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 2장 그가 말하다 본문
2장 그가 말하다.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예수의 현존 자체가 경외스런 일이다. 게다가 나는 그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자상하며 심지어 유머러스할 수 있는지 알게 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런데 내가 그와 함께한 경험 중에 가장 내 마음에 드는데도 최근까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한 측면이 있다. 4개월 이상 계속된 그 만남과 관련해서 특히나 멋졌던 측면은 친구 사이가 흔히 그렇듯이 우리 두 사람도 사사롭게 서로 나누는 관계, 즉 친근한 관계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 의식적이고 사려깊은 교감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주제들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화는 다른 사람하고였다면 4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도 나눌 수 없을 만큼 풍부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위릐 이런 교감을 그가 나에게 주는 사사로운 선물 정도로만 여겼다. 만일 그 당시 누군가가 그 만남의 더 깊은 의미에 대해 물어봤다면, 나는 "결국은 모든 게 사랑으로 귀착되지 않겠어요?"라는 정도로만 대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만남의 이 부분에 대해 완전 묵비권을 행사했던 건 아니다. 이따금 나는 남편인 브라이언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예수와의 대화 일부분을 약간 언급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들의 기대치에 잘 들어맞는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만남이 생생한 현실이고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지속성을 가졌다면, 말로 옮길 수있을 정도의 교감이 있었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이것이 그들의 놀리였기에, 우리가 함께한 시간 동안에 나눈 폭넓은 대화를 침묵이라는 빈칸으로 감추고 싶었던 나는 사람들에게 전혀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일단 수문이 열리고 나면 그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올 질문들, 무엇보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같은 질문들을 막을 방도가 전혀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1996년 봄, 예수가 다시 나게 나타나더니 그 부분도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나로서는 그의 말을 중개하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가 그의 메시지를 공개하길 꺼린 데는 나름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예수의 메시지란 게 실상은 내가 던진 질문과 문제 제기와 의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졌다는 데 있다. 내가 던졌던 물음들은 많은 점에서 내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이어서. 그에 대한 대답 또한 내 존재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그의 이야기들을 생각할 만큼 주관적이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만도 4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터였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위해서 그의 현존을 여과하거나 예수의 대해 생각할 바를 해설하는 것 역시 내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거니와 그런 소임을 자처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바라는 쪽은 오히려 마치 여러분이 그레게 직접듣고 있는 듯이 그의 메시지들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여러분은 그것들을 각자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다시 말해 예수에 대한 당신의 이해나 관계에 따라 그 메시지들이 당신의 가슴과 마음에 직접 닿도록, 내가 이 책에서 예수의 말을 긁은 글씨로 표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은 원래 문맥에서 그 메시지들을 이해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대화 방식의 한쪽 당사자인 내가 그것들에 던진 뉘앙스나 의미에서 그것들을 따로 떼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책은 논문이 아니라 대화록이란 사실을 잊지말고, 이 메시지들을 가슴으로 받길 권하고 싶다. 예수는 새로운 성경을 쓰고 있지도, 새로운 '상상수훈'을 설파하고 있지도 않다. 그냥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대화란 게 으레 그렇듯이, 우리 대화에도 많은 곁가지들이 있다. 미리 정해진 어떤 일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이야기의 흐름이 이끄는 대로, 또 우리 가슴이 끌리는 대로, 한 가지 주제에서 시작된 대화가 여러 관련 주제들로 두서 없이 이어지는 경우들도 많았다. 게다가 우리 관계가 발전해감에 따라 대화의 힘과 길이와 강도 역시 갈수록 커져갔다. 덕분에 나는 여기서 온갖 보석들을 건졌다. 그리고 대게 그 보석들을 하나로 꿸수 있는 줄이 있어, 예수의 이야기들이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메시지를 당신에게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에게 질문해야 할 때면, 나는 최대한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그의 지위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나를 영예롭게 했기에. 내 전공도 아닌 분야나 주제를 파고드는 식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권리를 가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공경심에 대한 발로로 나는 언제나 그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 빛으로 나타났을 때를 빼면, 그가 내게 첫마디 말을 건넨 것은 그가 처음으로 물질 형상을 하고 나타났던 날 아침이었다. 나는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이 강력한 현존 앞에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이 이 경이로운 현상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자애로운 말 한마디가 내 귀에 와 닿았다.
"글렌다, 당신 자신이 사랑이오"
그 말에 정말로 모든 불안과 염려가 눈 녹듯 사라졌다.
물론 그 순ㄴ간에는 그의 이런 선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말해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이것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냥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만족스러웠다. 그것은 풍부하고 남성적이고 리드미컬한 바리톤 음성이었다. 그의 이런 목소리가 워낙 자상하고 안정감을 준 덕분에 나는 내가 성경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참으로 내 갈증을 식혀주는 청량수와도 같았다.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책을 읽고 탐구해봤자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릴 뿐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의 말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 한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읽은 다른 지식으로 그의 말을 보완하거나 연이어 질문을 던지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비록 그의 현존 앞에서 나는 자주 나 자신이 어린애처럼 느껴지곤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감정이 그를 어린애의 유치한 호기심을 참아주는 '아빠'로 여기는 지점으로까지 커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글렌다. 당신이라면 우주의 수수께끼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국에는 나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주에 대해 통달한 그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뭣하러 내가 굳이 뭔가를 물어야 했겠는가?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나를 평온하게 해주는 그 멋진 명징함과 충족감이
주어지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그의 현존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
여전히 내 전형적인 화실 일과에 몰입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림 그리기는 화가가 무작위적이고 예견할 수 없는 가능성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길 때 가장 잘 진행되는 작업이다. 게다가 화가의 주변 환경이란 건 그다지 깔끔한 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내 작업실을 묘사하는 데는 이 정도의 형용사로는 어림도 없지만!
그런 내가 어떻게 '붉은 카펫을 펼쳐놓고도'여전히 창조적이지만
너저분한 평소의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경이롭게도 예수는 이것을 가능케 했다
내 추측이지만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을 그 자신의 1차 과제로 삼지 않았나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평소 방식대로 그림을 그릴수 있어야 했는데. 그는 이에 대한 책임을 떠맡았다.
그는 내가 즐기는 것들에서 기쁨을 나누었고, 나의 커피타임을 인내를 갖고 기다려주었으며, 내 작업방식을 즐겼고, 내가 더 잘해낼 수 있는 방법을 두드럽게 제안하곤 했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을 예쁘게 여길 수 있게 해주었다. 내 입는 옷이라고 해봤자 대게 청바지와 스웨터였고, 내 얼굴은 호장 대신에 자주 물감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몸에서는 장미향 대신에 테레빈유 냄새가 났는데도 말이다. 완벽한 신사였던 그는 친철하고 사려 깊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나 자신이 부족한 인간이란 느낌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다. 게다가 그는 그 모든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드는 인자함과 능숙함을 가지고, 며칠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최고의 인식과 이해와 영감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대회의 초기부터 나는 그가 큰 일만이 아니라 사소한 일들에까지도 얼마나 사려 깊은지를 알고는 경회심에 사로잡혔다. 극히 자잘한 일. 아주 사소한 예의, 가장 미세한 관찰도 그에게는 독같이 중요했다.
사실 우리의 대화 자체가 나로서는 대단히 낯뜨거운, 그의 사소한 한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그 첫날, 눈이 많이 나빠져 있던 나는 간격이 30센티미터도 안 될 만큼 화판에 바짝 붙어 앉아서 첫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그 이전 2,3년 사이 내 눈은 근시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최대한 참아보기로 작정했던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시각적 아름다움에 해난 내 애착이 워낙 강해서 안경을 통해 그것을 걸러낸다는 사살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청의 운전면허증 갱신 요구만 무난이 처리할 수 있다면 그 문제는 그냥 유보해둘 참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내가 눈을 찡그리는 것을 봤고,
내게 물었다.
"글렌다, 눈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 물음에 선뜻 답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물음을 비켜갔다.
"최근에 신경을 많이 썼더니 눈이 좀 긴장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어젯밤에 푹 자지 못해서... 흥분해서요" 하지만 대답해놓고 보니, 자신이 완전히 솔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그날 밤 늦게 브라이언이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아. 멋졌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하지만 좀 죄의식이 드는 일이 하나 있었어요.
예수가 나에게 뭔가를 물었는데 ,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해준 그 모든 위로도 그 다음날 내가 여전히 같은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느끼고 있던 민망함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어" 이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결국 안경을 맞추러 외출했고, 그후로 우리 두 사람으 만남에서 그 문제는 두번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다음 주에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그 날의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나는 가만히 미소를 머금은 채 온화하면서도 정중하게 나를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을 알아챘다.
내가 기적이 일어낫음을 알아차린 건 그림 작업을 다 마치고도 2주가 더 지난 때었다.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온갖 잡동사니들 밑에 안경이 놓여 있었다. 한두 번 정도는 그것을 썼을 테지만, 예수가 현존했던 그 과정 어딘가에서 내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건 그의 현존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언제나 완벽했기 때문이다 결함을 재거나 드러낼 부정적인 기준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운전면허증을 받으러 가서 실시한 내 시력검사 결과는 안경 없이 2.0/2.0이었다. 내가 그 후로 두번 다시 안경을 쓰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다.
만일 나더러 그의 메시지들 중에서 으뜸가는 정수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가슴의 우위성이리 것이다.
예수는 몇 번이나
"잊지 마시오, 글렌다. 당신 자신이 사랑이오"
라고 말했으며 거기서 나아가
가슴의 중요성에 대해 자세히깨우쳐주곤 했다. 그런데
예수가 처음으로
가슴에 대해 언급했던 것도
또 한번의 당혹스런 내 반응이 그 계기였다.
그때는 초상화를 시작한 지 겨우 2.3일 정도밖에 되지 않은 때어서,
나는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짧게나마
예수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마음먹었다.
초상화가로서의 경험상, 나는 꼼짝않고 앉아 있는 것에서
모델의 주의를 돌려 편안한 기분을 갖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존경스런 고객의 경우에는 그런 식의 소소한 시도가 당최 부적절해보였다. 이 때문에 초조해진 나는 그를 감동시키겠다는 식의 정반대 유형으로 튀어나갔다.
나는 내가 독창적으로 디자인한 색상표를 그에게 제시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시각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색깔도 빛만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미술 분야만이 아니라 물리학 분야까지 수강했던 나였다. 이런 탐구 결과 나는 꽤 앞선 색상이론을 발달시켜 전문성이라는 꽤 그럴듯한 무기를 가질 수 있었다. 내게 큰 도움을 준 이 공식덕분에 내 그림들은 나름의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다. 이공식에 대해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감명을 받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냥 입을 다물거나 약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예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게 아닌가!
그것도 좀 슬픈 얼굴로, 나는 그의 침묵에 말이 막히고 말았다.
전혀 저항이 없는 깃털벽에....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 수 있었겠는가?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글렌다. 색상의 어떤 면이 당신을 두렵게 하는 거요?"
그것은 장막을 뚫고 날아와 내 가슴 한복판에 꽂히는 화살과도 같았다. 아무도 내가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그 영역에서 나름 꿰뚫어보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는 아무도 내가 쌓아올린 방어벽을 뚫지 못했는데.
예수가 그 거품을 터트린 것이다.!
나 자신이 크토록 분명한게 드러났다는 사실에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앉아 있던 내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찾아낸 말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였다.
" 음, 마음은 언제나 그 사람이 특히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보상하는 쪽으로 쏠리니까요.
사랑하기 위해서 반드시 잘 알아야 하는 건 아니요
사랑 자체가 권능이요"
취약점이 완전히 노출된 나는 어떻게든 변명해보려 했다.
"그건 그냥, 내가 빛과 색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것드을 제대로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우주의 아름다움이 내 영혼의뿌리까지 흔들곤 해서, 그 앞에 서면 부족함을 느끼거든요"
그는 내가 두려움을 내려놓고 가슴의 열망을 표현하자.
논리적이해를 통해 해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뤄냈다고
위로하고 나서, 가슴을 지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삼기 위해
마음이 어떤 식으로 가슴의 혼란을 부추기는지 설명해주었다.
"마음은
가슴의 혼란을 보상하거나 이용하는 데 적극적이죠.
하지만 마음이 가슴의 혼란을 제거하거나 치료하는 일은 절대 없소 왜냐하면 가슴의 절망이 마음에게는 권능을 휘두를 기회거든요"
"마음은 항상 그런 식인가요?"
"흠, 자주요 하지만 사실 마음은
아주 멋진 종복(從僕)일 수 있소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기만 하면요 그러려면
마음 자체만으로는 아무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은
체험들에 근거해서
정리하고 기획하거나 아니면 가슴과 영혼의 권능에 기여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보완할 논리적 바탕을 발달시키죠
. 문제는 가슴이 이런저런 식으로 삶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취할 때
생깁니다. 왜냐하면 가슴이 마음에 결핍감이나 불안감, 두려움,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충격을 주면 마음은 역의 논리로 작용하거든요"
"가슴은 순수한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가슴은 순수할 대는 그런 일이 일어니지 않죠
하지만 가슴은 단선적이고
오로지 합일의 느낌에만 몰두하는지라
자신의 체험가 남들의 체험 간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런 명확성은
자신을 '나'로만 인식하는 영혼의 것이오,
가슴은
측은지심을 펼치기 때문에
남들의 아픔과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혼동하죠,
가슴은
그런 감정들에서
죄의식과 회한, 두려움과 비탄따위를 일궈나가고, 하지만 그런 불운한 상황을 야기하는 건 삶의 악행이나 사고들이지,
가슴이 아니오
내가 언급했던 '나는 세상 속에 있는 것이지,
세상출신인 건 아니다'란 말은
내가 내 가슴의 권능을 최대하할때 사용하는 직접적인 방법이었소,
해결책은 오직 와벽만을 아는 가슴의 참된 희열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세상의 고난을 느끼는 것이오,
자신의 가슴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그것의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개개 영혼들에게 달려 있소,
성스런 중심에
침투해 들어온 부정적 감정들은
부정적 믿음과 자세를 자아낼 수 있소
가슴과 마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믿음과 자세요. 만일 소망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면
그 소망들이 어떤 토대에 놓여 있는가에 특히 주의해야 하오
가슴도 지취하기 위해 믿음을 끌어모으지만,
마음 또한 그것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슴의 문맥을 설명하기 위해
믿음을 만들어낼 수 있소, 이것은 자주 무의식적인 행동 동기와
대단히 왜곡된 행동과 흡인력을 불러올 수 있소"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상황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하나만 예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가장 명백한 사례는 수수께끼 같은 '미지'의 상황일 때요 이럴때
마음은 통제력을 일을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발명품으로 가득채우고 말죠 .
하지만 우선은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의 가슴이 결핍에 맞춰지게 되면,
그의 마음은
돈을 벌 방도와 수단을 짜내느라 여념이 없게 되죠,
여기에는 생존 압박과 관련해서 나름의 논리가 있소, 하지만
그 논리로는 전혀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 사람의 기본 신념을 바꿀 수가 없소,
그 사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빈곤의식을 북돋우거나 지속시키면서 그냥 그 문제에 대처해가거나 하면 부자가 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긴 하지만,
깊고 참된 풍요감은 절대 가져다주지 못하는
물질적 부를 얻기 위해 평생을 땀 흘려 일하게 되죠.
어느 쪽이든 결핍을 보상하는 것 외에는 가능하지가 않소
왜냐하면 마음은
논리나 균형의 문제만 해결하지,
삶의 문제는 절대 해결하지 못하니까요.
삶의 풍요로움에 너무 많은 가리개를 덧씌운 나머지 생긴
그 사람의 빈곤의식이
결국 그 사람의 믿음을 결핍에 투자하게 만드는 거죠.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이경이로운 우주를
경외심으로 바라보면서
우주의 무한한 공급에 감사하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긍정적인 충격을 주었기에
그의 마음은
이 풍요를 그의 삶에서 현실화시킬 방도를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훨씬 적은 노력으로 더 큰 풍요를 얻게 되죠.
이것은 몸의 건강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요.
질병을 믿는 사람은
평생 건강하기 위해서 애를 쓰죠,
그의 마음도
문제의 근원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병을 막거나 고칠 방도들을 제공하는 수준에서만 움직이고요 하지만
건강과 완전함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더러
그 믿음을 현실화할 긍정적인 기여를 하게 만들죠.
이처럼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믿음이나
충격이 주어지면
마음은 역기능을 일으킵니다.
마음 나름의 완벽한 논리가 있긴 하지만
그 논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보상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거울에 비쳤을 때처럼 뒤집히는 거죠"
"뒤집히다뇨?"
논리란
기본적으로 결과와 결말, 추론 유형 따위를 결정하거나 예견하는
것이오, 만일 그것이 긍정적인 입력을 가지고 시작하면,
논리는
그 방향으로 계속 나가 의미 있는 긍정적 결론을 내게 되지요. 하지만
논리가 부정적 요소에서 시작되면
그것은 부정의 방향으로 가고 맙니다. 하지만
'논리'가 건강이나 이익 같은 긍정적 결과를 얻으려면
계속 부정의 방향으로 갈 수는 없는지라.
이 부정적 유형들을 뒤집으려고 애쓰게 되죠"
이렇게 말한 그는 경외심이 가득한 얼굴로 주위와 바깥을 둘러보았다.
"내 아버지의 무한한 우주는
그지없이 풍요롭소,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으면
마음이 직접적이고 적절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게 되죠.
이렇게 긍정적인 충격이 주어지면
제대로 작용하지만,
부정적인 충격을 받으면 거꾸로 작용하는 게 마음이오,
이런 게 마음의 논리요
그러니 그냥 무한을 보시오.
그냥 , 그 무한이 계속되는 창조를 찬미하시오"
그런 다음 그는 신약에서 내가 좋아하는 한 구절을 암송했다.
"저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그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한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자려입지 못하였느니라.
날마다 무한을 보라,
그러면 너희가 구하는 모든 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구절이 이토록 아름답게 들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의 설명은 무척이나 자상했지만, 나로서는 그가 말한 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를 더 묻지 않을 수 없었기에, 감히 질문을 던졌다.
마음과 영혼은 어떤 관계인가요?"
"영혼은
당신의 불멸성을 이루는 요소들인
당신의 사랑과 자각, 체험, 역량,
기억, 감정, 잠재력을 전부 합한 것이오,
반면에 마음은
기록자이자 행정가요,
마음의 이런 능력은
당신의 실존에 유용하면서 중요한 자산이죠. 하지만
마음은
지휘관이 되기로 되어 있지는 않소,
마음 자체만으로는
아무 권능이 없어서 기본 조건을 바꿀 수가 없거든요.
당신 영혼의
중심부에는 '성스런 가슴'이 있소,
여기가
당신이 신과 하나되는 지점이요.
가슴은
내면과 외부의 무한을 봅니다.
그것은 완벽을 볼 수 있고,
사태의 군원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바꿀 수 있소,
가슴은 당신의 고귀한 지성이요
그것은 창조주가 세운 무한의 관점을 중심으로 모여 있소,
가슴이 당신의 개별서오가 신과의 합일,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통일성을 존중하는 건 이 때문이요.
내가 일출과 일몰에 대한 재밌는 사실 하나늘 이야기해줄까요?"
예. 해주세요"
"먼저 해가 뜨거나 지는 것을 지켜볼 만한 곳을 찾아내시오.
해가 수평선에 접히거나 지평선 가까이 있는 밀도 높은 대기로 걸러질때까지는 해를 독바로 쳐다보지 않도록 주의하고요 하지만
해가 황혼빛으로 물들면서 맨눈으로도 편히 쳐다볼 수 있게 되면,
당신은 해의 중심부에서 당신 영혼 안의
무한점과
공명하는 무한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생체영양소가 될만큼 많은 자양분과 긍정적 자각을 줍니다.
실제로도 그것은 당신몸이 비타민을 생성하고 무기질을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죠"
이말을 들으니 태양을 신성시할 정도로 숭배했다는 원시인들 이야기가 생각낫다. 그런 내 생각에 예수는 대답했다.
"원시인들은 생명력을 주는 태양의 힘을 잘 알고 있었소,
그것을 제대로 다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지는 몰랐지만요,
해든 뭐든 피조물을 숭배하는 건 잘못입니다.
하지만 피조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한을 인식하는 건 잘못이 아니오.
태양은 무한의 강렬한 장면 중 하나요.
별빛 찬한한 밤하늘 이나 바다 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과왈함 또한 강한 영감을 주는 장면이고요"
예수는
"외부로만이 아니라
내면으로도
날마다 무한을 응시하라" 고
몇 번이나 나에게 충고하곤 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물었다.
"무한을 내면으로 응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무한은
드넓은 공간이나 지극히 미세한 것들에만 한정되는 주제가 아니오,
무한은 양적인 문제가 전혀 아니오,
사실 그건 질적인 거요.
당신의 가슴을 예로 들어보죠"
이것이 서두여서, 그것은 나중에 그가 나에게 가르치려던 많은 것들의 토대가 되었다.
"내가 말하는 가슴이란
신체 기관의하나인 가슴이 아니오,
비록 매순간 당신 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것이 심장이니만치,
신체기관인 가슴을 진짜 가슴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상징으로 삼을 수 있긴 하지만
, 내가 말하는 가슴이란
당신 영혼 자체의 중심 초점을 말하는 거요.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온갖 세속 감정들과
성스런 자각들을 통합하여
무한 집적의 한 초점으로 모아들이는 렌즈요
이 부위는
당신이 물질 존재로 있게 된 벽두부터
당신의 심장 뒤쪽이지만
심장보다는 약간 아래쪽에 있어왔소"
그러더니 그가 말했다.
"그것이 어디쯤에 있는지 느껴보시오"
내가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은
마치 내 존재의 뼈대 전체가
에너지로 맥박치며
진동하는 듯한 그낌이었다.
내 속에 생명의 느낌이 있었다.
그 지점 속으로 밀고 들어갈 어떤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권능이 주어졌다.
"이것이 창조주가
당신의 마음 안이 아니라
당신 내면에 설치한 권능의 원턴이오,
마음은
단순히 종복에 불과하오. 그래서
마음은
긍정적인 충격을 받으면 제대로 잘 해내지만,
부정적인 충격을 받으면 영 제 역활을 못하는 거요.
가슴은
고귀한 지복의 감정들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온갖 감정들도 만들어낸다오, 하지만
그냥 단순한 감정이 아니요.
그건 무한한 자가이고, 당신이 계속해서 흡수해낼 모든 고귀한
의식의 토대요.
당신 삶의 대본 전체가 쓰여지는 게
당신 존재의 중심부 안에 있는
이 권능에서요 그러니
삶의 대본을 실천하거나 그것을 다시 스려면
마음이 아니라
가슴에 따라 살아야 한다. 당신의 마음은 그럴 힘이 있소,
하지만 당신의 가슴이 바란다면
무엇이나 실현될 것요"
그리고 나서 그는 역사적 사건 같아 보이는 일에 대해 언급했다.
어쩌면 비유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데다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싶다.
"가슴이 너무나 삶에 짓눌려 있던 때라,
마음이 가슴의 부정적 충동들이 일으킨 모순과 혼란으로
자신을 휘졌던 때가 있었소,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종복인 마음만이라도
논리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은 주인인 가슴에게 항명을 시도했지요, 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마음은
가슴에게 패배를 선고했소
그런 다음. 종복인 마음은
자기 나름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가슴 없이 꾸려나가기 시작했소.
마음은 오직 논리적이를 원했기에,
이해되지 않는 환경은 지배하고자 했소,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지배와 이해는 같은 것이거든요.
마음은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면 뭐든 이해한다고 가정하죠,
이것이 마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핵심적인 문제, 다시말해
폭풍의 눈이자, 마음이 당신의 주인이 아니라
당신의 종복이어야 하는 단일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요"
그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이런 역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명이 해결방안은 아니오.
게다가 이해를 지배로 대신하는 건 삶의 풍요와 권능과 의미를
발가벗긴 채 삶을 고갈시킬 뿐이요.
당신의 삶을 치유할 해결방안은
당신 가슴 안의 권능에서 찾아져야 하오,
이것을 해낼 수 있는 건
정확한 이해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게 필요하오"
그는 내게 다음의 것을 날마다 열심히 수련해보길 제안했다.
"내가 당신에게 세 가지 수련거리를 주겠소,
첫 번째는
항상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당신의 온갖 긍정적 감정들을 강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항상 용서하는 것으로
당신의 부정적 감정들을 약화하는 거요.
세 번째 수련은
앞의 두 가지보다 좀더 열심히 하면 좋은데,
그런데 글렌다. 내 생각에 당신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쉽게 이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왜냐하면
당신은 화가로서 이미 이것을 수련하고 있는 셈이거든요
. 내가 말하는 건 무구한 인식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좋아요, 그럼 창박을 쳐다봐요....
이제 다시 나를 쳐다보면서
방금 뭘 봤는지 이야기해봐요"
"나뭇가지 5개 그리고 담 위에 새4마리가 있었고요.
또 창틀 위에는 약간의 새똥들과 함께 마른 잔 가지 2개가 있었어요"
"잘했소,
이런 게
무구한 인식이요.
당신은 어린애처럼 자신이 본 것을 그냥 말했소.
이건 어린애들이 아주 잘하는 거죠.
애들은 선입견 없이
그냥 인식하고
반응하죠.
당신 또한 어린 시절에 이렇게 했고 당신은 지금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이 능력을 잘 유지하고 있소.
하지만 마음이 대답을 했다면,
십중팔구 마음은
자신이 지배권을 쥐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 주저했을 거요
주저라는 위장 밑에서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본 것의 윤곽을 그려본 다음에
이런 식으로 말했겠죠.
'음, 내 생각에 나뭇가지 12개와 잔 가지6개, 새 3마리 그리고 깔끔한 창틀을 봤던 것 같아요'라고 마음은 구조와 대칭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질서를 잡으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달리 말하면
당신의 마음은 그것을 '바로 잡기'위해
원고를 다시 고쳐썼을 거란 말이오.
마음은
현실을 조작하고
미리 판단하고,
있는 현실을 자기 나름으로 설계하고
재설계하기 위해 원고를 다시쓰곤하죠.
복잡하고 약아빠진 마음이
항상 하려는 바가 이것이요.
그것은 자신이
존재에 부여할 수 있는 이상화된 유형들을 찾아내서는
그것들을 신성하다고 칭하죠.
이 우주를 신성하게 만들기 위해
뭔가를 할 필요는 전혀 없느데도 말이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곤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뿐이오.
당신이 이해하거나
지배하지 못했던 것들을
우러러보고 감사하고 용서하시오.
삶은 신성하고 완벽하며,
창조주의 의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주니 말이오"
이 얼마나 멋진가! 이 메시지는
기대에 들떠서 내가 다시 어린애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의 현존 앞에서
타고난 무구함으로 빛을 발했다.
나는 마음이
현실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면서
어쩐 식으로 우리 세상에 독재를 휘두르는지 알 것 같았다.
예수는
그 뒤에도 다시 한번 이와 유사한 깨달음을 강하게 북돋워주었다.
"마음은
구조가 현실이 되게 하죠,
당신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억압구조들이
마음이 빚어낸 개념들에서 온 겁니다.
이미 완벽으로 존재하기에
더 이상 완벽해질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완벽을 만들어내고자
애쓰는 마음의 시도에서요.
다시 말해 마음은 온갖 상황들을
정가로 묶어두기 위해 그것들을 얼그러뜨립니다.
여기에는 삶을 얼그러뜨리고,
가슴을 얼그러뜨리고,
영혼을 얼그러뜨리고,
관계를 얼그러뜨리고
, 의지를 얼그러뜨리는 것도 포함되죠
오로지 마음이 제시하는 류의 '해답'인 미화된 구주를 가지고
지배권을 얻거내기 위해서요.
마음과 억압구조들에 지배받는 그런 세상에서는
-물론 그 삶이 어쨌든 조금이라도 견딜 만한 한에서= 희생적이니
불쌍한 가씀쪽이 자발적인 종복이 될 수밖에 없소,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이 인정한 모든 무자비한 장벽과 억압 공리들을
가슴이 나서서 보상할 부밖에 없는 거죠.
그러나 마음이 주인이고 가슴이 종복인 세계에서는
가슴의 참된 권능은
이미 오래전에 잊혀진 채,
감옥 안에 가둬져 달아날 자유마처 뺏기고 맙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가슴이 여성적이고 순응적이며 감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죠 그 사람의 감정적이고 창조적인 필요에만 기여하는 자각 중심, 그 이상 어떤 것도 아닌 마음의 '처'로만요"
예수는
이것이 뒤집힌 우리 사회의 비극이어서
가슴에게 다가가 그것의 참된 권능을 되돌려준 것이
자신의 선물이자 선택 과제였노라고 설명했다.
"가슴이 제자리에 있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은
진실로 쓸모 있는 종복일 수 있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럴 때라야 마은 진실로 재치있고 행복할 수 있소, 다른 종복들이 그렇듯이 마음도 한정된 역할 범위가 설정될 때 가장 효율적이니가요. 마음의 바꿀 수 없는 특징 중 하나가,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적어도 둘 이상의 준거점을 가져야 한다는 거요.
따라서 마음만으로는 무한을 처리해낼 수가 없소.
반면에 가슴은
무한 관점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덕분에,
삶을 제대로 처리할 자신의 권능을 끌어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슴에 봉사할 때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지만,
역으로 가슴이 마음에 봉사할 때는 한계만이 존재하죠,
감정 에너지는 불안정하게 끓어오르고요"
이 문제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나는 이런 문제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당신의 설명 덕분에 가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이해가 가지만,
마음에 대해서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 마음은
근본적으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 첫 번째 부분은
기본적으로 복합 DNA 컴퓨터라 할 수 있는 통합하고
이전하는 장치요. 그것은 당신의 뇌와 신경체계 안에 집중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모든 몸 세포를 포함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당신 몸으로 스며들고 순식간에 당신 모을 감싸는 전자기 영역이요.
이것은 당신의 모든 감정체험과
생각을 집착하기 위해 모으로 저장하고 복구하는 일을 주로 하는
시스템이죠. 마음 속의 모든 자료는
수학적으로 기호화되어 (+) 접근이나(-)접근,
즉 압력 요소로 작동됩니다.
가슴의 감독을 받지 않으면
마음이 이분법으로 작용하는 이유가 이것이요.
마음이 지배할 때
그 시대의 질서는 양극성이오"
이것과 마음에 관한 다음의 대화들에서 보듯이
예수는 마음이라는 그 단어를
의식의 모든 차원을 평가하고
결합하는 '상위의 마음'을 뜻하지 않았다. 그가 계속해서
가르치고자 했던 바는,
고귀한 의식(기록하고 통합하고 인과를 작동시키는 실질적이고
세속적인 작용들 너머에 있는)은 성스런 가슴 주위에 모여 있으며,
고귀한 의식의 방향을 잡아주는 건 의도이고, 이것을 권능있게 해주는 건 사랑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우리가 겪는 여러 사회 문제들도 가슴과 마음의 역전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마음이 지배하면
자신조차 구조의 지휘 하에서 이루어지는 조직화된 사업이 될 수밖에 없소, 이렇게 되면 인류의 형제애가 완전히 무력해지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죠. 하지만 가슴이 신과 제대로 된 관계에 있으면서 그
사람 인생의 주인일 때는 나눔의 자연스런 측면으로 자선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이 점을 유다에게 이해시키려 무척 애썼지만,
구조의 인간이었던 그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유다와의 관계에 대한 이런 언급을 들은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물었다.
"예수님, 제가 분수를 모른다면 부디 용서하세요, 하지만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알았다면
왜 그가 제자 그룹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는지 그 까닭을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 질문에 뒤이어 나온 예수의 대답은
내가 그와 나누었던 가장 따뜻하고 가장 우애깊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 그 그룹에 유다가 들어온 것은
아버지의 선택이지, 내 선택이 아니요.
사실 유다의 배신과 자살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거나 그를 기피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관계로
유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죠.
나는 유다를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소, 그가 어떤 식으로
나를 배신할지, 그가 사용할 방법이 무엇일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죠. 또 나는 왜 아버지가 우리 두 사람을 같은 곳에 있게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소 사실 유다와
나는 함께 자랐더랬소, 내가 나서서 그를 내 그룹에 들게 한 것이 아니고요.
그는 어렸을 때 내 가장 친한 친구였소,
고등교육을 받은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유다는 부와 교육이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누렸지요,
그의 가족은 그 시대에 이용할 수 있었던 모든 특권과 혜택을
그에게 주었고, 이 때문에 그는 구조에 복종하는 종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게다가 학문적이고 지적인 탐구로 그의 마음이 그의 가슴을 가릴 정도로 강했구요 우리는 맑은 물과 흙탕물처럼 서로 나란히 흘렸소,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했소,
아이였을 때 우리는 함께 놀았소, 지금으로 치면 '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 같은 '유대인과 로마인" 놀이도 했고
'숨박꼭질'놀이도 자주 했조, 우리가 상대방을 찾을 때 나는 언제나 그를 찾아내곤 했지만, 그는 당연히 나를 찾아내지 못했지요, 그건 쉬웠어요. 그냥 가장 큰 엄페물 뒤를 찾아보기만 해도 그는 꼭 거기 있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공터 한가운데 앉아 있어도,
그는 마치 내가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로 곁을 지나쳐가곤 했지요. 그래도 우리는 함께 삶을 즐겼소, 게다가 아직 어리고 사내애의 장난기가 가득했던 터라 나는 즐겨 유다에게 자랑하곤 했죠.
다른 누가 그 광경을 목도하기 훨씬 전인 어린 소년일 때부터
나는 이미 기적을 이룰 수 있었거든요.
나는 유다에게 모습을 감추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따금 죽은 나뭇가지를 살려내기도 했소, 단지 자랑하기 위해서였지요 내 생각에 그건 그냥 내 어린시절 기질의 일부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 강한 인상을 받은 유다는
처음부터 나를 메시아로 여겼죠,
그는 이것을 그의 온 가슴으로 믿었어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메시야상이란 건 당연히
모세나 다비드왕처럼 정복의 기적을 행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부활키 위해 여기 왕 중 왕이 왔도다"라고 외치게 하는
제사장 왕이었소.
그런식의 메시야 예언의 중점은
주로 정치권력을 되찾는 것에 두어져 있었죠. 그래서
그는 모세가 파라오에게 갔을 때 파라오의 참모한 명을
뱀이 되라고 명했던 식으로 내가 신의 권능를 가지고
로마를 마비시키리라고 생각했소,
그는 내가 로마를 무릎 꿇게 만들어 이스라엘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우리 땅을 되찾게 해주리라고 기대했소 보다시피 유다는 내가 누군지 실제로는 전혀 모랐던거요 그는 단지 그의 마음과 구조가 허용하는 딱
그 만큼만을 알았을 뿐인거요.
커가면서 그는 언제나 나의 도전과제였소,
그는 언제나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느 정도까지의 오해가 가능한지를 내가 알게 해주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품는 오해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소 우리는 완전히 정반대여서 그는 반대소리를 내주는 아주 좋은 반항판이었지요. 이건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니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선택했고, 그 역할을 아주 잘 해냈어요.
그는 행동 때문에 빚어진 고통이라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그를 용서했소 왜냐하면 그런 행동들이 없었다면 기적도
일어날 수 없었을 테니 말이오 그리고 흔히 하는 비난과 달리 무엇보다 확실한건, 그가 돈 때문에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다는 거요
. 게다가 그는 그것을 나에게 대한 비신이라고도 생각지 않았소
유다는 자부심 강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만치 틀림없이
그 돈을 자선단체나 유대교 회당에 기부했을 거요.
내가 신에게 헌신했듯이
유다는 구조에 헌신했다는 것.
이것이 우리 드라마의 본질이요.
그 운명의 밤에 유다가 우리의 만찬 자리에서 떠날 때,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그가 이제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간다는 건 알고 있었소,
그는 내가 나 자신의 운명을 증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만큼이나
확실하게 자시의 운명을 증명하기 위해 갔던 거요.
그는 구조의 아들이었고
, 나는 신의 아들이었소..
. 우리는 그 밤이 다 가기 전에 결판을 볼 수박에 없었서,
그때까지는 서로를 보완하는 식으로 공존해왔지만
이제 드라마가 완전히 펼쳐져야 할 때가 왔던 거요.
물론 그가 그것을 의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굳이 그의 의도를 해석한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소.
나의 비정치적 가르침에 초조해진 그가 나를 극단으로 몰아넣어
로마에 맞서게 하고 싶었던 거라고요.
그가 내게 권력을, 그가 생각하는 식의 권력을 안겨주기 위해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했던 건 분명하오,
그는 자신이 로마병사에게 가면 그들이 나를 잡으로 오리란 걸 알고 있었지요. 게다가 내 권능을 알려주어 그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한 것이 틀림없소, 나를 잡으러 군대 병력이 파견된걸로 봐서 말이오.
내 추즉으로 그는 내가 포위당하면 곧바로 그들에게
내 권능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듯싶소,
아마도 내가 사라지거나 병사들을 돌기둥이나 나무로 바꿔버리리라고 여겼겠죠. 아니면 내가 비둘기로 변해 날아가리라고요.
그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했고 사실 그렇게 되었소.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기적은
유다가 상상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것이었죠.
왜냐하면 내가 그냥 굴복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까요.
그로 인해 유다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없었소.
그래서 나는 그가 죄의식에서 자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계획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통렬한 좌절감에서
자살했을 거라고 믿소,
그는 내 굴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거요.
지배에 집착하는 마음은
굴복을 패배로 여기니까요. 하지만
가슴은
굴복의 불멸성을 알기에 감히 굴복할 수 있는 거죠
그 우위성을 보유하면서도 굴복하는 가슴이란 역설이야말로
아마도 내가 일으킨 가장 멋진 기적일 거요.
바로 이것이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었소 그 나머지는 그냥 역사이고요.
"당신은 유다를 용서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그가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었나요?"
"아직은요. 하지만 그가 일어난 일의 진실에 눈떠 신에게로 돌아가면,
그것은 이 우주에 구조의 폭정을 산산조각 내는 영향을 미칠 거요.
그를 비난하지 마시오,
그렇게 하는 건 그가 아직도 수호하고 있는 그 폭정들을
더 북돋워줄 뿐이니까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시오
그러면 아마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그런 기적이 일어날 거요"
나는 용기를 내어 유다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이 기뻤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곧잘 궁금해하던 풀리지 않는
수수게끼였기 때문이다.
아랫배에 어는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나는 감히
또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물었을 때,
나는 그 대답이 그냥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전 십자가에서
당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어요.
당신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권능으로 뛰어넘은 건가요. 아니면
그것을 충분히 맛보고 나서 초월한 건가요?
아니 이제 알겠어요,
당신도 우리처럼 죽음을 겪고 나서
그것을 초월했으리란 걸요. 왜냐하면 그런 식의 굴복과 승리만이
뒤집힌 우리 세상을 다시 역전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은 더 높은 차원에서
우리가 처한 곤경을 보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던 거죠. 구조에 푹 빠져 있던 유다는
역사적 선례와 필사적인 방법들에 근거한 전술밖에 짤 수없었지만,
당신은 새로운 차원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으로 우리를 데려갔어요.
그리고 유다가 당신이 하려던 걸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
여기에 있고요. 구조의 종복으로 있는 한,
참된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따뜻한 미소를 떠올리며 예수가 대답했다.
"맞았소, 아주 잘 배웠군요.
내 십자가형과 부활이 뜻하는 참된 기적은
그러고 나서 성스런 가슴이
구조에게 주권을 갖는 지위로 복구되었다는 것과
사랑이 죽음을 누르고 승리했다는 거요.
내가 가슴의 우위성을 회복시켰으니,
이제 당신들이 할 일이라곤
당신들의 삶과 세상에서
그것의 권능을 인정하고 적용하는 것뿐이오.
당신들의 가슴은
신을 떠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신에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뭔가를 할 필요가 전혀 없소,
그 자체로 완벽한 가슴은
창조주와 한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연결고리요.
하지만 그것은 환상에 대해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되찾아야 하오! 모든 기적이 이런 식으로 일어납니다.
모든 기적의 주체는 가슴이니까요.
당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고귀한 지성과 고귀한 자각,
위대한 해결책을 불러오는
가슴의 권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시오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 까닭이 이것이오,
죽음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구조를 죽이니까요.
그들은 '난 살 날이 겨우 6주밖에 안 남았어'라면서
외부적인 요구들을 놓아버리죠
그렇게 되면 마음은 완전히 중요성을 상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해집니다.
갑자기 가슴의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는 거죠.
그 불꽃을 태우는 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니면 만족이나 포기라도 상관없소
그런 다음에댜 가슴은 불꽃을 통해서
기적이 가능해지죠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 대부분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가 구조의 세상이 죽어들게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그들은 진실로 살게 되고요
이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의 의미요.
당신이
가슴으로 살 때
당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니까요."
아래서 둘째줄
가슴과 가슴의 기적에 대한 이런 그의 깨우침은
내가 지난 몇 년동안 잊고 지냈던 특별한 기억하나를 불러왔다.
1981년 당시 나는 한 출판없자의 화보집을 만들기로 계약하고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 브라이언과 나는 강아지 한 마리를 갖고 싶어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마음에 들어했더 것이
포스테리어 종의 와이어헤어였다.
뉴욕 시에는 이 혈통의 개를 사육하는 괜찮은 사육장이
여러 군데 있었기에, 우리는 거기에 무무는 동안에
그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몇 군데 사육장 주인들에게 전화로 문의해본 결과 한 군데가 특히 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 사육장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데려갈 수 있는 강아지가 여러 마리 있었기에, 나는 직접 가서 강아지들을 보기로 작정했다. 텍사스에서 온 촌사람이었던 나는 뉴욕 시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육장 주인이 브롱스라고 자신의 주소를 알려주었을 때에도 내부 경보시스템이 작동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머물던 곳은 중심가였는데 저녁 러쉬아워 동안에 도시를 가로질러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대를 생각하면 브롱스까지 줄창 택시로 가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지하철로 가는 편이 더 빠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기차를 탔을 때 느끼는 잡다하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언제나 좋아했다.
내가 탄 지하철 역은 월 스트리트와 가까운 곳이었다.
이 역을 지난 기차는 자신들의 교외 이파트로 퇴근하는
잘 차려입은 중개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 역시 멋지게 차려입고 있었기에, 지하철을 타길 잘했다고
뿌듯해하면서 편안한 마음응로 신문을 읽어내려갔다.
역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의 복장과 인종분포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전철이 한 역에서 다음역으로 갈 때마다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무척 흥미로웠다. 마침내 기차가 브롱스 터널을 통과하자 장면이 완전히 바뀌었다. 발리 슈즈나 쓰리 피스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에 발가락이 드러나는 샌들과 검은 가죽바지. 문신들이 있었다.
지하철이 멈첬을 때, 나는 '브롱스:다음 두 번째 역"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기차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더 이상한 건 차에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이 출발했을 때 나는 내 눈에 들어오는 세 개의 차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정어리처럼 꽉꽉 쟁여져 있다가 갑자기 혼자가 되고 보니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절이 첫 번째 브롱스 역엥서 끼긱거리며 멈춰서서 문이 열리자 대략 12살에서16살 정도인 남자애들 여섯 명이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면서 빈 지갑 몇 개를 철로 위에 버렸다.
그날 작업의 증거물드을 없애는 모양이었다.
등뒤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하지만 내 내면 깊은 곳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속삭임이 들렸다.
다른 누군가가 지하절에 올라타기를 기도하거나, 그들이 나를 무시하고 저 반대쪽에 앉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내 양옆에 한 사람씩 앉고 나머지 네 명은 내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식으로 나를 둘러쌌다. 우리는 1분 정도 말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지만, 그 시간이 내게는 한 시간은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무슨 상관이야. 오늘이 내 생에 마지막 날일 수도 있어,그러니까 그만큼 즐겨야겠지' 나는 그냥 고개를 들고는 '안녕'하고 말을 걸었다.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얼음을 깨면서 그애들 중 한 명이
컬컬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약간 목을 쥐어짜듯이 해서 나온 내 목소리는 놀랍게도 나즈막하게 끄는 남부 사투리였다.
"나는 덱사스에서 왔어"
"텍사스에서 왔다고요? 그런데 여기서 뭐하세요?"
그가 내 말투를 흉내내며 물었다.
나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음, 강아지를 한 마리 구하려고"
그 '험한 애들'의 마음을 풀어 보통 청소년으로 바꾼 것이
나 자신의 흥분 덕분인지, 강아지가 마법을 부린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그 순간부터
분위기 전체가 바뀌었다.
내가 확신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 마음이
작동을 중단하고
내가슴이 그 상황을 끌어가지 않았더라면
그 전체 사건은 소중한 하나의 추억 대신에 어떤 식이든
아픔으로 끝났으리란 것이다.
만일 내가 감정적 반응이나 두려움을 드러냄으로써
약간이라도 거부감을 보였더라면,
그들은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고 그것을 핑계로 나의 대한 어떤
적대적인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이다.
우리 만남의 외면적인 수준에서는 내가 불리했던 게 확실하다.
이런 문제를 마음이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궁리할 수 있는 복안이 어떤 것이었든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포착해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슴은 드라마와 치명적 갈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만
붙들려 있지 않는다.
예수가 말했듯이 말이다.
" 가슴은 어떤 상황에서나
항상 새로운 삶을 가져오고,
가슴 없이는 불가능했을 가능성을 열어주죠.
때로는 1%의 가능성만으로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
면 절대적인 듯이 보이는 상황을 재배치하여 사실은 그것이
상대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거라곤 그 정도뿐이기 때문이죠. 절대적인 건 신밖에 없소,
다른 모든 것들은 상대적이오.
비판하는 사람이
마음의 장벽 안에 같히게 되는 게 이 때문이오.
마음이 이런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맹점은,
마음은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요소들을 둘러싸고
자신의 지배를 공식화한다는 거요. 하지만
마음은
절대 존재는 하나뿐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죠.
내가 당신에게 마음은 종복으로는 뛰어나지만
주인으로는 치명적이라고 강조했더 이유가 이것이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려먼
먼저 그것의 플러그를 뽑는 법을 알아야하오"
다행히도 그날 나는 마음의 플러그를 뽑았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나는 무국함과 재치가 지휘를 맡는, 일종의 '무위' 상태에 있었다.
소년들과 나는 강아지를 놓고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얼마 안가 그들 중 한 명이 왜 내가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뉴욕 시를 가로질러가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음, 나는 화가인데. 일할 게 좀 있어서 뉴욕에 와 있는 거야"
"나도 화가예요!" 그중 한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대꾸하자
다른 두 소년도 합창하듯이 외쳤다
"재도 정말 잘 그려요!"
"어떤 걸 그리는데?"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창밖 역사 벽의 낙서들을 가리키면서
타잔처럼 가슴을 쳤다.
"저거, 바로 내가 한 거예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내가 역사 벽의 낙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뛰어난 자기 표현의 성과였다.
이보다 더 중요했던 건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두 번째 화제거리를
찾아냈다는 데서 느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안도감이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말이라고는
"뉴욕 시에서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전시할 수 만 있다면
자기 오른팔이라도 내놓겟다는 화가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니?"
라는 게 전부였다. 그 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우리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 애들은 마음을 풀고 평범한 청소년들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내 작업실이 어디에 있고,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 알고 싶어했으며, 마누엘은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승낙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여기에 오래 있게 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말고 사실 내가 보기에 공공 전시에 대해서는
너도 나한테 한 수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들 중 한명이 내 그림을 찍어둔 사진을 가진 건 없는지 물었다. 나는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가방을 열어 지갑을 꺼냈다.
낵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이런 젠장 ,하지만 나는 그냥 지갑에서 사진들을 꺼내 둘러보게 했다.
그들은 감동했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우리는 여름캠프에 모인 무리의 아이들처럼 강아지와
그림 따위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중 한명이
불쑥 말을 꺼냈다.
"여기서 내리면 위험하다는 거 몰라요?"
나는 "내가 사는 텍사스에서는 거의 어디나 안전한 편인데"라고
순진하게 대답했다 나이 많은 애 중 하나가 그런 나를 꾸짖었다.
"어휴. 아무래도 여기서는 누가 당신을 보살펴주는 게 낫겠어요.
우리가 택시 타는 곳까지 당신을 바래다 줄께요"
우리가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나는 자신이 원탁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기네비아 (아더와의 왕비)라도 된 듯이 느꼈다.
그 남자애들은 알고 있는 듯이 보이는 택시 기사는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차에 올라타자 그가 물었다.
"부인, 괜찮으세요?"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그러고 나서도 나는 몇 번이나 다른 표현방식을 써서
"다시는 그런짓 하지 마라!"고 강조하면서 나를 따끔하게 꾸짓었다.
그 택시 안에서 그 날 저녁의 사건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어리석지 않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또 나는 우연히 똑같은 상황에 다시 한번 처하게 된다면
그때도 독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처리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소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햇지만 내 가슴 속에는
언제나 그들을 위한 자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예수에게 다하고 나자
그의 눈은 눈물로 글썽거렸다.
내가 "당신을 슬프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라고 하자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슬프게 한 게 아니오.
그 사건은 나도 잘 기억하고 있소, 그리고 나는 당신과 그 소년들이
정말 자랑스럽소 나는 사람들의 삶이 바뀌는 순간에 대해 대단히
감상적인 편이오"
[출처] 끝없는 사랑 84쪽 가슴과 가슴의 기적에 대한 .이런 ....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출처] 2장 그가 말하다.|작성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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