으로 아름답게 축복해주셨군요" 농부가 대답했다 "그래요. 목사님, 하나님 덕분이죠. 그래서 저도 수도 없이 이런 축복을 내려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지요. 하지만 당신이 뭘 알겠소? 당신도 그가 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해버릴 때를 봤어야 하는 건데!"
예수가 말했다. "무한을 계속해서 확장하는 데 있어 당신들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요. 당신들은 별도의 차원이요! 가슴은 이 별도의 차원을 이루게 해주는 문이고요. 그것은 당신들의 고귀한 지성이 시작되는 지점이요"
예수는 살아가는 동안 의식을 만들어내고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구사하는 데는 여러 수준과 여러 성질의 지성이 관계한다고 설명했다. 그 중 최고의 지성은 사랑 자체다. 왜냐하면 실존의 최고 신비와 해결책들은 쥐고 있는 건 사랑뿐이니까.
인간에게 가장 낮은 지성은 생체발생적인 지성으로 이 지성은 생존을 위한 충동을 제공할 뿐 아니라 몸의 기능들을 관할한다. 하지만 생체발생적인 지성은 죽음을 극단으로 두려워하고 환경에 적대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참된 삶을 꾸려갈 방책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생체발생 지성이 철학을 세울 때, 도덕은 처벌과 죄의식의 산물이 되고, 권력은 영토적 요소가 되며, 인종적 정치적 사회적 유사성이 그 사회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토대가 되고, 신은 생존투쟁에서 당파적인 동맹군으로 여겨진다. 물론 신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는 전제 하에서.
다행히도 이 수준의 지성 위에 삶에 대한 훨씬 더 넓은 인식과 정보를 모으고 소화할 수 있는 정신(마음으로도 번역)이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의식 차원에서 더 많이 자각할수록 생체발생적인 지성의 협소한 시야는 정신능력과 자질이라는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대체된다. 예수는 정보를 소화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논리로 체험을 정리해내는 광대한 기억은행이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의 가장 위대한 산물은 합리성이고, 그것의 가장 큰 한계는 구조적 개념들에 대한 의존성이다.
"정신은 흡사 컴퓨터 시스템처럼 이진법을 써서 선택적 기능들이 전기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는 통합 장치요. 정신의 지성은 그것이 봉사하는 환경이 만들어낸 앎의 체계입니다. 그 환경은 그 사람의 하루 생활만큼 작을 수도 있고, 우주만큼 클 수도 있소, 정신이 확장하는 듯한 외관을 지니는 것은 그 최소의 시스템 안에 더 큰 시스템과 연결되고 결국에는 더 큰 시스템을 불러오는 패턴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아무리 그래도 정신은 하인이요. 따라서 그것은 고급한 정통 지성을 갖지 못합니다."
정신이 철학을 세우려고 할 때는 이상적 형태라는 관념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 때문에 그것의 공리들은 자주 삶의 실제 현실에 미치지 못하고 만다, 정신은 타당성과 정확성, 개혁이라는 개념들로 도덕성을 보고, 권력을 지식에 대한 독점적 통제로 여긴다. 정신에게 사회는 서열식의 관리구조이고, 법은 공정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정확성의 문제다. 정신의 지성이 신이라는 실체에 대해 좀이라도 생각할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불완전을 판단하기 위해서 불완전에서 완벽을 분리해낼 수 있도록 설정된 이상화된 개념들을 통해서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그의 환경 안에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인간에게 자연의 힘을 지배할 수 있게 해준 쓸모 있는 하인이다. 정신은 우주에 대한 광범한 정보군을 주었고, 그것을 숙고해볼 여유를 주었다. 이 같은 봉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도 정신에는 존중할 점이 많다.
하지만 정신으로서는 삶을 전혀 동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인류의 대군단이 마지못해 하면서도 생체발생적 지성이 제공하는 삶의 설명 족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무어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생체발생적 지성은 친숙한 작은 범위들 안에서는 적어도 생명지향적이고 협력적이 아닌가! 예수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선언을 할 때 우리 논의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 이런 식의 고찰이었다.
"인류는 시급하게 가슴의 고귀한 지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신만으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줄 수 없는 데다가, 발생적 지성이 오늘날의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력과 결합하면 인류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 때문이오. 정신에 비해 가슴은 최고의 단순성과 공시성에 근거한 지성의 작용이요. 그 바탕은 존재 전체와의 합일된 관계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인식하는 자각 중심이고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지성의 수준들을 요약해서 말하면, 생존과 논리, 공시성과 사랑이 그것이용. 개개인의 삶 속에는 이 네 가지가 모두 들어 있소. 물론 사람마다 자신에게 갖아 많이 도움이 되는 한 수준에 중점을 두긴 하지만요. 만일 그 사람이 가슴의 지성(공시성의 지성-옮긴이)이나 고귀한 사랑의 지성에 대해 거의 모른다면, 그는 다른 가능성들 중 하나에 집중할 테고요.
생존적인 지성이 물질 삶을 유지하고 환경과 감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데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논리적 지성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우주선을 제작할 수 있소, 하지만 어느 쪽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성과 결합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소, 그런데도 주어진 역량으로 넘어서 그것들을 적용했을 때는 파멸적인 결과가 불가피하죠.
궁극에서는 무한히 연결된 단 하나의 지성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 영이오. 아마도 이것을 위대한 우주 정신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거요. '지성'이라는 용어 쪽이 그것의 기능과 삶에 대해 갖는 그것의 유용성을 더 정확하게 표현해주긴 하지만요. 반면에 정신은 엄밀하게 말해서. 우회성과 자족적 통합성과 독점적 적용 대문에 적어도 최소한의 구조는 지니기 마련이오.
무한을 이해할 수 있고, 하늘과 땅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는 건 오직 가슴의 단순성뿐이오. 가슴은 흡사 바퀴의 축처럼 균형의 중심에서 이해의 일곱 동심원으로 자신의 자각을 펼쳐갑니다. 지성의 이 각 차원들은 앞선 차원이나 차원들 위에 세워져 그것들을 완성시키죠"
지성의 첫 번째 차원은 합일이다.
이것은 모든 삶 속에는 합일하는 힘인 오직 한 신, 한 권능만이 있다는 근원적인 자각이다. 이 자각은 영의 단일성을 긍정하고, 연륜의 지혜를 드러내며, 더 넓은 세상질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합일을 중요시할 때, 모든 실존 속에 퍼져 있는 인과의 유형들을 이해하게 되는데, 가슴의 지성은 원인과 결과가 단순히 일직선적인 결말 이상임을 드러내준다. 전체에게 도움되는 행동을 하면 전혀 다른 방식이면서도 그 대가를 지불받는 사람에게 도움되는 방식으로 보상받듯이
"최고의 지성인 합일에 선(善)보다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없소. 물이 자신의 수위를 찾듯이, 선도 자신의 적용 수위를 찾습니다 합일의 권능 덕분에 남을 해칠 의도로 취해진 행동조차 신은 선의 형태로 바꿀 수 있소.
또한 합일은 지성의 근원이요. 합일은 앎을 통합하고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니까요. 이것이 바로 지혜의 시작이요. 통합은 성공적으로 생각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리인 데다가, 우선순위가 없다면 중점을 두고 가치를 둘 것이 삶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이것은 당신이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지배와 관련된 핵심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더 높은 지성으로 바뀝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지배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사업에서부터 군사 분쟁에 이르기까지 지배의 문제에는 경쟁이 따라다니죠. 개인의 삶에는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다툼이 있고요. 이런 것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배를 다투는 경쟁에는 이렇게 명백한 것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식탐과 같은 집착적인 충동들은 몸의 자연스런 기능과 경쟁하여 지배력을 손에 쥐려는 것에 지나지 않소 이런 목록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죠. 그 사람이 신을 자기 삶의 합일력으로 허용할 때까지 그 경쟁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소.
모든 집착과 충동은 허구적 지배와 대리 권력이 만들어낸 결과요. 개중에는 가장 강한 지배는 한 개인이 직접 자신의 권리를 유보시키는, 꾸며진 정체성들의 지배일 거요. 그것은 당신을 헤매게 만들고, 당신의 시간과 희망, 당신의 꿈과 사랑을 죽이는 가짜 지배요. 그런 가짜 지배가 없다면 당신은 온몸에 무한한 지혜가 넘칠 것이고, 그런 무한한 지혜를 사용할 여유를 가질 것이오. 신이자 하나이자 궁극인 합일이 현존 할 때, 당신은 자신의 삶과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권능을 가집니다 "
예수는 우리더러 가슴으로 있으면서 합일의 원리에 대해 명상하고, 신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권능임을 선언해보라고 제안했다. 우리가 이런 자각에 자신을 더 많이 열수록 다른 것들이 우리를 통제할 능력은 더 줄어든다. 그러고 나면 신의 권능이 가슴을 통해 우리에게 옮겨옴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슴 안에 존재하는 지성의 두번째 차원은 사랑이다.
"사랑은 우주의 권능이요. 따라서 당신의 삶에서 가장 큰 방어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호하고 영예롭게 하고 존중하는 것이오. 당신이 명확성을 가지고 이 원리를 계속 유지하면, 당신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오. 이것은 당신의 모든 목적이 사랑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지향 이상의 것이오. 그것은 지성적이고 의미 있는 삶의 차원이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있음의 본질이오. 목적에 헌신하면서 움직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높은 지성을 갖지요. 그렇게 자신의 참된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되고요.
가슴의 지성은 누적됩니다. 합일은 인식함으로써 우선순위가 설정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사랑이 목적을 부여하죠. 게다가 사랑은 그런 목적들을 양육하고 증대하고 적용할 그 사람의 본능을 키워줍니다. 사랑은 존재방식이기도 하고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삶을 점화시킵니다. 살은 삶을 맛나게 하고 믿음과 희망을 지탱해주죠. 삶이 자주 힘겨운 패키지들로 교훈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배움이 이루어지려면 용서가 이루어지고 사랑이 복구되어야 합니다 이 배움에 불을 붙이는 게 사랑이요.
오직 사랑을 가지고서만 배움은 이루어질 수 있소. 이것이 힘겨운 고난의 학교로부터 뭔가를 받아서, 그것을 당신의 영원한 소득으로 바꾸는 방법이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난 이제 다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난 그 교훈을 완전히 소화했어, 난 그 의미를 알아'라고 말할 수 있을 거요.
사랑은 삶에 확실성을 가져다주기에, 당신의 사랑이 명확하고 후회나 잘못된 소망으로 오염되지 않을 때, 당신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확신을 갖게 될 거요.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는 건 열정을 불태울 연료를 갖는 셈이요. 열정은 살아가는 연료가 되지요.
사랑이 당신 존재의 권능이자 참된 자신의 본질임을 깊이 숙고하시오. 이 원리들을 진지하게 적용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랑과 삶에서 성공할 것이오"
가슴속 지성의 세번째 차원은 삶이다.
"삶이란 움직이는 사랑이오. 삶이 바라는 것은 의미 있는 체험이고 행복이며, 성취이고 지속이오. 삶에는 내재된 지성이 있소.
삶을 따르고 생에 기여하고 삶이 당신에게 보여주는 길을 따르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시오. 이 단순한 과정 안에 위대한 지혜가 있소, 내가 내 제자들에게 생명을 따르고, 죽은자는 죽은 자가 묻게 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오. 지나간 잘못, 이미 죽은 잘못에 머물면 대단히 비싼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오. 당신의 길을 밝혀주고 당신의 미래를 열어주는 건 삶과 생이오. 백미러를 통해 삶을 보지 말고, 앞쪽을 보면서 무구한 인식으로 현재 순간의 가능성들을 찾으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삶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당신 자신인 사랑이 어떻게 삶에 더 잘 개입 할 수 있게 해주는지에 대한 타고난 지성을 개발할 것이요. 어제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자신과 남들을 용서하시오. 내가 말한 '죽은 자'의 의미가 이것이오.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당신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시오. 삶이 있는 자리가 여기이니까요.
지금 순간을 성스런 것으로 여기시오. 이렇게 하는 것으로 당신은 삶을 체험의 전개로 보고 그것의 모든 측면을 존중하시오 삶은 당신 뒤에 있지 않고 당신 앞에 있소, 그것은 역사나 추억이 아니오, 당신 눈앞에서 탄생하고 잇는 바로 그것이 삶이오. 이것을 알 때, 당신의 지성은 필멸 구조의 공리들로 가득한 정체된 지식 덩어리가 아니라 역동적인 권능이 될 것이오"
가슴속 지성의 네 번째 차원은 공경이다.
공경이란 용어는 오늘날 서구에서는 그 의미를 크게 상실했지만, 동양에서는 아직도 공경이 영예의 대단히 중요한 차원이다. 그 전에도 공경이란 말을 언제나 그 어원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오던 나로서는 예수가 그것을 지성의 한 차원으로서 언급했을 때 귀가 쏠깃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공경과 자신에 대한 공경, 형제들에 대한 공경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공경에서 시작합니다 공경은 영예롭게 하는 것의 한 측면이오. 공경은 단순히 영예롭게 하는 것 이상이긴 하지만요.
우리가 영 속에서 하나라 해도 개개 존재는 그 사랑과 목적과 삶에서 각기 다릅니다 개개인에게 속한 독특한 자질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능력과 자유와 책임을 그 개인에게 부여하죠. 개개인과 삶의 개개 측면에는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독특성이 있소, 따라서 당신이 지상에 가져오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가져다줄 수는 없다오. 공경은 당신과 창조주가 협정을 맺었고, 당신이 삶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대답과 자원이 이 협정 속에 있다는 걸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이 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최고의 지성인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게 만들죠.
이것을 알면 당신은 걱정거리들은 내려놓을 힘을 갖게 됩니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것들 대부분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니까요. 물론 시련들 중에는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들도 있소. 그 나머지는 바꾸려 할 경우, 집중과 결단이 필요한 것들이고요.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온통 걱정하는 데만 쏟아서야 이런 자질들을 소유할 수가 없죠. 평온은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는 데서 옵니다. 불평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니 불평하지도 말고요 또 자기 연민에 젖지도 마시오. 이 또한 자신에게 무례한 짓이니까요.
신의 자녀가 왜 자신에게 유감스러워합니까? 자기부정이란 게 바로 이런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 부정하는 것이 자신을 얼마나 권능 없게 만드는지 알고 있습니까?
신성한 질서를 공경하는 데서 인내심을 키워지고, 적절한 타이밍이 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위대한 지성이 있습니다. 당신의 계획이 펼쳐지고 식탁에서 당신의 자리가 정해지려면 먼저 다른 문제와 다른 필요들을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소, 만사를 그 중에서도 특히나 신성한 질서를 공경함으로써 당신은 평화와 인내를 얻을 것이요. 이로써 당신은 자신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고, 이는 당신이 최고조의 자부심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줄 거요. 가장 자부심 높은 행동이 바로 성스런 가슴을 당신이 신과 협약을 맺은 자리이자 더 높은 지성에 접근할 수 있는 자리로 보고 공경하는 것이요"
지성의 다섯 번째 차원은 정직이다.
"정직해지면 무구한 인식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무구한 인식이란 생전 처음 애벌레를 보는 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다. 예수는 무구한 인식이 모든 새로운 발견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체fiter 역할을 하는 개념들을 옆으로 치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의 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이 무구한 인식을 통해서이다.
"하늘왕국에 들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내가 말했던 이유가 이것이요.
정직 없이는 높은 지성도 존재할 수 없소, 정직은 여러 면에서 지성의 다른 차원들을 합계한 것이요. 정직해지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지성에 접근이라도 할 수 있겠소? 상황이 정직하게 평가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수로 지성을 삶에 적용할 수 있겠소? 정직은 지성의 한 측면이 아니라 주로 도덕을 위한 지침으로 여기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요. 정직은 과학과 법, 사회운영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에 해결책을 가져다줍니다. 정직이란 '그게 뭐지?'라는 가장 간단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있는 그대로의 검열 받지 않은 대답이 따라 나오는 것이요.
남을 속였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정직의 자기 토대를 파괴하는 것이니까요. 정직은 지성의 원천인 반면에 부정적은 어리석음의 원천이요. 따라서 과학이나 연구, 기획에서의 첫 단계는 정직과 정직한 진행을 위한 토대를 세우는 것이요. 이에 비하면 이론은 부차적이요. 연구자들이 이론을 증명하는 데 들이는 시간만큼 정직의 토대를 세우는 데 시간을 들였다면, 훨씬 더 많은 배움을 이뤄낼 수 있었을 거요. 사회 운영 역시 마찬가지요. 정직은 예컨대 유용한 예산과 투자, 생산 따위를 수립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요.
부정직한 사람에게는 많은 문이 닫혀 있습니다 설사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기 기만의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가 없소. 습관이나 관계, 아이디어, 경력, 계획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정직이 당신을 데리고 갈 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경우는 없소, 정직에 대한 묵상은 당신 가슴의 방과 지금까지 당신에게 숨겨져 있던 삶의 기회들을 열어줄 겁니다"
지성의 여섯 번재 차원은 정의다.
정의는 모든 문명과 모든 문화의 토대이다. 정의가 없어지면 문명도 무너진다. 정의는 도덕이나 법의 단순한 집행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또 정의는 공정한 시합이자. 공정한 거래의 황금률이다.
"정의는 가장 기본입자들에서 가장 복잡한 인간 상황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의 토대요. 정의는 거래와 균형의 지성입니다. 균형이 유지되면 건강이 유지되죠. 이것은 건강한 사람에게 건강한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우에 사실이요.
균형 잡힌 거래와 공정한 거래를 통해서 당신은 삶 및 남들과의 관계에서 지헤를 키울수 있소, 그 프로젝트가 성과 있는 것일지. 아니면 그 업무가 당신에게 맞을지처럼 발상들의 타당성에 본능적으로 유의하게 될 거고요. 또 임금과 가격책정에서 공정성을 기하는 법도 알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은 결국 균형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그런 균형을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를 보증하고요 가슴속에는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성의 특별한 차원이 있소."
예수는 소비자가 어느 정도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작금의 경쟁적 가격책정법이 반드시 정확한 가치 책정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성명했다.
"어떤 것에나 나름의 공정한 가격이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대체율(代替律) 다시 말해 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과 노력과 능력이 들어갔는가에 따라 정해질 때라야 정의롭다고 할 수 있소, 너무 적게 지불하거나 너무 많이 지불하는 경우 어느 쪽이나 거래행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둘다가 균형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습니다"
나는 아직도 물건값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것이일상화되어 있는 많은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약간 뜬금없이 물었다. "우리는 모두 가격들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나요?"
얼굴 가득 번져가는 웃음으로 뜬금 없는 그 대답을 똑같이 돋보이게 하면서 예수가 대답했다.
"당신이 높은 가격만이 아니라 낮은 가격들에도 똑같이 이의를 제기하는 한에서만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가격이나 여타 거래에 토를 다는 것은 참된 정의가 아니어서 가슴의 지성을 약화시키죠. 정의는 공정성의 원리이니 양쪽으로 다적용합니다!"
예수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고 2,3년 후에 나는 예수의 이런 진술에 주석이 될 만한 아주 흥미로운 책 하나를 발견했다. 그 책의 자자는 거래하는 것은 이득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예수가 준 가르침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는 염가판대를 즐기는 내습성을 버리고 진심으로 원리를 적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일이나 깜짝 판매, 벼룩시장 알뜰장터 같은 것들은 이 법칙에 예외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가 평가절하한 것을 마치 공정한 시합인 듯이 여긴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나는 공정성의 참된 권능을 발견할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신 나는 새로운 그림에 착수하려던 참이어서 몇 폭의 캔버스를 구입해야 했다. 내가 사용하는 캔버스는 대단히 섬세한 벨기에산 린넨으로 대략 90센티미터에 60달러에서 90달러 정도 나갔다. 가격이 워낙 비싼 탓에 나는 필요량 이상을 넘어서 많은 양의 여분을 비축해둘 수가 없었고 이런 사정은 윌 지역의 미술용품 공급업자의 경우에도 동일했다. 이 때문에 나는 그 가게에 야드 단위로 구입할 수 있도록 잘라서 파는 두루마리가 있는 걸 언제나 희소식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내가 전화를 건 날 아침에도 그런 두루마리가 있었다. 나는 반가워하면서 "곧바로 가서 2미터쯤 사겠다"고 약속했다.
그 가게에 도착하여 가게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는 곧바로 내가 부탁한 2미터의 린넨을 잘라왔다. 나는 그것의 가격 범위를 알고 있었던 데다가 이것이 지역 가게들에서 내가 원하는 재질의 재로를 찾아낼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값이 얼마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건네준 계산서에는 2미터의 가격이 30달러로 매겨져 있었다 주저없이 나는 말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이런 나의 반응에 놀란 그가 반문했다 "너무 비싼가요?"
"아니요 천만에요. 너무싸요. 이건 최저가보다도 훨씬 싸요! 카탈로크를 가져와서 한번 보세요"
그의 손가락이 도매물품 카달로그의 목록들을 흝어가는 동안 나는 청구서의 가격이 그가 제시하는 경우 30달러가 아니라 190달러는 되어야 한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내가 지불하고 싶은 건 정당한 가격이라고 그를 납득시키면서, 나는 그가 캔버스를 미터 단위로 팔아도 손해가 아니란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의 실수에 당황해서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손님이 그의 관심사에 마음쓰는 게 놀라워서 그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내 제안에 반대했다.
"아니오, 당신은 30달러만 내면 됩니다"
나도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당한 가격으로 계산해야죠"
그는 종이에 뭔가를 갈려쓰더니 한 손을 벌리면서 말했다."천만에요! 나는 미터당 15달러에 그 두루마리를 팔아치우려던 참이었소
이렇게 우리의 실갱이는 이미 우정의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캔버스 값보다 더 중요했다. 나는 그에게 금액 전체를 지불하려 했고, 그는 그것을 받다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신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가게 안의 다른 물건들을 사는 것으로 그가 받아야 할 돈을 되돌려주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의 손해를 벌충해줄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각별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그는 언제나 세일 물품이나 물량을 내게 알려주길 좋아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유괘한 체험이어서, 나는 모든 곳에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염가판매 하는 상품을 보면, 먼저 '당신은 정말로 이 가격에 팔아도 괜찮다고 믿나요?"라고 묻곤 한다. 이런 물음은 공정하고자 하는 진솔한 바램을 표현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면 자주 감탄할 만한 이리들이 벌어지곤 한다. 여기에는 또한 정의의 또 다른 측면인 필연적 귀결이 존재한다. 즉 정의를 주는 것으로 정의를 받는다는 귀결이.
이 체험에서 더 큰 교훈은 예수가 사랑과 거래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거래에서나 그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요소이자 에너지이면서 자발성은 사랑이요. 무력이나 속임수로는 훔치거나 약탈하거나 침해할 수 있을 뿐이오. 사랑 없이는 어떤 참된 거래도 있을수 없소. 당신은 자신이 물건을 거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로 거래하고 있는 건 사랑이요. 당신은 우정과 영적 교감과 신의와 믿음,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가치들을 거래하고 있는거요. 정의가 사라지면, 믿음도 사라집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문명도 가버리고요.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이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도 알다시피 누구나가 아버지와 맺은 협약에 따라 자기 나름의 특별한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장점을 공정하게 추구하는 것으로 당신은 당신만의 기회와 장점들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는 축복을 입는 거요.
누구에게나 나름의 장점들이 있소, 그것들을 발견하려면 먼저 공정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잠재워야 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라면 '나에게는 아무런 장점도 없어'라고 항의할지 모르지만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에게 강점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오히려 사람들은 그녀가 약점이란 약점은 다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요.
보다시피 이것이 세상을 물려받는 온유한 자들의 법칙이오. 장점을 불공정하게 추구하려는 모든 욕구를 완전히 잠재울 때,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점들의 금광 안에 자신이 앉아 있음을 알게 될거요. 당연히 이 금광은 가슴의 무구함 속에서만 찾을 수 있소"
이 이야기를 듣자 한 사례가 내 머리에 떠올랐다. 범죄적 삶을 살던 한 남자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실 그는 별이 여러개인 누범이었다. 결국 판사는 그가 확실하게 개과천선할 때까지 더 이상 가석방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법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다른 수감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그 감옥에서 가장 진취적으로 자기변신을 시도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야기를 줄여서 말하면, 그는 지금 뉴욕 변호사 협회의 저명 인사이자. 인간의 범죄 성향과 교도소 교회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저자이다. 그는 지금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맨 밑바닥'에 도달하여 장점을 불공정하게 추구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례는 내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정의는 처벌이나 법의 집행과 관련해서 주로 이야기되는데. 이제 보니 그건 이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주제군요"
예수는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의를 행해야 할 이유가 범죄를 막는 데 있을 뿐이라면, 그걸 높은 지성으로 간주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정의의 진짜 목적은 뭔가르 막는 게 아니요! 오히려 정의는 조정 및 결단에 관한 문제요. 정의는 선을 살찌우고 결코 끝나지 않는 거래를 관리하는 삶의 방식이요! 그럼에도 불의가 판치면 범죄가 득세하죠. 개인의 건강에 비유하면, 범죄라는 질병은 여러 해 동안의 스트레스와 건강하지 못한 생활 후에 심각한 심장 장애가 오는 것과 같은 거요.
정의는 물과 같아서, 그 흐름을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공정성과 거래가 있는 한, 자기 나름의 참된 수위를 찾아냅니다. 필사적인 조치가 자주 취해지는 건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요. 범죄 행위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사회가 정의로우면, 그런 범죄행위가 자랄 토양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물었다 '일반인들의 경우라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규칙을 따르지만, 정의에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대다수 사람들은 그냥 규칙을 어기지 않는 방식으로 눈앞의 기회들을 찾을 뿐이죠. 보통 사람이 삶에서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로를 흉내내거나 서로에게 화내지 말고 아버지에게 하듯이 서로를 대하시오. 당신들은 신의 자녀들이오, 신과 다시 연결되시오. 사람마다 창조된 이유가 다르고 특별하기 마련이오. 이 진실속에서 누구나 자신의 장점과 자신의 정의를 찾아낼 것입니다"
정의의 지성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자연스런 균형을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다. 우주의 광할함과 우리의 관여가 초래하는 그 얽히고 설킨 복잡성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무슨 수로 균형을 가져오는 더 깊은 차원의 힘을 항상 알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지성적인 생에는 주고 용서하는 것이 기본요소가 된다.
친절이 도입되는 부분이 여기이다. 은혜의 표현으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하게는....지성으로서의 친절이 .
지성의 일곱번째 차원은 친절이다.
"친절은 어린이나 노약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신의 의지요. 당신의 선은 친절을 통해서 강화됩니다. 당신이 이 권능을 알고 사용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지혜로운 관라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의지요. 친절한 행동은 당신 자신의 풍족함을 키워 줍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줌giving이 몇 배로 늘어나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요.
지금 세상에는 친절이 그다지 자주 언급되는 덕목도 아니고, 그것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요. 오히려 그것을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베푸는 유화책, 다시 말해 그들의 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보고 친절을 경멸하는 경우들도 있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친절을 받아들이길 난처해하죠. 하지만 당신이 친절을 가슴으로 묵상해보면, 그보다는 훨씬 더 흥미있는 주제란 걸 알게 될 거요.
세상은 친절을 삶에 대한 보상, 즉 그 험난한 현실을 막아주는 자상한 보호행동이라고 여기곤 하는데, 사실 친절은 삶의 가슴이요. 그것은 삶을 견딜 만하게 하고, 의미 있게 하고, 감칠 맛 나게 하죠.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친절이 무엇일까?'를 묻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소, 구체적이 되시오. 이것이 친절이라는 지성의 문을 여는 열쇠요. 친절과 관련된 일반론은 애정에 찬 감정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는 적용할 수가 없소. 아마도 당신은 주어지는 그 대답들이 당신의 의문을 이끌고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 놀랄 거요"
잠시 생각해보니, 우리가 친절에 대해 얼마나 많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편의적으로 사회적 예절과 배려를 친절의 한계로 설정하고 있는가? 참된 개입은 회피하면서 보여주는 관심이 얼마나 진심어린 것일 수 있을까? 따뜻한 포옹과 단호한 '안 돼'가 더 큰 친절인 경우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치하고 있는가? 제한하고 금지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더 큰 친절이었을 때도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탐닉에 빠져들곤 했던가? 자러 가는 것이 더 큰 친절이었을 때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밤새 걱정하며 거실을 거닐곤 했던가? 용서하고 놓아버려야 했을 때도 우리는 얼마나 빈번히 복수를 궁리하곤 했던가?
"친절이라는 지성을 발달시키려면, 명예나 인정받기 위해서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연(緣)에도 얽매임 없이 진실로 주고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래나 통제를 위해서만 자신의 공물을 보유하는 사람은 얼마 안 가 친절이라는 지성을 잃고 맙니다.
다음으로는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친절한 것이 나약함을 나타내거나 무절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죠. 아니면 하루 종일 초콜릿을 먹고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것은 친절이 아니라 삶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능하게 하는 그런 습관들이 존재하는 건 그 사람들이 친절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요.
친절에 노크하는 건 말 그대로 신의 지성에 노크하는 것과 같소, 당신 자신에게 친절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당신은 남들에게 친절한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될 거요. 자신과 남들에게 친절해지는 게 신의 의지요"
이 순간 나는 자신이 친절을 오직 온유함이나 자상함 정도로만 여겨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절은 그런 것들을 훨씬 넘어선다는 놀라운 깨우침 앞에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절이란 게 뭐죠?"
"친절은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오. 친절은 보살피고, 돕고, 해로운 행동을 금하고, 함께 나누고, 삶을 작동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으 배려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선한 의지요. 친절은 움직이는 강인함이요. 친절을 보여주게 만드는 확신은 어떤 상황에서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죠. 당신의 참된 잠재력을 죽이는 대신 그것을 발휘하게 하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할지 생각해보시오. 당신을 해롭게 하는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푸는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친절은 강인함을 키우고, 강인함은 더 큰 친절을 키웁니다"
예수의 이런 진술은 그것의 진실성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상황을 내 머리 속에 떠올려 주었다.
언젠가 나는 차에 치인 작은 개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아픔이 너무 심하면 공격적인 행동을 불러올 수 있으니 다친 짐승에게 손 대지 말라는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듣긴 했지만, 그 순간에는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측은함이 앞선 나머지, 그렇게 앞뒤를 재는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개를 안아서 동물병원으로 데려갔다. 사실 그 개는 으르렁거리면서 약간 물기까지 했지만, 이렇게 하는것이 그 작은 개에게 도움이 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내 확신에 비하면 그 정도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친절한 이 행동은 그 개의 생명을 구해주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친절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안내해주는 전조등으로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보아야 한다. 이 친절에는 쓸모 없는 것을 제거하는 행동이 포함될 때도 있다. 1978년에 내가 그리고 있던 한 그림에도 이런 식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 필요했다.
그 그림은 밝은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한 다발의 풍선들을 들고서 맨발로 달려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소녀의 뒤에는 돌담이 있고, 그 너머 멀리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문제가 많은 대단히 복잡한 그림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림에만 온통 에너지를 쏟아붓다보니 밤을 꼬박 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은 달랐다. 내 그림은 갈수록 심각해져갔고 그만큼 내 기운도 빠져갔다. 나는 그 구도의 꼭대기 부분을 해결할 아무런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림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를 놓고 몇 시간이나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서 그랬든지는 상관없었다. 나는 칼을 손에 쥐고 그림으로 가서 위쪽 반을 잘라냈다. 그것은 일종의 안락사였다! 남아 있는 건 치마와 달리는 발뿐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건 매력적이고 참신했으며, 내 번뇌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건 내가 그날 밤 나 자신과 그림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친절한 행동이었다. 또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지만, 그것은 내 미래를 위한 행동이었다. (봄의 비행)이라고 이름 붙인 이 새로운 소형 그림은 내가 그렸던 (어린 양과 사자)이전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림이 되었다. 이 그림 덕분에 나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출판사와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은 1980년작 미술 포스터의 하나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코머셜 마르뀌 라이트)에 내 이름이 6개월 동안이나 내걸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분명히 친절은 기묘한 패키지로 묶여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입증해준다 그것은 자주 주는 사람과 받은 사람 둘 다를 놀라게 한다!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면, 10여 년 전에는 없엇던 방식으로 사람들이 친절에 눈떠가고 있음을 보여주는증거들이있다. 그런 증거들 중하나가 기업들이 이제 친절의 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비자 입장에서' '사용자 입장에서' 같은 시장 개념들이다. 현실적이 되자! 당신 같으면 불친절한 상점과 상냥한 상점 중 어느 쪽에서 물건을 사겠는가? 당신 같으면 북돋우는 분위기의 기업과 착취하는 분위기의 기업 중 어느 쪽에서 일하겠는가? 어느 기업이 개인의 능력을 더 많이 키워주겠는가? 어느 기업이 생산품이 당신에게 더 큰 도움이 되겠는가? 당신이라면 직원을 적대시하는 방식으로 경영되는 기업이 만들어내 자동차를 갖고 싶겠는가?
예수는 우주를 섬세하고 현명하게 다룰수록 멋지게 작동하는 섬세한 장치에 비유했다. 친절은 무력한 약자에게 베푸는 보살핌만이 아니다.
"친절은 가슴지성, 다시 말해 삶 자체를 이롭게 하려는 신의 의지의 마지막 차원이요. 내가 말하는 지성은 메마르고 냉담한 정신적 추론과는 다릅니다. 참된 지성은 삶에 명확성과 열망을 가져오는 확신과 이해에 지나지 않소 그래서 달리 말하면, 성스런 가슴 속에는 이해를 가져오고 삶을 꾸리는 데 중점을 두는 합일과 사랑, 삶, 공정, 정직, 정의, 친절이라는 일곱 가지 열망이 있다고도 할수 있소, 이것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영혼의 참 앎인 자비를 만들어내지요"
[출처] 끝없는 사랑 280쪽 지성의 일곱 번째 차원은 친절이다.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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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34와 시편 82:6절을 참고 “예수께서 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너희는 神들이다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 느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神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였도다” 너희는 신의 아들과 딸로 태어 났다. 왜냐하면 네 안에 그리스도 신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깨달아 질 때, 네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고요하라. 그리고알라. 내가 곧하나님임을(시편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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