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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6장 한영 (one spirit)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6장 한영 (one spirit)

柏道 2022. 2. 11. 05:32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6장 한영 (one spirit)

사랑
2021. 10. 5.

우리의 한 영은 딱 잘라 규정하기 힘든 엄청난 주제이다. 게다가 한 영이 만물과 연결되어 있고, 만물을 지탱하고 있으며, 모든 존재의 나눌 수 없는 단일성임을 전제로 할 때, 우리가 무슨 수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시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규정이란 것의 속성 자체가 뭐가 뭐고 뭐가 뭐가 아닌지를 객관화하고 담아내고 확정하는 것인 마당에, 우리가 무슨 수로 무구한 인식을 위태로운 흉내내기로 격하시키는 일 없이 우리의 단일성에 대한 절대규정을 고안해낼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각의 보고들에 영광을 돌리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더 큰 이해를 위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는 정도에 겸허히 머물고자 한다. 다행히 이것이 우리를 성스런 진리와 직관으로 연결시켜 준다면, 그것은 크나큰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 무한한 포괄이라는 단순성에 경탄할 수 있다. 영이 없는 곳은 없다 우리의 단일성이 가진 아름다움과 영광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의 광활하고 끝없는 확장성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영을 존재의 거대한 대들보 중 하나로 칭했다. 사랑과 금강입자와 영은 우리 의식의 꼭지점들이다. 그것들이 각기 별개의 실체여서가 아이라. 창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원하기 위해 지성과 일관성을 빌려주는, 존재의 원리적 측면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세가 고대 이집트의 호사스럽고 안락한 궁전 생활을 버리고 이스라엘인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고자 한 것은 혁신적인 발상이 일으킨 권능 덕분이었다. 그 발상이란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소박한 확신이었다. 이 발상이 혁명적이었던 건 그것이 인종이나 시화집단, 부족마다 자기 신이 있다는 독점적인 분할임명식의 사고 방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또 모세는 신을 물질존재의 외적 표출로 나타내는 범신론적인 관념도 초월했다. 반드시 외적인 형상을 취하지 않더라도 신을 존재 전체의 근원으로 명확히 인식했던것,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바꾼 모세의 급진적 발상이었다.



무한한 형상과 무한한 형태의 존재들 모두가 공동의 생명 우물에서 탄생했다! 존재하는 건 단 하나의 근원적 본질인 신뿐이다! 외적인 전시물들 속에서는 거룩한 현존이나 불멸성을 찾을 수 없다. 고귀한 앎은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궁극의 단순성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만 얻어질 수 있다. 반대로 복잡한 혼란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이런 이해를 잃고 만다. 그래서 누구의 해석이 더 위해한가를 놓고 다툴 때 우리는 신성의 핵심과 권능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 발상이 인류역사에 기여한 바는 참으로 큰 것이었기에, 덕분에 이전의 세계관에서라면 생각은 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실현은 불가능했을 인류의식의 통합과 합일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예수는 우리가 다시 한번 오직 한 영밖에 없음을 깨닫는 놀라운 영적 발달의 결정적 순간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내게 권하곤 했다.









"인류가 이 위대한 자각을 지향해가면, 인류는 지금 세상에서 우세한 영에 대한 세 가지 기본 오해에서 벗어나게 될 거요. 그중 하나가 영과 몸은 별개라는 겁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오. 몸이란 사랑과 금강입자들과 영이 완전히 통합된 한 단위요. 이 셋은 전체의 나누어질 수 없는 측면들이지만 각자가 두드러진 자기 나름의 특질을 가지지요"









이런 이야기에 내가 물었다 "이 세 부분이 나누어질 수 없는 거라면서 왜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까?"









"신의 시각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소. 하지만 당신들에게는 각자 나름의 특별하고 영원한 자아로서 생명과 목적과 자각과 지속성이 주어졌소 그리고 이것을 떠받치기 위해서 각자 나름의 자각 중심과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도 주어졌소. 이 연결이 내가 성스런 가슴이라 불렀던 것으로, 당신의 사랑이 머물고 무한에 대한 당신의 자각이 시작되는 곳이오. 이 놀라운 자리는 신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성역이자 권능이오.



이 성스런 가슴을, 들어온 신의 빛이 나름의 특정 계약들을 입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굴절되는 투명한 수정 프리즘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요. 프리즘이 단순한 흰빛을 굴절시켜 무지개색 배열로 펼쳐내듯이 신의 단순한 진리들도 성스런 가슴을 통해 삶의 다양성에 적용될 수 있게 바뀝니다. 따라서 당신들 가슴의 시각에서 보면, 당신들은 이 지상과 자신의 몸을 세 가지 기본 본질로서 체험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건 올바르고 타당하고 현명한 일이오. 그럼에도 그것들은 모두 하나고, 영은 몸과 분리되지 않소.



두 번째 오해는 영이 몸과 함께 보완적인 이중성을 이룬다는 견해요. 하지만 몸과 영은 하나니, 이또한 정확하지 않소. 서구사상사는 이분법적 발상이라는 유산을 당신들에게 물려주었고, 당신들은 이로부터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발달시켜왔소.



인류는 모든 것을 대립의 관점에서 보고 있소, 인간은 낮음으로 높음을 재고, 남으로 북을 재며, 검정으로 하양을 재고, 맑음으로 흐름을 잽니다. 이런 식의 등급비교는 구별한다는 면에서 유용할 수 있소, 하지만 그런 등급은 스펙드럼의 양쪽 끝이 밝혀지고 관찰될 수 있을 때는 유효하지만, 양쪽 끝이 인간 의식의 범위를 넘어서면 쓸모가 없소.



이런 이유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무한을 다루길 기피하죠. 과학은 지금으로서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속에 같혀 있는 관계로 무한에 접근할 수가 없소.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무한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고요. 영과 물질계는 서로 반대라고 믿게 되면 통합된 영적 삶을 누릴 능력을 잃고 말지요. 이런 오해는 대단히 팽배해 있어서 사람들은 자주 '이건 영적인 문제지, 세속적인 문제가 아냐'라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영은 어떤 것과도 떨어져 있지 않소. 영은 만물 속에 있고, 만물을 이루고 있소, 이것을 알면 누구라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신들이 영의 합일성에서 제외했던 것이 무엇이든, 당신들은 그것에 심판을 내린 것이오. 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오.



마찬가지로 역사의 유산인 세 번째 오해가 있소. 땅과 가깝게 지냈던 부족 시대에는 모든 인간 종족이 여러 영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믿었소. 그런 사고방식은 자연력과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여러 측면들을 관찰하면서 합리적인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여러 측면들을 관찰하면서 합리적인 근거를 얻었지요. 그것들은 이런 발상들이 생겨난 본래의 무구한 상태와 함께 역사의 뒷전에 남겨졌더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을 거요.



하지만 이 오해는 결국 영의 다양성에 믿음의 중심을 놓은 철학과 종교들로 발전해갔소. 이들 철학과 종교는 그 영들 중 일부는 좋고 일부는 나쁘며, 영들이 세상의 지배를 놓고 서로 경재하고 연합한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이런 믿음과 달리 오직 한 영만이 있을 뿐이오.



그런데 이 유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소. 그 고대철학들은 다양성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가지고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초보적인 통찰을 이끌어냈소. 각자가 나름의 개성을 가진 개인임을 인정한 것은 인류의 입장에서 중요한 도약이었지요. 인간이 사랑을 이해하기 전에 영을 먼저 이해했기 때문에, 영이 개별성을 인식하는 토대가 되었던 거요.



지금은 더 나은 이해를 가지고 당신이 개인인 것은 자신의 사랑에 의해서이고 한 영은 개개인의 사랑에 따라 그 사람에게 독특하게 공명한다고 좀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이란 존재를 구벌해주는 것은 당신의 사랑 혹은 그것에서 기인한 상황이고, 당신의 품성을 형성하는 건 당신이 지닌 사랑의 성격이요. 한 영은 절대 나누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에 공명하죠"









우리가 말한 영은 성 삼위일체의 한 측면으로 신학적인 성령이 아니었다. 성령강림절이 이 논의에 무슨 영향을 미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부담 없이 편히 작업할 수 있도록 평온하고 부드러운 교류를 유지하는 데 자상하고 사려 깊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실제 삶과 그토록 잘 어우러지고 그토록 인간적이었다는 이측면이야말로 그 메시지들의 특이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성령이 그가 말하는 한 영과 어떤 관계이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기쁜 얼굴로 설명했다.









" 그 둘은 같은 거요. 경험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요. 존재의 가장 위대한 신비 중 하나는 한 영이 신의 개성과 의지와 권능 자체를 인격화할 수 있고 인격화한다는 사실이오. 마찬가지로 성령도 위대한 회복력을 쏟아내는 강력하고 성스런 에너지 회오리요. 성령을 입는 모든 것이 정화되고 새로워집니다. 영적 재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일컫는 것이 그런 순간들이오. 또한 성령은 온화하고 양육하는 신의 현존이어서 언제라도 자문을 구할 수 있소. 하지만 생에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성령은 모든 창조물, 존재의 모든 측면들에 배분된 신의 무한 권능이 내면에 깃든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되죠"









예수가 깊이 있게 다룬 쪽은 영의 두 번째 측면이었다. 왜냐하면 생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한 영을 아는 방식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예수는 통합된 영성이란 개념을 강조했다. 기술적으로 말하더라도 우리의 한 영은 모든 것이 영원히 섞이고 상호작용하면서 공존하는 일차 모체이다. 우리의 합일성을 포용하고 방어하는 존재로서 손상되거나 더럽혀질 수 없는 모든 존재의 모체가 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위대한 펼침이 지닌 역설은, 어떤 감각, 어떤 수단으로도 영을 충분히 파악하기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규정상 본질이란 건 잠재력의 파동과 차이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영과 하나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식perception 보다는 오성understanding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는 자리요"









이것은 우리가 결정적인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수에 따르면 '불가분성은 영의영역인 반면, 가분성은 입자들의 영역"이다.











오성





[ 悟性 , understanding ]





















외국어 표기

Verstand(독일어)



개념을 만들고 판단하는 사유능력(思惟能力).



정신의 자발적 능력으로서의 오성은 수동적 감성과는 구별되지만, 감각적 직관에 의한 촉발을 필요로 한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사유작용은 판단작용으로 나타나고 판단의 내용이 개념적으로 규정됨으로써 경험적 인식이 성립되는데 이 인식능력이 오성이다. 오성은 주어진 직관내용을 종합 통일해서 합법칙적(合法則的)으로 정돈하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규칙의 능력이라고 한다.

가능적 경험의 선천적 제약으로서 전제되는 순수오성 개념(범주)과, 선천적 원칙의 근원으로서의 오성이 「순수오성」이다. 이 순수오성은, 초경험적「이념」(理念)의 능력으로서의 「이성」과 구별된다. 순수오성의 핵심은「선험적 통각」인데 주어진 내용이 가능적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선험적 통각에 의해서 통일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경험의 형식이 순수오성에 근거하지만, 오성은 감성과의 결합에서만 인식을 성립시킬 수 있기 때문에, 순수오성의 선천적 산출은 가능적 경험의 대상(현상)에 대해서만 타당하다. 즉, 현상의 통일적 연관으로서의 「자연」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법칙은 순수오성에 의해 수립된다.



이러한 칸트의 생각에 대해 헤겔(G.W.F. Hegel)은, 오성은 사물을 고정시켜 타자와 구별할 뿐 타자와 내적 연관 및 타자에로의 필연적 전화(轉化)의 이해로는 나가지 않는 추상적 개념의 능력이라고 본다



"입자들은 가분성이라는 바로 그 성질 덕분에 검토되고 규정될 수 있지만, 영은 그렇지 않소, 입자란 잠재 에너지의 지속적인 흐름에서 나타나는, 별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발현이오. 한 예로 금강입자들에 비해 더 크고 복잡한 원자의 경우를 봅시다. 원자를 구성하는 구조의 성질이 한 원자를 다른 원자들과 구별해주지 않소? 마찬가지로 초원에 놓인 한 바위는 다른 바위와 구별 됩니다. 이처럼 모든 물질 소재들은 개별성과 가분성이라는 특징을 지닙니다. 그 물질 소재들의 규모와 상관 없이 말이오"









입자들의 가분성과 영의 불가분성에 사랑을 보태면, 장엄하고, 웅대한 창조의 삼각형을 얻을 수 있다. 불가분의 무한한 잠재력이 사랑의 안내로 가분성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가분성은 바다의 파도처럼 다시 단일성에 굴복한다. 이런 게 다양한 시각을 가졌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아닐까? 이런 게 많은 구성원을 가졌지만 한 가족으로서 같은 몸인 우리가 아닐까? 이런 게 모습은 다종다양하지만 동일한 인류의 형제자매로서 우리가 아닐까? 내 마음이 이런 식으로 끼워맞추기만 할 수 있었던 것을 예수는 시적으로 요약했다









"우주 전체를 사랑이라는 위대한 마스터가 안무하는 가분성과 불가분성의 멋들어진 춤으로 여길 수도 있소"









당신인 사랑은 가분성과 불가분성의 이 위대한 교향곡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이다. 예수의 설명은 그런 우주 선율들을 멋지게 교향악으로 작곡해낸 것과 흡사했다.









"우주는 영의 단일성을 매개로 합일 속에서 유지되는 겁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모든 것이 속하고 나름의 자리를 갖는 맞얽힌 관계체계 안에서 작동하고요. 영은 불가분이어서 상호교류의 궁극 매체가 됩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영의 본질을 매개로 온갖 생각과 의도가 서로 전달되는 거죠. 인류가 이 점에 눈뜨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하고 비전을 보고, 텔레파시를 나누고, 감정이입을 하고 예전에 공이라 불리던 것 너머에 이르고, 공같은 건 전혀 없다는 걸 아는 재능을 갖게 될 거요. 예전에는 고독이 있었다면, 이제는 공간이 사랑과 연속성으로 가득함을 아는 데서 오는 평온이 있을 거요.



존재의 그 장대한 삼각형 안에서 사랑은 금강입자들을 연결하고 지휘하는 반면에, 영은 사랑에 공명하면서 모든 소재들을 완벽한 합일로 연결합니다. 창조의 이 무한한 순환 속에서 각각이 전체의 일부이면서도 각기 다른 세 가지 작용을 하는 거죠. 영과 물질의 결합을 통해서 당신은 가분성이 불가분성으로 바뀌는 그 미묘하고 결정적인 지점을 확인할 수 있소."









두드러지게 명쾌한 얼굴로 예수가 덧붙였다









"불가분성이 가분성으로 바뀌는 지점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새 천년에 들어설 과학이 이해해야 할 결정적인 관건이오. 이런 진보를 가로막는 지금의 가장 큰 장애는 불가해한 미지를 배경으로 가분성의 영역을 연구한다는 데서 생깁니다. 나머지는 수단과 앎이 이 나머지 영역에 다리를 놓을 때 이해될 거라고 전제하면서요. 하지만 그것의 불가분성이 인정되고, 그런 다음 불가분이 가분이 되는 전환 지대에 연구의 중심을 두어야 그것이 이해되리라고 보는 게 더 이치에 맞소. 분리의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불가분의 차원이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소? 게다가 가분성과 불가분성 사이에 놓인 다리를 인식하려면 사랑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실험 절차는 더 큰 관점에서 여과하는 것이 필요할 거요"









이건 정말 일종의 단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확하게, 사랑은 존재하려는 충동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방향성 정도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작용점으로까지 스스로를 넓혀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암시한 것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가 사랑의 작용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밝혀준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이 순간의 예수는 교환 및 교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적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교류의 유형들을 보더라도, 우리를 묶어주는 영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교류할 수 없소. 교류란 그 성격상 내가 말하는 것, 다시 말해 내 제안이 당신에게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내 목소리는 교류가 아니라, 무의미한 잡음에 불과할 거요.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우리의 교류는 당신이 지금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내가 제안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거요. 보다시피 교류란 가분성과 불가분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미묘한 결단이오. 우리 사이의 이해는 가분성이 불가분성이 되는 지점에서 일어나죠. 이 지점에서 교류는 하나의 이해로부터 다른 이해로 극적으로 전환됩니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오. 우리를 연결하는 사랑이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줄 수 없고, 당신은 내게서 받을 수 없소, 모든 의사교류의 만능 촉진제는 우리 자신인 사랑이오"









"그 교류란 게 언제나 직접적이고 분명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사랑이 이끄는 은연 중의 교류로 가득한 것이 한 영인가요?"









예수는 이런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암시라도 하듯 만족스런 얼굴로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물론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순간에 내가 바랬던 건 예수의 확인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예수의 표정엥서 그런 확인을 넘칠 만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몇 년 후에 나는 사랑의 권능이 막연하게밖에 서로를 알지 못하는 두 영혼 사이의 교류를 촉진시켜준 감동적인 사례 하나를 경험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의 현존이 어떤 식으로 상호 공명의 토대를 닦는지 더 잘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포트 워쓰 서쪽에 있는 우리 화실 건물에서 였다. 작은 판자집식으로 지어진 우리 건물은 복잡한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로 옆에 타코벨 식당의 드라이브인 창구와 잇닿아 있었다. 두 건물 사이이에는 축대가 있어서 우리 화실은 차들이 드나드는 길 높이보다 1미터 정도 아래쪽에 앉아 있는 꼴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두 집을 나누는 화분 담에서 덜어져나간 몇개의 벽돌을 다시 고쳐놓고 있었다. 유동성 베기가스와 자동차 엔진소리와 고출력 가세트들의 소음을 참아가면서 일하는 동안, 나는 자동차에 탄 재 주문할 차례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가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어색하고 어설픈 동작으로 일하고 있었고, 무기력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거리는 도시 상류층들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긴 했지만, 빈민가와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덕분에 내가 서 있던 곳의 옆과 머리위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행렬은 그런 인구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고전음악이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BMW에서 느슨해진 환충장치와 시끄러운 머플러를 가진 1965년형 시보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자동차 전시장과 흡사했다.



갑자기 나는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끽끽거리는 괴상한 소음에 놀라 일손을 멈췄다. 그 차의 라디오 음량은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였는데. 더 나쁜 건 내가 특히나 좋아하지 않는 하드록 방송국에 채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하던 일에서 도피처를 찾기로 작정하고 그 차가 지나갈 때까지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렇게 어거주춤한 자세로 있자니 나는 자신이 굴 속에 웅크린 토끼처럼 느껴졌다. 눈의 초점을 맞출 애정의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건 그런 상황에 노랄 숨을 곳을 찾아 달아나는 야생토끼들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귀여운 동물들과 동병상련의 애정을 느끼는 순간,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차에 타고 있던 그 남자가차의 엔진을 회전시키길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라디오 채널을 서정 음악에 맞춘 다음 음량까지도 낮췄던 것이다! 그는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이런 상태로 있었다. 그가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채널을 맞춘 것은 "부릉부릉"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차를 출발시키고 난 뒤였다.



이 일은 예수의 가르침을 내가 직접 경험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영은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가르침 말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온전한 전체이고, 따라서 우리와 신과의 성스런관계이며, 우리가 서로간의 형제애에서 느끼는 유대감이다.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당시. 나는 예수에게 이 개념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예수는 제안했다.









"잠시 쉬면서 이렇게 해봅시다. 마음과 몸을 편히 하고 쭉 뻗어 이완시켜봐요. 그 다음엔 숨을 깊게 쉬어 자신을 편안히 받아들이시오. 자신을 신의 한 측면, 한 단위라고 상상하시오. 이제 당신의 가슴과 마음과 영혼을 할 수 있는 한 넓게 확장하여, '존재 전체'를 가만히 응시하시오. 이렇게 가만히 보는 동안 자신에 대해 편안하게 여기고, 자신이 한 존재의 한 단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당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전체를 받아들이고 그려보시오! 당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간에 그것은 한 단위로서의 당신과 영원한 전체를 대변하는 한 영 사이에 영원히 존재하는 대화요. 다시 한 걸음 더 나가 존재의 영원성 속에서 '한 존재'의 개개 단위들이 똑같이 '존재 전체'와 영원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태를 그려보시오. 단위들과 전체와의 그 대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숨이요. 주고 받고 말하고 듣고, 가르치고 배우고, 나아가고 물러서고, 나타나고 사라지는 리듬이 있을 뿐이지, 분리는 없소"









내가 이런 예수의 지시대로 했을 때, 나는 한 영이 어떤 분리도 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당양한 사물들, 다양한 삶의 측면들에 어떤 식으로 공명하는지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어머어마한 다양성 속에서 우리 각자가 나름의 선호와 지향을 갖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예수는 이것이 그냥 당연한 일이며, 우리의 개성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따금 우리는 에너지가 진동하는 듯한 방식으로 자신과 남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화를 알아챌 수 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좋은 파장과 나쁜 파장'이란 속어는 이런 깨달음을 표현하는 구절이 되어왔다. 아이들이 뭔가가 '좋은 파장'을 갖는 것으로 여길 때, 그들은 뛰어난 관찰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만물은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파장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들의 공명이 그것들이 건드리는 것들 모두와 양립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당신은 영의 공명으로 어떤 것의 성질과 의도를 알 수 있소, 이 공명은 그 근접도에 따라 다른 것들과 결합하여 멜로디, 즉 우주 노래들을 작동시킵니다. 다른 어떤 예술형태보다 음악이 영혼을 영적 교섭으로 더 잘 이끄는 이유가 이것이요. 사실 이건 미(美)의 다른 측면들에도 똑같이 해당되죠.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영의 단일성 내에서 특정한 조화와 공시성을 대변하는 것이거든요.



아름다움은 영적인 길을 따라 놓인 표지판이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당신은 거기서 진리를 찾아낼 수 있소,



미(美)는 당신이 삶 전체에 걸쳐 영의 지침을 따르면서 조화롭게 걷고 있음을 말해주는 메시지와 같은 거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예술가로서 내 관심을 촉발시킨 탓에 나는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는 데 특히나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직관과 아름다움을 보도록 합시다. 당신도 알다시피, 예술이란 일종의 직관적 과정이오. 그 예술형태가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조각이든 관계 없이 예술가는 직관적 발견과 표현을 자신의 주요수단으로 삼지요. 이 면에서 직관은 구조가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거나 제한하지 않을 때 가장 잘 작동하고요, 하지만 방향성 없는 직관이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낳는 경우는 거의 없소. 그래서 아름다움과 직관은 서로에게 가장 완벽한 짝인 거요.



직관을 안내하는 불빛으로 아름다움에 맞먹을 수 있는 건 없소.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구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질서와 잠재력을 불러일으키고 다듬는 사랑의측면이니까요.



직관이 펼쳐지는 의식을 위해 길을 청소할 때, 미(美)라는 표지판은 성장하는 의식이 현실 상수들에 집중하도록 해주죠 그러고 나면 진리가 인식되고요 진리와 아름다움은 둘 다 우주의 상수요 하나는 계시의 상수고, 다른 하나는 발현의 상수죠.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면 예술가는 언제나 항상성의 유형이 자신앞에 나타날 때까지 환상과 혼란, 예비적 표현들로 가득한 정글안을 뒤지고 다니죠. 이것이 그의 가슴과 행동들이 탄생시키고 있는 이미지나 소리, 혹은 개념입니다. 무심한 구경꾼으로 있었다면 특별한 어떤 것도 보지 못했을 상황에서, 그는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알아보듯 자기 앞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죠 지금까지 예술가들은 펼쳐져가는 발현 안에서 상수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름다운 건 바로 이것이요. 나중에 가서 다른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도 이것이고요.



당신들은 예술의 역사 속에서 이 순환을 보아왔소, 처음에는 아름다움의 한 형태가 나타나 문화로 성장해가기 시작하죠. 그러다가 그것은 모방을 고무하고 자극하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서 지속되다가, 마침내는 표면이나 장식하고 삶의 피상적 측면들을 좀더 아름답게나 유치하게 장식하는 닳고 김빠진 공식으로 전락하죠. 그런데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신선한 인식들이 새로운 미적 자각의 극적인 사례들을 불러오는 겁니다.



봄날 부화하는 병아리들처럼 이 혁신적인 감수성은 기존 우상의 베일을 벗기고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삶에 불러옵니다 그런 사례들이 처음에는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흔한건 그것을 이전의 미감(美感)으로 보기 때문이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건 대개 이전 상황들이 내뿜는 예견할 수 있는 광채거든요. 하지만 미의 진화를 이끌고 부양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살아 있는 진실을 계속되는 직관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미의 본질임을 알죠.



사고방식 또한 하나의 예술형태요. 아마도 인간의 예술형태 중 가장 섬세한 형태... 그래서 이것도 직관과 아름다움이 동반할 때 가장 잘 작동합니다"









생각할 때, 우리는 의식을 발전시키고 확장시켜줄 발상과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한 영같이 광대하고 막연한 주제를 다룰 때는 우리의 생각을 펼치고 검토하기 위해 대안적 시각을 제공할 비교 개념들을 갖는 것이 특히나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비록 우리가 영을 규정하지는 못해도, 그것을 그려보고 그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소, 이런 노력에서 한 영을 가장 가깝고 가장 효율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비교 대상이 아마도 무한일 거요. 영처럼 무한도 한계를 허용하지 않소. 왜냐하면 무한은 궁극의 대소와 궁극의 질, 궁극의 잠재력이니까요. 무한은 있음직한 차원들에 대한 추정이 아니라 우주의 잠재력에 내재된 작용과 집행의 한 측면이요. 그래서 무한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포괄할 수 있는 구조란 건 없소"









최근까지도 과학은 무한을 그 성질상 측량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신비한 것으로만 규정하고 도외시해왔다. 또 분석적이고 귀납적인 철학 구조들에게도 무한은 도전과제였다. 한 영처럼 무한도 분리가 아닌 통합 요소를 간주되어야 할 태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철학과 과학이 통합이라는 좀더 결정적인 문제로 눈길을 돌림에 따라 무한이라는 주제는 탐구와 숙고를 자극하는 여러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다. 예수에 따르면 이런 새로운 자각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우리 의식 내에 유연성과 수용성을 정착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한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를 앞에 두고서도 비슷하게 두뇌 유연 체조가 확장된 시야를 갖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자, 이제 '큰 것'을 향해 떠나는 우주 여행을 시작했다가 방향을 바꾸어 '작은 것'의 영역을 탐구해보자.



우리의 탐험을 시작하려면 먼저 10제곱한 수의 100제곱한 수인 구골플레스란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천문학에서 나온 엄청나게 큰 수이다. 그렇다면 구골이란 무엇인가? 비록 구골플렉스googolplex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수이긴 하지만 이 또한 대단히 큰수이다. 구골googol이란 수학용어는 숫자 '1'에다 0이 백개 붙은수, 즉 10의 100제곱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수인지는 다음 경우를 생각하면 실감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아르키메데스는 10의 100제곱보다 훨씬 더 적은 10의 63제곱의 모래알이면 그 당시 알려져 있는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적어도 각각 평균 1000억 개 정도의 별을 포함하고 있는 1000억 개의 은하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다가 별과 행성과 암흑물질과 여타 화합물들을 구성하는 전자와 양자, 중성자를 비롯한 존재 입자들의 그 끔찍한 수를 합해보라. 그렇게 했을 때의 수는 10의 86제곱이 되지만, 이것도 아직 구골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이다. 하지만 150억광 년의 지름을 가진 우리 우주 전체가 아원자 입자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그 사이에 빈 공간이 없다고 하면, 입자들의 전체 양은 10의 132제곱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건 구골보다 좀더 큰 수이다!



여기에 비교했을 때 구골플렉스는 얼마나 클까? 구골플렉스는 10을 10제곱하고 나서 다시 그것을 100제곱한 수이다! 숫자1 뒤에 붙는 동그라미(0)를 인쇄하는 데만도 150억 광년에 달하는 우리 우주 전체를 뒤덮을 종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구골플렉스를 다시 100제곱한 슈퍼 구골플렉스라는 것도 있다. 지구 위의 어떤 의식적인 마음도 이렇게 엄청난 크기의 수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연습을 하는 이유는 당신 마음의 경계를 부수는 동시에 수퍼 구골플렉스를 규정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방금 묘사한 한 중력 단위의 가설적 크기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중력의 한파동이다. 그런데 한 파동이 있다면 더 많은 파동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한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한 영은 이것 전체이자... 그 이상이다!



이번에는 작은 쪽으로 달려가보자. 우선 원자핵이 얼마나 작은지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야구공이 지구 크기로 확대된다면, 야구공의 원자들은 행성 전체를 뒤덮고 있는 버찌열매 크기 정도가 된다. 다시 버찌 크기의 원자르 대형아구장만한 크기로 확대하면, 그제서야 그 핵은 모래알만한 크기 정도가 된다. 이것만으로도 정말 작지만, 금강입자의 작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다.









"무한은 방향이나 크기를 넘어서 있소,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가까운 현실측면들을 관찰하고 나서 밀도의 변화도와 여타의 진행도를 감안해서 무한을 추정하는 경향이있소. 당신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 앞의 물체들은 대단히 밀도가 높아보이죠. 그런 다음 시야를 지평선으로까지 넓히면, 물체보다는 공간의 비율이 훨씬 더 커지게 되고요. 다시 당신의 시야를 밤하늘로까지 넓히게 되면, 공간이 커지고 대신 밀도는 줄어드는 듯한 인상을 훨씬 더 강하게 받게 됩니다. 이건 물론 단지 시야와 거리 때문에 그럴 뿐이죠. 하지만 그런 인식이 원시인들에게 가져온 자연스런 결론은 공간은 저 멀리에 존재하고 영은 그보다 더 너머에 있으리란 것이었소. 이와 반대로 가까운 것은 빽빽하고 단단하게 보였기에 그들은 이것을 물질적인 것이라 여겼소. 그리고 영과 물질의 중간쯤에 인간인 자신들을 놓고요. 말하자면 인간이 처음으로 인식한 무한이 이런 점감(漸減)하는 범위의 밀도였던 거요. 비록 그것이 인간의 시각 때문에 그 안에 한정되긴 했지만요. 두 극단 사이에서 관점을 이렇게 고정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계속되고 있죠.



인간이 영적인 삶을 향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뚫고 지나갈 밀도층이 달라진다는 건 사실이 아니오. 영은 차원의 한 측면이 아니라 존재의 통합된 부분이오. 한 영의 단일성 안에서는 밀도에 대한 당신의 인식과 관계없이 그 모든 밀도 인식들이 수많은 가능성이라는 배열 속으로 사라지고 말죠. 신과 함께 있고 자신의 참자아로 돌아가려 할 때, 당신은 삶을 끌어올려야 할 다양한 밀도의 고리들과 밀도 수준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오.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충족시켜야 할 요구조건들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황들로 삶에 접근하죠. 그들에게는 삶이 계속해서 구조와 가장 많이 싸우고 갈등하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강하게 유지하는 경우가 많죠. 자신들이 구조를 지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구조와 무한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완전히 고정시킨 거죠.



삶을 밀도에 대한 인식으로만 고정시키는 사람은 에너지를 힘으로 인식하기 마련이오. 과학 역시 에너지를 무엇보다 힘으로 여기는 지점에 아직 머물러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밀도를 중시하는 삶의 지향과 딱 맞아떨러집니다. 에너지의 특정량을 밀고 누르는 데 필요한 힘의 양으로 보는 거죠. 이 경우 힘은 밀도에 비례하여 작용하는데. 그 때문에 압력이 가해지면 쓰레기 압축기의 경우처럼 밀도가 더 커지죠. 하지만 에너지에 대한 이런 식의 설명에서 가장 큰 맹점은 밀도에 대한 인식 대부분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거요. 물질 존재의 98%이상이 그냥 공간에 불과한데, 공간은 힘에 반응하지 않소! 따라서 이런 식의 접근법이 갖는 한계는 자명할 수밖에 없소.



사랑의 영향에 따라 훨씬 힘들이지 않고 자력으로 삶을 끌어와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반응하는 건 공간이요. 이런 이해를 가지면 더 흥미로운 쪽은 밀도가 아니라 공간이 되죠. 힘은 무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생각과 과학과 인간의 행동조례들이 힘에 근거하는 한, 무한을 계속해서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거요. 힘과 밀도는 짝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조건짓죠. 자신의 인식을 힘에 두고 있는 사회는 아주 협소한 범위의 영향력밖에 행사할 수 없습니다.



힘은 예상 가능한 한도 내에서 아주 가깝게 근접해 있는 상황들에만 영향을 줄 수 있소. 그건 힘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영향력 자체를 상쇄시키는 밀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요. 이건 입자와 사람, 어느 쪽에나 해당됩니다.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원으로 표현하면 그 원주 위에서는 언제나 저항이 일게 마련이고, 그 저항은 영향력의 한 원이 다른 밀도의 원과 만날 때, 갈등으로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지금 순간 지구 행성의 결정적인 문제로, 그런 상황은 힘과 밀도가 더 이상 행위와 상호교환의 언어가 아닐 때까지 계속될 거요.



인류는 지금 그 운명의 모서리에 위태롭게 서 있소.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인류는 몰락과 상당한 파멸을 경험할 거요.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대면이오. 선택권이 주어질 것이고, 선택이 내려질것이오"









다가올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수의 눈은 기대감과 낙관으로 반짝였다. 예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에너지와 산업과 인간행동 영역에서 힘의 영향이 주어들수록 삶이 덜 힘들어지리란 걸 믿도록 나를 북돋웠다. 반면에 나는 강력 문화인 하이테크로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공상과학 영화들이 비쳐주는 류의 이미지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가 대답했다.









"그건 현재 기준들에 근거해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미래에 불과하오. 산이라는 패러다임의 '아침 장면'이 '오후 장면'이 어떨지를 정확하게 예고해주리라고 가정하는 건 대단히 흔한 실수 중하나지요. 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건 더 많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소! 그들은 이제부터 일어날 변화를 이해할 수 없소.



내가 장담하지만, 힘을 근거로 한 항공공학으로 우주를 가로질러 여행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오. 힘이 효과를 발휘하는 건 한정된 특정 범위 안에서 만이오. 힘에 근거한 역학이 달이나 화성, 심지어 태양계 전체가지도 가보겠다는 열망을 가진 우주 프로그램을 감당할 수는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이 힘에 근거한 사고방식과 힘에 근거한 공학을 가지고 은하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건 아니오.



당신들은 얼마 안 가 고도로 발전된 기술을 가진 세계로 들어서게 될 거요. 비로 그것이 당신들의 지금 문명이 의지하고 있는 고마찰, 고저항의 공학에 근거하지는 않을 테지만요"









이에 대한 내 반문에 뒤이어 나온 그의 대답은 그가 다른 행성들에 존재하는 문명에 대해 했던 유일한 언급이었다.









"당신은 다른 목장의 양들에 대해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여기에는 지구 너머에 있는 목장들도 들어가는 건가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있는 건가요?"









내가 예수에게서 아주 약간이나마 초조감이란 걸 느낀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다고 심하게 당황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건 마치 네 살짜리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아기는 어디서 와요?"라고 물었을 때 아빠 얼굴에 나타나는 보기 좋은 약간의 당혹감과 흡사한 것이었다. 아빠는 실제로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줄여서 말하고 싶지만 그러하다고 조금이라도 잘못 전달하고 싶지는 않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오. 당신이 추측하듯이 다른 어딘가에 형제자매들이 있소, 하지만 무릇 형제란 건 가족 구성원으로서 나름의 자격을 가지고 함께 어른이 되자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관계요. 이 시기에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게 답이 아니오. 당신들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기 위한 답은 서로를 바라보고 신을 바라보는 데 있소.



당신들의 공상과학 영화들은 많은 점에서 당신들을 잘못 이끌어 의식이 기술을 따라간다고 믿도록 만들어왔소. 그런 영화들은 그냥 기술 발전만 가속하면 한없이 뻗은 우주속으로 구조화되고 양극화된 의식을 펼쳐갈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죠. 그렇게 되면 의식도 어느 정도 성장하게 만들 수 있다고요.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요. 하지만 이보다 진리에서 먼 이야기는 없소 의식이 기술을 불러오는 거지, 기술이 의식의 성장을 불러올 수는 없소



기술의 더 큰 도약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의식이 바뀌어야 하오. 당신네 행성과 비슷한 행성들은 대양의 섬들과 같소.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섬들 말입니다. 반면에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문명들에게는 힘을 쓰지 않고도 공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의식이 있소. 공동의 합의에 따라 교류와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면이라면 당신들 세계보다는 그들이 훨씬 더 클 것이오. 은하간 연결의 법칙은 상호주의요. 당신들이 당신네 문명과 비슷하거나 뒤떨어진 그런 문명들에 다가갈 수 없듯이, 그들도 당신들에게 다가올 수 없소. 그 각 문명들사이의 거리는, 힘이 포기되는 시점까지는 이것이 계속 사실로 남아 있을 만큼 충분히 떨어져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은하 공동체에 혼란과 악행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마시오. 자유의지란 건 언제나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보편적으로 참인 규칙이 있으니, 당신들은 마음 편히 그것에 의지해도 좋소. 그 규칙이란 당신들을 해칠 수 있는 존재라면 당신들에게 다가올 수 없고 당신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존재라면 당신들을 해치지 않으리란 거요. 창조주는 그의 위대한 지혜로 생명체를 가진 모든 행성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만큼 충분히 거리를 두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았소.



이것은 진실로 발전되 모든 기술들은 공시성의 원리와 전체론적 유형화, 삶의 역동성에 대한 존중들에 근거한다는 부차적인 사실과 결부되죠. 오로지 정복하기 위해서 빛의 속도를 넘어서 여행하는 침략자들이란 발상은 완전한 허구요. 그 정도의 기술에 이르기 위해 요구되는 공시성만 해도 갈등에 근거한 의식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소.



모든 사랑의 존재들은 한 영을 통해서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소, 이것은 이따금 직접 인식되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받는 사람이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공명이나 조화 정도로만 느끼는 경우가 훨씬 더 많죠"









"영적 교감이라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 공명이란 게 뭔지, 그것들이 우리가 좀더 연결된 삶을 살수 있도록 어떻게 돕는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서로 연결되는 공명이 어떤 건지 더 잘 이해하려면 넓은 호수를 떠올리면 됩니다. 이른 아침 잔잔하기 그지 없는 그 호수 옆에 돌 두 개가 놓여 있소. 그런데 '사랑'이 걸어와 그 두 돌을 주워서 물속에 던집니다. 하나는 호수 왼쪽으로, 하나는 오른쪽으로요. 찬물에 가서 풍덩 하고 부딪히는 기분이 상쾌하긴 하지만, 그 두 돌은 잠시 서로를 잃어버렸다고 느끼겠죠. 그래도 자신이 몸을 던져 물 표면 위에 넓게 퍼져가는 동심원들을 만들어냈다는 걸 알게 된 두 돌은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비록 아직은 외로운 퍼짐이긴 하지만요.



그러다가 갑자기 한 돌의 동심원이 다른 돌이 만들어낸 동심원과 교차하게 됩니다. 두 돌은 환의에 가득차 다른 돌을 찾아냈다는 걸 깨닫지요. 마침내 그들은 다시 한번 교감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 그들은 역적으로 상대방을 알아보는 법을 알게 되었기에, 그들의 교감은 더 큰 확신에 차 있죠. 이런 확신을 가진 그들은 이제 두번 다시 상대를 잃는 법이 없죠"









이 이야기는 분리라는 주제에 전혀 새로운 차원을 보태주었다. 아마도 사랑은 영적 분리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돌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던졌을 것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물에 만들어 내는 물튀김들은 당연히 우리 자신인 사랑과 공명할 것이고, 우리의 동심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양태로 만날 때까지 무한을 향한 퍼짐은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예수가 떠난 후의 상실감을 어떻게 참아냈느냐고 자주 묻곤 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다. 우리가 나눈 경험에서 얻은 것들 중 내가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어디서나 그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예수는 "당신은 내 사랑에 의해 나를 알아볼 것이오". 영은 내 사랑에 공명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신체 한계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니, 물로 그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다. 나는 자주 그의 현존을 느낀다. 당신 지금 이 순간 나의 현존과 더불어 그의 현존을 느끼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듯이, 이런 자각으로부터 나는 내가 사랑했던 고인들의 현존을 느끼는 법도 배웠다. 지금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자주 그들과 함께 있다. 나는 이제 신체적 의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수 속으로 던져진 그 두 돌은 서로를 영 속에서 찾아냈기에 서로를 진실로 발견함으로써 끝난다. 우리가 한 영에 눈뜨게 되면 우정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필시 더 크고 새로운 의미를 띨 것이다. 참으로 많은 연결과 재연결이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도 우주를 가로지르면서까지! 이것은 기도나 명상으로도 일어날 수 있고, 공감의 순간들에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다.









"연결과 재연결이 봄꽃들처럼 만발할 것이오. 그것들은 회색빛 겨울로부터 찬란하게 빛나며 싹을 틔울 것이오. 영의 무한성은 우리 모두와 공명할 잠재력을 가진 바다와 흡사합니다 구조의 벽과 장애들을 제거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위대한 매체를 통해 시간이나 거리에 상관없이 교제할 수 있소, 그 안에는 기도와 교감과 예언의 권능이 들어있소.



하지만 한 영은 신과 우리 모두의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하오. 누구나 그것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그것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지기 방어의 울타리 내에서) 영을 사용하면 오히려 자신이 큰 해를 입을 수 있소. 이건 결국 신에게서 분리되게 만들기 때문이죠.



사랑의 권능을 잊고 전체 영을 남용하거나 무시하는 존재는 자신의 나침반을 잃고 자기 고향의 이름을 잊고 맙니다. 영은 남에게 자비롭지 못하거나 해롭기까지 한 소망을 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닫힌 원을 만드는 경향이 있소. 자신들이 베푸는 사랑에서 상대방을 배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줄어들게 만드는 것이고, 상대방을 영에서 떼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리와 단절을 자신의 운명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형제애와 안전지대를 제공하는 영의 원들 안에 살고 있소. 그들이 그 안에서 아무 해도 입지 않으려면 영의 전체성 또한 마찬가지로 존중하고, 그 영의 원을 불가분의 영역 안에서 구조와 분할을 기도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삶에서 느끼는 기쁨과 선호를 함께 나누며 서로를 북돋우는 사람들의 원을 가져도 괜찮다는 뜻이라고 여겼다. 물론 우리가 그런 관계를 우리만이 특권으로 선택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배제되었다고 여기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절대 영을 나누지 마시오. 그건 그렇게 할 수가 없소. 그렇게 하려 해봤자 에너지만 낭비할 것이고, 그 결과는 당신 자신을 나누는 것이 되고 말 거요. 동료라는 닫힌 원과 무한한 영 간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성의 공식은 없소. 다만 영을 경건하게 유지하도록 애쓰는 것 말고는요. 이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소. 하나는 아버지의 인격화로서 성령의 신성을 공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일상생활 전체에서 영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단일성을 보시오. 전체 영에서 배제되거나 아버지에게 선택받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원 안에 안주하는 나머지, 오히려 전체 영쪽이 배제 당하고 있지요. 이렇게 스스로 배제시키는 것으로 그들은 영적 교감에서 분리되어 있소. 또 이렇게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은 위대하고 순수한 자각을 갖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샘이오. 내가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도 마라'고 했을 때의 의미가 이것이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심판함으로써 사실상 자신을 한 영에서 분리시키고, 자신을 심판하게 만들기 때문이오.



원죄란 단지 심판에 지나지 않소. 모든 존재는 심판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분리하는 데 착수하는 셈이요.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이 사랑의 공동체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이것이오. 심판의 직접적인 결과는 분리요. 의식하든 안 하든 당신은 '유일 천제'와 영원히 대화를 나누고 있소, 당신이 내치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그것으로부터 내쳐질 것이오. 영의 어떤 내원이라도 그 영원한 대화가 가져올 결과로부터 당신을 지켜줄 수는 없소"









"그것이 당신이 말씀하신 '뿌린 대로 거두리라"의 의미인가요?"









"단지 더 클 뿐, 같은 것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대단히 일직선적인 상관관계와 의미를 가진 것으로만 해석하죠. 만일 그가 물을 주면 풀이 자랄 것이고, 친구를 사귀면 혼자 식사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빌리기만 하면 언제나 빚에 허덕이리란 식으로요. 이런 것들도 사실이긴 하지만, 내 메시지의 핵심은 일직선적인 인과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소.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념을 구형으로 360도가 될 대까지 확장해보시오. 그러고 나면 큰 것이 작은 것을 부양하고 작은 것이 큰 것을 권능 있게 해준다는 원대한 이해에 도달할 것이오.당신 자신의 삶이 평화롭기를 원한다면, 지상에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시오. 당신 자신의 삶이 풍요롭기를 원한다면, 남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원리에 따라 살고, 그 원리를 지지하시오. 이렇게 하는 것으로 당신은 한 영에게 당신 가슴의 가장 참된 소망을 알려주게 될 테고, 거꾸로 한 영은 당신이 남들을 위해 구한 것을 가지고 당신을 영예롭게 할 것이오. 이런 게 영원한 대화요"









나는 그 모든 것 속에서 선을 보았다. 그런데 대단히 기묘하게도 그것은 나더러 "그럼 악은 선의 반대인가요?"라고 묻게 만들었다.









"질병이 건강의 반대가 절대 아니듯, 악도 선의 반대가 아니오. 질병이란 건강이 부족한 것이오. 하지만 질병은 그것과 반대되는 힘을 가진 건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조건이 아니오. 질병처럼 악도 독자적으로 힘을 갖는 것으로 오해되어왔소, 그래서 악이 그 나름의 독자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잘못된 전제 하에 악마니 마귀니 타락한 천사니 하는 개념들에 너무 많은 주의와 관심이 기울어져왔소. 지구에 준 내 선물이 악에 반대하는 것뿐이었다면, 그 선물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을 거요. 사랑과 선의 모든 선물은 설사 악이 눈에 띈다 해도 무시될 정도의 작은 얼룩에 불과한 그런 풍요로운 상황 속에서 안녕이 우세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거요"









예수의 대답이 이러했기에. 나는 갈등의 문학에서 그토록 걸출한 역할을 해내는 '어둠의 존재들'이란 배역을 놓고 이야기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대답에서, 그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것으로 치부되는 권능이란 건 사실상 이분법의 오해로 인해 과장되어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악은 존재에 내재되어 있지 않소. 선과 악은 영원한 드라마에 속하는 동등한 대항세력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오. 악이란 건 신과 분리되고 자신인 사랑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오! 이것의 다른 쪽 선택이 선이죠. 이런 선택은 존재할 수밖에 없소. 그렇지 않고서는 개성을 부여한 것이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할 테니 말이오. 그런데 무릇 선택이란 결과를 갖기 마련이어서 사랑을 선택하거나 사랑을 부정하는 경우도 그러합니다. 또 선택을 회피하는 것도 결과를 갖는데.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불러오는, 끝없이 우유부단한 대화가 바로 그것이오.



하지만 악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거나 그들의 행동이 파괴적인 것 같다고 해서 남들의 가슴을 심판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오. 세상이 악이라 규정하는 것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억압 구조와 그에 맞서는 보복 간의 투쟁에 지나지 않소. 비난받을 만한 여타의 행동들도 삶의 구식장애물들을 마침내 끝장낼 만큼 용기 있는 누군가가 그 장애에서 벗어나면서 일으키는 여파일 뿐이고요 또 영이 상호작용하는 삶과 가르침의 위대한 대화로부터 누군가에게 가져다주는 교훈을 구체화하는 상황들도 있소, 이 모든 것들은 일단 신성한 질서 안에서 그것들의 위치를 이해하고 나면 아량으로 보아넘길 수 있소. 악은 파생물이지, 근원이 아니오. 악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소. 신이 만물을 창조한 것은 사랑을 가지고서였소, 이분법에서든 아니든 이것말고 다른 원인은 없소. 태초에 선과 악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오직 선만이 있었소! 창조와 파생물은 같지 않소 모든 창조의 권원은 신이요. 반면에 파생물이란 건 선택의 결과요!



모든 악의 원천은 사랑의 부정이어서, 이것은 사랑이 지휘하지 않는 불운하고 혼한스런 삶을 가져오기 마련이죠. 어떤 사람이 자신인 사랑을 부정할 때, 그는 자기 삶의 사건들을 지휘할 힘을 잃게 됩니다. 사랑은 지휘하지, 지배하지 않거든요. 사람이든 상황이든 요소든 우주 안의 어떤 것이 자신인 사랑을 부정하면 그것은 지휘권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그것은 얼른 지배권을 움켜쥐죠 그결과 속임수로 보완되고 힘으로 통제되는 저질 가치들을 무자비하게 추구해가는 것입니다.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사랑의 권능을 잃은 상황에서 밀어닥친 절망에 반격하는 셈이요!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악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는 사실을 빼면 악을 창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어떤 신의 자녀도 자기 중심에 악을 품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오직 사랑을 부정하고 증오와 질투와 탐욕의 마음가짐 으로 삶을 강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 사람은 악으로 무성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소. 이것이 내가 악은 파생물이지, 원래요소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요"









그래서 내가 예수에게 물었다 "그럼 악이란 환상일 뿐인가요?"









"아니오. 사랑을 부정했을 때나타나는 결과는 대단히 현실적이오. 하지만 자신이 보는 것을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환상이 되는 쪽은 당신의 심판일 테니까요"









이어서 그가 설명했다.









"심판이란 분리를 일으키는 마음의 역학이오, 따라서 그것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소. 반면에 포괄을 일으키는 마음의 역학은 현실에 근거한 식별을 가져오지요. 악에는 실체가 있소. 내가 악이란 게 어떤 건지, 왜 악이 실체가 있는지 설명해주겠소.



최고의 악이란 사랑더러 사랑인 자신에게 맞서게끔 만드는 의도나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사랑인 대다수 존제들은 절대 이해하거나 끌어오지 못할 상태요.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한, 악과 사랑에 일관되는 토대는 없소.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는 그냥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있는 거요.



나는 온 가슴을 다해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두 가지 계명으로 인류에게 악을 해독할 수 있는 처방을 주었소! 악이 접근해오면 '가겠지'라고만 말하시오. 그러면 그건 가버릴 것이오. 악이 좀이라도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까지도 한 영이 포괄한다는 것밖에 없소 자신의 한 부분일 수 있는 어떤 부정보다 더 큰 존재인 신은 악이 난폭해져서 영의 단일성을 휘졋도록 돠두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 중에는 사랑으로 충만한 위대한 존재들이 있소. 실제로 악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그들은 성령을 섬기고 그것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지요. 이 위대한 존재들은 성령의 각료들이요"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점에서 온전함을 유지하는 여러 천사군단이 이 특별한 집단에 포함된다는 걸 가슴으로 느겼다.



악 또한 하나의 실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우리의 삶을 이분법적 역설로 바꿀 구실로 그것을 이용하는건 부정하다고 예수는 덧붙였다.









"악에게서는 배울 게 전혀 없소. 성령과 비교하면 악은 아무 권능도 없거든요. 게다가 사람들이 악이라 부르는 것들 대부분은 그들 나름의 오해나 심판이 만들어낸 환상이오. 당신이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나면 악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할 수 없소. 악의 문제에서 당신에게 필요한 유일한 조치는 마음먹는 것뿐이오. 이런 선택권이 없었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자유도 없었을 것이고, 당신의 개별성 선언은 진리가 아니라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을 거요. 선택권이야 말로 당신에게 주어진 자유요. 당신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오래 헤맬 수 있고,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집에 올 수 있소. 그동안에는 사랑의 부정이 가져다줄 수 있는 온갖 교훈들을 경험할 수 도 있고요!



바뀔 수없는 결정,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결정이란 건 없소. 이 때문에 성령은 언제나 자신의 각료들에게 더 높은 이해라는 성유를 부어주곤 하죠. 선택의 자유가 한 영에게 최소한의 혼란만 일으키면서 존중받을 수 있도록요. 나아가 신과 사랑을 부정하는 존재들은 그런 자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최고의 희생을 지불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또한 용기 있는 사랑의 행동이요. 사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랑의 존재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겠소? 그러니 이에 대해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당신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종식시킬 수 있게 해줄 것요. 영에는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소"









예수는 우리가 집중해야 할 영적인 수련이 하나이자 전체인 것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할 때 삶은 점점 더 많은 기쁨과 점점 더 적은 아픔을 가지고 펼쳐질 테지만, 그것은 이분법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한 존재의 위대성을 말해주는 건 그의 지님이 아니라 그의 펼침이오. 그가 얼마나 많이 지닐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가 말이오. 지님은 구조의 방식이지만, 펼침은 삶과 기본선의 충만과 자유를 가져오죠. 사람들은 한 영과의 교감을 통해 이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분리는 영원히 끝날 것이오. 그럴 때 당신은 마침내 자신의 자각이 삶의 잠재력이라는 무한대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벽들을 부수게 될 것이오.



만일 당신이 더 큰 영향력을 갖고자 한다면, 한 영과 교감하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생존 메커니즘인 힘 대신에 자비와 직관을 갖게 될 것이오. 당신은 생각만으로도 무한한 전체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될 것이고, 삶의 공급과 기쁨들을 끌어오게 될 것이오"









이와 관련해서 예수는 윤리에 대해 재미있는 언급을 한 바 있다.









"윤리란 개인들과 그들의 집단 바탕 사이에서 상호 작용하는 리듬이오. 개인의 더 크고 참된 능력을 북돋우고 이끌어내지 못하는 집단은 비윤리적이오. 반면에 더 큰 안녕과는 무관하게 자신을 진전시키는 개인이라면 윤리적으로 무책임한 것이고요"









마침 선과 악이 우리 이야기의 주제가 되고 있던 터라 나는 적당한 기회라 생각하고 천당과 지옥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천국과 지옥이란 건 어떤 장소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존재의 질을 말하는 건가요?"









"만일 당신이 장소의 본질이 존재의 질이라고 여긴다면, 그 대답은 '둘 다'가 되어야겠죠. 하지만 선과 악처럼 천국이 근원이라면 지옥은 파생물이오. 천국은 모든 존재가 지닌 기본선과 사랑의 지휘를 기꺼이 따르려는 삶의 자발성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옵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자신을 구현하는 데 있어 사랑이 우위를 점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인 겁니다. 그것을 당신의 가슴에서 시작하시오. 또 영혼들이 다시 새로워지고 모든 환상과 고통에서 치유되는 아버지의 가슴과 가까운 장소도 있소, 이것이 바로 크나큰 사랑으로 유지되는 성스런 사후 체험이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꼭 이렇게 엄밀한 영역으로만 국한되어야 하는 건 아니오.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면 천국은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 가슴속에 존재할 수 있소. 그러고 나면 동일한 자발성으로 그것을 당신의 외면 생활로 확대할 수도 있고요. 그리하여 우주 전체가 천국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게 되면, 마침내 천국은 어디에나 있게 되지요!



반면에 지옥이란 자신과 신과 실존과 전쟁 중인 영혼이 겪는 고통이요. '전쟁은 지옥'이란 말을 당신도 들어보았을 거요. 지옥이란게 바로 전쟁이요. 사랑의 존재가 악을 자신의 지침으로 선택했는데. 어떻게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있겠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시오. 그런 상황에 어찌 선이 갈등을 보탤 수 있겠소? 게다가 당신이 사랑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어디에 놓고 있는 셈이오? 인간은 사랑과 용서를 부정함으로써 소위 지옥이라 일컫는 집단 악몽을 창조했소. 사람들은 용서하기를 무척 두려워하고 크게 오해하고 있소, 하지만 인간이 용서받지 못했기에 타락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게 아니라. 용서받지 못했기에 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거요!"









그럼 우리는 옳은 것을 위해 싸워야 하나요?" 내가 이렇게 묻자 예수는 대답할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기라도 하듯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어느 정도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에서 시작해봅시다. 당신의 심판이나 추정을 앞세워 싸우겠다고 달려나가지 말고, 우선 무엇이 옳은지를 찾아내시오! 그런 다음 그것을 선언하고, 이 점에서 당신의 입장을 정하시오. 이 때문에 전쟁이 벌어질 상황이라 해도, 적쪽에서 먼저 시작하도록 놔두시오. 그래서 당신이 공격을 받고 나면, 당신은 사랑으로 지휘하면서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딱 그만큼만 싸우시오.



신의 아들은 전쟁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회암인 데다가 지구를 황폐하기 만드는 마름병이니까요. 전쟁은 결국 그 전쟁을 저지른 관견자 모두의 영혼 속에 머물게 되죠. 아무리 사소한 사업상의 공격이나 사회적 공격, 지적인 논쟁이라도 그런 분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영혼을 찾아오기 마련이요. 당신들이 여기 있는 건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통성을 찾아내기 위해서요. 사랑인 신과의 공통성과 사랑인 당신들 서로간의 공통성을요. 자신과 전쟁을 치르는 존재는 절대 다른 곳들에서는 자신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죠. 이것이 악의 재미있는 측면이오. 어떤 사람이 사랑의 권능을 일단 부정하고 나면, 그가 힘이나 속임수로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삶이 그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소. 그래서 사랑을 부정한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회를 만들어내려는 절망적인시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점을 깊이 이해하면서 받아들이도록 하시오. 하지만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누구라도 심판을 내리면 삶에 대한 인식에서 대단히 협소해질 수밖에 없소. 지식으로 인한 실수는 딱 두가지가 있는데. 그둘 다가 심판에 의해 초래되곤 하죠. 그중 하나가 잘못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현실이 자신이 아는 것으로만 한정된다고 가정하는 것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신이 당신들 앞에 무엇을 놓았는지에 대한 자각을 날마다 키워가고 있소"





"그럼 일상생활이라는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영의 방식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요?"









"사랑의 지휘 하에서 삶의 단순화를 통해서요. 위대한 영의 방식을 사용할 때 당신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삶에 끌어오게 될것이고, 당신의 사랑은 끌어온 그것을 당신이 필요로 하고 바라는 것으로 모양 잡아줄 것이오. 일상생활의 자잘구레한 일들에서 영적인 경영이란, 끌어당기고 압축하는 작업이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존재에게 걸맞는, 노력의 올바른 적용법이오. 결과적으로 그과정에서 당신은 그것을 즐기게 될 것이고, 휴식과 오락과 영감을 즐길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오.



압축은 복잡한 잠재력에 적용되는 단순화의 힘이오. 그 결과는 강제적인 동시에 즉각적이죠.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이나 변화가 순식간에.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적이 있소? 그건 어떤 기회를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답을 아는 순간일 수도 있으며, 어떤 목적을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아는 순간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이 다 함게 몰려오는 때일 수도 있소. 압축의 순간은 강력한 촉매작용의 순간이요. 그것은 존재 이유의 면전에서 개인적 정당성을 강제로 확인하는 것이요"









우리 대화에서 압축이라는 주제가 나온 경우는 여러 번이었는데 그 첫 번째 경우는 영과 관련해서였다 영을 성스럽거나 비의적인 영역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자동차 관련 용품점들에서 흔히 논의되는 주제와 영을 연관시키는 것이 어색하고 부적합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압축이란 단지 "많은 것을 적게" 만든다는 의미다. 이것은 더 좁은 공간에 더 많은 물품을 쟁인다는 뜻일 수도 있고, 복합적인 문제들에 공통된 대답을 찾아낸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복잡한 감정을 자아내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운다는 뜻일 수도 있다. 공통된 통합 요소가 없다면 복잡이 단순으로 귀결되는 일도 있다. 공통된 통합 요소가 없다면 복잡이 단순으로 귀결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의 기적과 영의 통합성, 그리고 금강입자의 공통성이 팽창과 압축 모두를 작동시킨다. 팽창은 영적 문제들에서도 세속적 문제들에서도 자주 이야기되는 주제이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 질질 끌려다니다 보면 단일원자나 하나의 좋은 생각 속에 압축되는 엄청난 잠재력을 간파하기가 쉽다.









"당신들은 자력과 끌어당김과 압축으로가 아니라 힘과 행동으로 결과를 자아내는 데 익숙하기에, 새로운 방향을 익히는 동안 자신에 대해서 참을성을 가져야만 하오. 그리고 배움에서 진척을 이루더라도 걸음마 시절의 권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압축은 대단히 강력하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 원자가 어떤 힘을 갖는지만 생각해보시오. 한 원자의 해체력이 한 도시를 날려버릴 수 있소. 그런데 한 원자로 압축되려면 얼마나 많은 수의 금강입자들이 필요한지 알고 있소?



실제적인 차원에서 압축의 효율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가 있소. 한 시골 지주에게 개간할 땅 천이백 평 정도가 있었지요. 그 땅은 간목들과 잡초들, 무릎 높이의 풀들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아오른 바위들로 뒤덮혀 있었소. 그 일을 자신이 직접하고 싶지 않았던 지주는 인근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값싼 노임으로 그 일을 해줄 시골 청년들을 구했지요. 하지만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청년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 지주가 찾아낼 수 있었던 건 겨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소



어쨌든 그 청년을 데리고 다시 개간지로 돌아온 지주는 그 일이 스무 시간 가량 걸릴 거라고 속으로 계산하고 청년에게 시간당 5달러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그럴 듯하게 들리도록 100달러를 주겠노라고 제안했소 일거러를 살펴보고 난 청년은 그렇게 싼 노임으로 일하는 것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소. 하지만 청년은 그런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않고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본 후에 이렇게 대답했소. '좋습니다. 제가 그 일을 하죠. 그런데 일하는 기간이 2주가 걸려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지주는 같은 돈으로 일을 더 많이 시키는 셈이 되기에 기뻐하며 그러라고 했지요. 청년의 복안에서 핵심은 그가 소유한 거위떼와 스무 마리의 염소였소, 잡초를 먹어치우는 이 거위와 염소들은 2주 동안 그 개간지에 풀어놓았을 때 그땅의 잡초들이 말끔히 제거되리란 건 두말 할 필요도 없었죠. 게다가 청년에게는 이것말고도 다른 자원들이 있었소. 그에게는 편의를 제공해줄 가까운 이웃이 있었는데. 그 이웃은 돌을 나를 수 있는 장비와 전동 제초기를 가지고 있었소. 그래서 이웃의 동의를 얻어 그 장비들을 빌린 그가 돌을 들어내고 풀을 깍는 2시간여의 작업을 끝내고 나자 개간지는 눈에 띄게 다듬어졌소. 청년의 계획이 아름다운 건 자신의 모든 자원을 연결하고 압축하여 자신이 보탠 두 시간의 작업에 쏟아부었다는 거요. 그 일은 약속한 대로 2주만에 완성되었소. 그 과정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던 지주는 놀라고 감탄하며 소리쳤소. '정말 멋지네! 하지만 여보게 자넨 겨우 두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걸 생각하면 노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값을 정한 건 지주 자신이란 걸 청년이 상기 시키자 그 지주는 청년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100달러를 주었다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압축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시골천년이 약간의 이익을 올린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그가 한 일 못지 않게 그가 하지 않은 일도 중요했다. 그는 자신을 팔지 않고 대신 자신이 한 일을 팔았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 임금을 책정하지 않고, 그 결과물에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는 가치의 안내를 받으면서 끌어당김과 자력과 압축을 실현해냈다.



청년은 일련의 선택사항들을 통합하고 집중화된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것들을 결합함으로써 이익을 실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지주의 기대치를 능가했다. 지주는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 청년의 가치는 시간당 5달려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탓에 어떤 꼬투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 청년은 지주의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을뿐 아니라, 지주에게도 투자한 돈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주었다.



시골에서만이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이 원리들은 기적처럼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대변하는 것이 직업에 쏟는 노력을 가치를 발생시키게끔 적용하여 노동의 성격을 바꾼다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만물을 가치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이 구체화된 것으로 인식하게끔 우리 의식을 진화시킬 때, 저항이라는 배경악에 맞서 삶을 재배열하는 데 우리의 노력을 투여해야 할 필요성은 없어진다. 내게는 월가에 위치한 주식 중개회사의 우편실에서 일했던 한 친구가 있다. 그녀는 우편물을 조작하고 처리하고 묶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냄으로써 앞의 시골청년과 유사한 성과를 올렸다. 그녀는 시간당 임금을 받고 있었지만, 지혜롭게도 그 작업 효율성 증대를 보너스 체계와 연동시켰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신의 참 이익을 위해 우편실의 다른 업무처리 방식을 체계화시킬 수 있는 지침 메뉴얼을 작성했다.



내가 예수에게 시간당 임금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을 때, 그는 고대의 가르침을 인용했다.









"어느 일꾼이나 자신의 임금을 받을 가치가 있소, 당신이 팔리고 있는 것에 대해 더 높은 의식을 발달시키는 한, 시간당 임금에 잘못된 건 없소.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노동이 지닌 가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환의 토대가 되게 하시오. 하지만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시간, 당신 존재의 어떤 부분을 팔지 마시오.



가치를 인식하고 창조하는 건 일상 삶 속에서 영에 가장 조율된 의식 차원이오. 그리고 의식의 이런 측면들이 당신들 경제의 토대를 이룰 때 진실로 계몽되고 잘 부양되는 문명이 있게 될 거요"









예수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수는 그 일에 들어간 시간에만 근거해서 우리 수고들에 가격표를 붙이기보다는 가치를 창조하라고 권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팔리지 않고 그 일거리에 가격을 붙일수 있게 된다.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일거리에 가격표를 붙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보았다. 이 새로운 이해는 참된 이윤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해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사실 힘에 근거한 경제는 누구에게도 참된 이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부채를 숨길 만큼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부풀어가는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서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화중에 순소득을 재순환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깨달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이해를 덧붙여주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건 이윤을 위조하기 때문이오. 부채가 드러날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화폐교환의 진행 추세를 가속화하면 이렇게 되지요. 이윤의 환상은 이렇게 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이 환상은 기술과 생산과 확대와 인간 에너지가 그 추세를 견딜 수 있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소. 빈곤국가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가격폭락을 불러오는 반면에 부국들에서는 인플레이션이 그토록 자신을 잘 감추는 이유가 이것이죠. 인플레이션은 힘에 근거한 문화의 경제적 화물열차요.



하지만 압축에 근거한 경제는 인풀레이션을 낳지도 생명력을 소모하지도 않죠. 결국에는 이것이 지구의 방식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누구라도 압축에 근거해서 소득을 얻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시작할 수 있소. 다른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따르게 될 테고요.



당신이 어떤 일을 더 쉽게 더 잘 해낼 때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보도록 북돋우시오. 살아가고 일하는 데 있어 더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할수록, 당신은 놀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명상하고 살아가는 데도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소. 잊지 마시오.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주시되고 복제되고 있소, 한 영을 매개로 하기에 어떤 것도 그냥 간과되고 넘어가지 않거니와 그 결과들도 대단히 전염성이 강하죠"









예수의 이 같은 말은 예전에 내가 동물학 강좌에서 들었던, 우리의 공유된 삶이 갖는 권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이야기를 기억나게 했다. 우리를 동물왕국으로 안내하는 이 이야기는 '백 번째 원숭이' 현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해 관찰된 이 원리는 그때 이후로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일단의 인류학자들이 남쪽 바다 어딘가에 있는 섬의 원숭이 공동체를 연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섬의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고 있었다. 그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먹는 전형적인 방식은 땅에서 고구마를 캐낸 다음 그것을 반으로 잘라 가운데 부분만 먹고 나머지는 버리는 식이었다. 껍질에는 모래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재치였는지 아니면 호기심이었는지 한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먹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껍질에 붙은 모래를 물에 씻어내고 나자. 그 고구마는 통째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버리는 것 없이 고구마를 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힘들여 더 많은 고구마를 찾거나 캘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말하자면 다른 동료 원숭이들이 세 개의 고구마를 캐는 동안, 씻어먹을 줄 아는 원숭이는 한 개의 고구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덤으로 그 원숭이는 모래를 뱉어내거나 할 필요도 없었기에. 아마도 그만큼 물장구를 치거나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우월성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특이한 행동 때문에 그는 동료 , 원숭이들 사이에서 괴상한 놈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어쨌든 그는 전통을 훼손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원숭이식 이단 판정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지성과 효율성이 이기게 마련이다. 얼마 안 가 그 원숭이의 가족과 동료들도 고구마를 씻어먹기 시작했다. 고구마를 씻어먹는 원숭이들의 숫자는 조금씩 늘어갔다. 비록 구래의 방식에 집착하는 몇백 마리 원숭이들은 여전히 거리를 두면서 의심의 눈으로 그 해변족들을 바라보긴 했지만 말이다.



고구마를 캐고 모래를 뱉고, 찾아낸 고구마의 대부분을 낭비하는 행위가 주는 친숙함과 익숙함이 여전히 혁신의 전망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변화는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인류학자들은 고구마를 물에 씻는 원숭이들을 일일이 헤아리는 것으로 그 느린 진전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백 번째 원숭이가 고구마를 먹는 방식을 바꾸자 나머지 원숭이들도 모두 그렇게 하는 게 아닌가! 원숭이 공동체 전체의 집단 의식이 바뀌는 역전 현상이일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그 섬의 모든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씻어먹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 작은 섬은 주변의 여러 섬들과 함께 군도에 속해 있었는데. 이 군도의 다른 섬들에 사는 원숭이들의 식습관도 이 섬의 원숭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첫 번째 섬의 패러다임이 전체적으로 바뀌자마자 그 군도의 다른 모든 섬들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무작위적인 공시성은 영적인 교류가 불러오는, 현실적이면서 명백한 결과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와 전체간의 교감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것에 사랑으로 응할 때, 우리는 "우와!"하는 경탄의 순간들,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고도 얻게 되는 강력하면서 무작위적인 통찰들을 갖게 된다.

나아가 우리가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영적인 하나됨에 참여할 때,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큰 또 다른 축복을 입는데. 그것은 내면 현실과 외부 현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드물게 얻어지는 고양된 순간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한 영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와 접하여 우애의 축복을 누리고, 신과 접하여 평화의 축복을 누리며, 필요와 접하여 기회의 축복을 누린다. 또 우리가 한 영을 통해서 희망과 접할 때는 비전이 느낌과 접할 때는 표현이, 진실과 접할 때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성을 통해서 우리는 경외감에 가득차 영을 본다.

하지만 저 밖의 지평선을 바라보거나 높은 산을 바라보거나 북극성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영을 찾을 수 없다. 영은 우리 한가운데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누가복음 17:20 절에 있는 심오하기 그지 없는 말씀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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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요한복음 10:34와 시편 82:6절을 참고 “예수께서 답하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너희는 神들이다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 느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神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였도다” 너희는 신의 아들과 딸로 태어 났다. 왜냐하면 네 안에 그리스도 신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깨달아 질 때, 네 자신이 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고요하라. 그리고알라. 내가 곧하나님임을(시편 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