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 제 4장 당신 자신인 사랑 본문
제 4장 당신 자신인 사랑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 없이는
다른 것들도 모두 어느 정도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불멸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
"처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당신은 누구인가?"이다.
당신은 그냥 인간인 당신 종족과 국가의 자녀일 뿐인가?
아니면 당신은 불멸의 영혼인 신의 자녀인가?
영이자 목적이고 능력의 근원이며 빛인? 이 모두가 사실이다.
그럼에도 당신 존재의 궁극 핵심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예수는 말했다. "당신은 사랑'이라고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는 처음에는 그가, 나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도록 북돋움으로써 나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간의 가르침과 보충설명이 있고서야 비로소 나는
그가 태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권능,
우리와 신의 혈연관계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나로서는 사랑과 행복을 뿜어내는 샘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라는, 평소 내가 지니던 의문을
예수에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방송망들을 통해 보고되는 그 끔찍한 사건들에 근거해서
일반화한다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는 대단히 힘들 터였다.
너무 단정적으로 보이는 것에 약간의 자책감을 느끼면서
내가 예수에게
나의 이런 인식이 그의 가르침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누구나 사랑으로 창조되었소.
현상태는 그 사람의 건전함과 그의 과거 선택들과
삶을 다루는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고요.
사랑이 무시당하고 불신되고 남용되고 부정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정원의 장미는 그대로 여전히 장미죠.
시들고 하얀 반점으로 뒤덮여 있더라도요
당신이 주위에서 보는 지치고 괴로운 얼굴들은
사랑이 깨어진 사람들의 얼굴이요.
그 사람의 자아의식이
자신의 본성에서 일단 떨어져나오면,
사랑은
행동이나 느낌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당연히 못 미치기 마련이죠.
지구에서는 이런 게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지배적인 믿음입니다."
진실을 복구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그것이 우리 오해의 원인들인
태고적 상처들로 곧바로 곤두박질하는 것을 의미할 때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경우에 그러했듯이,
예수는 이 문제에서도 능숙했다.
(내가 경험했던 그 모든 유보들은 더 큰 이해를 거부하는 나 자신의
타성에 불과했다)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그의 강조는 사랑이 되는 것과
사랑을 하는것이 어떻게 다른가에 주어졌다.
조건 없는 사랑을 이해하는 열쇠 전체가 이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진실로 그냥거기에 있고자 하면서.... 하지만 그들의 그런 노력은
무자비한 장애물들에 가로막히기 십상이다. 어쨌든
누구도 조건 없는 발싸개가 되거나 무조건 어리석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어떤 조건을 극복하고
낚아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곤 했다!
"당신이 사랑을 외적인 힘으로 여기는 한,
사랑은 언제나 삶의 조건들에 좌우 될 거요.
삶은 나름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소.
자연에도 나름의 조건들이 있구요. 예를 들어 봄이
새로운 생명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또 인간들 스스로도 사회 안에 많은 조건들을 설정해왔지요.
개중에는 현명한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소.
이런 조건들 대부분은 완화될 필요가 있소.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벽과 감옥으로 만들고 말았으니까요.
당신들은 관용을 키우고, 시각을 넓히고, 용서를 키우고,
삶에 대한 호기심을 넓히는 것으로 조건들을 완화할 수 있소,
그렇소 조건들을 완화되어야 하고 다시 자연질서와 더 많이
양립될 수 있어야 하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삶에는 언제나 어떤 조건들이 있기 마련이란
사실은 여전히 남지요. 예를 들면 당신이 어떤 삶에게
20달러를 주어 그를 도와줄 수 있다면 당신은 기쁘겠죠.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에게 당신 집의 열쇠를 주는 문제라면
어째 좀 꺼림직할 겁니다. 물론 당신이 그 사람을 그만큼 많이 사랑한다면 세상 전체를 그에게 줄 수도 있겠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외적인 저항에 직면하고
분노를 느끼게 되는 지점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오.
삶을 운영해나갈 때, 균형을 유지하고 정정당당한 시합이 되게끔
하려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선을 긋지 않을 수 없소.
균형은
살아가면서 영원히 되풀이되는 조건이요.
균형이 전쟁가 평화사이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자주 있고요.
따라서 외부로 넓혀가고 바깥을 바라봐봤자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주어지지 않소.
그러니 이 추론방식은 잠시 뇌두고 다른 각도에서 사랑을 봅시다.
자, 진리로 돌아가서 당신 자신이 사랑이고,
사랑은
당신이 남에게 주거나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이나 행동이 아니란
사실을 고찰해봅시다.
당신은 그것을 거래할 수 없고, 교환할 수 없소 또 그것을
화폐 삼아 바꿀 수도 없소, 당신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가졌다고 자랑할 수도 없소.
당신이 진실로 사랑을 이해하면,
당신은 더 이상 그것을 외적인 요소로 볼 수 없을 거요"
잠시 후, 나는 좀더 쉽게 그의 대답 안에 담긴 지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을 외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는 외적인 조건들과 갈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사랑임을 깨달으면
이런 조건들은 사라진다.
우리의 여러 외적 한계들이나 그런 한계들을 이용하려는
약삭빠른 세력들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사랑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이해를 소화해내자 어떻게 해서
적이 동지로 바귀는지 더 쉽게 이해가 갔다.
적이 가진 사랑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의 가슴에 가 닿게 되면
그만큼 그는 자신의 적의를 지속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랑은 사랑을 공격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의 모든 형제들에게 보내는 은밀한 신호는 사랑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인간 존재인지, 영적 존재인지, 빛의 존재인지, 아니면
신의 자녀인지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대답은 그 모두라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으로 햇빛 찬란한 태양이다. 그렇다면
태양은 무엇을 하는가? 그것은 빛을 발산한다.
영은 사랑으로서 당신에게 공명하고,
당신을 존중하고 자기 안의 한 자리를 당신에게 준다.
사랑으로서
당신은 신의 자녀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사랑이다!
개개인은 자기 나름의 특별한 방식에서 사랑이다.
아마도 이 점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는
우리가 여전히 사랑을 애정 및 애착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구조에 강하게 지배받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뭔가에 애정과 애착을 갖기는 드문 이리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지닌 소수의 것들에 매달리곤 한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아끼는 소유물들과 마음에 들어하는 위한거리들에 매달린다.
예수는 말했다.
"사랑은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소, 하지만
당신 존재의 저번에 사랑의 권능이 놓여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런 깨우침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참기 힘든 것일 수 있소,
사랑에서 우러나는 행동 중 하나인
집착 내려놓기는
누구에게나 가장 어려운 표현이죠.
그 다음이 용서를 통해
미움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이고요.
용서는
당신 자신인 사랑을 완성시키는 행동으로
표현될 때 좀더 긍정적인 의미를 띨 수 있소
마지막이지만 똑같이 중요한 점은,
사랑은
당신이 아무 할 일이 없을 때도
뭔가를 하려는 강박적인 충동을 내려놓길 요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지휘하기 위해
안식했던 거룩한 아버지처럼
당신 역시 이렇게 하기를 선택할 수 있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즉
무위(無爲)가
사랑의 더 위대한 표현이고
존재의 궁극 표현일 때도 있지요.
이런 사실들을 이해할 때 당신을 이용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그 힘을 잃을 것이오"
우리의 이런 논의들은
성경에서 신이 "나는 나다"라고 선언했던 것에 대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최상의 상태는 있음이고,
신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란 뜻이오.
그런데 이 있음을 일컫는 명칭이 사랑이오!
당신의 있음 또한
행위를 넘어서고
당신의 있음의 이름 또한 사랑이오.
창조주는 사랑이고, 사랑의근원이며,
당신 자신의 있음의 기원이오. 당신들은 이런 현상으로 창조되었소."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그건 당신이 그의 자녀란 듯이오.
그냥 피조물이 아니란 거요.
창조주의 신비는
형상이나 형태로 그려질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넘어서 있소.
하지만 당신들의 거룩한 근원 중에서 인식할 수 있는 측면은 사랑이오. 이 사랑은
창조를 통해서 확장됩니다.
이 점에서 인류는 대단히 특별한 자리를 가지고 있지요
왜냐하면
인류에게는 자신 또한 사랑으로 인식하고
이 권능을 앎으로의 창조에 활용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거든요.
이것은 거룩한 아버지가
무수히 많은 작은 신들로 분해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아니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지속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건
오직 하나인 창조주밖에 없소.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는
거룩한 의지가 인류의 모든 세대에게 자신과 같은 본질을
이어받게 했다는 것이오.
이 공통된 본질이 사랑이오.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에서 이와 비슷한 예는 DNA가
당신 몸 안에서 하는 몸의 총괄 운영을 위한 기호전달 체계로서의 역할이오. 설령 당신 몸의 다양한 부위들에서 조직세포들을 떼어냈다 해도 DNA분석은 그 모두가 똑같이 당신의 독특한 DNA임을 확인시켜주지요 하지만 이 샘플들 중 어느 하나도 몸 천체와 맞먹을 수는 없고,
그 중 어떤 것도 혼자서 기능할 수는 없소. 그럼에도 DNA 기호가 같다는 사실은 몸의 모든 부분들이 응집하고 협응하여 함게 작용할 수 있게 해주죠. 그러니 당신이 하늘의 창조주와 함께하는 공통된 DNA,
삶의 온갖 발현물들만이 아니라 그것의 근원에 협응하는 방식으로
당신이 기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DNA 는 사랑이라 할 수 있소.
사랑은
당신의 있음을 나타내주는 인장이오
이것을 알면 왜 이보다 못한 행동들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당신이 이 특별한 본성을 펼치기
시작하리란 데 있소.
당신이 창조된 건 사실 이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니까.
사랑을
어떤 행동으로 생각하지말고,
그렇다고 효율성의 크기로 여기지도 마시오.
만일 당신 창조주와 크기로 자신을 비교한다면,
당신은 헤어날 길 없는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오
. 사랑은
양이 아닐. 행위의 타당성을 말해주는 있음의 질이오.
사랑은
장벽과 크기에 좌우되지 않는 질이오.
그것은 자신의 권능을
사랑의 궁극 근원인 신에게서 끌어내지요.
그러하기에 사랑은
몇 가지 양도 할 수 없는 권리들을 갖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는 사랑이 가져다준 모든 것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당신의 품성으로소화할
소박한 권리가 있소, 왜냐하면
당신의 품성은
당신의 사랑을 요약한 것이거든요.
어느 누구도 이 권리를 당신에게서 빼앗을 수 없소.
사랑은 어떤 경우에나 자유롭소, 따라서
사랑이 될 때
당신 또한 그러하오. 당신의 몸은 구속당할 수 있지만
당신의 사랑은 어떤 한계도 갖지 않소.
사랑은
금강입자 들을지휘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되는 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삶을 지휘하죠.
사랑은
조건들의 종복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되는 것으로
당신은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소.
사랑의 법칙이오.
모든 법칙은 그것이 사랑에 뿌리를 두는 한에서만 유효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이 법칙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아래에서 평등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온 가슴을 다해서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가지 계율만을 남긴 까닭이
이것이오.
사랑은
삶의 모든 것과 차별 없이 공명하니
사랑이 됨으로써
당신 또한 삶과 공명합니다.
당신이 누구인가라는 진실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고,
당신 자신인 사랑이 되는 것은
당신의 성스런 권리이고, 이건 무조건이오"
나는 이전에 살아오면서 이런 가르침의 사례들을 경험했던 적이
두세 번 있었다.
예수의 현존 앞에서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것들이 더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나는 그런 경험들을 예수와 함께 나누고 그 경험들의 깊은 의미를
추출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한 이야기는 특히나 예수의 메시지와 관계가 깊다. 그것은 내가 뉴올리언즈의 툴란 대학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의 일이이다. 그 당시 나는 운 좋게도 1836년에 세워진 한 주택에 딸린 개조된 하인 거처 중 정원 쪽 건물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 웅장한 옛 주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아서 그 정원은 향기로운 태산목들이 줄지어 서 있는 높은 3미터의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워싱턴 가와 카론델렛의 모서리에 면해 있던 그 집으로 들어오는 출입구는 단 두 곳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앞쪽의대문을 통하는 것이었고
, 다른 하나는 본채의 현관 앞을 자나서 내 거처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마차출입문을 통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2충 건물이었는데,
그 발코니에 서면 정원을 가로질러 철제 레이스무늬로 장식된
유리창이 있는 본체 건물이 보였다.
또 내 방 창문 밖에는 잘 생긴 가지를 이층 창문까지 뻗은 무성하고
싱싱한 오크 나무가 서 있었다. 이층 창문에는 에어컨이나
햇빛가리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 고양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건 흡사 낙원 같은 풍경이었다.
이곳의 유일한 결점이자. 내가 학생 신분으로 그것에 세들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이 유올리언즈에서 가장 위험한 빈민가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다. 그 도시는 겨우 한 블록밖에 안 떨어진 세인트찰스 로를 결계로 빈민가와 부촌으로 나눠져 있었다. 운 나쁘게도 내가 살던
그 아름다운 주택의 마차 길은 빈민가 쪽으로 통해 있었다.
나는 자존심이 지시하는 대로 애써 카론델렛쪽의 마차 출입문을 피하고 정문쪽으로만 드나들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즐거움 중의 하나는
그늘진 내 집 발코니에 앉아서 마차 출입문 박에서 뛰어노는
이웃집 아이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애들이 하는 놀이나 행동들이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몇몇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방치되고 있는 게 확실한 심한 개구쟁이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이라고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자주 ;큰누나'같은 방식으로 내가 도와줄 게 뭐 없을까
궁리해보기도 했지만, 그러기보다는 그냥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을 내 가슴속에 지니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볼수록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나큰 사랑을 느끼던 나는 그들의 삶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서 그들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더 많이 갖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예전의 나였더라면 아마도 그들을 두려워하면서
내 방 창문을 걸어 잠그고 밤 외출을 삼갔을 것이다. 하지만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그 집을 들락거렸어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내가 멀리서 그 아이들을 지켜보긴 했지만,
그 아이들에게 접근하거나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들을 향한 내 사랑은 갈수록커져갔다. 사실 이것은
사랑하는 것에 비해서 사랑이 되는 것이
더큰 권능임을 확실히 체험했던 내 생애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그것은 사랑이 되기도 전에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분별지심에 근거한 행동일 수 있는지
처음으로 깨달은 사건이기도 했다.
부활절 아침이 왔을 때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마치 출입문을 열어두었거나, 아니면 아이들이 문을 밀고 들어온
게 틀림 없었다. 왜냐하면 해가 그 집 지붕 높이 걸렸을 때
나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내 방 창문 아래에서 부르는 합창소리에 잠을 깼기 때문이다. 내가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자 그들은 내게 남의 집 정원에서따온 게 분명한 작은 꽃바구니 하나를 선물로 주엇다.
이것이 우리가 가졌던 딱 한번의 만남이었다. 잠시 후 그 아이들은
내 삶에서 가장 감명 깊은 부활절 선물 하나를 남겨두고
부활절 인사를 건네며 떠았다. 우리는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 아이들은 내 사랑을 느끼고 그에 응답한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요즘 들어 이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건 그 아이들이
내 사랑에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 나름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예수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말했다.
"당신이 남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에서
자기 실현의 선물보다 큰 것은 없소
아버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의도하는 바가 이것이요!"
요즘도 나는 '내가 더 잘 알지' 하면서 개입하려는 자세로
내 사랑을 넓히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애정 깊은 받아들임이 갖는 더 큰 권능을 상기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남들의 곤경을 못 본 척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 되기 전에
사랑을 하기부터 하는 건 우리가 어떤 상황을 그냥 판단하고
말았을 뿐, 그 상황에 처해 있는 당사자를 존중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자신도 남의 신발을 신고서는 걸을 수 없는 마당에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 사람더러 어떤 신발을 신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사랑이 행동으로 제공될 때는 거부당하거나 적개심에 직면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것은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나온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사랑으로가 아니라....
예수는
누구나 자신인 사랑이 되어 있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의식적인 기도 따위의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사랑이 그 사람들을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신 자신인 사랑이 열심히 되는 것말고 당신이 해야 할 다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 중에는 한 사람의 풍성 속에 든
사랑의 권능을 입증해준 또 한번의 경우가 있다.
이 이야기도 예수에게 해드렸을 때 예수께서는
내가 그 안에 든 훨씬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1940년대에 텍사스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채 만 명이 안 되는 인구였지만 그 안에는 합성화 같은 다양한 현실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소도시는 조야한 뽀쪽탑을 단 빅토리아식 저택들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진 대공황 시대의 잔재들을 지닌 채 빠른 속도로
성장과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의 이 회상에서 '주인공'이 되는 사람은
노새가 끄는 사륜 짐마차로 고물을 수집하던 메트라는 한 남자다.
그 당시에는 고물 수집이 지금 처럼 아직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터라, 진취성과 장비만 있으면
언제나 일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메트는 마을에서 찾아낼 수 있는 다른 잡일들도 많이 했는데,
그 중에 내가 손꼽아 기다리곤 했던 것이 봄이 되면 쟁기와 노새로
우리집 뒤쪽의 텃밭을 갈아엎는 일이었다.
우리 어머니의 가정부였던 그의 아내 비올라 역시 따뜻하고
상냥한 여자였다. 그녀는 나의 양육도 일부 책임지고 있었기에,
나는 오후에는 종종 그집 아이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메트는 매일 수레와 노새를 끌고 일을 하러 나갈 대
우리집 앞을 지나갔다. 아직 만 4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의 노새가 또각거리며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세운 채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가 오고 잇음을
말해주는 그 또각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몇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메트는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한 어떤 빛과
그만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어린 시절에 알던 사람 중에서 메트보다 더 눈부신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냥 '거기에 있는'드문 능력 누구와도 함께 있을 수 있는 드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소박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고결한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가 삶의 한계들을 사랑을 완성할 기회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안다.
그의 빛을 느끼기 위해 굳이 메트를 알거나 그 빛을 받기 위해
그와 관계를 맺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메트는 만족과 평온으로
그냥 빛나는 사람이었다.
메트의 이런 너그러운 풍성은 내가 어린 시절에 스스럼없이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출발점이 되었다. 날씨가 괜찮으면,
그는 거의 날마다 나를 집에서 다섯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마을 광장까지 태워다주었다.
그의 마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나면 나는
가게에 들르는 일 등의 일과를 치르고 나서, 공터들과 마굿간들, 할머니네 정원과 은밀힌 비밀장소들으 기웃거리거나 놀다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것이 나의 일상 산책코스였다 보다시피 이건 그 시절 내가 '작은 악동들'중 한 명이었음을 말해준다.
메트는 내게 사랑으로 있으라는 가르침을 맨 처음 준 사람이었다.
그건 당신이 해야 할 어떤 일이 아니다...... 그건 당신 자신인 것이다! 하나의 존재방식으로서 사랑은 놀랄 정도로 전염성이 강하다!!
이야기를 마친 나는 덧붙이거나 논평할 말씀을 구해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얼굴만 환히 빛내며 잠시 가만히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완벽에 뭘 더 더할 수 있겠소?"
사실 삶이란 게 본디 그런 식이어야 하오"
지상에서의 삶을 그 최고 수준에서 치하하는 이런 답변은,
찬물 한바가지를 내 얼굴에 끼얹어 단잠을 깨우는 듯한
강한 효력을 발휘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완벽은 오직 하늘나라에만 있을 수 있다고 지레짐작하면서
포근한 담요 밑에서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나의 또 하나 질못된 전제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오직 하늘나라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성인들의 경우는 예외일 수 있지만)관념이었다.
우리는 신 및 우리의 궁극 목적지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이구나. 란 생각이 난생 처음 내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 차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에게 물었다.
"실제 삶에서 살이 되는 예를 좀더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어린애의 천진난만한 기쁨 같은 건가요?"
"뚜렸하게 드러나는 사랑의 달콤한 존재방식이라면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거요.
당신은 그걸 가슴으로 알게 되오
그보다는 치열한 삶의 전투들 속에서
사랑이 되는 것에 대해 좀더 이해하고 싶지 않소?"
"제가 원하던 게 바로 그거예요 다만 당신과 함께 있을 때는
삶이 전혀 전투로 여겨지지 않지만요"
그가 웃었다.
"사랑은 그 전투들 속에서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차이가 빛어낸다는 걸 알고 있소,
그건 당신 자신의 소명과 봉사 자질에는 진솔해지는 반면,
당신 품성의 참된 영광을 줄일지도 모를 부나 명예 따위의 유혹은
거부한다는 듯이오. 또 그건 자신이 퍼즐의 한조각을 지니고 있다는
은근한 확신을 가지고 혼란의 와중에서도 확고히 서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사랑은 사업가여서, 저예산으로 많은 요구를 채우기 위해
잠 못이루며 해결책을 구하는 그 많은 밤들 동안,
헌신과 명확성을 놓는 법이 없소.
또 사랑은 인내할 줄 아는 애정 깊은 어머니여서,
불안정하고 말썽 많은 자녀를 치유하고 바꾸기 위해서라면
한시도 방심하지 않죠.
예전에 그런 식으로 신경을 쓰고, 애정을 기울이고, 꾸짖고,
교정교육을 하고 조언을 하던 한 어머니가 있었소. 하지만
외적인 어떤 것도 효과가 없었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는 자기 아들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아이의 외삼촌 집에 입양시킬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소.
그러던 어느날 밤, 그녀가 기도하면서 이 마지막 가능성에 대해 숙고하고 있을 때, 그녀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소.
그녀 자신이 그 문제의 일부인 동시에 해결채의 일부라는 걸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그녀 자신을 떼어내는 건 오히려 그들 둘 다가 절대로 필요로 하는 연결관계를 거부하는 것일수 있었소.
이런깨우침으로 기운을 되찾고 그날 밤을 기분좋게 푹 자고 난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영혼과 영혼이 마나는' 포옹으로 아들을 깨웠지요.
그건 아이의 유아기 이후로 그들 두 사람이 나눈 어떤 포옹과도 다른 것이었소. 마침내 치유가 시작된 거지요.
보다시피 당신 자신인 사랑이 된다는 건
다아신 삶의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과 관계한다는 듯이오.
사람들은 너무나 빈번히 선정성을 추구하고 욕망에 쫓기고
불만에 내몰리면서, 삶의 표면에서만 스케이트보드를 타곤 하죠
. 이런 사람들의 역설은 삶이란 건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내려와
길 위로 녀려서야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는 거요
. 자신인 사랑을 깨닫는 첫걸음은
당신이 삶과 맺고 있는 필연적인 연결성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장담하는데 이건 결코 맥빠지는 일이 아니오.
당신이 삶에 더 깊이 닿을수록 삶이 말해주는 것들을 더 많이 거둘수록, 당신의 유머감각도 더 풍부해질 거요.
사실 삶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믿기지 않는 순간들을
박탈하는 게 정치적으로만 정확한, 피상적인 행동과 태도죠.
웃음은 영혼을 위해서 좋은 거요.
특히나 당신 자신의 문제를 놓고
웃을 수 있을 때는 말이오.
당신과 삶의 연결이 가져다주는 권능.
즉 자아의 중심이
신의 실체와 접촉하는 데서 생긱는 권능을 절대 과소형가하지 마시오. 그건 당신을 겸허하게 만들어줄 것이요.
또 당신을 고결하게 만들거나 깨우쳐주거나 울게 만들 수 있소
다른 건 다 놔두고라도 그것이 당신을 짓눌러온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리라는 건 확실하고요.
아이를 낳는 산모가 진행 중인 그 기적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운동선수가 자신의 팀원들과 연대감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어긋난 어깨의 통증을 견디지 못할 것이오.
삶이란 건 연결을 맺는 모험이오.
그런 연결들이 당신의 풍성을 확인해주고 강화시켜주지요
. 당신이 나중에 화환을 결어줄 연결은 사랑으로 맺은 연결들이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소모적인 체험들이오.
그것들이 당신을 즐겁게 하거나 자극할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참된 삶의 의미란 면에서는 결국 당신을 배고프고
목마르게 만들 것이오.
영혼은 물질 삶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는 현실체험을 갈망합니다.
몸은 오직 영혼만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불멸성의 체험을 갈구하고요 이런 결합이 자신을 실현할 수 있게 해줄 때,
당신은 사랑이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분명히 알게 될 거요.
인간은 결합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소,
그 맨 처음이 신과의 결합이었고, 그 다음이 삶과의 결합이었으며,
똑같이 중요한 마지막과정이 몸과 마음의 결합이었소,
신의자녀로서 인간에게는 자의식이 주어졌소,
그것을 받아들이겠노라는 부수적인 서약과 함께요.
몸으로서는 더 고귀하게 살기 위해 영혼을 인정ㅇ할 필요가 있소.
영혼에게는 자신의 물질 체험을 이루기 위해
몸을 존중할 필요가 있구요. 몸과 영혼은 서로가 상대방에게 많은 것들을 줄 수 있소. 영혼은 몸에게 더 고귀한 삶과 더 높은 의식,
더 고상한 원리라는 전망들과 함께 그것들을 추구할 용기를
가져다주죠 반면에 몸은 가장 위대한 체험인 자비의 체험을
비롯한 온갖 체험들을 영혼에게 주고요. 그리고 몸은 적용하고
봉사할 현장영역도 삶에게 제공합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통합을
통해 몸과 영혼은 가슴의 목적들을 키우고 이끌어가죠.
당신이 행해야 할 첫 번째의무는
몸과 영혼, 그리고 당신 내면에 당신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사랑의 결헙을 인정하는 것이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차대한 통합조차 이루지 못한 마당에
어떤 여자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낼 수 있고,
어떤 남자가 자기 형제들과 사이 좋게 지낼 수 있겠소?
몸과 영혼에 대한 많은 묘사들이 그것들의 상호의존 관계나
그 결합에서 기인하는 갈들을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소,
평화와 고요와 방어를 원하는 쪽은 주로 몸이요.
영혼과 사랑이라는 원동력이 없었다면
몸은 가장 저항을 덜 받는 삶을 추구했을 거요.
몸의 주요 죄악은
안락과 편리함을 조항해서 변화에 저항한다는 거죠
몸은 위험을 무릅쓰는 자가 아니오!
반면에 모험으로 인한 죄과는 대개가 영혼의 탓이요.
체험하기 위해서 지구를 찾아온 건 영혼이오.
하프 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천상의장미가 얼마나 향ㅇ기로운지는 영혼도 이미 알고 있소. 하지만
장미 가시에 찔리는 느낌이 어쩐 것인지, 제트 비행기의 G-force'가 얼마나 짜릿할지는 영혼이 물질체험을 해봐야만 알 수 있소.
월드 시리즈 시합의 흥분이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기븜을 즐기는
쪽은 영혼이오. 이것들은 유익한 체험들이오 하지만
체험아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영혼은
곤란한 문제상황들까지도 불러올 수 있소.
영혼이 자신이 했던 지상 서약을 따르지 않을 때
특히나 이런 일이 잘 일어나죠. 분리되고 자제력 없이
제멋대로인 영혼은 자신과 남들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소. 반면에 몸이 영혼을 무시하면 자기보호의 집착히나 고역 속에 산 채로 묻혀버릴 수 있소, 양 극단 모두가 좋지 않소, 창조주의 의지도
아니고요.
몸과 영혼의 혼인(marriage)은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풀기 어려운 갈등일 수 있는데,
균형과 해답은 당신 내면에 있는
사랑의 권능를 발견했을 때만 생겨날 수 있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기 전에
죄짓는 삶이나 자기파괴적인 삶 속게 빠지고 말죠.
범죄는 영혼이 자기 물질 삶의 목적과 의미만이 아니라
사랑과의 연결성을 잃고 만 결과요.
예상되어졌던 건 인간적인 약점이지 범죄가 아니오.
그러니 누군가가 존재의 세 기둥인 영혼과 몸과 사랑을
자신의 내면에 복구하도록 도와주는 건
그가 다시 삶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요"
"약점과 범죄의 경계선은 어디인가요?"
"범죄란 존재의 유효하고 창조적이고 공시성적인 성향에 맞서는
파괴적인 행동이오. 따라서 창조주가 작동시킨 모든 것에 맞서는 행동이 범죄죠. 문제는 범죄가 범죄자의 통합된 온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거요. 그렇다고 창조주가 파괴를 선한 용도로 쓰지 않는다든가 그 범죄자가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오.
내 이야기의 핵심은, 범죄는 온전성을 파괴한다는 거요.
그래서 범죄에 대한 이해는 단순하면서도 정확해야 하오.
모세가 그것을 십계명으로 요약한 까닭이 이것이요
. 이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알기 쉬운 지침을 주어 비행과 심판을
끝없이 열거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소.
옳고 그름을 둘러싼 논란들 대부분이 삶의 흐름에 분열을 불러오고,
삶의 흐름을 따라 항해하는 영혼의 능력을 심하게 제한할 수 있거든요. 정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심판은 옳고 그름의 끝없는 목록을
낳기 마련이구요. 신은 당신들이 이런 주제에 사로 잡혀 있기를
바라지 않소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들이 몸과 영혼의 합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방해할 테니까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당신들이 상황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요.
당신들은 형제자매요. 게다가 당신들 중에 몸과 영혼의 불균형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약점이란 이거요. 다시 말해 몸과 영혼이 그 결합을 놓고 싸우는 과정에서
부조화와 분쟁을 경험하는 것 말이오. 이건 넘어지기도 하고,
우연히 깨뜨린 꽃병을 감추려고 애쓰다가 좌절감에 엉엉 울기도 하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소
그런 상황은 관련자 모두에게 짜증나고 실망스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온전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일 뿐이오.
반면에 범죄는 온전함을 훼손하는 것이오.
나는, '왜 당신은 사회의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
언제나 예의범절에 따라 살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소, 그 대답은,
그들은 신과 맺었던, 몸과 영혼을 결합시키겠노라는 서약을
충분히 펼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요.
나는 그 과정에 사랑이 존재할 때
인간적 불안정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은총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더 큰 이해를 그들에게 주었소.
합일의 서약을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당신들은 웃음의 순간들과
슬픔의 순간들, 용서를 구하는 순간들을 알아차릴 것이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해주는 자비를
발견할 것이오. 그리고 똑같이 중요한 마지막 사실은
그럴 때 당신들은 자신이 사랑임을 알게 되리란 것이오. 왜냐하면
오직 사랑의 권능만이
그 필수불가결한 결합을 맺어주고
하나됨의 조건들을 이뤄줄 수 있으니까요"
예수는
인간의 가장 큰 오류는
신과 삶을 자신의 본성과 연결하는 대신에
구조와 연결하려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사랑과 구조, 두 주인을 섬기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구조는
우리가 자주, 대단히 깊이 있게 이야기한 대 주제 중 하나였다.
예수는
인간이 삶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구조라고 말했다.
이런 이해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 대부분은 많은 불필요한 고통과
외적인 장애들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랑의 방식들과
더 큰 권능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구조에 지배받게 된건
우리가 자청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구조의 시각에서 보면 태풍은 원인과 결과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태풍이 일련의 특정 조건과 방향량(백터)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상당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불어닥쳐온다. 하지만
우주를 지휘하고 만물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 일정표 안에 사랑을 포함시키면
상위 요소가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받고 있을 때는 폭풍이기가 대단히 어렵죠.
설사 그 사람이 자포자기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랑을 첨가한다해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소, 물론 이건 설탕을 넣지 않은 채 쿠키를 굽고 나서 위에만 설탕을 흩뿌리는 경우와 좀 비슷하지요. 더 맛있는 쿠키를 얻으려면
그 원재료들 속에 설탕을 섞어야 하요!"
사랑과 구조 사이에서 겪는 갈등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랑을 포함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하기 일쑤다. 구조는 우리를 속여 사랑을 늦추거나
전혀 사랑 없이 살도록 만든다.
대개는 사랑이 '차이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명분을 가지고.
당신이 자신인 사랑이 되어 있을 때는
이런 문제를 전혀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해결책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당신이 가져야 하고 해야 할 바로 그것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오.
당신 앞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더 마음에 드는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소, 은총은 사랑을 쏟는 대상에 있지 않고,
사랑을 쏟을 기회에 있소"
내가 물었다. "재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 눈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요"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떤 일이든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오"
"지금 제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요?
"당신이 이야기를 나누는 바로 옆사람이오"
"제가 다음에 배워야 하는 건요?"
"당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 당신은 굳이 교훈을 찾아나설 필요가 없소. 그쪽에서 당신을 찾아올 거요.
사람들은 너무 자주 자기 눈앞에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곳에서 교훈이나 목적을 구하려고 애쓰죠.
그들은 바로 눈앞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단순한 교훈의 권능은
존중하지 않고, 굳이 어려운 교훈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자신을 자주 힘들게 합니다. 누구나 자신 앞에 충분히 가지고 있소, 다음 번 교훈은 그것들을 충분히 소화했을 때 저절로 나타날 거요"
이 말씀에 내가 대꾸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자꾸 외부에서 찾는건
우리 근원에서 단절되고 버려진 듯이 느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자애롭게 웃으면서 근원과의 연결은
다른 어딘가가 아니라
성스런 가슴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어서 그는 구조의 분할하는 성격과
그것의 여러 환상들에 대해 설명했다.
"물질 존재로 있는 모든 것이
같은 금강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면,
구조란
한 형상을 다른 형상과 구별해주는
개개복합 배열들의 제공자로 볼 수 있소,
유형상의 그런 차이들은 새와 나무, 혹은 수은과 철을 비교 했을 때 알 수 있듯이 각 물질존재들의 고유한 특성이요.
그런 물질 형상들은 더 넓은 유형들의 문맥 안에서 상당 기간
안정된 상태로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한시적이오. 따라서 한시적 존재로서 그것들은 당신의
삶을 지휘할 자격이 없소"
예수는
당신을 온전한 존재로 보는 것이
성령의 의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구조는 대단한 사기꾼이어서 당신이 구획화되고 여러 부분들로 나누어진 듯이 느끼게 한다. 당신은 근본에서 사랑일 뿐 아니라. 당신이 지금껏 사랑했던 모든 것과 당신을 사랑했던 모든 것이 누적된 존재다 따라서 당신의 사랑는 잠재성으로 만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도 유지된다. 예수는
사랑이 지금 순간에 존재하는 신성한 에너지 일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잠재성이기도 하다는 사살을
내게 확실히 깨우쳐주었다. 달리 말하면 이렇다.
"사랑은 끝없는 삶의 근워이죠.
사랑은 당신의 이름이고,
당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당신을 사랑한 모든 이,
당신의 삶을 함께 나눈 모든이,
당신이사랑으로 존재케 했던 모든 것이 당신의 품성을 이루고 있소
이런 게 바로 당신이요
. 당신이 이런 사랑에서 분리되는 일은 절대 없소, 당신의 불멸성이 사랑이거든요. 반면에 구조는 당신의 삶이 시간과 공간의 단편들로 잘라져 있거나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들에 속하는 다른 어딘가에 보류되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 구조가 지배할 때만 당신 자신인 전체성에서 당신을 떼어낼 수 있소
이 분리의 환상을 깨부수고
영혼에게 그것의 단순한 온전성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게
성령의 권능이오.
성령이 현존할 때,
당신은 창조주와 하나이고,
당신 자신인 모든 것이 개인적 통합성 속에서 재결합됩니다.
온전함은 거룩한 것이오,
온전함은 치유요.
이것이 도든 기적의 본질이오.
그 기적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아니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든요. 예전에 찢겨져 나갔던 모든 것이
온전함은 사랑을 떠받칩니다.
이 공유된 유대를 통해 사랑은 어떤 것이라도 치료할 수 있소."
한 여자가 예수의 옷을 만지고 병이 나았다는 성경에 적힌 사건을
내가 지적하자 예수가 대답했다.
"그녀는 내 사랑을 만지고
병이 나은 거요.
반면에 당신의 삶을 조각들로 잘라내 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 맞서게
만드는 게 구조의 속성이오. 당신은 이런 구조를 주인으로 삼겠소?"
예수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저리를 치면서 부정하고
난 나는 곧바로 물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이 여기서 나오는 건가요?" 이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확고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은
신과 분리되고,
자신인 사랑과 분리되고,
사랑이 어떤 식으로 우주를 지배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하지만 이미 분리된 상태에서 가장 통탄할 오류는
구조에 봉사하는 것이오. 구조는 잔혹하고 이간질 잘하고 배신을
알삼는 주인이오. 그러나 분리 상태일 때의 구조는
당신을 지배하고자 하지만, 온전함을 되찾고 나면
역설적이게도 겸손하면서도 헌신적인 종복이 되죠.
알다시피 이렇게 되는 건 지휘의 보편법칙 때문이오.
우주와 금강입자들가 한 영과 가슴과 삶의 모든 것을 지휘하는 건
사랑이오. 따라서 이 권능에서 분리되면
당신은 책략에 의지해서 지배하지 않을 수 없소.
바로 여기에 구조가 당신을 지배할 수 있는 열쇠가 있소,
당신이 삶을 지배하길 구하거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구조에게 굽실거리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구조는 당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되지요
이런 추구의 비극은 그런 식으로는 절대 삶을 지배할 수 없다는 거요.
반면에 당신들은 신의 자녀로서 그것을 지휘할 더 큰 권능이 있소!"
이 말씀은 예전에 내가 십대 때 겪은 한 사건을 내 머리 속에
떠올려 주었다. 그 당시에 내가 즐겨하던 스포츠는
로데오와 승마였는데 그 중에서도 내 전공은 베럴 레이싱
(장애물 넘기)이었다. 어느날 내가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 든 카우보이 한 사람이 나와내 암말이 겪고 있는
문제가 뭔지 눈치챘다.
내 암말은 타이밍에서 느렸고 커브에서 너무 크게 돌았다.
나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 노인이 나더러 울타리 쪽으로 와보라는 몸짓을 하길래
나는 훈련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에 부풀었다 . 사실 그는 그렇게 해주었다.
비록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담배연기를 후- 내뿜고 나서 느린 텍사스 말투로 그가 물었다
. 이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지?"
그당시 나는 '뻬빼 마른'편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겨우 46킬로그램밖에 안 나간다고 솔직히 고백하자. 내 암말을 가리키면서 그가 물었다.
"지금 그 방식으로 45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말을 급선회시킬 수 있다고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거지?"
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 이따위 질문이 다 있어?
' 내가 그 말을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려는 순간,
내 안의 뭔가가 속삭였다.
'이 사람은 내가 알아둬야 할 핵심에 다가서고 있는 거야 이 사람은
50여 년 동안 챔피언들을 훈현해왔어' 하지만 나로서는 여전히
그가 나를 기죽이려는 건지, 아니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도움을 주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강한 호기심이
그 기회를 잡게 만들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일 네가 저 말더러 네 방식으로 하는 것과
자기 방식으로 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저 말은
십중팔구 그 양자를 절충해서
어정쩡한 방식으로 달릴 게 틀림없어 그러면 너는 설득이나 힘으로
그 차이를 메꾸려 할 테고 말이야. 하지만 이런식으로 해서는
절대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
비결은 말과 하나가 되는 거야
네 방식이 곹 말의 방식이 되도록!
그렇게 되면 너는 말을 46킬로그램 더 쌀찌우는 셈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어 질주하게 되지" 그 다음부터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는 나아가 네게
'하나됨'의 몇 가지 비결을 가르쳐주었다.
이 이야기를 예수에게 했을 때,
그의 현존은
내가 그 승마와 교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예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대단히 특별한 진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진리란,
지배가 분리의 도구라면
지휘는 하나됨의 도구라는 것이다!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전쟁처럼 헌난한 상황에서도
효율적인 지휘의 관건은
단결심과 공동의 대희에 있음을 안다.
신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사랑이 가져다줄 수 있는 권능을 주었지만,
지배와 짝을 이루면 그 권능은 줄어든다.
반면에 지휘와 짝을 이룰 때는 그 권능이 배가된다.
이런 깨달음은 놀랍게도 예수가 내게 가르치고 있던
구조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가 그 직전에 말했듯이
구조는 분리의 도구이고 지배 절차의 확장이다.
예수는
구조는 질병과 고갈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쇠약하는 구조 들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수리해야 하는 부담을
끝없이 지운다.
몸은 사랑과 구조, 양자로 이루어진 복합 형상이다.
권능들의 보완이라는 이 모순은
중심 결합인 영적인 가슴과
그것의고귀한 지성간의 결합을
중심으로 할 때라야 비로소 해소된다. 예수가 덧붙여 설명했다.
"구조가 균형을 잃거나 자기 자신과 갈등하면,
당신은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구조가 사랑과 갈등할 때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이 찾아오는데,
당신은 그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모르죠.
답은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알고 어떤 상황이라도
처리할 수 있는 가슴의 굉장한 능력을 이해하는 데 있소,
구조는
가슴을 강하게 만들 때를 빼고는
가슴의 상대가 되지 않지요"
그는 자주 상기시키곤 했다.
"가슴을 키우시오. 찬탄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가슴의 긍정적 충격을 강화하시오. 용서를 표현하는 것으로
당신 몸과 존재와 환경의 부정적 충격을 상쇄시키며
하루를 시작하시오.
모든 부정적 충격은 마음을 역논리 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말고 당신이 삶의 모순들을 빚어내기 시작하는 게
이런 방식임을 기억하시오.
사실 마음은 당신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면,
그 문제의 진일보한 측면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절대 해결 쪽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 자체를 영속화시키는 쪽으로 나가죠.
결핍을 믿는 사람은
결핍이 현실이라고 믿도록 자기 마음을 프로그램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결핍을 메꾸기 위해 많은 돈을 벌어야 하죠.
결국 그 사람은 결핍 또한 지속되게 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어야 하죠.
결국 그 사람은 결핍 또한 지속되게 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게 됩니다.
계속해서 결핍에 투자하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자산을 공급이 한정되거나 통제되는 품목들에 배치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그렇게 많지가 않아. 그러니 항상 비싼 값을 유지할 거야'라거나 '요지에 자리잡은 부동산의 양은 한정돼 있어 그러니 비싸더라도 당연히 거기에 투자하는 게 바람직해'라고 하면서요
그는 '지레'의 경제학으로 자신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데,
그러고 나면 그 '지레'가 그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지요
그는 더 많은 돈이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지레를 확보하도록
쉬지 않고 일하지만, 결국에는 삶에 의해 튕겨나오고 맙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는 절대 풍요의 수숫께끼를 풀 수 없소.
그냥 결핍의 믿음이 빚어낸 결과에 맞서서 자신을 방어할 뿐이죠!
결핍은
구조의 한 측면이어서
아무런 해결책 없이 언제까지나 자체 지속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크고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구조란 건 쇠하기 마련이오.
구조의 이런 자기 소모적 성격을 증명해주는 게
열역학의 원리들이지만,
오히려 우주는 무한히 팽창하고 있소,
우주의 풍요에는 끝이란 게 없소.
이 외관상의 역설은
오직 사랑의 권능으로만 설명할 수 있죠"
가슴을 강화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무구한 인식이다.
삶을 살아보기도 전에
삶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는 데 매달리지 마라
예수는 내게 자주 "살고 체험하고 즐기길" 권했다.
새로운 인식과 모험들이 가져다줄 놀라움을 맛볼 충분한
용의가 있다는 점만 빼고는 아무런 여행 안내서도 없이
그냥 주말여행에 '나서는'것이 때로는 정말로 멋진 여행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물론 사업상의 출장과 장기 휴가를
구조의 지침에서 도움을 받아 계획하는 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여행들이 자신을 재충전해주는 여행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수는
그림과 관련된 문제들에서도, 나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판단이나 선입견없이 그냥 보게 만드는 것으로
내게 여러 번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내가 '다시 생각해보는
' 데서 빠져나오도록 슬며시 주의를 주곤 했다.
"숙고해보는 건
잠시 뇌두고 그냥 그렇게 하시오" 이런 그의 충고를 따랐을 때,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나서 행동했을 때 걸리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쉬운길을 찾는
마음의 작용이
오히려 상황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잦다는 걸 안다.
그런 책략은 결국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무엇보다
지휘관으로서 우리의 지위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예수는 말했다.
"주저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지휘관으로서의 당신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긍정적 추진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오.
자신이 하는 일과 더불어 있으면서
무구하게 그 과정을 즐기시오.
어린이들은 이렇게 하지요
천국문을 여는 열쇠가 이것이오.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당신 삶의 이 순간과 이 자리를 소중히 품는 열쇠가 이것이오.
뭘 하든 것을 맛보시오. 풀밭에 앉아서 그것의 촉촉함과 시원함,
자신을 건드리는 상큼한 산들바람을 맛보시오.
혹은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풋풋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그 대화의 따스함을 맛보기만 해도 좋구요"
예수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뭇가지에 달리 나뭇잎 수를 세는 일 같은 걸
내게 시키곤 했다. 그리고 나면 내가 마음을 써서 계산할 기회를
채 잡기도 전에
"다시 내쪽을 보고 얼마나 많은 나뭇잎을 보았는지 말해보시요"라고
말해 내 주의를 되돌렸다.
내가 시간이 짧아서 나뭇잎 전부를 보지는 못했노라는
식의 운을 떼지 않고 그냥 대답하면
그건 언제나 옳은 답이었다. 그는 내 마음이 개입하기 전에
나를 가로막곤 했던 것이다.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단순성은
당신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만 존재할 수 있소"
나는 이에 대해 단순한 한 사건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수준의 의미들을 숙고하는 것이
큰 깨우침을 줄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예수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에는 다른 것의 상징이나 생각의 재료가 될 필요 없이
오직 그 자신일 권리가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있음은
주권이어서 정당화될 필요가 없소"
예수가 이렇게 언급했을 때,
나는 의미가 좀 더해지면 가치도 더해지리란 전제 하에
내 그림들에서 사람들이 상징적 의미들을 '읽어낼' 때
경험하곤 했던 오래된 방어심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오히려 나무를 그냥 나무로서 그렸던 것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예수가 대답했다.
"나무가 나무인 것이 무슨 잘못이겠소?
상징적인 해석이 재미있고 의미 있을 수 있지만
그냥 있는 것보다 권능 있는 건 절대 아니오.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뜻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소,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존재할 권리를 부정할 때,
당신은 동일한 자신의 권리까지 침해하는 것이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냥 자신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죠.
모든 곳에 여러분의 의미와 중요성을 습관적으로 부여하는 건
삶에서 권능을 훔쳐서 마음에 주는 거요.
그 모든 것은 사랑의 권능에 의해 발현하지,
외적 의미 일정에 봉사하기 위해 발현하는 게 아니오.
당신의 정원에서 솟아나는 작은 잡초가 생명을 얻게 된 건 그것의 모체가 씨앗을 남겼고, 환경이 유리했으며,
모든 존재의 성스런 근원이 한낱 잡초의 참나 현존조차도
껴안았기 때문이오. 그렇다고 그것이 대립의 상징이라거나
음울한 운명의 확정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하지는 마시오.
당신 정원에 잡초가 솟아오른 건 그것이 그냥 거기에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당신 그 잡초를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런 속에서 그것을 축복하시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제거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축복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존중하니까요.
축복은 축복을 존중하구요.
당신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이 방법을 역동적 지침으로 살기만 해도
삶의 많은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오.
존재의 우월성이란 게 이런 거요.
성스런 세 요소, 즉 존재의 세 기둥이 태초부터 있어왔소,
그 첫번째이자 궁극의 요소가 신성의 근원인 '참나'요.
그다음이 신성의 영적 현존인 무구함이고,
세번째 요소로 신성의 발현된 현존이자
신성의 창조력인 사랑이 있소,
존재의 이 세 측면 모두가 인간에게도 확장되어
그가 자신의 축복과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해주죠.
'창조 행위들' 속에서 일곱째 날의 목적은 행동하기를 그만두고
인식하는 거요. 이것은 창조를 끝냈다거나 창조주가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그것은 존재의 주권성으로 지휘한다는 궁극의 계획과...
.사랑으로 있음을 드러낸다는 궁극의 계획을 가동시킨 것이었소"
예수는
우리가 실존을 자각할 때.
있음과 행함과 가짐의 자연스런 상호관계를 인식한다고 설명했다.
그 참된 우선순위에서 우리의 있음은 우리의 사랑이고,
이로부터 우리의 능력이 나오고
다시 이 능력에서 우리가 삶에서 이루는 성과들이 나온다
하지만 구조의 세계는
우리더러 행하려면 먼저 가져야 하고,
우리가 되어 있으려면 먼저 행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전문성의 경우라면 이런 우선 순위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전적으로 이것에만 좌우될 때, 그것은 사랑을 자신의 동기로
삼지 않음으로써 참된 능력을 결여한 자격증 전문가들만을
길러내게 된다. 순위의 이 같은 역전은 '지레'를 위한 물질 소유와
진솔한 성취의 대용물로서 이 '지레'의 사용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고 나면 참된 있음이 아니라 '
허상의 창조'가 그 마지막 산물일 것이고.
예수에 따르면,
우리가 자존심과 자부심, 확신과 안녕을 경험하는 것은
에고가 아닌 사랑 덕분이다.
'에고는
당신의 사랑을 대신한 허상이나 망상에 권능을 부여한 것이요.
영예라는 허상들은 당신의 안녕과 아무 관계도 없소, 오히려
실제로는 당신의 안녕을 고갈시키죠
예수는
우리가 소유를 가지고 삶의 행로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된다고 말했다.
자화상들이 겹겹으로 쌓일 것이기에 그것들끼리 평온을 유지하거나
그것들을 단순한 있음으로 녹여낼 방도가 없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가 이 방향을 뒤집어 우리 자신인 사랑에 근거해서
자기 이해를 확립하면, 그 모든 파생 이미지들은 우리를
지배할 힘을 잃을 것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세상은 뭔가나 어딘가에서 끌어온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실존을 설명하려는 길 잃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것이 부정적인 뭔가나 어딘가라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 자신이 누군지 모를 때는
그게 무엇이든 무(無)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진실은 당신들은 사랑이고,
사랑의 근원인 아버지를 빼고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연원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이런 깨달음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소,
그건 당신들이 각자의 인생에 대해 갖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니까요.
사랑은 있음의 최고 권능이오.
삶의 권능으로서 사랑을 지혜롭고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경영하는 것이 선이고요.
이 때문에 일부 질서와 지침들은 유용할 수 있소, 하지만
구조와 구조의 요구, 그리고 구조가 당신을 위해
발명해낸 정체성에 강박적이고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많은 고통과 아픔을 일으킬 수 있소.
연원: 사물의 근원. 처음 입교할 때 이끌어주는 사람
복합형상들이란 건 무릇 한시적이기 마련이오.
삶이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가려면 그것들은 무너져야 하고
바뀌어야 하오. 그런데도 그렇게 무너지는 구조와 집착 대상들에
매달린다면 그건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는 경험이 되고 말 거요 그것이 몸에 대한 집착이든 사회적 집착이든 사업상의 집착이든
상관없이 말이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사랑의 관점에 서서 당신들은 그 불가피한 변화가
자신과 남들을 더 낫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도록 만들 수 있소,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구조를 자신의 종복으로 만들었을 때만이요.
절대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구조를 관찰해야 합니다
그건 실존기간 내내 발견되는 조직의 구성요소거든요
. 예를 들면 그건 왔다가 가는 물질 형상들의 복합 배열에 불과하오.
또 삶을 이해하거나 경영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마음이 만들어낸 공식의 한 측면이기도 하구요 인간들은 구조를 매개로 공식화되는
실존의 다양한 층들에 마음이 설정한 다양한 요소들을 덧붙였죠.
구조가 당신에게 봉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의 한계를 기억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당신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놔둔다면
구조가 당신을 억누를 것이요"
그래서 내가 물었다. "구조의 영향이 지나쳤던 경우가 언젠가요?"
예수의 대답은 명쾌했다.
"음, 구조의 영향이 지나쳤던 경우라면,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는 증거가 이미 밝혀졌는데도
세상에 그런 믿음을 지속시켰던 때를 들 수 있겠죠.
휴일이 의미를 상실하고 관례로만 지속될 때도 그렇구요
. 또 정부가 자기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속할 때도 구조가 너무 멀리 나간 경우죠.
무릇 관료제도가 봉사하기를 그만두고 자기방어적이고
자기배불리기 식이 되기 시작할 때, 사업이란 게 서류사무만 보면서 가치와 생산이라는 자신의 의미를 상실할 때, 학교가 오직 이론만을 가르치면서 삶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을 때도 두말 할 필요 없이 그렇소.
구조가 너무 멀리 나가는 건 구조가 주인이 될 때, 다시 말해
결정요소가 될 때요. 구조는 결국에 가서 당신을 배반하고 말 거요.
왜냐하면 구조는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요. 구조는 한시적이오.
우주의 자연스런 구조들조차 한시적이거늘,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일정을 뒷받침 할 뿐인 마음이
만들어낸 공식들의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가 계속했다.
"참신한 사고방식이 일어나려면 과학의 이론구조가 느슨해져야 하고,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나려면 산업구조가 느슨해져야 하오,
사람들의 책임감이 커지려면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고요. 지상에 윤리에 대한 존중심이 남아 있도록
하려면, 나쁜 짓을 했을 때 받을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좋은 일을 했을 때 기쁘기 때문이라야 하오.
당신이 더 이상 가슴의 지휘를 느낄 수 없고
가슴이 당신의 삶을 권능있게 해주지 못할 때도
이미 구조가 너무 멀리 나간 거요.
구조가 그토록 지배하고자 애쓰는 건 그것의 한시성이 한없는
두려움을 낳기 때문이요"
"마음이 만들어낸 구조는 그냥 배신자 같은 건가요?"
" 그 이상이오, 왜냐하면 당신들은 거의 항상 그것들을
현실과 혼동하니까요. 마음이 구조를 좋아하는 건 구조가
논리를 대변하기 때문이오.
또 그와 더불어 구조는 마음이 자기 나름의 복합체 속에
짜넣을 수 있는 유동 부분들을 마음에게 주죠, 그러면
마음은 집단의 동의를 거쳐 자신이 만들어낸 발명품들을
현실로 확정합니다.
당신들이 현실이라 부르는 것 중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전혀
현실이 아니오. 당신들의 동의에 근거해서 마음이 낳은 구조들에
불과하죠.
하지만 가슴이 당신의 삶을 다스리기 시작하면,
당신은 십중팔구 마음이 만들어낸 구조들을 거의 갖지 않고
살아가는 쪽을 택할 것이오.
아니면 적어도 어떤 구조는 유지하고 어떤 구조는 버릴지 식별하는 방법을 알게 되든가요.
구조에 대한 마음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구조의 위험스런 경향성을 전혀 보조 못하죠"
예수가 덧붙였다.
"가장 위험스런 구조는
당신이 정체성이라는 형태로 내면화하는 구조들이오
. "나는 이것이야. 나는 저것이야. 나는 사회에서 이런 지위를 가졌어.
나는 그런 유산을 물려받았어" 라는 식으로요.
구조를 내면화하면
당신이 구조를 갖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당신을 '갖게'됩니다.
왜냐하면 내면화된 것은 자신에게 보이지 않거든요.
내면화된 구조는 당신이 자신의 무한성을 인식하고
불멸성을 자각하는 데 있어 주된 장애물이요.
외적으로 구조에 순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지 않지만,
그것을 내면화할 경우 당신은 자각을 크게 잃고 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당신은 자신을 구조의 산물로 여길 테지만,
이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오.
당신이 자신을 오직 사랑으로 여길 때,
당신은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이외의 다른 모든 자기규정들은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한시적일 수밖에 없소.
한시성은 죽음의 두려움속에 살면서,
그것을 자진해서 따르는 참가자들 모두에게 두려움을 주입하는 것으로 생존하죠 이 두려움에는 아픔과 고통이 함께 따릅니다.
구조를 내면화하고
나면 당신의 삶은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권능에 좌우당할 것이오
. 하지만 누구도 이 둘 다를 섬길 수는 없는 법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애쓰긴 하지만..."
"그 말씀은 사랑과 두려움이 서로 대립물이란 뜻인가요?"
"전에도 말했지만, 사랑에는 대립물이 없소.
사랑은 이분법을 끝내는 신성한 용매니까요.
하지만 사랑이 기회일 수는 있소, 따라서 사랑은 대안을 갖지요"
"대립물과 대안이 어떻게 다른가요?"
"대안이란 당신이 중점을 두지 않기로 했던 또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요. 따라서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거나 전혀 없소,
신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통해서, 또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창조를 확장해가죠. 따라서 대안은 불가피합니다.
알다시피, 단식하는 건 먹는 것의 한 대안이오.
양자를 다 경험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경험할 수는 없소,
이 둘은 선택의 산물이니 만치 그것을 대립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대립하거나 양극성에 힘을 실어주는게 아니오.
그냥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우는 거죠.
대안은 당신에게 자유의지와 선택가지들이 주어졌다는 사실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대안은 삶을 권능 있게 해주고 삶을 바뀌게 해주죠.
예컨대 한 남자의 삶은 결혼을 하고 나면 굉장히 많이 바뀌죠.
그가 삶에서 중점을 두는 것도 그가 독신이었을 때 중점을 두었던 것과는 전혀 달라지죠. 아이를 가질 것인가 아닌가도 삶의 대본을 바꿀 또 하나의 선택이 되겠죠.
어떤 선택들은 워낙 기본적이어서 그것에 근거해서 패러다임들이
세워지고 나면, 거부당한 대안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죠.
반복하기가 가장 어려운 선택들이 이런 것들이오.
다른 대안이 없는 듯이 보이니까요.
당신 자신이 진실로 누군지와 사랑이 당신의 핵심 실체라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거요!
지금껏 당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선택은
당신 자신인 사랑이 되는가 아닌가였소..."
예수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 공백을 말로 채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내게 앞의 이야기를 놓고 잠시 생각해볼 시간을 주고 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존재들은 이 선택에 어중간하게, 부분적으로만 응하오.
엉거주춤한 상태로만 인정하면서 말이오.
판단 보류의 이런측면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과 구조,
꾸며낸 정체성, 생존 차원의 사활 투쟁으로 가득한 수수께끼의 심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건 심한 쓰라림과 미움의 과정이었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중 어떤 것도 사랑의 대립물은
아니오. 그부정적인 감정과 체험 모두가 그들 자신인 삶을 존중하는 대신 다른 대안을 말하자면 사랑을 부정하는 대안을 선책한 결과요........
하지만 사랑은 그 모두를 녹일 수 있소,
그렇지 않고 사랑이 그런 부정성과 대립하는 것이라면,
사랑이 존재하더라도 그 차이에 힘에 실어주고
양극성에 불을 지를 뿐 아니겠소!
대립이라는 주제 자체가 구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소.
당신이 대립으로 인식하는 건 한정된 인식 영역 안에서의 겉모습에
불과하오. 그림 전체를 본다면 그 양극성은 저절로 무너지고 말죠.
사실 대립이란 건 당신이 그 연결고리를 보지 못하는
잘린 원에 지나지 않소.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책상 위에 놓인 평면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 아이는 '지구의 양 쪽 끝'을 운운할 수 있소,
이때 당신이 해야할 일은 그 지도를 집어든 다음,
둥글게 말아 육지와 바다가 어디에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전부요. 밤과낮을 대립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소,
밤낮이 급작스럽게 바뀌는 골짜기에 산다면 특히나
그렇게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 뒤바뀜이 서서히 진행되는
산꼭대기에 산다면,
당신은 그 둘의 이어짐을 관찰할 수 있을 거요 만일 당신이
달에 가서 지구를 본다면 여러 국면들을 가진 둥근 원으로
그 과정을 훨씬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거구요. 이건 기술적인
대립들도 표함해서 어떤 '대립'에나 해당되는 것이오"
예수는 내 팔레트쪽을 쳐다보고는 내가 쓰고 있던 색깔들을 놓고
이야기했다.
"검정은 하양의 대립물처럼 보이죠.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것이 검정인 반면, 하양은 빛을 백프로 반사하니까요. 하지만 사실 이 스펙트럼은 검정과 하양 너머에까지 펼쳐져 있소, 검정은 어두운 반투명쪽으로 나아가고 하양은 밝은 반투명쪽으로 나아가다가 둘은 결국 완전 투명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원은 완결되죠.
모든 대립은 그것들을 잇는 원을 복구하는 것으로 녹여질 수 있소.
그것들을 양극성으로 설정하는 것은 무지와 이기적인 구조의 소치요
. 가장 기본되는 연결은 사랑이어서
, 사랑이 있으면 다른 연결들도 찾아내기가 쉽소,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연결에 필요한 많은 것들이 오랜 세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이처럼 사랑은 양극성을 끝내게 만들지, 대립물을 갖는 게 아니오.
사랑은
어떤 양극성도 갖지 않지만,
당신이 사랑이 아닌 대안을 선택한다면
사랑을 대신하는 구조들은 대립물로 가득해지고 맙니다.
두려움은 구조에 내몰리며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감정이요.
구조란 건 한시적이어서 언제나 위태롭거든요
. 또 미움은 구조에 휘둘리거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태도이고요. 미움이란 건 사랑이 되돌아오지 못하게
방어하는 것에 다름아니오.
사랑은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정복합니다.
사랑은 세상 속에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일부는 아니오
. 두려움과 미움과 그것들에서 나오는 다른 모든 해악들도
파생물일 뿐, 으뜸 원리는 사랑이요.
사랑은
우주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두말 할 여지없이 세상 구조들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소.
태초에는 어떤 약도, 어떤 두려움도, 어떤 미움도 없었소
. 있는 건 오직 하나인 사랑과 하나인 잠재체Body of potential,
한영뿐이었소, 그러다가 발현이 형태를 띄기 시작하자
자유의지가 사랑의 모든 측면으로 확장되어갔소.
생명이 되고 삶을 체험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자신을 사랑으로 알기 위해서요. 그리하여
굳이 원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본성을 부정하는 선택까지 가능해졌소. 그리고 위태로움의 모든 '씨앗들'이 싹튼 게 이 최후의 선택에서요"
이 최후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선물이요.
그것이 없었다면 당신들은 사랑의 한 측면이면서도 그 이상의 창조력은 갖지못했을 테니까요. 말하자면
당신들은 신의 창조물이긴 할 망정, 신의 자녀가 되지는 못했을 거요.
일단 사랑이
당신들의 본성인 동시에
당신들의 선택이 되고 나자,
양극성의 모든 잠재력이 당신들 삶에서 말소되고,
당신들은 지휘권을 갖게 되었소.
하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할 때
달콤한 감정이나 사모하는 마음, 다정함 따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하오. 이런 것들은 개인적 애착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반응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죠. 반면에 내가 말하는 사랑이란,
작용이자 권능이며 순수 의도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적나라한 핵심이오. 당신 나름의 몰입까지 포함하여
당신이 적나라하게 진솔해질 수 있는 모든 주제가 당신이 대단히
사랑하는 주제들입니다.
사랑이 주인일 때.
구조의 세상에 관대함과 정직함이 찾아옵니다.
반면에 구조가 지배하면
삶은 언제나 연기와 거울로 가득한 극장이 되고 말죠.
구조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게 되면 본질적으로 기능장애일 수밖에 없소. 왜냐하면 그건 (상황을 )일으키지도 고치지도 못하니까요
. 비록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것으로 고칠 수 없는 구조의 오류는
없지만요.
구조는 형태와 용이성, 보존성을 줍니다 하지만 그뿐이오.
자신이 사랑임을 잊거나 부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거기서 분리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구조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거나 하지 않죠.
그러니 구조가 연륜을 쌓아온 건 오로지 인간의 태만 때문이었소
구조가 자신의 퍄생물들을 갖긴 하지만
뭔가를 창조한 적은 없소
이것은 어느 경우에나 해당되지만, 특히나 인간과의 관계에서 사실이오. 인간은 구조가 특정한 방식으로 그 유형들을 형성하고,
그것의 완성품으로서 인간으로 진화시켰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요.
구조가 생산을 촉진하긴 하지만 생산 자체를 일으키지는 않거든요.
구조는 우주의 은총,
즉 우주의 불멸자(不滅者)가 아니라
우주의 회반죽mortar이고 우주의 필멸자요.
그것은 조직의 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소,
구조를 자기 인식의 한 측면으로 내면화하는 건
당신의 힘을 그것들에 넘겨주는 것에 지나지 않소
이건 아무 의미도 없소 왜냐하면 구조 속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불멸성, 무한성에 대한 어떤 체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오.
자신의 불멸성을 회복하고
무한성을 인식하는 것은
사랑을
자신의 참된 근원으로 아는 것과 분리될 수 없소.
구조는
당신이 자신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쩐 정체성으로 알기를 원하죠.
하지만 정체성이야말로
당신의 불멸성을 가로막는 것이오.
모든 정체성은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오,
정체성을 놓아버릴 때
당신의 권능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오.
어떤 것이 당신의 삶을 규정하거나 설명하도록 놔둔다는 건
그것을 당신의 존재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요.
자신의 삶을 역사나 외적 상황들이나 축적된 정체성들의 산물로
믿는 사람은 구조를 내면화한 것이고요.
개개인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권능에 비하면
그 사람이 왕자로 태어났는가 거지로 태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어느 쪽 조건이든 똑같이 무의미하오!
그런 구조들을 내면화해서 얻게 되는 건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구조를 내면화했을 때,
입게 되는 주요 손실은 세 가지나 되죠.
거짓 정체성으로 자신인 사랑을 대체하는 것이 그 첫번 째손실이고,
끝도 없는 조건들이 당신을 무구한 인식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그 두 번째 손실이며, 그리고 당신 스스로가 필멸하는 구조의
동반자가 되는 ㄴ것이 그 세 번째 손실이요"
사실 나는 이 가르침을 내 개인의 경험으로도 설명 할 수 있다.
나는 화가로서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 속에
내 가슴과영혼을 심기에,
이따금 사람들은 '글렌다. 그 그림을 팔 수 있겠어?"라고 걱정스럽게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파는 건 캔버스와 물감뿐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내 창조의 자국들을 팔았던 적은 한번도 없다.
내가 창조했던 모든 것을 나는 몇 번이고 재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일개 화가의 경우에도 사실이거늘, 우리의 성스런 근원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아버지가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의 사랑이 남긴 자극에서
우리를 몇 번이고 다시 장조하고 또 창조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의 불멸성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참된 이름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예수는 말했다.
"삶이 움직이는 사랑이라면, 시간은 살아남고자 애쓰면서 움직이는 구조에 불과하오!
당신이 구조를 농도 짙게 내면화하고 나면, 죽음은 필요한 과정일뿐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지요"
그는 죽음을 "쓸모 없는 정체성들을 위해서 집을 청소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건 우리가 구조의 종복으로 있는 한, 죽음과 시간의 환상이 계속 우위를 점하리란 뜻이다.
"사실 당신들은 시간 흐름의 일부가 아니오 그런 식으로 보이는 건 당ㅅ인들이 구조에 연루되어서일 뿐이오"
대단히 명확하고 확고하게 그가 선언했다.
"모든 참된 있음은
'지금 속에' 있소,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요, 따라서 시간은 아무런 있음을 갖지 않소.
시간을 위치시켜 보시오.
시간을 공간 속에 집어넣고 위치를 정해보시오.
당신은 무엇을 갖게 됩니까?"
"지금을요"
"맞았소, 실제로 존재하는 건 '지금'이오.
모든 있음의 고향이 이 지속하는 '지금'이오.
구조는 지속성을 갖지 않소, 따라서 구조의 입장에서 시간은
구조가 태어나고 살고 죽기 위해 요구되는 과정에 불과하오.
당신들이 흔히 시간이라 부르는 그 과정은
움직이는 구조에 지나지 않소 그건 살아남으려는 구조의 노력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시간과 무관합니다.
삶은 움직이는 사랑이니까요.
당신들이 인식하는 시간은 자신의 지속 양태를 만들어내는 구조의 시작이고 진행이며 끝이요. 자동차가 제조되고 나면
그것은 어떤 목적에 봉사하다가 닳아가기 시작합니다.
수리비 청구서만 자꾸 쌓여가다가 결국 고철이 되고 말죠.
폐차장에서 제철소로 넘어가면 그 자동차는 이제 다른 뭔가로 변합니다. 그 자동차의 일생을 묘사하는 운동 주기를 시간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당신으로서는 시간잉 존재하지 않는 거죠.
설사 당신이 그 중 어떤 부분을 집어내더라도 당신이 갖게 되는 건
지금이 전부요.
우주 법칙과
구조 경향 간의 차이를 마침내 알 때,
당신은 크나큰 명징성을 얻게 될 것이오. 그렇다고 구조를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마침내 구조를 당신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수 있는 거죠.
또 구조의 필멸성이 당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당신의 운명을 구조의 운명에서 떼낼 수도 있고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당신이 사랑으로서
자기 존재의 온전성과
종복으로서 구조의 지위를 절저히 확신하고
나면,
당신이 산에게 '이리오라'고 말하면 산이 올 것이고
바람에게 '잠잠해져라'고 말하면 폭풍이 그치리라는 사실이오.
천지만물의 열쇠가 이것이오.
[출처] 끝없는 사랑 162쪽 구조가 자신의 파생물들을 갖긴 하지만
뭔가를 창조한...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출처] 제 4장 당신 자신인 사랑|작성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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