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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5장 금강입자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5장 금강입자

柏道 2022. 2. 9. 11:11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5장 금강입자.

 
예수가

금강입자에 대해 말할 때는 언제나 그것을 지휘하는 건

사랑임을 잊지 않고 주지시키곤 했다. 그는 강조해서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기술을 발전시켜도 사랑을 갖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소"

금강입자란

사랑의 지휘 하에서

불연속의 형태와 배열로 구체화하는 고주파대역의 지속적인 흐름을 말한다. 불행하게도 감각 인식과 구조적 설명에 심하게 지배당하고 있는 인류는 이 강력한 삶의 동력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영원히 현존하고 결코 끝나지 않을

생명의 강이지만, 우리의 일상 인식과 워낙 동떨어져 있는 터라,

그것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나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아마도 내가 이 과제를 좀이라도 성공적으로 해낼 방도는

예수 자신이

그것에 접근하던 방식에 충실히 근거하는 것 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다.

예수가

이 주제를 다루던 다양한 방식들을 돌이켜볼 때,

한 가지 일관되는 것이 있다. 그건 그의 설명이 항상 단순하면서도

적절하고 직접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거의 언제나 놀라움에 사로잡히곤 했지만 말이다.

예수는

아주 평범한 것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내 관점을

바꾸거나 더 큰 이해를 가져다줄 새로운 생각거리들을

끌어들이곤 했다. 예를 들어 그가 운을 떼는 서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 상황이 잘 풀린다는 걸 알고 있소?"

같이 전혀 거창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게 되고 그러면 그때부터

그가 그런 말을 한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곤 했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웅장한 것'과 '사소한 것'

'세속적인 것'과 '비범한 것'을 솔기 없이 통합시켜 주곤 했다.

따라서 이 금강입자라는 주제를 다름에 있어서도 나는 그것이

보편 원리들과 연결되는 심오한 측면들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삶에 적용하는 면에도 중점을 두고자 한다.

모든 발현은 결국 그것의 속성과 잠재력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들을 구제화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우리가 금강입자라는 주제를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금강입자에 대한 지식은

입자 물리학이나 은하 여행, 에테르 영역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삶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이 생명력을 의식 차원에서 깨달을 때,

당신은 왜 식물을 사랑해주면

그 식물이 더 잘 자라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살아 있는 실제들의 이 같은 역동적 상호작용은

사랑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금강입자들이 자유롭게 교환되기 때문이다.

이 미립자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복합형태들을 이루는

벽돌들이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이 미립자들이 사랑의 지휘를 받는다면, 식물이나 애완동물 같이 생기 있는 생명체들을

몸이 아픈 사람에게 주었을 때 그 사람의 회복 정도가

훨씬 빨라진다는 것이 뭐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이런 사랑의 선물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치료와 치유의 많은 영역들에서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소한의 감호만을 하는 감옥들이나 정신병원들에서는

식물과 동물이 재소자의 심리치료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그것은 이 살아있는 동반자들이

구조의 영역 바깥에서 삶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치유를 위해서나 그냥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위해 자연을 찾곤 한다 하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최상의 이유는 하나가 그 모든 것과 연결되기 위해서가 아닐까?

교환은 그 사람의 연결이 의식적인가 직관적인가에 상관없이

그 환경과 어떤 양태로 공시성을 갖는가에 따라 이루어진다.

나는 아직도 낚시꾼이 어느 낚시줄에 물고기가 걸렸는지

'느끼고' 나뭇꾼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느끼는'것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나는 평소에도 말을 타고

북 테사스의 언덕들을 가로지르던 추억을 자주 떠올리곤 하는데,

한번은 예수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말은 한번도 쥐구멍에 발을 빠지거나 바위에

발이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러다고 내 말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수는 말이 땅과 계속해서 에너지 교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지형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던 거라고

설명했다.

생명에너지의 지속적인 교환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깊이 있는 정보와 인식을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느낌들을 '직관'이나 '육감'이라고 일컫지만,

이런 식의 표현은 그것이 능력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은밀한 자각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선조들은 지금의 우리보다도 이런 능력들을 더 많이 사용했다. 모든 참된 능력이 그렇듯이 생명 교환을 인식하는 이 능력도

사용할수록 커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가능한 한 많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펜을 쥐고 이 책을 써나갈 때, 나는 모든 우주 질서가

이 단순하고 일성적인 작용을 중심으로 적용되는 것을 깨닫고

놀라곤 한다. 단 하나의 잉크 분자 안에 존재 전체의 청사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발현이 사랑의 지휘 의

도 아래 무한한 영의

바다로부터 떠오른 금강입자의 드러남이므로.

이 현상은 모든 실존 속으로 끝없이 스며들고 모든 실존을 지탱한다.

예컨대 부부간의 사랑이라면,

남편의 사랑은 아내의 금강입자들에 영향을 미치고,

아내의 사랑 역시 남편의 금강입자들에 영향을 미친다. 사

랑이 그들의 생명에너지를 뒤섞어 그들이 생각과 마음과 가슴에서 하나가 되어가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외모까지도 섞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같은 지역 출신 사람끼리는 어딘가 모르게 닮은 데가 있다는 걸 깨달은 적이 있는가? 물론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아서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어투를 가지고 그 가계를 추적할 수도 있다고 한다.

또 우리는 이따금 길 가는 애완동물과 그 주인이 닮은 걸보고 키득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금강입자들을 연결하여 조화롭게 공명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이런 일들은 조금만 신경써서 보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언제나 자연과 자연에서 나타나는

생명력 교환들에 주목하곤 했다. 언젠가는 그냥 즐기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공원 벤치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아름드리 호두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 앉아 있던 내 몸은

숨죽인 찬탄 속에서 금강입자들의 자유로운 흐름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모든 벽이 사라지고 주변 풍경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한 떼의 까마귀들이 내 앞의 잔대밭에 내려앉는 것과동시에

한 무리의 다람쥐들이 숲에서 몰려나왔다 까마귀와 다람쥐들은

풀을 쪼거나 열매을 찾아다녔다. 잠시 후에는 앵무새 몇 마리와

자그만한 노란 콩새 두세 마리도 여기에 가담했다.

마치 내 비밀의 정원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까마귀와 다람쥐들은 생전에 한번도 사람을 보지 않아

사람이 무섭다는 걸 모르는 동물들 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자례로 내게 다가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함이 온몸을 흝고 지나갔다.

그건 마치 '자연을 들이마시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까마귀 한 마리가 녹색 정원뱀을 잡아서는 날더러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치켜들었던 것이다.

나는 '오, 그건 징그럽구나'라고 대꾸 했다 왜 새가 내 말을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그냥 그럴 거라고 느꼈을 뿐이다. 그러자 그 새는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1.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자기가 얼마나 능란하게

먹이를 먹어치우는지를 내게 모여주었다. 그는 정말 쇼맨이었다!

잠시 후에 호두 열매들을 모아서 땅에 묻도 있던 작은

다람쥐 한마리가 내 눈에 들어오았다.

그 햇호두의 껍질에는 아직도 녹색이 남아 있었기에

나는 다람쥐가 그렇게 하는 것에 호기심이 바짝 당겼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귀여운 다람쥐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좀 설익지 않았니?"

다람쥐는 자신이 내 말을 새겨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짙은 갈색껍질의 호두열매 하나를 찾아낸

그 다람쥐가 열매를 물고 내 쪽으로 와서 마치 "이거면 됐어요?"

라고 묻기라도 하듯 그것을 치켜들어 보여주었다.

내가 그의 영리함을 한두마디 말로 확인해주자

그는 그것을 물고 가 땅에 묻었다. 그렇게 호두를 땅에 묻고

난 다람쥐는 다시 호두열매 하나를 주워들고 확신에 차서

내게로 걸어왔다. 다람쥐는 그 자리에서 호두열매 껍질을 벗기고

나더니 그것을 내 발 밑에 떨어뜨렸다.

내가 다람쥐에게 먹이를 줘본 적은 있지만, 다람쥐가

내게 먹이를 주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예수는 말했다

"금강입자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 생명의 숨결이오.

이 금강입자들의 지속적인 교환은

존재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들은 유기체만이 아니라 행성과 바람과 존재하는

모든 실체들을 포괄하죠. 모든 것이 그 존속 기간 내내 숨을 쉽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이 입자들은 삶에 기본 균형과

연결을 가져다줍니다. 여기에 조율된 사람은 생명의 숨이

고르지 못한 상태가 질병이란 걸 확실히 알죠. 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다시 자연스레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존을 포개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오. 이런 게 접촉이나

간단한 포옹만으로도 발휘할 수 있는 치유력이오"

예수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내가 물었다.

"직접 접촉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런 치유가 가능한가요?

당신의 옷을 만졌던 성경에 나오는 그 여자의 경우처럼요"

"그녀는 내 사랑을 만진 것이고, 그래서 치유된 것이오.

당신들도 서로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소,

특히나 서로에게 품고 있는 그 사랑의 뿌리를 만진다면 말이

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떨러져서 혼자 살면 금방 생명력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소"

이런 그의 대답은 내 호기심을 북돋워주고 앎에 대한 내 갈증을 키웠다.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내가 "금강입자란 게 뭔가요?"

라고 묻자

예수가 대답했다.

"그건 물질 존재를 이루는 기본 벽돌이오.

그것들은 무한을 활성화하고 결합하며, 무한에 형태를 부여하는

특수화된 잠재 에너지요. 일종의 점으로 존재하는 그것들은

더 쪼개지거나 나눠질 수 없고,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오,

하지만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차원을 세웁니다.

한 점과 다른 점 사이에는 차원이 있고, 일련의 점들 사이에는

차원양태가 있소, 이렇게 해서 공간이 있게 된 거요.

이 양태들의 리드미컬한 활성화와 반복을 통해서

에너지가 전달되는데. 이 양태와 리듬들이 더 복잡해지고

특수화되면, 물질이 형성되죠"

대학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물리학 수업을 떠올리던

나는 빛이 입자일 수도 있고 파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예수 또한 금강입자가 점과 에너지와 질량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실제로 질량을 만들 수 있는 입자는 금강입자뿐이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에너지와 질량이 같은 것인 일차 발산점이오.

금강입자가 솟아오르는 바탕은 불가분으로 우뚝 솟은

한 영인 무제한 잠재력의 연속 필라멘트요.

따라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무한을 구체화하여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잠재력을 활성화시키고 모든 발현 형태를 가능하게 해주는

궁극의 점으로 금강입자를 설명할 수도 있소"

하지만 나는 당혹스러웠다. "무한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죠?"

어떻게 무한을 제한하지 않고 그것이 기성요소들과 통합될 수 있죠?" 네게는 이것이 모순어법처럼 보였다.

"당신들이 물질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이 그럴 거요. 당신들이 알고 있는 물질우주는

전체 존재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보존의 법칙은 이 1%도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오.

사실 대부분의 과학과 대부분의 견해들이 에너지를

힘이나 연소나 압파pressure waves 정도로 해석하죠

그리고 이 관념은, 힘을 압파로 귀착되고,

압파는 밀도를 낳으며, 밀도는 물질로 귀착되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무한하게 남아 있다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어법이오!

나머지는 규정될 수 없으니 이해의 토대로 제공될 수도 없소.

무한이 규정될 수 없는 나머지로 간주되는데 무슨 수로

그것의 속성을 규정할 수 있겠소?"

무슨 수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겠소?

무슨수로 그것을 활성화할 수 있겠소?

진실은, 창조하고 남은 '나머지'가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들이 체험하고 측정하는 물질우주라는 거요.

차원 상호 간의 끝없는 가능성으로

그 물질우주를 둘러싸고 지탱하는 그것의 무한한 공급이 아니라요.

당신들이'물질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추적할 수 있는 건

단지 에너지 양태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오. 게다가 이 또한 한편에서는

새로운 공급이 이뤄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 배열이

소모되는 식으로 쉼없이 미묘하게 흐름이 변하고 있소.

금강입자는

무한세계와 한정된 물질 실존 영역 둘 다에 속해 있습니다

금강입자는 생각이 현실로 발현되는 데 필요한 연료와

역동적 에너지를 제공하죠 그건 새로운 생명력과 아름다움과

영양과 치유를 생명에게줄 뿐 아니라 영에게 육신을 제공하기도 하죠. 금강입자는 사랑의 지휘를 받아 자연과 영의 의지에 순응하기 때문에 어떤 차원에나 속해 있습니다"

pressure wave

1. (기상학) 기압파(氣壓波)

2.(공학분야)압력파

기압파 대기 중에서 음향의 전파에 따른 아주짧은 주기릎 가진 미세한 기압의 진동으로서 세로파의 일종을 말한다.

압력파 유체중에 생긴 상태변화가 유한의 속도로 전해지는

현상을 파동이라 부르며 파동에 다라서 압력이 변화할 때

그 파를 압력파라 부른다.

예수가 말하는 것에는

언제나 자연스런 타당성이 있었기에,

이것은 나로 하여금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항상 존재해오던

내재된 의식이 이제서야 흔들어 깨워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사실 예수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잠에서 깨우는 것이었다.

예수는

'에너지를 힘으로'보는 관념이 산업에서부터 정부와 삶의 경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 형태에 대한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해왔다고 설명했다. 관념은 성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우리가 보는 것을 참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

힘이 아닌가! 우리 세상의 허다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힘이다.! 예수는 우리의 이해 토대가 힘에서 자력으로

바뀔 때 심오한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내게 장담했다.

"실존의 더 큰 통일을 설명해주는 건 자력 magnetic attraction이고, 차원 상호가 영역을 통합하는 것은 사실 자기 응집력이오.

그리고 역으로 모든 물질 현실을 지탱하고 연결하는 것이

차원 상호간 영역들이고요 무한은 나머지가 아니요.

무한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결합 요소요.

사람들이 힘에서 흡인{(빨아들이거나 끌어당김(흡수)}으로

사고방식을 바꾸면 인간 기술의 모든 측면이 따라서 바뀔 것이오"

예수는

우리가 연료와 조야한 에너지로 인해 겪는 곤란의 상당수가

에너지를 힘으로 해석한 데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힘을 써서 저항을 발생시키고,

그 저항에서 전기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의 시대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예수가 '조화롭고 무해한 에너지"라고

칭했던 것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발전기에서부터 마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힘있게 할 수 있는 우주의 진짜 에너지다.

오직 그럴 때만 우리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무한을 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이 순간에도 과학은 여전히 결핍과 힘과 나머지에 중점을

두고 있소. 지배를 필요로 하는 결핍과 그것을 지배하는 데

사용되는 힘고, 이해되지 않는 나머지 존재 말이오.

무한을 나머지로 보는 것은 전혀 생산적인 태도가 아니오.

하지만 이제 그런 상황은 바뀌려하고 있소" 예수는 낙관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전환을 이뤄내죠?"

"그 모든 것은 궁긍 권능에 대한 적절한 존중에서 시작될 거요.

충분한 수의 삶들이 이런 이해에 도달하고 그것을 촉진하면

인류의 패러다임 전체가 에너지를 힘으로 여기는 믿음을

넘어서게 되지요. 힘은 충분한 사랑 앞에 서면 의식을 지배할

자신의 권능을 잃습니다. 그때부터 의식은 비약적인 속도로

깨어날 거요. 그건 워낙 강력해서 순식간에 해답을 불러올 거요.

그때까지는 금강입자들이 자장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잊지마시오.

인간의 잠재력과 관련해서는 가슴이 당신들의 자기 중심이오.

당신이 금강입자들을 자화(磁化)하는 건 가슴을 통해서이고,

당신이 그것들을 지휘하는 건 사랑에의해서요"

이상 세계에 대한 그의 예견이 내 상상력을 휘어잡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은 전기 에너지가 자력보다 앞선다는 교과서식

설명에 달라붙어 좀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저히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설명은 다시 기술적이어서 뒷장에서 옮기는

평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문맥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의 답변 중 요지를 말하면 전위를 발생시키는 구성 자기가 있고,

전기 극성에서 생기는 파생 자기가 있다는 것이다.

"구성 자기를 전기 극성이나 저항 없이 공시적이고

홀로그래픽한 통합이 이루어지는 흡인(끌어당김)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소, 반면에 파생자기는 전기 에너지의 보완물이어서,

기본 실존 형태를 제자리에 붙들어두죠. 여러 이유에서

자기는 물질 실존의 알파이자 오메가 라고 할 수 있소"

"당신은 그것들이 사랑의 영향을 받아 자기에 반응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예수는 연극 무대의 배경을 준비하는 무대 디자이너처럼

침묵의 창조 상태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그가 내게

제시한 장면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내가 당신에게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방 하나를 준다고

해봅시다. 그 방안은 중력이 아주 약한 데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당구공들로 가득 차 있소, 당구공이 날아다니는 속도는

약한것에서 미친 듯한 빠르기까지 다양하고요.

당구공들은 벽과 바닥과 천장에 부딪혀 되팅기면서 계속해서

왔다갔다하고 있죠. 그러데 특히나 건 이 당구공들의 표면에

하나같이 철가루가 입혀져 있다는 거요

이제 당신이 그 방에 들어가서 자기 조끼를 입었다고 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당구공들은 당신에게로 날아와 차례로

달라붙으면서 당구공 사슬을 형성할 거요.

그 사슬 유형은 그것들을 끌어당긴 자력의 흡인유형과

똑같을 거구요 말하자면 당구공들은 당신이 자장 속에 도입했던

사랑의 유형에 따라 서로 연결되고 뻩어나가죠.

내가 들 수 있는 또 하나의 예가 있소. 아이들이 많이 쓰는

자석화판은 아마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그 자석화판의 투명 플라스틱 덮개 밑에는 자석 연필에 반응하는

아주 가는 철끈들이 들어 있소, 자석연필은 화판 위에

그려지는 그림 선을 따라 그 철끈들을 끌어당겨 모이게 만들고.

철끈들을 끌어당기는 그 자석의 움직임에 따라 어떤 유형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소.

이제 그 자석이 당신 가슴이고 그 연필은 당신의 사랑이라고 해봅시다. 사실 가슴이란 게 이런 거요. 이것이 당신의 영향력이오.

당신은 말 그대로 그냥 있는 것으로, 자신인 사랑이 되는 것으로

자기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소, 당신은 삶이라는

화판 위에서 움직이는 자석이오. 당신이 어떤 상황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상황에 고유한 금강입자들이 당신이 일으키는

영향에 맞추어 조정되죠. 당신은 웅장한 계획을 생각해내서

그것을 화판 위에 그릴 필요가 없소, 당신 자신이 웅장한 계획이오!

자신이 사랑이 되면 되는 거요. 모든 것이 그것을 중심으로

저절로 배열될 테니까요.

사랑이 커질수록 영향력도 커집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자신인 사랑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소. 유형과 그것의 결과인 표현물을 만들어내는 건 당신의 사랑이니까요."

"금강입자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나요?"

"본래 상태에서는 그렇소"

예수는 모든 물질 존재들은 금강입자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 입자들이 자기적으로 응집하여 물질과 형태의 모든 복합

유형들을 이루는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응집한 덩어리들은 구조를 세우는데, 그러고 나면

견고함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에너지 긴장이 이 구조를

함께 붙들어둔다. 모든 견고함은 구조여서,

구조는 모든 견고함을 설명해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너지의

무한 공급 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뚫으려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 환상을 깨닫고 구조 너머를 볼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사랑의 새로운 속성이 구조화된 배열에 주입될 때

일어날 수 있는 방어 행동의 가능성을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초기 저항이 일어나거나 심지어는 거부할 수도 있소!

이건 구조가 힘에 봉사하는 경우가 찾고,

혼한을 감추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오.

구조는 입자들을 간수하고 배치하고 이용하는 보존 정리

시스템이지만, 살아 있는 역동적 질서를 일으킬 능력은 전혀 없소,

반면에 사랑이 입자들 사이에서 참된 조화와

공시성을 불러 일으키면서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생명의 활기찬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지요.

이것이 견고함의 환상을 제공하는 유약하고

부적합한 구조들을 박살내는 영향을 미칠 수 있소,

사실 그건 생명의 흐름을 제한 하는 모든 구조들의

'생존을 위협하는'것일 수 있소. 사랑이 새로 들어옴으로써

기존 파벌이 산산조각나고 마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싸움에서 지는 쪽은 사랑을 모방하고 질서를 위조하려고

애쓰는 연약하고 부적절한 구조들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회복과 더불어 새롭고 참된 질서가 찾아오죠.

지구에서 이 메시지가 지금보다 더 적절했던 때는 없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에는 많은 사랑이 쏟아 부어지고 있소,

쓸모 없는 기존 구조들 중 일부를 박살내는 효과를 미칠 만큼

많은 사랑이요. 그것은 지구에 쏟아 부어질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오, 하지만 이로부터 새로운 삶, 새로운 희망,

새로운 성장의 싹이 틀 것이요"

나는 예수가 청하는 구조가 자연에 존재하는

원자와 분자의 아원자 구조가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복합구조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설사 자연 구조라 해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에 시달리던 나는 어느 날엔가

예수에게 물었다 "나무를 이루는 입자들은 언제까지나

나무를 이루나요? 아니면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는 건가요?"

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간단명료했다.

"금강입자들의 생존 과정을 지휘하는 것도 변함없이 사랑이요 하지만 입자들은 기억을 지니고 체험을 보유하고 있어서, 삶의 흐름을 지휘할 때, 사랑은 경향과 선호가 같은 선을 따라서 더 많은 체험들을 낳을 수 있게 해주죠. 이미 형성된 금강입자들의 경우, 수소나 산소 같은 원소의 원자 배열은 말할 것도 없고, 중성자와 전자 같은 좀더 복합적인 입자들 속에 여전히 같혀 있다는 사실이

이 면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 원자 배열은 나무가 꽃으로 뒤덮이더라도 여전히 지속되죠. 나무가 죽고 나면 나무의 생명력을 이루던 금강입자들은 대개 다른 나무로 옮겨갑니다 사실 이런 게 삶이요. 사랑의 영향을 받아 작동하는 금강입자들의 자유롭고 구조화되지 않은 공급 말이오.

삶이란 건 그냥 움직이는 사랑에 불과하오. 사람들이 침체된 일상과 의무들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오. 휴식을 취하거나 휴가를 가거나, 아니면 그냥 취미생활을 즐기기만 해도 됩니다. 삶과 그냥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면서 신선한 금강입자들을 새로 공급반기만 해도 치유가 되거든요. 금강입자들을 들이마시고 당신 주위에서 그것들의

풍요를 즐기시오"

삶에 대한 예수의 감정은 지극히 애정 깊고 경건했으며, 삶의 양육력에 대한 크나큰 감사와 결부되어 있었다. 그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에 감탄하던 나는 어느 날,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건 예수가 삶을 지칭할 때는 언제나 여성형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우리의 성스런 근원을 남성형으로 칭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이었기에 특히나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내 호기심은 결국 예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첫째가 신을 과연 성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가 즐겨 사용하는 그런 식의 용어법에

대해서였다.

"최상의 성스러움은 성을 넘어서 있소, 물론 자신 안에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요. 그 같은 발현들은 존재의 영원한 균형잡기의 일부요. 남성적 존재로서 가장 기본적인 발현이 그원이 되는 것이오, 가장 기본적인 여성적 발현은 삶과 창조의 동력인 의식과 사랑으로 발현하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삶은 신의 여성적 측면인가요?"

예수가 대답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길 좋아하죠"

성의 문제와 관련된 내 선입견들이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서구문화 속에 사는 우리는 대체로 활동적인 영향을 남성형으로, 수동적인 요소를 여성형으로 칭한다.

하지만 예수는 "인과관계의 힘들은 밀도 높게 형성된 물질구조 유형들에서만 지배적인데, 우리의 성관념을 규정해온 것이 이런 힘들 "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더 높은 존재 차원들에서는 '원인과 원인'만이 동시에 존재하고" 예수는 "원인과 결과는 우주의 파생국면들이지, 일차 국면들은 아니"라고 여러 번 강조하고 나서, 다시 한번 "더 높은 수준의 자각에서는 굳건하고 견고한 영향을 남성적인 것으로 활동적이고 상호적이고 적응성 있는 창조 양식들을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는 동안에 나는 기회를 보아 예수에게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복종을 인정하는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해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현대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그런 관념들이 몹시 불쾌햇던 것이다. 그는 그런 구절들 중 일부는 그 당신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서술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우주질서의 원리를 가리키는 형이상학적 표현들인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구절들이 사회 정치적으로 파괴적인 행위 유형들을 떠받치는데 이용되는 반면, 훨씬 더 큰 진실들이 잊혀지고 말았다는 건 불행한 일이죠. 우주 질서는 음양의 균형과 상호존중으로 유지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는 항상성이 활동성을 다스려야하고, 진리가 적응 위에 거해야 하며, 근원이 피조물보다 앞서야 하고, 부동성이 변화를 지휘할 권리를 위임받는 우주 차원의 명령체계도 있어야 하오. 이것의 증거는 존재 전체에 걸쳐서 발견할 수 있죠"

예수는 개개인의 차원에도 그런 균형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누구나가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소, 삶이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듯이 말이오. 그렇게 내재하는 잠재력은 '균형 잡힌'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예를 들어 쉽사리 바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단순히 남성 이상의 존재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거요. 어떤 특정 과제에도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항상성이라는 자신의 남성적 굳건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고요.

여성의 경우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소. 그녀가 삶에서 안정된 목표나 과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여성적 경향을 과도하게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녀가 자기 안에 존재하는 남성적 굳건함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녀는 좀더 확실한 방향성과 단호함을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좀더 명확하게 알고 싶었던 내가 "이 원리가 금강입자처럼 기본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나요?"라고 묻자, 예수가 대답했다.

"항상적이고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철저하게 기본적이란 면에서 보면 금강입자들은 양이오. 하지만 삶을 지휘하고 다양한 형태들에 적응하고 사랑의 창조물들을 양육하는 한없는 능력이란 면에서 보면 금강입자들은 음이오"

이런 그의 대답은 내 호기심을 돋구었는데. 그건 그가 사랑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사랑은 양이기도 하고 음이기도 한가요?"

"물론, 그렇소 사랑의 단호함은 양이고, 사랑의 활발성은 음이오"

그러자 예수가 몇 번이나 삶을 '움직이는 사랑'이라고 칭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제 나는 예수가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또 그가 왜 여성형 대명사를 써서 삶을 지칭하고, 우리의 권원과 관련해서는 남성형 대명사를 썼는지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색채 없이 순전히 철학적 정확성으로 사용된 용어였던 것이다.

음양의 원리가 우주 차원의 균형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잠시 옆길로 샌 것이었기에, 우리는 금강입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금강입자들의 전체 차원은 에너지로 바뀌는 입자와 입자로 구체화되는 에너지가 벌이는 복잡한 상호역학의 세계이다.

금강입자들의 끊임없는 흐름을 전제로 하면 결핍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공급이 무한한데 왜 우리는 결핍을 믿을까요? 우리가 한계 너머를 볼 수 없도록 우리의 믿음을 그토록 뿌리깊게 조건짓는 게 뭐죠?"

"그건 당신들이 모든 물질을 그것에 형태로 부여하는 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오. 자유로운 생명의 강을 그것의 근원과 연결된 무한한 잠재력으로 보지 않고 말이오"

"저는 이제야 막 깨달아가고 있는 것을 당신은 이미 훤히 다 보실 수 있군요. 어떻게 해야 제 자각을 기울 수 있을까요?"

예수는 자상한 눈길과 가벼운 미소로 내 초조감을 달래주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먼저 성스런 가슴에 대해 알고, 당신의 삶이 좀더 완벽하게 그것을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하오.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참된 가슴이고 당신의 거룩한 방이오. 대개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이 끝날 무렵이면 그 방문을 닫고 말지요. 그러고 나면 생명창조 입자들을 인식하는 능력도 사라지고, 남은 건 고정된 공급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죠. 이제 그 사람은 삶의 자원들을 생활의 모순된 유형들만이 아니라 구조에 투자하는 것으로 낭비하면서 말 그대로 자기 삶을 소진하고 맙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고갈되고 나이 들게 되죠.

그 입자 에너지의 생명 흐름과 교환을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참된 가슴뿐입니다. 사람들이 헌신 정도가 큰 영역에서일수록 더 직관적인 게 이 때문이요. 성스런 가슴이 다시 되살아나 그 불꽃을 밝힐 때라야, 당신들은 무한히 풍요로운 우주에서 금강입자들의 신선한 공급을 자력으로 끌어당길 수 있소, 당신들이 끌어당길 수 있는 금강입자들의 양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소, 금강입자들은 당신들의 삶을 권능 있게 해주고, 그것을 치유하고, 그것이 훨씬 더 높은 실현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줄 수 있소.

성스런 가슴은 거룩한 방이오. 참된 기도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여기지요. 그것은 평화와 고독의 자리이고, 자신의 근원과 강력하게 연결되는 자리여서, 당신이 할 일은 기도를 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가는 것뿐이오.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기도이고, 그 거룩한 방에 들어가는 것이 성스런 행동이오. 내가 내 사도들에게 벽장 속에 들어가라고 권했던 이유가 이것이오. 조용하고 고요한 장소라는 외부 환경이 그 거룩한 방에 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니까요.

사실나는 기도문을 주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소. 참된 기도를 말로 대신하는 순간, 기도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거든요. 기도문의 유일한 가치는 생각을 더 높은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사람의 영혼이 성스런 침묵 속에 빠질 수 있도록 예비해주는 데 있소. 그 거룩한 방에서 존재 전체의 근원과 결합할 때,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끌어올 수 있는 권능이 활성화될 거요. 이곳은 당신의 '있음' 중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여서, 그 안의 완벽한 고요로 자신이 언제 그곳에 들어갔는지 알수 있소. 그 안에는 새로 내린 눈밭 같은 성스러움과 순수함이 있소"

그가 이런 마지막 말들을 하고 있을 때. 내 주의를 사로잡는 새로운 깨달음에 나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수와 함께 있는 데서 온 부산물인 작은 축복 하나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시하고 있었다. 평소 아마(亞麻) 기름 냄새와 테레빈유 냄새로 뒤덮혀 있던 내 화실 특유의 악취가 지워지고, 대신 내가 무의식적으로 예수의 현존과 결부시키게 된 기분 좋은 신선한 향기가 방안 가득한 경우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이 향기는 새로 눈이 내리고 난 다음, 상큼한 상록수 내음과 오존 가득한 맑은 산 공기와 흡사 했다. 그런데 예수가 거룩한 방을 묘사하는 데 바로 이 이미지를 사용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우연의 일지인가!

나는 언제나 높은 산에 오르길 좋아해서 가능한 한 자주 높은 산들을 찾곤 한다. 뉴 먹시코로 여행하던 어느 여름, 나는 란초스 더 타오스에 있는 아름다운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방문했다가 성스런 가슴을 강렬하게 경험하는 축복을 입었다. 스페인인드르이 세운 이 성당은 아도비 벽돌로 세워진 부벽들을 가지고 있는데. 전세계의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그 장엄한 부벽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장 사진발을 잘 받는 건물이라는 사실은 놔두더라도, 이 성당에는 사람을 끄는 훨씬 더 놀라운 뭔가가 있었다. 그건 그 성당이 이 세상 것이 아니 절대 고요를 사람들에게 경험시켜 준다는 것이다! 재단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바깥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는 건 물론이고, 속삭임과 발소리조차 그 고요 속에 흡수되고 마는 걸 느꼈다. 들리는 건 오직 내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

그 성당을 세운 사람들이 이런 효과를 의도한 건지, 또 어떤 영적지시에 따라 그 성당이 설계되어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게 중요한 건 그 성당이 나 자신의 거룩한 방에 들어가는 것과 맞먹는 외부 환경을 제공해준 가장 장엄한 건축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성당의 신성함 속에서 청한 모든 기도는 답변 받는다는 이야기가 민간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였다. 나 역시 내 기도가 답변받았다고 확신한다.

예수는 여러 번 말했다.

"가슴은 자신이 지휘한 것을 계속해서 지닙니다. 당신 삶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명되고 당신 가슴의 지휘를 받았던 모든 입자들이 영원히 당신 것으로 남게 되죠"

나는 예수의 이 말을 무척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그 문제로 곧바로 들어가서 물었다.

"제가 오늘 이 지상에서 살기를 그만두면, 내 몸과 내 삶, 내 존재를 이루고 있던 그 모든 금강입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무수히 많은 금강입자 군단들은 그냥 우주에 소속되어 있을 뿐이오. 산소나 질소, 탄소 따위의 원소를 형성하는 그것들은 아버지가 공동으로 사용하라고 남겨둔 것들이거든요 당신이 죽으면 그런 입자들은 본래의 공동 자궁으로 돌아가겠지요. 하지만 몇 조의 세제곱에 달하는 수많은 금강입자들이 인간 종족에게 소속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로 가서 재순환하게 되지요. 그 애들의 사랑이 당신이 뒤에 남긴 사랑의 방식과 닮은 정도에 따라서요. 그리고 당신의 가계를 통해서 당신에게 왔던 몇 십억 개의 금강입자들도 당신이 그들과 함께나누었던 사랑의 유사성에 따라서 미래 세대의 자손들을 떠받치기 위해 그리로 돌아갈 거구요. 또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당신이 삶을 함께하면서 남들과 교환했던 입자들도 본래의 기증자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떠나더라도 당신 개인이 가슴의 자력으로 끌어당겨 당신 삶을 창조하는 데 사용했던 입자들은 모두 당신과 함께 남을 거요. 그것들은 당신의 영혼에 달라붙거나 당신이 사랑으로 점 찍어둔 곳으로 가서 당신의 가슴이 자신들을 다시 한번 불러내기를 기다릴 거요. 어느 쪽이든 그것들은 영원히 당신 것이요. 영원히 함께 하길 바라거나 어떤 존재 영역으로 돌아가서 다시 함께 일하길 바라는 친구나 가족들이 집단적으로 그런 사랑의 지점들을 지명하는 경우가 많죠"

이런 진리를 듣게 된 것에서 나는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사실 이 계시를 소화하고 숙고해보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들었다. 설사 우리가 우리의 있음에 핵심적인 것들과 우리 사랑은 가지고 간다 해도 우리 삶의 발자국들 자체를 뒤에 남겨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유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 중 남들과 함께했던 체험들은 모두 남기고 가는 반면에, 우리가 사랑하게 된 것들은 가지고 간다.

다른 생물체들이 숨쉰 공기를 우리 또한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금강입자들과 그것들의 활기찬 공급 흐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이런 사고방식을 더 확장할 수 있었다. 예수가 주었던 답변을 들을 때마다 나는 새로운 의문들에 부딪히곤 했는데. 결국에 가서 가장 큰 문제는 책임의 문제였고,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답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우리 뒤에 사랑의 유형을 남길지, 갈등의 유형을 남길지, 위대함의 유형을 남길지, 환상의 유형을 남길지, 앎을 남길지, 수수께끼를 남길지, 사랑을 남길지, 용서를 남길지의 문제였다.

"내가 천국에 부를 쌓으라고 했던 건 이런 현실을 마음에 두어서 였소, 당신이 아주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살면서, 당신의 사랑을 더 높은 의식차원으로 실어다주는 원리와 생각들로 당신의 사랑을 이끌어 왔다면, 당신 삶의 보물들은 그만큼 더 안전하게 보관 될 것이오. 하지만 그 사람의 사랑과 삶이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우며, 불성실과 배신으로 점철되었다면, 그의 생명 입자들은 그가 해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길을 잃고 말 수 있소, 이것은 관련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지요. 이렇게 길 잃은 입자들은 부채를 갚을 때까지 대부분 담보로 잡혀 있게 되는데.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 크나큰 고통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소. 그보다는 용서하고 놓아버리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유익하지요"

"이것이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업보라는 것인가요? 당신이 지금 말씀하신 게 그 업보의 원인이고요?"

"우주에서 인과의 과정이란 균형을 잃었다가 다시 찾는 방식을 말하는 거요. 균형은 잃으면, 되찾아져야 합니다. 업보란 건 이걸 말하는 거요. 하지만 인과의 길을 되밟는 것이 균형과 온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오. 더 좋은 방법은 자비와 사랑으로 풀어가는 거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온전성을 상실할 때마다 그 것을 복구하길 열렬히 구하는 것이 전부요. 나는 당신들이 더 위대한 사랑과 자비와 공시성의 힘으로 당신들의 업을 탕감해줄 자신의 근원과 다시 연결되는 것으로 그런 온전함을 찾아내길 바랍니다.

반면에 업보란 최저 수준의 윤리 행동, 다시말해 우주를 위한 일종의 치안 활동이요. 비록 그것이 삶을 다시 균형잡는 데 효과가 있고, 우주에게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영혼에 상처를 입힐 수 있소, 그래서 영혼을 고귀한 책임의식, 성스런 가슴과 신의 자비로 권능화된 책임의식으로 끌어올려 이 악순환을 끝내려는 것이 나의 주된 목표요"

이 메시지의 아름다움과 완벽성은 생각해볼 많은 것을 내게 던져주었다. 비록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그의 자상한 설명과 인간적 실수에 대한 그의 관대함에 더 크게 감명받았지만 말이다.

"너무 많은 인간적 실수와 왜곡이 후손들에게 전체 인간 역사의 일부나 때로는 가계 전통의 일부로 그냥 전해지곤 해왔죠"

그는 이어서 우리의 한정된 이해가 어떤 식으로 오래 전에 시작된 치명적인 유형의 최근 표현에 불과한 죄악이나 범죄를 쉽사리 비난하곤 하는지 설명했다.

"먼저 왔던 사람들의 업적을 물려받는 것에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소? 하지만 자신이 지상에 머무르기 전에 저질러진 과오들의 와중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소? 좋은 것들만이 아니라 나쁜 것들까지 함께 물려받는 그 집단 유산은 피할 방도가 없소"

예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꿰뚫는 듯한 선명함으로 내 눈 갚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마치 내 영원성을 훤히 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는 다시 선언했다.

"당신들은 무구하고 완벽하게 태어나긴 했지만, 당신들이 태어난 세상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유산을 다 가진 곳이요. 이 유산들은 부분적으로는 자력에 끌려서 개개인에게 오게 되지만, 부분적으로는 개인에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같은 인류로서 형제니까요. 그래서 누구나 예외 없이 그 집단 유산의 일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엄청나게 오용되고 있는 '누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죄)는 선언의 본래 의미요.

이 말의 참된 의미는 그가 형제라면 누구도 부정적인 유산의 일부를 받다들이고 그것을 바꾸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요. 그러니 차후로 당신을 화나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말고 그런 위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는 편이 좋을 거요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면 이제 당신은 그 무력함을 보는 대신에 그런 운명을 받아들인 그 큰 용기와 능력을 찾아낼 수 있을 거요. 다리 밑에서 사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상실과 포기를 자신의 계약조건으로 감내하는 그 고귀한 영혼을 칭송하게 될 거구요. 아이가 암으로 죽어가면 생명의 상실을 불쌍히 여기는 대신, 이런 유산을 자진해서 물려받을 정도로 불멸성을 확신하는 한 영혼으로 그 아이를 보시오. 고난을 벌이 아니 포괄요소로 보고요.

고대 이스라엘에 살았던 부자 욥의 이야기가 말해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이오. 욥은 상황이 반전되어 온갖 사건들이 그의 삶을 점점 더 최악으로 몰아가기 전까지는 행운과 축복이 가져다준 온갖 혜택들을 누리고 있었지요. 욥은 자신의 고난을 벌로 해석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소. 또 그 고난을 자신이 겪어야 할 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소, 그는 거기에서 뭔가 교훈을 찾아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변하는 건 없었지요. 그는 기도하고 희생하고 찬미하면서 신에게 참회하고 탄원도 해보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여전히 만족할 만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소.

절망에 빠진 그는 마침내 신에게 설명해주길 청했지요. 그는 신에게 물었소. '왜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제멋대로 사용하게 놔두시면서 선한 사람은 고통받게 하십니까?' 그러자 신이 대답했소, '네가 아침에게 명한 적인 한번이라도 있느냐?' 아니면 새벽에게 그 처소를 보여준 적이 있느냐?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져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에 의지함이나?'

전지전능한 신이 푹풍 가운데서 한 대답은 욥에게 더 많은 의문을 불러왔을 뿐이죠. 욥에게 보낸 신의 메시지는 원망이나 판단, 나아가 까닭을 파헤치는 데 해답이 있지 않고 우주의 광활함과 장엄함 속에 있다는 것이었소.

마침내 욥은 고난을 자기 삶의 새로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굴복했지요. 결국 인간의 형제관계 내에서 자신의 계약조건은 좋은 것과 더불어 나쁜 것도 받아들이는 데 있는 걸 이해했던 거요 그러자 그는 신의 자비로 본래의 부와 본래의 축복을 되찾을 수 있었소. 하지만 이런 일이 이루어진 것은 인과를 정당화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임과 자비라는 더 고귀한 힘에 의해서였소.

모든 사람이 삶의 더 높은 차원으로 함께 올라가야 하듯이, 삶도 좋건 궂건 공유되어야 하오. 당신이 최악이라고 여기는 것도 스쳐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것이 더 위대한 지혜요"

"그건 항상 그런 식이어야 하나요?"

"당신들이 서로 간에 분리되어 있고 신과 분리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는 한, 그럴 거요. 하지만 자신이 사랑임을 알고 한 영안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냥 지나갈 거요. 또 구조들을 바꾸거나 무효화할 수 있도록 바다의 파도처럼 공급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테고요. 이것을 알고 나면 당신은 구조의 한계가 뭔지를 인식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의 종복이 되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요"

우리 인간의 공식에서는 자신의 삶과는 멀리 떼어두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피하거나 동정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 딜레마에 대해 예수가 제시한 해답은 존중과 포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범죄를 용서해야 한나거나, 질병이 만연하는 상황을 그냥 두고 봐야 한다거나, 남들의 고난에 무관심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의 메시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이 겪는 어려움은 우리 모두의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나머지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들을 심판할 권리를 가졌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다른 여러 경우들에도 그랬지만, 이 경우에도 예수는 우주에서 우리의 안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이해의 세 가지 수준들을 구별했다.

가장 낮은 수준의 이하란 결과를 인식하거나 인정하는 일 없이 그 사람의 생존과 직접 관련되는 이해들을 말한다. 이것은 단기적인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지만, 가혹한 함정과 치명적인 결과들을 불러올 수 있다.

그 다음 수준의 이해가 원인과 결과, 즉 인과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해 상당 정도의 지휘권을 가지고 점잖고 문명화된 행위를 가져오는 이해다. 하지만 그가 이 수준에서 멈추고 만다면, 삶은 구조와 단전적인 논리, 지배와 판단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상자 속에서 사는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높은 세 번재 수준의 이해가 있다.

이 가장 높은 이해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의 힘에 순응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에 따르면 이 마지막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과 의식에서 크나큰 도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곳이야말로 진실로 믿음과 의식이 다스리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과 받아들임과 용서만이 아니라 굉장한 정도의 믿음과 의식이 함께 요구되는 영역이다.

내가 우리의 가장 높은 수준의 이해에만 집중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해의 세 수준 모두가 필요하고 유효하오. 생존하는 법을 배우거나 그렇게 하는 데 있어 도움을 받는 게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면 놀랄지도 모르겠군요. 인과에 대해 연수과정을 밟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무한한 전체는 선(善)의 더 위대한 유형들에 따라 삶을 지휘하거나 부수거나 제건할 전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그 사람이 사랑과 공시성을 매개로 이 권능에 조율할 때, 선과 인간의 분리는 끝나고 그 삶은 더 큰 축복과 더 넓은 이해, 그리고 불멸성의 의식으로 충만할 것이오"

사랑의 지휘에 따르는 무한한 공급의 바다에 대해 그려보는 건 언제나 멋진 일이다. 나는 1992년의 그때 이후로 금강입자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경영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좀더 의식하면서 창조할 기능성과 잠재력을 꿈꾸면서 많은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인류가 그같은 이해에 도달한다면 건강과 치유에서부터 최상의 토지 생산성과 최소 저항의 연료, 은하간 통신과 여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이 목표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1997년 11월 6일 텍사스주 버몬트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에는 '뉴욕연합통신'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과학자들, 스타트랙의 묘기 이뤄내다) 오스트리아의 한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은 한 곳에서 빛의 조각들을 없어지게 한 다음 약 9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것들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이것은 거리에 관계없이 (광자들)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리 지표의 순간이동인 '양자 공간이동'을 처음으로 입증한 실험이었다. 자일링거는 과작자들이 앞으로 2.3년 안에는 원자들 간의 공간이동을,그리고 10년 정도 안에는 분자들간의 공간이동을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내가 예수에게 인류가 이런 지식을 남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구조의 인과를 가지고는 그건 언제나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거요. 금강입자의 문제로 한다면 거의 불가능할 거구요.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은 우주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를 갖는가 아닌가에 좌우되니까요. 인간이 갈등 속에서 살면서 단선적인 인과로만 삶을 경영하는 한, 그 사람은 결코 그림 전체를 보지 못할 거요"

하지만 그의 이런 대답만으로는 내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에 나는 한번 더 물었다.

"당신도 제게 말씀하셨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이해수준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높은 책임감을 가진 과학자들이 발견한 새로운 기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맞아 악용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일들은 이미 여러 번 일어났고요"

우리 역사의 그런 현실을 인정하며 그개를 끄덕이는 예수의 얼굴은 차분하면서 고요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자상하게 나를 환기시키는 그의 얼굴에는 격려의 미소가 퍼져갔다.

"금강입자들은 사랑의 지휘를 받습니다. 오직 사랑의 지휘만요. 그래서 그것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의식하면서 이용하려면 더 높은 패러다임을 지녀야 하오, 때로는 도둑들의 뜻대로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언제나 위대한 소유의 법칙이 관철되기 마련이오. 사랑과 책임 있는 후견과 힘의 올바른 사용이 소유권을 보장한다는

법칙 말이오.

내가 선각자의 발 밑에서 금강입자들에 대해 배우는 특혜를 누리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 무한 입자들이 내게 정말로 현실적인 의미로 다가온 것은 1996년 4월26일에 뜻하지 않게 우주 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지고서였다.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 성스런 여행은

소핑몰에서 시작되었다.

브라이언과 나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서 남은 저녁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궁리했다. 책을 사러 갈까. 아니면 영화를 보러 갈까? 우리는 먼저 서점에 가서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찾아냈다. 그 책은 '베스트셀러'의 하나였고, 내가 좋아하던 저자였기에 호기심이 당겼다. 내가 그 책에 관심이 많은 걸 눈치챈 브라이언이 물었다. "당신 이 책을 사고 싶소?" 하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놀랍게도 "아니오"였다. 이건 그 책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최근 들어 외적인 상황들, 남들의 진실에 갈수록 관심을 갖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손에 잡히는 대로 입안에 갖다 넣고 싶은 욕구가 전혀 일지 않았다. 예수가 내게 준 "맑고 시원한 샘물"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 입안에서는 식힐 수없는 욕구들로 짠맛이 났다. 이런 자각을 하면서 아마도 내 가슴속의 스의치가 눌러진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내 내면에 깃들어 있던 것을

존중한 것이다.

의식의 완전한 전환이 시작된 것은 문이 열리고 그 문지방을 넘어섰을 때였다.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나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다는 것이다. 그 문을 지나간 나는 우주 속으로 굴러들어갔다. 그건 마치 평행우주가 펼쳐진 것 같았다. 내 육신은 브라이언 곁에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내가 책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자. 대신 영화나 보러가자고 제안했고, 나는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원했던 건 오로지 내 눈앞에 펼쳐진 그 파노라마를 즐기면서 내 앞에 뻗어 있는 그 낭하를 계속 걸어가게끔 놔두는 것뿐이었기에, 모든 걸 양보해서 그가 신경 쓰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긴 복도에 놓인 여러 개의 문들을 차례로 지나 위로위로 올라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들을 지날 때마다 내 존재의 울타리들과 겉옷들이 한겹씩 벗겨져나가는 듯했다. 올라갈수록 내 몸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마침내 마지막 문을 열자 하늘이 보였다. 하늘과 그 광할한 무한을 마치 생전처음으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애처럼 경이에 가득차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길은 저 멀리에서 밝게 빛나는 성운 모양의 빛에 가서 멈췄다. 그것이 별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걸 내가 안다는 점만 빼면 그건 은하수와 비슷했다. 그건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황금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입자 구름이었다. 산들바람을 타고 나는 연처럼 나는 그 입자들과 함께 떠다니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까워졋을 때, 나는 그것들이 나머지 내 존재를 기억과 잠재력 속에 보존하는 나 자신의 금강입자들이란 걸 알았다.

그것은 혼자서 하는 귀향 파티와 비슷했다. 그건 마치 나인 모든 것이 내게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하늘과 땅을 같은 한 단위로, 보면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장차 되고 싶은 나 모두를 받아들였다.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워서 그건 마치 에덴동산으로 걸어들어가, 지금까지 내가 맛보고 싶었던 온갖 맛있는 과일들을 그냥 줍기만 하면 맛보게 되는 것과 같았다. 모든 것이 빛났고, 무겁거나 딱딱하다는 느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으며, 내 모든 감각과 의식에서 그것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영혼이 다른 곳에 있는 동안, 그날 저녁의 일정에 따라 전형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는 내 몸도 함께 보면서 말이다.

그 천상의 영역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나로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두 곳 다에 머물 수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지상에 있는 내 일부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내가 느끼기에 그동안 서너 달은 족히 지났을 듯했지만, 지상의 시간으로는 실상 책방을 나서서 영화관에 앉아 있다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여행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금강입자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여행이 가능했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화실에서 예수와 함께 보내던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금강입자들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그의 외모와 관련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여기 이 3차원 공간에 있기 위해서 금강입자들을 배열한 건가요?"

예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서 자신의 물질 몸을 기억하고 있는 금강입자 덩어리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것들을 내 주변으로 옮긴 다음, 사랑으로 그거서들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입자들만으로는 빛을 반사할 만큼 충분히 조밀하지 않은 탓에 내 시신경의 지각력에 맞추어 조정하는 부가적인 요소가 필요했노라고 덧붙였다. 광선이 내 이마에 비쳐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다시 말해 내 감각능력에 더 섬세하게 조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면서,

그의 이런 설명이 신비의 일부를 벗겨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실망스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진짜로 여기 있는 것 같은데요!"

예수는 자신의 현존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면서 확언했다.

"나는 내 사랑으로 여기에 있는 거요. 다만 대다수 사람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역학을 다 거치지 않았을 뿐이죠.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림을 그릴 감각 정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보장들이 필요하니까요"

"금강입자들을 직접 인식할 수가 있나요?"

"맨눈으로 금강입자들이 내는 광채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소,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능력을 사용하길 오래 전에 그만두었지요. 사람들이 봤다는 오라, 즉 물체 주위에서 빛나는 광채란 게 바로 이거요. 이건 오늘날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각이요.

하지만 후각이 그렇듯이 한때는 모든 사람이 금강입자를 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소. 몇천 년 전만 해도 그건 친구와 적을 구분할 때만이 아니라 먹을거리와 약초를 고를 때도 사용된 일종의 생존감각이었거든요. 동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감각을 사용하죠. 새가 독초와 자기 몸 안의 기생충을 없애줄 약초를 구별할 줄 아는 게 이 감각 덕분이오. 새가 자신에게 필요한 약초열매 쪽으로 접근할수록 금강입자들은 빛을 발하지만, 해로운 상황이 있을 때는 희미해지거든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삶은 움직이는 사랑이요. 사랑은 긍정적인 잠재 영역에는 빛을 가져오지만, 부정적인 잠재 영역은 희미하게 만들거나 때로는 어둡게까지 하죠!

누구라도 끈기를 가지고 연습하면 이 감각을 다시 닦을 수 있소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플러스 자극과 마이너스 자극을 뚜렷하게 대비하는 것에서 시작하시오. 그 다음은 중간 지대의 자극들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생기면 그 더 큰 시간과 끈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 능력이 하루아침에 찾아오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거기에 있는 건 분명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그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능력이오"

나는 이것이 신비스런 지각인지 물었다.

"사실 그건 대단히 실제적인 지각이오. 하지만 현실 중에 신비로 여길 수도 있는 광휘(光輝)의 차원이 있긴 하오, 비록 그것은 그 사람의 현실이 얼마나 넓으냐에 전적으로 좌우되지만 말이오! 다행히도 이 차원에서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생명체들이 금강 기억이나 금강 잠재력으로 여전히 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소"

"그게 천국인가요?"

"대단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불멸성의 모든 체험은 천국을 건드리는 것이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시적인 삶에서 찾아내 천국이라 불렀던 것이 이것이오. 하지만 내 가르침의 중심인 영원한 법열의 천국은 신성한 가슴이 신과 다시 연결했을 때 그 가슴을 통해서 발견되죠"

내가 이 차원을 의식하면서 인식하게 된 것은 4년 후의 4월 26일이 되고서였다. 하지만 이 당시의 나는 예수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사를 떠올렸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우주의 전체 체계와 조화를 이루는지가 궁금했다. 1992년 당시에 천사들이 내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으로 금강입자들에 특별한 영향을 행사하는지 알고 싶었다.

예수는 내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그렇소. 이들은 구조의 세계 안에서움직이지 않는 존재들이요. 이 때문에 그들은 중력과 시공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신의 기적들에 충실하게 봉사할 수 있는 거요. 그들은 인간의 경우에는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의 환상들에 제한받지 않고, 금강입자들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죠"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방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리 집 고양이 구나가 눈에 띄었다.구나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화실을 찾아오곤 하는 유일한 비관계자였다. 나는 그 고양이가 자주 예수를 올려다본다는 걸 눈치채고 예수에게 물었다.

"구나는 당신을 볼 수 있나요?"

"그렇소" 라고 예수가 말하자 구나 또한 그 사실을 인정이라도 하듯 야옹 소리를 냈다. 예수는, 동물들은 인간보다 훨씬 더 쉽게 금강입자를 볼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걸 구나가 좋아하지 않았거나 ,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거요. 아마 방안에 뭔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정도만 알아채고 방을 나갔겠죠. 구나가 여기에 있는 건, 그가 내 현존을 사랑하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기 때문이오"

우리는 둘 다 애정 어린 눈길로 구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고양이는 점심으로 내어놓은 사료를 맛있게 먹는 것으로 자신의 만족감을 표현했다. 고양이의 이런 행동은 마치 자연스런 연결고리라도 되듯 우리의 다음 화제거리를 불러왔다. 만일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교환되는 금강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건 다이어트 및 음식과 관련해서도 생각해볼 깊은 의미가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몸을 양육하는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자.예수는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내게 환기시켰다.

"금강입자들을 지휘하는 건 사랑임을 잊지 마시오. 언제나 사랑으로 받아들이시오. 왜냐하면 음식물이 어떤 식으로 당신 몸에 양분을 공급할지를 지시하는 건 사랑이니까요. 당신이 먹는 음식을 축복하고, 그것을 주고 준비해준 사람에게 감사하시오. 그러면 당신의 가슴이 당신의 몸을 위해 설정한 에너지 주파수에 당신의 사랑이 맞춰질 것이고, 당신의 몸에게 그 양분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제대로 지시할 거요. 영양 상태를 더 좋게 하려면 당신의 가슴을 강하게 하시오. 강한 가슴은 몸을 더 높은 주파수에 맞추게 하여 더 효율적일 뿐 아니라. 더 많은 비타민과 무기질을 흡수하고 제조하게 해주는 저저항 형태의 에너지 활용이

자리잡게 해주죠"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비티민과 무기질을 제조할 능력을 타고났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가 자가 제조한 영양소들만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가슴의 진동수가 낮은 데 있다. 나는 예수에게 내가 식이요법에서 직면하고 있던 소화작용의 문제들에 대해 물었다.

"당신의 에너지 진동수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조할 만큼 충분히 높다면 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테지만, 아무런 지원이나 보완 없이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에는 당신 몸의 에너지 수준이 너무 낮소.

일출이나 일몰시의 햇빛을 직접 받는 것도 진동수를 높이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될 거요. 이렇게 하면 당신 몸은 화학적으로 반응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낮은 에너지 수준으로는 생산할 수없는 특정 영양소들을 만들어내도록 자극하죠. 소화작용은 에너지 진동수와 같고, 그 역 또한 사실이오. 사실 당신 몸 속의 경무기염류hard mineral traces가 갖는 대부분의 가치는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자궁에 있소, 그런데 태양은 이것을 직접 제공할 수 있소. 햇빛에는 당신의 태양층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미네랄의 재료와 불씨가 들어 있으니까요.

식이요법도 많은 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식이요법은 그에 앞선 사랑과 그것을 둘러싼 사랑을 북돋우거든요. 계절과 연령, 건강상태, 고도(高度) 등도 전체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가슴이 강해질수록, 새가 어떤 열매를 먹어야 할지를 알 듯이 당신더러 필요한 음식에 끌리도록 만들 것이오. 당신의 가슴은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따라 음식물을 처리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오.

내가 권하고 싶은 건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으로 높아지기 전에는 모든 상황에서 절제하고, 그런 절제가 감사와 사랑으로 행해지도록 하라는 거요"

나는 "고기를 먹는 게 잘못인지"알고 싶었다.

"결국에 인류는 고기를 거의 안 먹거나 전혀 안 먹게 될 거요.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 대다수는 건강을 유지하려면 웬만큼의 고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죄의식을 가지고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구요 죄의식을 가지면, 당신의 사랑이 그 영양공급 과정을 이끌고 다듬을 수가 없소.

먹이사슬은 모든 생명체들이 그 필요성이 존속하는 한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던 일종의 기정사실이오. 많은 생명체들이 자신들의 애정 깊은 봉사를 위해서 이렇게 하기로 선택했소. 그건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남용되어서는 안 되지요. 인간이 땅과 더 까깝게 살고 모두가 한 영임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하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존중했더랬소. 내가 부탁할 건 더 깊은 이해가 재연될 때까지는 자신의 생명을 당신과 나누는 생명체들에게 더 많은 친절과 감사. 절제를 보여달라는 것뿐이오.

지금 서구세계에서는 사람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있소, 이건 몸에 과전하(過電荷)의 부담을 지우고 한 영을 느낄 감수성과 가슴의 자기력을 억누릅니다. 고기를 과도하게 섬취하면 신체상의 가슴을 손상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혀 우연이 아니오. 과잉 섭취 다음으로 동물에게 가해지는 심각한 위해는 참혹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애정 없이 오로지 도살용으로만 그들을 길러낸다는 사실이오. 이런 비양심적인 행위는 자연의 금강입자들 속에 쓰라린 유산을 남깁니다. 게다가 그런 동물을 재료로 해서 만든 음식은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방식으로 기를 소진시킬 거요.

모세가 가르쳤던 코셔 요리법(유대 율법에 따른 정결한 요리법)은 전적으로 이런 요소들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것이오. 예전에 코셔 요리의 규칙 중 하나가 송아지 고기에 우유를 넣어 요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송아지 고기는 새끼소의 고기이고 우유는 어미소의 새끼에게 보내는 사랑의 정수요. 어미소의 생명물질이 그 새끼의 도살당한 몸과 섞여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이건 사랑을 모독하는 거요. 그런 요리방식을 금하는 유일한 이유가 이것이오. 모든 코셔 요리법들은 사랑과 양육이라는 개념들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런 지혜 대부분이 잊혀진 채 엄격한 격식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요. 많은 고대 지혜가 그러하듯 진리의 정수는 사라져버리고 구조만 남은 거죠.

음식과 사랑의 관계를 진실로 이해하면 건강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소. 하지만 내가 아침 저녁으로 해를 바라보라고 했던 걸 잊지 마시오. 해를 바라보면 신체의 가슴과 에테르 차원의 가슴, 그리고 영적인 가슴이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끌어당기고, 당신이 가진 것을 더 완벽하게 소화시켜줄 조화로운 공명에 착수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하면 당신의 에너지와 영양과 수면만이 아니라 그 날의 체험까지도 나아질 거요. 왜냐하면 금강입자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생명의 강이니까요"

우주의 구성요소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 *예수님이 들려주심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

예수님이 들려주심

(그는 나더러 흰 종이위에 밑변이 아래쪽에 있고

꼭지점 하나는 꼭대기에 놓이는 정삼각형을 그리게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주의 구성요소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다.

그 첫 번째가

사랑이고,

두 번째가

영(spirit)이며,

세 번째가

지금까지의 과학이 쪼개고 쪼갠 그 어떤 것보다 ,

사실 원자나 원자의 어떤 구성 부분보다 더 미세한 실재이다.

그는 그것을 금강입자 adamantine particles 라고 불렀다.)

모든 에너지 덩어리의 바탕이 되는 한

미립자 실체가 있소.

그 미립자 단위들은 자연 속에서 전적으로 보편적이고,

더 이상 나룰 수 없는 물질 존재의 기본 구성요소요.…

사랑의 근원은 아버지, 창조주 자신이요.

그는 태양이 지상 생명체에 대해 갖는 것과 똑같은 관계를

모든 존재들에 대해 갖지요.

하지만 그의 사랑의 빛은 너무나 눈부셔서 인식할 수 있는 건

그것의 후광뿐이오.

모든 사랑의 궁극 근원은 순수 사랑(Pure Love)이오.

당신들이 발산된 곳, 혹은 창조된 곳이 이 사랑에서지요.

당신도 광선처럼 그의 사랑의 한 실체요.

사랑은 신의 이름이죠. 당신의 이름 또한 사랑이구요.

이 점에서 당신들은 신과 닮은꼴로 창조되었소.

당신들은 사랑이라는 바로 그 본성의 발현물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할 것이오.…

사랑을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신의 실재와 본성을

묘사하기는 불가능하오.

그건 그냥 불가능합니다.

신성한 실재는 규정하는 자이지, 규정당하는 자가 아니니까요.…

성 삼위일체 또한 세 겹의 우주에 선행해

우주를 결정하는 성스런 신비요.

이것도 신처럼 규정될 수 없지만,

모든 존재의 현존으로 어디서나 자신을 드러내죠.

인식 가능한 현실 차원에서

"한 영(One Spirit)'이

신의 실존을 구체화할 때마다 그것은 성스럽다고 할 수 있어서,

금강입자들이

신의 의지를 형상화할 떄, 그것들은 말 그대로

신의 몸입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불멸의 당신 이름 또한 그렇구요.

참된 있음(beingness)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당신이 하거나 하지 않는 어떤 것,

주거나 주지 않는 어떤 것,

받거나 받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오.

다시 말해 그것은

상품이나 파생물이 아니란 말이오.

사랑은

풍요나 부족의 법칙을 따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오.…

이런 까닭에 사랑은

그 궁극에서 무조건이오.

그것은 어떤 존재상황에도

좌우되지 않으니까요.

나는 사람들이 요즘 들어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어 기쁘오. …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어떤 식이고,

왜 그러한지를 좀 더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소.

사랑에 조건이 없는 건 그것이 우리의 근원이고

당신 자신이어서지…, 조건 없기로 되어 있어서가 아니오.

행동은 언제나 어느 정도 조건부이기 마련이죠.

관계도 조건을 갖고, 실존도 조건을 가지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행하는 일이 사랑이라면, 이 점을 피할 방도가 없소.

그 수수게끼에 대한 해답이 되는 것이 사랑의 참된 본성이오.

우주의 가장 위대한 신비는

"있음"의 성스런 측면이 사랑이라는 거요.

가장 완전하게 그렇게 있으시오.

그러면 당신의 여생이 제대로 굴러갈 거요.…

실존의 두 번째 위대한 요소는 영(Spirit)이오.

우주 만물이 영으로 이루어져 있소.

오직 하나의 영만이 있소.

영은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 둘레에 있으며,

모든 것과 더불어 있고, 모든 것을 이루고 있소.…

드러난 창조물에서 떨어져,

순수지대에 따로 떨어져 있는 영 같은 건 없소.

물질과 영의 대립을 다룬 많은 이론들은,

참된 이해가 부족하고 구조화된 사고방식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줄 뿐이오.

분리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영은 모든 것 속에 있소.

영이 없는 곳은 없소. 영은 하나요.

영은 전체로, 연속되는 것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오.

영을

물질의 대립물로 보는 사람은

오해와 이분법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요.…

땅은 물질적이고 하늘은 영적이란 것도 옳지 않소.

영은

우리 모두와 하늘과 땅의 통일체요.

기도의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영의 단일성을 통해서지요.

꿈과 비전,

예언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도

영의 단일성을 통해서구요.

영 속에서 우리는 하나요. 따라서 영 속에서 우리는 형제애의 상태로,

공통된 자각과 추구의 상태로 통합되어 한 삶을 살고 있소.

그 추구가 깨달음과 승격이든, 어둠과 추락이든,

개인의 체험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가에 관계없이

우리는 한 영이고 개인의 체험은 모두에게 공유됩니다.

사실 다른 모든 발견들의 관건이 되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큰 성과가

통일장의 발견이었소.

의식의 비약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현대 물리학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거요.

다만 과학자들은 영의 물질 실체가 이미 발견되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오.…

"금강"이란 비할 데 없이 견고하여

구부러지거나 뚫리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오.

이것은 워낙 작아서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고,

혼재될 수 없으며 근본적이고, 절대 기본이 되는 미립자요.

모든 복합 형상들이 이 미립자에서 만들어지지요.

이 용어가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무한입자"란 용어는 그것의 기능을 표현한 것이요.

왜냐하면 이것은 차원상의 한계에 관계없이

모든 물질 실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이

처음 원자(atom)란 이름을 붙였을 때 가정했던 그 미립자죠.…

다시 삼각형을 보면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 번 보시오.

사랑 ,영 ,금강입자

꼭대기에 있는 것이 사랑이오.

그 다음에 영이 사랑에 공명하고,

사랑은 금강입자들을 지휘하죠.

모든 창조가 여기에서 일어났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개별 측면으로서

서로의 영에 대해 이야기하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요… 당신의 영, 내 영, 브라이언의 영,

우리집 고양이의 영 따위로요,

그 하나 속에 개별화된 부분들이 있는 건가요?)

단 하나의 영만이 있소. (그런데 나는 항상

당신이 방에 들어올 때면 알 수 있어요. 그건 당신의 영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 아닌가요?)

아니오, 다르게 느껴지는 건 나의 사랑이오.

우리가 각자를 확인하는 건 각자의 사랑에 의해서요.

영은 우리의 사랑에 공명하죠.

그건 마치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는 호수와 흡사하죠.

그 호수 안에 사는 물고기들 각자는

그 물 안에서 각기 다른 진동을 발산하죠.

마치 지문처럼 당신의 사랑 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영을 공명시킵니다.

당신은 이것을 그 사람의 영이 느껴지는 양태로 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뿐인 유일한 영이

그 사람에게 공명하는 방식이오. 만일 하나뿐인 유일한 영이

좀 더 긍정적이고 뚜렷하게 당신에게 공명해주길 바란다면,

진실로 당신 자신인 사랑이 되시오.

그랜다…

당신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내 사랑이오.

내 사랑은

다른 누구의 사랑과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브라이언의 사랑도 다른 누구의 사랑과도 다르게 느껴지고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어느 누구의 사랑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똑같게 느껴지지 않죠.

그래서 영이 응답할 때, 영은 각자의 사랑 하나하나를

다 독특한 자국으로 존중합니다.

이 사랑은 역으로 금강입자들을 지휘하고요.

당신의 개별성을 규정하는 건 영이 아니라

사랑이오.…

영은 나눌 수 없는 요소이고,

금강입자들도 복합 실체들을 이루는 벽돌들입니다.

그것들도 그 본성에서 백퍼센트 총체적이죠.

반면에 단수화하고 개별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사랑에만 있소.

사랑이 없다면

당신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구별되지 않을 겁니다.

글랜다…

당신 자신이 사랑이고

사랑은 외적인 상품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증명할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고 싶소?

(그럼요 !)

당신의 적들을 사랑하시오.

당신의 적들을 만났을 때,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사랑도

외적 요소들 때문이 아니라는 걸

당신은 일종의 사실로서 알고 있소.

당신은 그가 친절하거나,

당신이 그의 눈 색깔을 좋아하기 때문이거나,

그 만남으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당신의 적을 사랑하는 게 아니오.

당신의 적들을 만났을 때

당신은 자신이 사랑이고…

당신 사랑의 근원임을 압니다.

내가 당신들더러

네 적을 사랑하라고 말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오.

그렇게 하는 건 당신이 나약해지거나 수동적이 되거나,

당신이 짓밟히거나 고통 받거나,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유리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임을 당신이 배우기 위해서요.

이것을 아는 것으로 당신은 지휘권을 쥐게 됩니다.

외적 상황들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당신에게 가르칠 능력이 없소.

하지만 외적 상황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당신은 언제나 외부세계로부터 허락을 받고자 할 거요.

당신의 진짜 적은 이런 집착이오.

금강자들을 지휘하는 것이 사랑이오.

당신과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도 공유되는 많은 입자들이 있소.

그렇다면 당신들 두 사람 중에

어느 쪽이 그것들을 지휘하게 될 것 같소?

(사랑하는 쪽이에요) 그것이 첫 번째 핵심이요.

하지만 그 이상이 있소.… 그런 체험들은

당신이 사랑이란 주제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기회를

당신에게 주게 될 거요.

세상은 당신더러

바람직하고 유쾌한 결과들로 완성되는 감정을

사랑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쳐왔소.

다시 말해 사랑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요.

이보다 더 진리에서 먼 이야기는 없을 거요.

왜냐하면 원인과 지휘의 보편 수단이 사랑이거든요.

마지막이자 똑같이 중요한 핵심은,당신과 대립하는 그 사람이

전혀 당신의 적이 아니란 것을 당신이 그냥 발견해낼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이것을

인간이 "적"인 경우에만 한정시키지 마시오.…

자,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어떻게 태풍의 방향을 돌릴 건가요?…

당신은 태풍의 추동력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것과 마주해서

사랑으로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태풍을 지휘할 수 있소.

금강입자들은

사랑의 지휘를 받으니까요.

사랑은 만물의 근원이자 지휘자요.

그리고 사랑의 자녀로서 당신은 그 지휘권을 위임받았소.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이 사랑의 권능으로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소.

사랑하는 것으로가 아니라요.…

딴죽이 걸리는 지점이 여기요.… 당신은 사랑으로 있어야 하오!…

모든 상황의 심장부에서 타오르는 불꽃인 사랑으로요.

당신은 태풍을 이루는 그 힘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 그대로

그것을 진압할 수 있소.

태풍의 아름다움을 보시오.

그것을 이루고 있는 힘들의 아름다움을 보시오.

그것을 속속들이 사랑하시오.

당신이 그것과 하나가 될 때까지 그것의 필요성을 찾아내시오.

당신의 확신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소.

태풍이 그냥 옅은 공기로 흩어져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이슬비 같은 것으로 바뀔 수도 있소.

어쩌면 다른 지역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요.

설사 가장 못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을 거요.

사랑은 절대 사랑을 해치지 않으니까!

만일 당신이

벌레들을 집에서 몰아내고 싶다면,

그것들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시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알고 있소.

그들은 화학약품을 쓰지 않소.

그냥 다른 곳에서 벌레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이 금강입자들을 지휘하는 데

사랑을 사용한다면,

당신 삶에서 이뤄낼 변화들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요.…

당신이 지금껏 사랑으로 지휘했던

그 모든 미립자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당신의 것이요.

(이것이 당신이 몸을 부활시킨 방식인가요?)

물론이오.

그 당시까지 내 몸을 구성해 왔던 그 모든 입자들을

전면적으로 지휘할 권리를 준 것은 사랑이었소.

그리고 이제 그것들은 구조의 법칙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에 의해 다시 구성되었소.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구조의 죄수가 아니게 되었소.

사랑이 무엇인지 그 진실을 아는 것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날 거요.

이 새로운 존재 상태에서는 말 그대로 사랑이 당신들 가슴과

당신들의 몸 세포를 박동치게 할 것이오.

사랑이 당신들의 혈관 속 혈액이 흘러가게 할 것이고,

당신들의 생각과 당신들 주위의 그 모든 에너지,

당신들이 끌어당기는 그 모든 것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오.

(이것이 당신이 오병이어 五屛二魚의 기적을 일으킨 방법인가요?)

그렇소, 그건 비유가 아니었소. 나는 정말로 생선의 수를 늘였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해야 했던 건 한 마리의 생선을

충분히 사랑하는 게 전부였소. …

그린그랜다

[출처] [공유] 우주의 구성요소 사랑과 영과 금강입자 *예수님이 들려주심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출처] 제5장 금강입자.|작성자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