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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3장 경이로운 우주 - 거의 대화 없이 보내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3장 경이로운 우주 - 거의 대화 없이 보내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柏道 2022. 2. 9. 11:02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제3장 경이로운 우주 - 거의 대화 없이 보내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거의 대화 없이 보내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대화가 샐러드 바처럼 다양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예수의 위대한 지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빼고는

전혀 일관성이 없는 날들도 있었다.

사실 초기에는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넓은 시야를 갖도록 내 의식을 고취한 덕분에

나는 생각과 의미들을 더 넓은 범위에서 소화해낼 수 있게 되었다.

내 의식의 성장으로 말하면 사교 댄스에 등록한 십대의 성장에

비견 할 만했다. 사교댄스 강사의 첫 번째 과제는 학생이

'어설픈 동작'에서 벗어나 음악에 맞추어 발끝을 떼도록 만드는

것일 게다 처음에는 발을 헛딛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비록 강사인 예수가 빈큼없이 자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의 은총으로

나는 "음악에 맞추어 왈츠를 추기"시작했다.

조화의 이런 가속화를 가장 극적으로 촉진해준 건

어느 날 오전 내가 이해의 조각들을 퍼즐 조각처럼 모으고 있는 모습을 예수가 관찰했을 때였다. 그것의 의미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내게

예수는

내스케치북과 매직펜을 가져와보라고 말했다.

"당신은 아무 계획 없이 벽돌과 회반죽만으로 건물을 세우려 하고 있소 내가 당신이 더듬어 찾으려고 하는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을 알려주겠소"

그는 나더러 그 크고 흰 종이 위에 밑면이 아래쪽에 있고

꼭지점 하나는 꼭대기에 놓이는 정삼각형을 그리게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주의 구성요소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다.

그 첫번째가 사랑이고

두번째가 영이며,

세번째가 지금까지의 과학이 쪼개고 쪼갠 그 어떤 것보다.

사실 원자나 원자의 어떤 구성부분보다 더 미세한 실체이다.

더 이상 잘게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의 단일 입자로서

그것은 우주를 이루는 벽돌이다.

현재 물리학 연구의 주요 목표가 이 미립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힉스 보존'같은 명칭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들로

지칭되고 있는데. 심지어는 그것을 '신의 미립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비아냥 속에 역설적인 진리가 들어 있다.

이 미립자는 기존 미립자들의 족보에서 가장 근원적이란 사실이

이미립자를 연구하는 힘든 이유를 설명해준다.

명백한 차이는 이 미립자는 덩어리를 만드러내는 반면에,

다른 미립자들은 그 결과물로 덩어리지워진다는 점이다.

"모든 에너지 덩어리의 바탕이 되는 한 미립자 실체가 있소,

그 미립자 단위들은 자연 속에서 전적으로 보편적이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물질 존재의 기본 구성요소요"

그는 그것을 '금강입자'라고 불렀다.

예수는 심각형의 꼭대기에 사랑을 놓았다.

"사랑의 근원은 아버지, 창조주 자신이요.

그는 태양이 지상 생명체에 대해 갖는 것과 똑같은 관계를

모든 존재들에 대해 갖지요 하지만 그의 사랑의 빛은

너무나 눈부셔서 인식할 수 있는 건 그것의 후광뿐이오.

모든 사랑의 궁극 근원은

순수 사랑Pure Love이오

당신들이 발산된 곳, 혹은 창조된 곳이 이 사랑에서지요.

당신도 광선처럼 그의 사랑의 한 실체요.

사랑은 신의 이름이죠.

당신의 이름 또한 사랑이구요.

이 점에서 당신들은 신과 닮은 꼴로 창조되었소,

당신들은

사랑이라는 바로 그 본성의 발현물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할 것이오.

사랑을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신의 실재와 본성을 묘사하기는

불가능하오. 그건 그냥 불가능합니다.

신성한 실재는

규정하는 자이지, 규정당하는 자가 아니니까요"

이렇게 말을 끝낸 그는 내 다음 질문을 예상하고 곧바로 덧붙였다.

"성 삼위일체 또한 세 겹의 우주에 선행해

우주를 결정하는 성스런 신비요.

이것도 신처럼 규정될 수 없지만, 모든 존재의 현존으로

어디서나 자신을 드러내죠.

인식 가능한 현실 차원에서 '한 영'이 신의 실존을 구체화할 때마다

그것은 성스럽다고 할 수 있어서

금강입자들이

신의 의지를 형상화할 때

그것들은 말 그대로 신의 몸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로 주의를 돌리 때마다 그의 눈은 촉촉이 젖어들었다. 아마도 그가 눈부신 빛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 그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성스런 근원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경외감은

예수라 할지라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큰 것이었다.

예수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감정들 자체만으로도

메시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불멸의 당신 이름 또한 그러구요 참된 있음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당신이 하거나 하지 않는 어떤 것,

주거나 주지 않는 어떤 것,

받거나 받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오.

다시 말해 그것은 상품이나 파생물이 아니란 말이오.

사랑은

풍요나 부족의 법칙을 따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오.

이런 까닭에 사랑은

그 궁극에서 무조건이오. 그것은 어떤 존재 상황에도

좌우되지 않으니까요. 나는 사람들이 요즘 들어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어 기쁘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어떤 식이고, 왜 그러한지를 좀더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소. 사랑에 조건이 없는 건

그것이 우리의 근원이고

당신 자신이어서지...

조건 없기로 되어 있어서가 아니오.

행동은 언제나 어느 정도 조건부이기 마련이죠.

관계도 조건을 갖고, 실존도 조건을 가지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행하는 일이 사랑이라면,

이 점을 피할 방도가 없소"

나는 의자에 고쳐 앉으면서 안도감을 느꼈다.

나도 조건 없는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싶긴 했지만,

무조건의 발싸개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되는 것이 사랑의 참된 본성이오,

우주의 가장 위대한 신비는

있음의 성스런 측면이 사랑이라는 거요.

가장 완전하게 그렇게 있으시오 그러면

당신의 여생이 제대로 굴러갈 거요.

실존의 두 번째 위대한 요소는 영이오.

우주 만물이 영으로 이루어져 있소,"

예수는

삼각형의 왼족 꼭지점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영'이라고 쓰기 했다.

"오직 하나의 영만이 있소.

영은 모든 것 속에 있고

, 모든 것 둘레에 있으며, 모든 것과 더불어 있고,

모든 것을 이루고 있소.

드러난 창조물에서 떨어져, 순수지대에 따로 떨어져 있는

영 같은 건 없소"

그는 물질과 영의 대립을 다룬 많은 이론들이 있어왔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 이론들은 참된 이해가 부족하고,

구조화된 사고방식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줄 뿐이오.

분리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영은

모든 것 속에 있소,

영이 없는 곳은 없소, 영은 하나요.

영은 전체로,

연속되는 것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오.

영을

물질의 대립물로 보는 사람은

오해와 이분법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요.

땅은 물질적이고

하늘은 영적이란 것도 옳지 않소.

영은 우리 모두와 하늘과 땅의 통일체요.

기도의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영의 단일성을 통해서지요.

꿈과 비전 예언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도

영의 단일성을 통해서구요.

영 속에서 우리는 하나요.

따라서 영 속에서 우리는 형제애의 상태로,

공통된 자각과 추구의 상태로 통합되어 한 삶을 살고 있소.

그 추구가 깨달음과 승격이든, 어둠과 추락이든,

그 사람이 선택하는 길이 어떤 것이든에 상관없이 말이오.

개인의 체험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 가에 관계없이

우리는 한 영이고

개인의 체험은

모두에게 공유됩니다.

사실 다른 모든 발견들의 관건이 되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큰 성과가 통일장의 발견이었소,

의식의 비약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현재 물리학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거요. 다만 과학자들은 영의 물질실체가

이미 발견되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오"

그는 우리 과학이 다음 번 위대한 도약의 문턱에 서 있어서

금강입자를 발견할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각형의 세번째 꼭지점은

현장화된 현실 요소들을 나타내는데.

이를 통해서 잠재적 배열과 개별화된 배열의 차이가 가능해진다.

이 세 번째 요소는

입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이따금 예수는

그것을 무한 입자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금강입자라고 불렀다.

'금강'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내 귀에 무척 낮설게 느껴졌기에. 나는 그 말이 그만의 독특한 용어이거나,

천상이나 여타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용어 정도로 추측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그냥 외래어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중에 그가 '무한 입자'와 같은 의미로 '금강입자'란 용어를

사용했을 때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청했던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용어들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 '금강'이란

비할 데 없이 견고하여 구부러지거나 뚫리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오 이것은 워낙 작아서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고, 혼재될 수 없으며,

근본적이고, 절대 기본이 되는 미립자요 모든 복합형상들이

이 미립자에서 만들어지지요.

이 용어가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무한 입자'란 용어는 그것의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요

. 왜냐하면 이것은 차원상의 한계에 관계없이

모든 물질 실체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처음 원자란 이름을 붙였을 때 가정했던 그 미립자죠"

물론 오늘날의 과학에서 칭하는 '원자'는 대단히 복합적인 것이어서

그리스인들이 상정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입자다. 하지만

예수는 언제나 그렇듯이

긍정적인 어투로 내가 점점 더 작은 입자에 대한 탐구를

우리의 과학적 이해가 '양파껍질을 벗겨가는'데 있어 필요한

과정의 일부로 간주하게끔 도와주었다.

또 그는 궁극 입자의 발견이 이미 임박해 있으며,

그것은 사물의 작동방식에 대한

현재의 많은 수수께끼들을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예수는 다시 그 삼각형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다시 삼각형을 보면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한번 보시오.

꼭대기에 있는것이 사랑이오.

그 다음에 영이 사랑에 공명하고

사랑은 금강입자들을 지휘하죠.

모든 창조가 여기에서 일어났소"

경이로운 우주 거의 대화 없이 보내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하지만 이 가르침을 가지고 더 나아가기 전에 나는 이제

성가시기까지 한 어떤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개별 측면으로서

서로의 영에 대해 이야기 하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요....

당신의 영, 내 영, 보라이언의 영, 우리집 고양이의 영 따위로요.

그 하나 속에 개별화된 부분들이 있는 건가요?"

"단 하나의 영만이 있소"

차분하면서도 확고하게 예수가 장담했지만 나는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항상 당신이 방에 들어올 때면 알 수 있어요.

그런 당신의 영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 아닌가요?"

"아니오. 다르게 느껴지는 건 나의 사랑이오.

우리가 각자를 확인하는 건

각자의 사랑에 의해서요.

영은 우리의 사랑에 공명하죠.

그건 마치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는 호수와 흡사하오,

그 호수 안에 사는 물고기들 각자는

그 물 안에서 각기 다른 진동을 발산하죠.

마치 지문처럼 당신의 사랑 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영을 공명시킵니다.

당신은 이것을 그 사람의 영이 느껴지는 양태로 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뿐인 유일한 영이

그 사람에게 공명하는 방식이오.

만일 하나뿐인 유일한 영이 좀더 긍정적이고 뚜렷하게

당신에게 공명해주길 바란다면,

진실로 당신 자신인 사랑이 되시오.

글렌다, 당신이 확인 할 수 있게 된 것은 내 사랑이오.

내 사랑은

다른 누구의 사랑과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브라이언의 사랑도 다른 누구의 사랑과도 다르게 느껴지고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어느 누구의 사랑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똑같게 느껴지지 않죠.

그래서 영이 응답할 때,

영은 각자의 사랑 하나하나를 독특한 자국으로 존중합니다.

이 사랑은 역으로 금강입자들을 지휘하고요.

당신의 개별성을 규정하는 건 영이 아니라

사랑이오,

영은 나눌수 없는 요소이고,

금강입자들도 복합 실체들을 이루는 벽돌들입니다.

그것들도 그 본성에서 백퍼센트 총체적이죠.

반면에 단수화하고 개별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사랑에만 있소,

사랑이 없다면

당신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구별되지 않을 겁니다. "

사랑에 대한 이 같은 안내에 근거해서 하루는 예수가 물었다.

"글렌다, 당신 자신이 사랑이고

사랑은 외적인 상품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증명할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고 싶소?"

"그럼요!" 내가 서둘러 대답했다.

"당신의 적들을 사랑하시오."

이건 내가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고, 그런 권유에 전혀 꺼림직함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의 적들을 만났을 때,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사랑도

외적요소들 때문이 아니라는 걸

당신은 일종의 사실로서 알고 있소. 당신은 그가 친절하거나,

당신이 그의 눈 색깔을 좋아하기 때문이거나. 그 만남으로

당신이 이익을 보기 때문에 당신의 적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오.

당신의 적들을 만났을 때 당신은 자신이 사랑이고,.....

당신 사랑의 근원임을 압니다.

내가 당신들더러 네 적(원수)을 사랑하라고 말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오. 그렇게 하는 건

당신이 나약해지거나 수동적이거나, 당신이 짓밟히거나

고통받거나,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유리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임을

당신이 배우기 위해서요.

이것을 아는 것으로

당신은 지휘권을 쥐게 됩니다.

외적 상황들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당신에게 가르칠 능력이 없소. 하지만

외적 상황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당신은 언제나 외부세계로부터 허락을 받고자 할 거요.

당신의 진짜 적은 이런 집착이오"

내 주의를 그 그림으로 다시 돌리면서 그가 되풀이하여 말했다.

"금강입자들을 지휘하는 것이 사랑이오.

당신과 당신에게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도

공유되는 많은 입자들이 있소, 그렇다면

당신들 두 사람 중에 어느 쪽이 그것들을 지휘하게 될 것 같소?"

"사랑하는 쪽이오"

"그것이 첫 번째 핵심이요. 하지만 그 이상이 있소,

그런 체험들은

당신이 사랑이란 주체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기회를 당신에게 주게 될 거요.

세상은 당신더러 바람직하고 유쾌한 결과들로 완성되는 감정을

사랑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쳐왔소,

다시 말해 사랑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요.

이보다 더 진리에서 먼 이야기는 없을 거요. 왜냐하면

원인과 지휘의 보편 수단이 사랑이거든요.

마지막이지만 똑같이 중요한 핵심은,

당신과 대립하는 그 사람이 전혀 당신의 적이 아니란 것을

당신이 그냥 발견해낼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이것을 인간이 '적'인 경우에만 한정시키지 마시오.

자,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어떻게 태풍의 방향을 돌릴 건가요?"

"전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요"

나는 그가 그런 질문을 내게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당신은 태풍의 추동력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것과 마주해서 사랑으로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태풍을 지휘할 수 있소.

금강입자들을 사랑의 지휘를 받으니까요.

사랑은

만물의 근원이자 지휘자요.

그리고 사랑의 자녀로서 당신은 그 지휘권을 위임받았소.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이 사랑의 권능으로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소,

사랑하는 것으로가 아니라요,

딴죽이 걸리는 지점이 여기요

당신은 사랑으로 있어야 하오!

모든 상황의 심장부에서 타오르는 불꽃인 사랑으로요.

당신은 태풍을 이루는 그 힘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말 그대로 그것을 진압할 수 있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난 뒤에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태풍의 아름다움을 보시오. 그것을 이루고 있는 힘들의 아름다움을

보시오. 그것을 속속들이 사랑하시오.

당신이 그것과 하나가 될 때까지

그것의 필요성을 찾아내시오. 당신의 확신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소,

태풍이 그냥 옅은 공기로 흩어져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이슬비 같은 것으로 바뀔 수도 있소. 어쩌면

다른 지역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요. 설사 가장 못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을 거요

사랑은 절대 사랑을 해치지 않으니까!

만일 당신이 벌레들을 집에서 몰아내고 싶다면,

그것들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시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알고 있소,

그들은 화학약품을 쓰지 않소, 그냥 다른 곳에서 벌레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이 금강입자들을 지휘하는 데

사랑을 사용한다면,

당신 삶에서

이뤄낼 변화들은 이루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요"

내가 예수와 함께 보낸 그 기간 동안

나는 예수가 삶에 대한 가르침의 일부로 '통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몇 번이나 통제하려는

집착에 같혀 있는 사람들의 비극적 상태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통제란

이분법적인 상황 안에서 지배를 달성하려는 책략이죠.

사람들이 양극성 안에서 움직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통제를 사용합니다.

더 나쁜 건 통제가 일단 확립되고 난 후에는

그 통제를 지속하기 위해

양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거요"

반면에 지휘는 그에게 대단히 긍정적인 화제였다.

그의 말투와 몸짓으로 보아

그것은 우리의 약정된 권리 중 일부여서,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은

우리의 존엄에 필수불가결함을 전제로 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의 유일한 주권자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 되는 것뿐이다.

"당신이 지금껏 사랑으로 지휘했던 그 모든 미립자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당신의 것이요"

한번에 받아들이기에 이것은 너무나 엄청나고 놀라운 견해였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추스리고 물었다.

"이것이 당신이 몸을 부활시킨 방식인가요?"

"물론이오.

그 당시까지 내 몸을 구성해왔던

그 모든 입자들을

전면적으로 지휘할 원리를 준 것은 사랑이었소.

그리고 이제 그것들은 구조의 법칙이 아니라

사랑의 법칙에 의해 다시 구성되었소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구조의 죄수가 아니게 되었소"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우리가 새로운 몸들을 가지고

사랑을 의식적으로 지향하게 될 새로운 지구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그때가 언제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 장담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 진실을 아는 것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날 거요.

이 새로운 존재상태에서는 말 그대로

사랑이 당신들 가슴과

당신들의 몸 세포를 박동치게 할 거요.

사랑이

당신들의 혈관 속 혈액이 흘러가게 할 것이고,

당신들의 생각과 당신들 주위의 그모든 에너지,

당신들이 끌어당기는

그 모든 것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오"

"이것이 당신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방법인가요?"

"음 , 그래요" 그는 겸손하게 인정했다.

"당신은 정말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군요. 그렇죠?

그건 그냥 비유가 아니었군요. 그렇죠?"

"그렇소, 그건 비유가 아니었소, 나는 정말로

생선의 수를 늘였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해야 했던 건 한 마리의 생선을

충분히 사랑하는 게 전부였소"

예수는

그것이 참으로 간단한 일인 듯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경이감에 가득 차 그를 바라보며

소리 죽여 속삭이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 그건 사랑일 수밖에 없었겠군요"

그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이해했다.

그에게서는 이분법이나 대립상황의 기미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현존 앞에서는 어디에도 긴강이 없었다.

그는 진리와 이해에 근거하고

민주화된 현실의식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 과학과 과학적 사고방식,

더 높은 완결성의 추구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진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음의 구조물들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이해가

실존의 단순한 진리들에 근거하고

우리의 실제적 필요를 돕는 데 응용되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단지 권력을 독점하거나 사람들의 순종을 끌어내거나

인위적인 환경과 상황들에 대한 의존을 높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과잉 기술에 대해서는

별반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그는 실행력을 대단히 존중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신의 법칙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언했다.

"실행력이란 지상에 펼쳐진 신의 조화요"

우리는 너무 자주 구조의 교리들을

삶의 질서정연함과 실행력의 원인으로 오해한다. 이것은

엄청난 환상으로,

구조가 일시적으로나마 시민권을 확보하는 것이

이 환상에 근거해서이다.

예수는

자주 애정 깊은 존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구하게 인식할 우리의 권리를 상기시켰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우리와 존재 전체를 묶어주는 사랑을

지휘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작동시킬 수 있다.

"마음은

당신의 현실 개입을 구조화하길 좋아하고,

그런 집착을 정당화하길 좋아하죠,

마음은

삶이 대변하는 것을 미리 추측하고 예단하고 싶어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고안해낸 구조 모델들은

엄청난 덫이 되죠.

그런 공식들은 자신들의 설계도를 '거룩한'것으로

심지어 무구한 실체보다 더 기본되든 것을 떠받들도록

당신의 인식을 조건짓지만, 이건 거짓이요"

애매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용어로,

예수는

지성은 마음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마음은

구조와 지성이 만나는 토대요.

당신의 지성이 구조의 장벽들과 필멸성에만 한정된다면,

우주를 초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의 잠재력은 실현될 가망이 없소,

무구한 인식은 위대한 계시자요"

그는 나더러 고요히 앉아서 인식하기를....

창박을 내다보고 무엇이 있는지 그냥 말해보기를 권하곤 했다.

당신 역시 삶에 접근하는데 공식이나 정규 교육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따금 내가 그림의 구성 구조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는 내가 그 과정을 좀더 직접적으로 보도록,

내 앞에 있는 그대로

좀더 무구하게 보도록 도와주곤 했다.

내가 거기서 어떤 규칙성을 끌어낼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 흐름을 바꾸곤 했다.

"글렌다. 당신에게는 이런 게 필요 없어요.

삶을 바라보거나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해줄

어떤 공식이 필요 없단 말이오

그냥 여기에 있으면서

인식하시오.

마음을 느긋이 하고 그냥 있으시오"

그가 계속해서 권했던 건 그냥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무구한 인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창세기를 읽으면서 가졌던 오래된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선과 악이라는 주제를 팀구했다고 해서

무구의 동산에서 추방된 사건과 관련된 의문이었다.

나는 선과 악을 탐구하는 것이

왜 인간에게 금지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탐구는

마음의 추구이고

마음은

한없이 양극화되기 마련이오

마음이

선과 악이란 주제를 추구하면

이분법을 피할 도리가 없소.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신의 인식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데만 쓰게 되죠"

그가 다시 덧붙였다.

"올바른 삶으로 나아갈 방법이라면

가슴이 이미 알고 있소,

가슴으로사는 자신이

타고난 것인만치 연구하거나 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마음은

참된 선이 뭔지 결코 알 수 없소.

신을 위한 진짜 토대는 사랑이오.

그 다음에는 각자의 목적에 따라

무구한 인식과

자비로운 봉사로

삶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고요

선과 악이란 주제를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소.

그것은 오직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있을 때에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소.

아무리 선한 행동을 많이 해도

그것이 사랑의 불충분성을 보상할 수는 없소.

영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랑인,

이런 사랑에게 영이 속임을 당할 리 만무하구요.

사랑은 윤리 너머에 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은총이란 게 있을 수 있겠소?

" 오히려 참된 윤리라면 사랑을 본뜨기 마련이오"

우리가 옳고 그름이라는 주제를

마음으로 이해하려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심판하고 비난하고 가로막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몰아내는 게 전부인 건 분명하다.

"가슴은 양심을 타고납니다.

우리가 '죄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당신이 가슴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내주는 일종의 자동경보 창치요.

자신의 가슴을 따르는 사람은

설사 사회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경계선 밖으로 약간 벗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죄의식을 느끼지 않소.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마음으로만 사는 사람은

설사 논리적으로'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조차도

은밀한 죄의식을 지니게 되죠

그 속에는 어떤 내적 만족도 없기에

얼마 안가 그는 옳은 일이 뭔지 아는 능력을 일고 맙니다.

결국 그는 묻어둔 죄의식이 계속해서 고뇌로 되살아나는 상황에서

시도하는 것초차 그만두게 되죠.

그는 그 죄의식을 마비시키거나

제거하는 심리치료나 알콜에 많은 돈을 들일 테지만,

마음에 지배받는 사람은 결국에는 자신의 면역체계를 부수고 맙니다. 이것이 마음에 지배되는 세상이 만들어내는 최종 결과물이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전적인 은총으로 뒤집을 수 있소"

"어떻게요?"

"당신의 가슴을 따르시오!"

그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마음은 허세를 따르는 거군요"

"안타깝게도 그렇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재빨리 옮겨다니던

내 머리에 다음 번 질문꺼리가 떠올랐다.

"신약에 보면 바울이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건 당신의 말씀인가요?"

"가깝지만, 정확하게 내가 했더 말 그대로는 아니오.

아람어가 그리스어로 바귀면서

내 메시지의 실천적인 단순성 중 일부가 좀더 추상적인

그리스식 사고방식에 흡수되고 말았소.

아람어는 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서민의 언어죠

내가 그것을 택한 것이 그 때문이고요.

거기에다가 바울은 자신이 봉사한 사람들의 필요와 이해에 따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소

모든 악의 뿌리는 탐욕이오.

탐욕이 존재하게 되면

사람들은 극단으로 가기 마련이죠.

또 탐욕은 결핍감을 자아내오.

결핌이 생기면

두려움이 정원의 잡초처럼 싹을 틔웁니다.

인간에게 알려진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두려움에서 생긴거요.

그래서 이것은 뿌리부터 가지까지 저 악명 높은

가계보를 그리게 되죠.

탐욕이 자아낸 극단들이 결핍감을 낳고,

결핍감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모든 파괴적인 감정과 행동의 뿌리가 되는 식으로요"

"휴. 다행이군요! 전 돈을 좀더 많이 벌고 싶었거든요"

"그건 상관없소,

당신은 돈을 벌 수 있소.

돈이란 건 교환증서에 지나지 않아요.

사실 더 많이 교환할 때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더 건강해지죠.

나는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를 활기차게 교환하는 모습을

보길 좋아하오 경제가 유동적이면 구조가 지배하기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환하면 굶주리는 이도 없고 실직하는 이도 없고

가치 있는 아이디어가 묻히는일도 없거든요"

"예수님,

증오가 사랑의 대립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최근에 제가 읽은 책에서는 사랑의 대럽물은 두려움이라고

하던데요 예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예수의 얼굴에

쓴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난 당신이 지금쯤은 사랑에는 대립물이 없다는 걸 알았으리라

생각했는데요.

사랑은 모든 양극성을 녹여버리는 용매라오"

내가 그의 간결한 답변의 단순성을 되새기면서

들여다본 그의 눈은 맑은 샘물처럼 투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 주제를 놓고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게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해보길 권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두려움이 판을 치죠,

증오는 사랑 자체를 두려워하고요

탐욕도 사랑 없이 삶의 필요들을 기르고 공급하려는,

집착에 찬 욕구입니다.

사랑의 권능을 위조하고 뒤엎으려는 시도가

탐욕이라고 할 수도 있소.

탐욕이

모든 악의 뿌리인 이유가 여기 있소.

게다가 그것은 물질 소유나 돈 같은 것에만 한정되지 않죠.

주목받으려는 욕구와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욕구,

명성을 얻으려는 욕구, 교육 받으려는 욕구, 치료하려는 욕구,,

의존하려는 욕구,

심지어는 비참해지려는 욕구도 탐욕일 수 있소.....

사랑 없이 애착의 끈을 놓지 않는 경우라면

그 어떤 것도 탐욕일 수 있소.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당신의 생각은 잘못된 게 아니요.

이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요!"

"왜 탐욕인가요?"

"만일 사랑을

전적으로 대신하려고 한다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많겠소?"

"무슨 말이지 알겠어요"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지휘할 근거를 완전히 잃고 말죠.

그가 기대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통제인데,

이것은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 그것도 아주 많이요!

내가 예전에 한 이야기 중에 마음이 온유한 자는 천국에 들리라는 게 있소, 하지만 당신이 알아둬야 할 건 이 가르침 역시 그다지 잘 번역되지 않았다는 거요.

당신들의 언어에서 '온유'란 건

겸손(자기 비하)과 굴종을 의미하니까요.

내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소.

차라리 '온건'이라고 했더라면

내 메시지를 좀더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있었을 거요.

온건하게 사는 사람은

새로운 지구 경제의 토대를 이룰 테니 말이오.

그들은 지상왕국을 물려받을 것이요.

"그건 워낙 당연한 원리인 듯이 들려서

제가 당신 견해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탐욕스런 사람이

앞서나가고 온건한 사람은 뒤쳐지는 듯이 보이는 건 뭣 때문인가요?"

"오늘날에는 온건을 실천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도

공포스런 결핍에 대비해 자신을 지키고 자급하는 한에서만

그렇게 하니까요.

온건이 이루어지기 위한 이상적인 전제는

서로 나누는 풍요의 정신속에

집단으로 참여하여 함께 나누는 거요.

탐욕의 경우로 말하면,

그것의 초기 유익성은 사실 사기성이 농후한 것이요

. 탐욕은

처음에는 의기양양함을 자아내는 자동 '치유'기능을 갖고 있소,

그 사람은 그 과도한 추구에 매달리기 전에 아마도 자신의 결핍의

믿음 속에 빠뜨리고는 '이걸 가질까? 아니면 저걸 가질까?"하는

무수한 결정들로 자신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을 거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모두를 가질 거야!" 라고 선언하는 거요.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결핍의 믿음을 내던지고

결정의 무한한 이분법을 끝장낸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내면의

엄청난 창조력을 풀어놓게 됩니다.

이제 그가 이 힘을

질적으로 장악하여

모든 삶의 연결성에 그것을 적용할 수 있다면,

그는 파괴적인 집착이 아니라

풍요를 일궈낼 수 있소.

하지만 거의 대부분 그것을 오직 자신에게만 적용하여

'오직 나를 위해서'라고 하는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내고 말죠.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풍족은

그 인식에 대한 배신이요!"

내가 당신더러

우주의 무한성과 풍족함을 깊이 되새겨보라고 한적이 있지요?

그건 당신이 다른 삶들과 맺는 연결성을 강화하란 이야기지,

당신 혼자서 그 모두를 소유하란 이야기가 아니었소.

탐욕의 위험에 빠지지 않으면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줄 간단한 지침이 있는데.

그건 당신이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갖지 말라는 거요"

이건 소유의 문제를 불러왔다.

"누구도 뭔가를 소유할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아주 좋은 질문이오. 이런 식으로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그것은 당신이 뭘 소유하려고 애쓰는가와 관계가 있소.

구조를 소유하려고 애쓰는 건

덧없고 망상에 찬 것이기에 무익하고 쓸모 없는 노력이오.

창조주가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이유가 이것이오.

구조를 소유하고 경영하려는 노력만으로는 전혀 가치가 없소,

게다가 당신의 사랑이 지휘했던 그 모든 것이

어쨌든 당신의 것으로 유지 되니 말이오

그렇다고 아무도 뭔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다면,

훔치지 말라는 계율도 존재하지 낳았을 거요. 그래서,

그래요, 당신들은 소유하오 하지만

당신들의 소유권은 당신들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당신들이 실존 자체를 이루는 금강입자들에 발휘되죠.

당신들은 이 입자들과 영원히 함께합니다.

소유권은

구입대상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요

아무리 많은 돈도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에 붙일 명패를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

'성스런 몫'의 법칙이란 게 이런 거요.

당신이 돈으로 구입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하나 이상의 우주 권능이

그것을 당신 손에서 빼앗아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자비를 베풀 때까지

그쪽이 오히려 당신을 소유할 거요.

당신들은 자신의 삶을 소유하고 있소,

당신들은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준 것들,

당신들 자신이 창조한 열매들,

당신들이 노동한 열매들을 소유하고 있소,

당신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품고 있는 상상과 꿈과 열망이 빚어낸

그 모든 결과들을 소유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 모두와 또 그 모든 기억들이 맺는 열매를 소유하고 있소.

부 란건 사랑이 맺는 수확물이고,

사랑은

금강입자들을 지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당신에게이끌려오는 그 모든 것...

당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

당신이 살아오면서 사귄 친구들,

당신의 삶을 넓혀주는 가족들,

당신의 삶을 키워주는 꿈들, 이 모두가

당신이 지금껏 사랑했던 것들이오.

이것들은 당신의 것이고, 이 사실은 존중되어야 하오."

그는 주의를 주었다.

"구조 자체를 위해서 구조를 소유하려고 하지는 마시오.

모든 구조는 유한하오.

구조란 건

무릇 사라지기 마련이오.

나는 당신을 속이는 구조들은 놔두고,

당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

당신 것인 모든 것을 재창조해줄 하늘나라에 당신의 부를

쌓아두라고 권하고 싶소.

사실 안식일 이주는 진짜 축복이 이것이오.

그 날은 당신의 삶에서

구조의 지배를 내려놓는 날이오.

그 날 당신은

신의 법칙들과 삼라만상의 무한성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당신을 소유하고자 애쓰는 인위성들과 환상들을

잠시 제쳐두는 것으로

당신 자신인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지요"

"전 안실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정도로

계명에서 말한 걸로 아는데요"

"성경을 찾아보시오. 그 이상의 것이 있소"

나는 전에는 그 계명이

아들들과 노예들, 양, 도시의 이방인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성경의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고

내 마음에 떠오른 이미지는

우리 모두가 삶의 경직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편안해지는 모습이었다.

"당신 혼자서는 안식일을 지킬 수 없소" 그가 지적했다

"안식일은 자유가 주는 선물로,

당신이 모두에게 차별 없이 베푸는 축복이오. 그것은

구조화된 실존에서 벗어나는 사면의 선물,

잠시 동안 그냥 있음의 권능과 성스러움을 드러내주는 사면의 선물이오! 사람들은 일곱째 날을

창조주가 뒤로 물러났음을 뜻하는 것으로 크게 오해해왔소.

이건 전혀 진실이 아니오.

그것의 참 의미는

창조주가 행함이 아닌,

있음으로

창조하고 유지하고 사랑하고 자원한다는 것이오.

물러남이 아니라 안식으로 말이오!

만일 당신이 아버지처럼 되고자 한다면

당신은 사랑으로 있는 것을 통해서

삶을 지휘하는 비결을 배우게 될 것이오.

이런 능력을 얻게 될 때

당신은 구조를 극복할 것이오.

일곱째 날은

구조에 대한 창조주의 우위를 찬양하는 날이오,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할 때마다

당신은 이 원리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때마다

당신은 세상이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이오"

"왜 이 원리를 인식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건가요?"

"구조가 성경을 해석할 때,

그것은 환상을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죠,

반면에 사랑이 성경을 읽을 때는

환상을 꿰뚫고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구요"

"당신이 말씀하시는 구조란 게 어떤 건지 막연하게는 이해가 가지만,

제 이해가 너무 협소한 것일 수도 있으니, 당신이 뜻하는 구조가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안 될까요?

"구조란 건

우주 속의 조직 요소요.

비록 부차적인 파생 요소이긴 하지만요.

혼란에서 질서를 처음 이끌어내는 건 사랑이지만 ,

질서잡힌 배열 형태를 보완하여 지속성을 갖게 하는 건 구조요.

사랑이

당신의 집을 세워준다면,

구조는

그 벽돌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해주지요.

사랑이 국가를 세우면 구조는 그 국가를 관리합니다.

사랑이 올바른 행위의 한계를 정하면 구조는 그것을 강화하는 법률을 만들어내고요

구조도 마음처럼 제대로 작용할 때는 좋지만

사랑이 바꾸고자 하는 바에 전혀 따르지 않고

융통성 없이 지배할 때는 전제적이죠.

구조는

단순한 형태들에서 시작해서

복잡한 형태들로 쌓여가는, 예견할 수 있고 합의된 실존 유형들을

대변합니다.

구조는

잠재력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조직 공리를 붙들어두는 유형화요

예를 들면 구성요소가 같은데도

수증기와 물과 얼음 간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 구조인 거요.

하지만 H2O를 수증기로 할지 얼음으로 할지를 결정하는

'의지'는

구조가 아니라, 환경(사랑)에의 조화로운 적응입니다.

모든 구조는 파생물이어서

개정과 중단, 발달에 종속되기 마련이오.

바람직한 창조물들을 안정시키고 유지시키는 형상과

더큰 물질 총체로 결합하게 해주는 보존성의 낙인을 구조하고

할 수도 있소.구조는 상황이 그 자리에 있도록 붙들어두는 것이오.

이 격자판 위에는 마음이 만들어내고

인간이 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많은 유형들과

구조모델들이 놓여 있습니다.

현실을 앞서는 '성스런 설계도' 같은 건 없소,

이런 발상은 쓸모없는 구조들을 개정하거나 없애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구조에 당신들을 지배할 힘을 주기 위해

발명된 것에 불과하오"

이따금 구조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을 컴퓨터의 '저장'단추에 비유하곤 한다.

우리가 작업한 것을 보유하게 해주고,

한 작업과 다른 작업을 합쳐주거나,

어떤 프로그램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시 불러낼 수 있게

해주는 '저장'단추 말이다.

구조가

사랑의 계속되는 창조행위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의미 있다는 건

무척 위안이 되는 앎이다.

삶을 무구한 잠재력으로 되돌릴 수 있는 '삭제'단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것 또한 그러하고.

"사회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구조를 가장 많이 비호하죠. 역설은 거의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도

그것에 맹목적으로 순종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변해봤자 더많이 잃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두려워하죠.

이런 게 부자와 가난한 자간의 조화요.

반면에 온건과 유연성을 토대로 가치를 세우고 보완하는 사람들은

성장을 가로막는 일 없이 삶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 구조를 충분히 활용하죠.

당신들은 삶의 구조들을 차단하고

억류하는 것으로 체험하는데 사실 그것들은

당신들의 참된 부를 빼앗아버립니다.

당신들의 참된 부는 훨씬 더 높은 차원에 있소.

그것은 사랑이 거두는 수확물이요.

당신들은 받으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내려놓음의 권능을 배우시오.

이 교훈은 당신의 적들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구조를 내려놓을 때

이미 존재하는 참된 부가 몇 배로 늘어날 테니까요.

당신이 배우게 될 첫 번째 진리는

참된 부는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요.

당신이 해야할 일은 구조를 줄이는 거밖에 없소.

이런 깨달음을 얻을 때

당신은 구조에 얽매인 자신의 노예상태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확실하게 나아갈 것이고, 형제애라는 위대한 현실 속으로 옮아갈 거요"

예수는

그 당시 상황과 관계되는 몇 가지 실례들을 들려주었다.

"당신이 사서 개조했던 이 집만 보더라도 허물어져가는 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당신은 집의 가치를 높였소, 하지만

당신이 이 집을 팔아서 소유권을 양도하지 않는 한,

그 금전소득을 은행에 집어넣을 수는 없지요 보시오,

이런 게 당신의 선택이오.

당신은 이 네 벽의 구조를 유지 할 수도 있고,

그것을 팔아 돈으로 바꿀 수도 있소, 이건 다른 것들에도 똑같이

적용 됩니다.

구조로서 얻어지는 부는 매도되죠.

구조는 질서를 세우는데. 이건 좋은 일이요.

당신은 구조를 세웠소, 그런 다음 그것을 내려놓는 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부를 받는 거요.

그래서 아버지가 일곱째 날에 하신 것이 이것이오. 그는 말했소.

'이것도 좋구나 하지만

있음의 상태가 훨씬 더 낫다.

나는 사랑의 수확물인 내 진짜 부를 받아내겠노라" 고요

예수는 반짝이는 눈과 부드러운 미소 강렬한 요약으로

그 날의 가르침을 매듭지었다.

"신의 자녀들은 신의 참된 부인 사랑을 수확하기 위해 창조되었소,

당신들은 그의 수확물이자 그의 수확도구요,

당신들은 그의 사랑이 낳은 자녀들이오.

당신 또한 그러해서.

이것은 당신이 물질 부를 쌓는 방법이기도 하죠.

당신은 구조와 거래하여 그것을 세웁니다.

당신은 이건 좋구나, 라고 말하죠 당신은 다른 데 쓰기 위해

그것을 팔아서 이익을 실현합니다.

당신이 구조에 한번도 붙들리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부가 쌓일 거요.

구조는 당신이 궁극의 부를 손에 넣는 걸 영적 지적 신체적으로

가로막는 환상이요.

진리를 손에 놓으려면 환상을 내려놓아야 하오"

"신의 자녀들은

신의 참된 부인 사랑을 수확하기 위해 창조되었소,

당신들은 그의 수확물이자 그의 수확도구요,

당신들은 그의 사랑이 낳은 자녀들이오.

당신 또한 그러해서. 이것은 당신이 물질 부를 쌓는 방법이기도 하죠.

당신은 구조와 거래하여 그것을 세웁니다.

당신은 이건 좋구나, 라고 말하죠

당신은 다른 데 쓰기 위해 그것을 팔아서 이익을 실현합니다.

당신이 구조에 한번도 붙들리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부가 쌓일 거요.

구조는 당신이 궁극의 부를 손에 넣는 걸 영적 지적 신체적으로

가로막는 환상이요.

진리를 손에 놓으려면 환상을 내려놓아야 하오"

그날 밤 나는 이 원리가 인간관계의 중차대한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를 놓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관계의 실체와 그것의 구조를 분간할 수 있을까?

관계에서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요소란 어떤 것일까?

예수는

아마도 틀림없이이런 의문들을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해내길

바랫던 듯싶다. 왜냐하면 다음날 아침에 그 문제를 제기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음에도. 예수에게 물어보는 대신에 혼자서 숙고 해보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관계에는

많은 역할놀이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역할놀이가 관계의중심이 아니란 사실을 종종 잊는다.

관계의 중심은 함께 있는 이유와 양쪽을 묶어주는 사랑,그리고

그 와나의관계를 추구할 가치가 있게 만드는 상호존중이다.

'자신'이란 존재의 진실과

상대방이란 존재의 진실은

그 역할들로 규정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역할이란 언제라도 장식할 수 있는

집안의 방들과 같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자주 잊곤한다.

나는 역할놀이를 내려놓고 그냥 있거나, 아니면

관계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역할을 바꿔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것은 아마도 서로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한계 너머의 사랑을 확인시켜줄 약간의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것이다.

나는 관계에서 맺는 사랑의 수확물이

관계를 끝장냄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관계에 놓았던 선입견과

제한들을 내려놓을 때

나타난다.

오직 그럴 때만 우리는 참된 관계라는 부를 지닐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예수는

죽음의 체험을 복합구조인 신체형상을 내려놓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이해에 또 하나의 차원을 보탰다.

"영혼을 빌린 것에 불과한 이것(신체형상)이

내어놓는 놀라운 에너지 방출과

아버지가 당신에게 준 그 모든 것의 훨씬 더 멋진 귀가를 목도하죠.

당신의 사랑이 지휘했던 이것은

영원히 당신의 소유요.

당신의 사랑을 함께했던 그모든 사람들도

당신과의 합일속에 남아 있을 거구요.

당신의 최종 수확물은 이것이오"

우리의 부가 어떤 식으로 지속되는가란 주제를 다루고 있을때,

그에게 삶의 연속성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소재였던 터라.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몇 번이나 물어보곤 했다. 그는 말했다.

"당신이 자신의 위대한 연속성을 인식하기에는

당신이 지금 아는 대로의 삶은 너무 구조화되어 있소,

당신이라는 존재의 모든 것이 연속됩니다.

삶이 뒤에 남겨놓는 건 자신의 복합형상뿐이오

. 당신이라는 존재의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소.

당신 몸을 이루는 금강입자들 또한 당신과 함께 남고요.

당신은 영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당신 자신인 사랑은 언제나 당신의 이름을 실어나를 겁니다.

당신이 영에 의해 기억되고 소중히 품어지듯이, 당신의 재창조도 영원히 되풀이됩니다. 그것이 하늘이든 땅이든, 아니면 아버지의 무한한 영역 다른 어딘가에서든요"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어 '윤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전생이니 내세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의 대답은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당신의 불멸성은 단순명료한 사실이오. 그래서

당신이 단손하게 이해하면

그 이해는 좀더 정확해질 수 있소.

삶은 신의 의지에 따라 당신을 위한 자리를 무한히 되풀이해서

만들어냅니다. 당신의사랑에 맞추어, 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요"

그는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윤회의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소,

그것은 당신의 연속성을 긍정하죠. 이건 좋은 일이오. 하지만

그 속에는 당신의 불멸성을

구조와 선으로 환원하는 왜곡이 있소, 이건 사살이 아니오.

당신의 불멸성은

삶의 수레바퀴나 인과의 길 안에 같혀 있지 않소.

또 당신은 일직선적인 진화의 산물도 아니요. 당신은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완벽한 사랑이며, 계속해서 무한하게 자신을

재발현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의지와

당신 자신의 목적, 당신 자신의 사랑, 당신 나름의 봉사와

배움의 자리에 따라 이루어지지요"

그는 유머를 약간 섞어서 덧붙였다.

"실제로는 당신은 오직 하나의 삶만을 가지오!

다만 많은 장을 가진 아주 긴 삶인 거요"

나는 웃었다. 그러자 모든 심각성이 사라졌다.

내가 예수가 던진 이 가르침을 소화하고 나서 보니.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인과의 이유를 찾는 방식이 이해가 됐다. 그들이 자신들의 탐구를

심지어 태고 역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

시작점을 찾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하지만 시작점은 시랑이 아닌가.... 신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과 남들의 사랑.물질과에너지와시간과

공간이 물질 실체 및 그런 피조물들을 보존하고 한정짓는 구조들을

통합하고 결합하는 방식에는 분명히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근원은 사랑이며,

사랑은 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까지도 지휘한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나는 사랑이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원인임을 알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자신의 깨달음에 기뻐하고

있는 내 모습을 예수는 잔잔한 시선으로 자켜보았다.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예수가 다시 말했다.

"윤회를 해답으로 찾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자신을 찾으려는 거지만, 이건 방향을 잘못 잡은 겁니다.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시간이나 장소 같은 건 없소! 자신의 유일한 문맥은 지금이요! 과거는 지나갔소! 오직 에고만이 문맥에서 벗어난 자기 정체성에 매달리죠. 당신은 자신의 전생이 거지나 문둥이, 도둑 따위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을 거요. 왕이나 영웅, 성자로 살았던 자기 전생을 뽐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런 게 영혼을 자신의 구조 속에 묶어두려고 두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말하는 에고요. 당신의 불멸성은 구조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소. 자기 정체성의 권은 어떤 일직선상에 있지 않소. 그건 오직 자신의 사랑 속에만 있소.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사랑이요"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그 점을 진실로 알 대

당신은 자신에 대해 다른 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소.

이것이

당신이 구하는 모든 해답을 가져다줄 테니까요.

그건 자신의 불멸성을 장담하게 해주고,

자신이 남들과 함께하는 불멸의 사랑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강해질때,

당신은 자신의 참된 목적에 초점을 맞출 수 있소. 왜냐하면

당신의 목적은 사랑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거든요.

"최면으로 전생 퇴행을 하는 심리 치우법들이 많은데.

그런 게 효과나 가치가 있을까요?"

"그건 전적으로 그 기억을 불러오고 받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솔직한가에 좌우됩니다. 가치로 말하면 전생 퇴행의 가치는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

이제 쓸모 없는 것을 내려놓는 데 있소. 진실하고 철저한 용서 또한 이와 똑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요"

"우리의 잊혀진 집단 기억 중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대다수 사람들이 아직도 겪고 있는 원초 탄생 상흔이란 게 있소"

'탄생 상흔이란 게 뭐지?' 하지만

이런 내 의문을 입밖에 내기도 전에 예수는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당신들이기 이전이던 때가 있었소.

치후로 당신들이 당신들 아닌 때는 절대 없을 테지만요.

당신들이 사랑의근원 안에서

완전히 하나이던 때가 있었소. 그런데

사랑은

당신들에게 당신들 자신으로서 불멸성을 주고

당신들 나름의 정체성을 부여하기로 마음먹었소.

그건 당신들이 받은 위대하고 영광스런 선물, 희망과 기회와

책임 가들한 선물이었소, 하지만

공동의 빛이라는 단순성 외에는

다른 어떤 준거점도 갖지 못하고 있던 신의 자녀들은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삶이라는 그 선물을 분리로 해석했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임으로써

깊이 상처받았던 거죠

이건 비극적인 오해요.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온 문제와 고통들 중

대다수가 이 탄생 상흔에서 비롯되었소.

이런 경우에 직접 해당하는 사람들도 있소. 왜냐하면

몸이 태어날 때의 상흔도 그 사람에게 거부와 소외라는 감정적

상처들을 남기니까요.

혼갖 관계들이 다 삐그덕거리는 경험을 하면서 몇십 년이 지나고서야 그 문제를 인식하고 정확한 치료법을 쓰면 치유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영혼이

자신의 구속 상태를 인식하고

자신이 가진 장대한 자질에 눈을 뜨는데

그 정도야 무어 그리 중요하겠소?"

"무엇이 그런 자각을 막고 있는 건가요?"

"사람들은 집에 가고 싶다는 것과

자신의 자유를 잃으리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방황하죠.

떨어져 있고 싶다는 것과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사이에서...

.. 당신들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더라도

집단 익명성 속에 흡수되는 일은 절대 없으리란 걸 깨달아야 합니다.

개개인은 한 영 속에

자기 나름의 자리를 갖는 예우를 받을 것이고,

이후로 당신들이 당신들 아닌 때는 절대 없을 것이오.

당신들에게는 각자 자기 명의의 영생이 주어져 있소.

당신들이 이 선물의 장대함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당신들은 자신의 탄생을 환희에 가득차 새롭게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오.

처음에 그것을 분리로 본 당신들은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그것을 극화하고 구조화해왔소,

여기에 인간이 구조에 대해

지니는 의존성과 강박관념이 있소.

구조가

대용적인 안전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지구상에서 일어날 위대한 치유는

인류가 원초 탄생의 상흔을 딛고 올라서게 만들어줄 것이오.

인간존재의 진실을 드러내고,

경이로운 우주 안에서 자신의 영광스런 자리를 확정하면서요"

[출처] 끝없는 사랑 115쪽 신의 자녀들은 신의 참된 부인 사랑을 수확하기 위해 창조되었소.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