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본문
만일 당신이 이곳에 이르었다면
어떤 길을 택했고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시작한 여행이었든
변함없는 사실은
이제 감각과 관념을 내려놓아야 하리란 것이오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건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서나
자신을 가르치거나
호기심을 치우거나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건 기도가 효험이 있었던 여기 이 자리에 무릎끊기 위함이요
그리고 기도는 말의 나열이나 간절한 마음이나 갈구하는 소리 이상이라오
------T.S엘리엇
신비는 우리 주위 곳곳에 널려 있다. 게다가 일상 맛보기는 하면서도 아직 풀리지는 않고 있는, 가장 위대하고 매혹적인 삶의 신비, 현대과학의 발견 중에서 아마도 가장 놀랍고 황송한 발견은 모든 존재의 99%가 우리 감각기관과 실험기구들로 관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질량이나 형상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우주를 포함하는 나머지 1%조차 그 에너지 배열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에 불과하다.
닐 보어와 막스플랭크와 베르네르 하이젠버르그를 포함하는 위대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합리적 우주 속에 이해할 수 없는 경이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신비는 참된 예술과 과학의 힘이다.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 더 이상 놀라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혀 멍하니 있을 수 없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다. 우리로서는 해독 불가능한 뭔가가, 가장 고귀한 지혜와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뭔가가 우리의 아둔함으로는 그 가장 원시적인 행태로서만 인식할 수 있는 뭔가가 정말로 존재함을 아는 것 이 앎, 이 느낌이 바로 참된 종교성의 핵심이다"
삶의 시간 대부분을 우리 인식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의 그 1% 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99%는? 우리는 이것과 어떻게 관계하는 걸까? 대개의 경우, 뭐라 딱 규정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 개인들에게 존재하고 발달까지 하는 감각들을 통해서,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 끝없는 우주에 참여하는 걸 지극히 당연시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체를 제쳐두거나 느슨하게 놔두고 놀이나 봉사, 대화, 나눔, 상상, 명상, 기도,연구 , 잠 등등에 열중할 때마다, 우리는 생존 추구로부터 무한한 가능성과의 연결이라는 더 넓은 배경 속으로 우리의 초점을 옮긴다.
우리가 무한과 연결되는 건 저 멀리 있는 이상향으로 신비롭게 승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기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같은 것임을 깨닫는 순간들에 느끼는 고요한 직관이 무한과의 연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순간들에 우리는 모든 것이 인식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면서 이미 우리 눈앞에 있어 왔음을 명확하게 깨닫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참된 발견 행위는 신대륙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의식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탐구해야 할 마지막 위대한 변경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우리의 이해에 휠씬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끝없는 의식의 확장을 고무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기적 같아 보이는 비범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런 기적들이 그의 사랑과 인식과 권능의 수준으로 보면 비범한 것이 아니라 사실 범상한 것이라는 게 그의 가르침이었다. 실제로 예수는 약속했다. 영적인 성취와 신과 인간의 사랑. 그리고 의식의 승격을 통해서 "너희는 또한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할 수 있다"고 만일 예수가 자신을 인류에게서 떼내어 인류 위에 놓은 신비능력들을 가지고 청중들을 현혹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의 기적들은 아무런 지속적인 가치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여러분이 이 책의 저자가 그런 놀라운 체험에 선택된 이유를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저자만의 특출함 등에서 찾는다면, 여러분은 이 책의 가치를 놓칠 것이다. 내 가치는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에 있지, 우리를 떼어내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우리가 공통의 의식을 통해 각자의 사랑을 나눌 수 있고 예수가 인류에게 준 그 모든 메시지들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어서 누구도 서문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올 때까지는 불가피하게 현실 문맥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틀림없이 여러분들 중 다수가 물을 것이다.
예수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이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라고 물론 더 중요한 쪽은 그 사건의 성격이 아니라 이 책에 제시된 대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내용 차제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직업상 나는 화가이고 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육자다. 나는 은혜롭게도 선각자 예수의 현존 속에서 나 자신의 가장 큰 진리를 찾아낸 여성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종교에 대해 논하거나 내가 신학자인건 아니다.
이 메시지들은 독서나 연구, 종교 복음이나 인간 교사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문서의 문양과 그것을 짠 직기는 예수의 초상화를 그린 내 체험이지만, 이 대화의 창시자는 예수 자신이고 나는 참가자에 불과하다.
성스런 영역에서 발현했지만 삶만큼이나 실제적인 현존으로 예수가 내게 모습을 나타내고 나와 함께했던 것은 1991년 11월에서 1992년 3월까지의 대략 4개월 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친구간에 그러하듯...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대화는 이상세계나 다가올 미래의 일들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가 현재 사는 대로의 삶과 각자의 내면에 있는, 천국을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해서였다. 그의 이야기는 대단히 실용적이었고,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가졌으며, 놀랍게도 우리의 가장 앞선 지식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들 안에는 부수적인 보완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명확성이 있었다.
독자의 이행 도움이 되도록 예수가 말한 부분은 고딕체로 표기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 부분들을 전체 대화에서 떼어내어 따로 음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상황에서 내가 가졌던 의문과 자극과 감정들을 드러냄으로써 그 만남의 비사秘史적 측면들을 재구성하고 상기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의 대화가 그토록 친밀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제가 서로의 공통 관심사거나 우리 관계와 관련된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주제들은 중간중간 끼어드는 즐거운 잡담들을 포함해 실용적인 것에서 신비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나는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매일 공책에 옮겨적곤 했다.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받아적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혼자 있는 저녁시간에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내가 대화내용을 공책에 적어놓았던 건, 그 지혜들을 나 자신의 인생철학으로 삼기 위해서였지. 우리 대화를 공개하여 다른사람들과 나누겠다는 생각에서는 아니였다. 게다가 나 자신이 신학적 논점의 모든 측면을 포괄할 만큼 학문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단히 사적인 체험이었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으로서는 사실적인 경험이었다. 그 거룩한 존재가 내가 볼 수 있는 상태로 내앞에 현존해 있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목소리도 있어서, 나는 그 목소리에 직접 소리로 답하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이제 부터 읽게 될 이야기는 자동기술이나 채널링의 결과가 아니란 이야기다. 사실 우리 모두가 신의 채널이긴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채널링 기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다. 채널링은 다른 차원에서 이 세상 차원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끌어들이는 한 방식으로 대단히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최근 들어 인기를 모으며 되살아나고 있는 기법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구별을 하는 이유는 어느 한 현상을 평가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가 내게 했던 말들은 내가 귀로 들었던 것들이었고, 나는 대화의 상대방으로서 완전히 의식하면서 그 대화에 반응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으로서는 나 자신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11월 23일에서 1992년 3월 12일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경이로웠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설명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면에서 나는 여러분들이 앞으로 읽게 될 이야기를 예수의 진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 한 여성의 깨달음 정도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당신이 그분을 친구라고 부르든, 스승이나 선각자 주, 육화된 신이라 부르든 지난 2쳔년 동안에 그분보다 더 강하게 인류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다는 역사적 사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말하자면 당신이 믿든 안 믿든, 혹은 철저히 불신하든 간에 예수가 미친 영향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그분에게 두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은 놔두고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지어진 종교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과 지혜와 사랑과 미덕을 알아보는 또다른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성스런 측면들은 물론 공경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그분을 평이하게 '예수' 혹은 '그(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일부 독자들은 좀더 성스런 칭호를 원하겠지만, 나는 이 정도가 종교적인 시각-일부 사람들을 배제시킬 수도 있는-을 고집하지 않는 적절한 존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의 메시지로부터 여러분이 무엇을 얻느냐는 오로지 여러분에게 달렸다! 예수가 나에게 베푼 가르침의 기본원리 역시 무구한 인식의 원리였다. 즉 "눈을 열어 보고, 귀를 열어 들어라. 감춰진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니, 빛 속에 드러나지 않을 비밀이란 없다"는
그러니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릴 사람은 결국 여러분 자신이다. 받아들일 마음이 열려 있지 않거나 열망하는 마음 없이 들어서야 제대로 듣고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나로서는 여러분이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대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태초에
짧은 낮이 서리와 빛으로 한껏 찬란하고
짧은 하루해가 연못과 도랑의 얼음을 달굴 때
얼어붙은 가슴의 냉랭함이
수면의 거울에
이른 오후의 눈부신 섬광을 반사할 때,
장작불이나 화톳불보다 더 강렬한 불꽃이 멍해진 정신을 뒤흔든다.
바람이 아니라
일년 중 암흑기에 따오르는 오순절의 불꽃이
-T.S엘리엇
한 서사시가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는가는 잡다한 상황이라는 두터운 층 밑에 감취져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때늦은 지혜의 명쾌함이 몽매한 선견지명을 환하게 비추기 전까지는 어떤 아이디어가 언제 싹을 틔웠고, 운명의 행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란 확실히 어려운 법이다. 이것은 내 경우에 특히나 그러하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결정적인 시발점을 선택해야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아마 그것은 1989년 크리스마스 날을 골라야 할 것이다.
그해 겨울 북부 텍사스에는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쳤다. 비록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한겨울의 북풍은 우리 가족을 크리스마스 이브의 난로가에 계속 눌러 붙게 만들었다. 이렇게 불가에서 손과 마음을 녹이던 우리는 다음날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와 그 날이 가져다줄 축복을 기대하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이 지나고 새벽이 서서히 장막을 거둘 채비를 하던 밤2시경이었다. 우리집 고양이 구나가 사이렌 같은 비명소리로 우리를 깊은 잠에서 끌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지붕 위에 산타클로스가 내려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구나는 난로 굴뚝의 건축상 결함 때문에 훨씬 더 불길한 뭔가가 도착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시골집에 없던 화재경보기 역활을 구나가 대신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불길이 거실 대부분을 삼켜버렸고 스플릿 레벨 건물(같은 층의 방이 다른 방보다 높게 되어 있는 건물 )의 모든 출입구는 불길과 소용돌이치는 연기로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손에 잡히는 옷가지 몇벌을 들고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뿐이었다. 다행이 우리 모두가 탈출에 성공했지만 우리는 전재산이 제로 변하는 상황을 망연자실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크리스마스 날, 내 유일한 위안이자 도피처는 잠뿐이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바람에 꿈을 꾸며 자고 있던 나는 화들짝 깨어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 봐. 여보!"
죽음의 문턱에서 화들짝 놀라 일어났던 게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번에는 또 뭐예요?"
"내가 방금 꿈을 꿨는데, 당신이 그리스도의 대형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화제가 필요했다고 하면서 말이야" 속삭이는 투였지만, 남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당신. 헛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요"
남편의 꿈이 하늘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이. 나는 우리 친구들의 기도와 동정이 그런 꿈을 꾸게 만든 모양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만의 피신처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입은 손실 규모는 몇 개월 정도로는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아니 사실 그것은 정면으로 마주하기도 힘들만큼 큰 것이었다. 하물며 한참 곤히 잠들었다가 놀라 깨어나 연기 속 지옥을 탈출한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심 많은 운명을 위안 삼아 우리는 재난의 아픔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었다.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1년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도 나는 자신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내 작품들에 대한 애착이 현저히 줄어들어 그것들이 지금의 창조적인 충동으로는 되살릴 수 없는 옛 저녁의 열정과 생명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내 작품들을 복구해야 되는 상황이 가슴이 무겁게 누르는 공허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신앙 쪽으로 확실하게 나아가 그분야에서 오랫동안 개발해온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인 듯이 보였다. 어쩌면 새롭고 놀라운 발전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독창성이나 테크닉 면에서 놀랄 만한 약진은 없었지만, 내 신작은 꽤나 매력적이어서 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1991년 가을.로스앤젤레스의 일류미술상 전시회에 새 작품을 출품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런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닷새 동안 열린 전시회에서 내가 얻은 건 몇 건의 주문과 몇몇 갤러리와의 제휴 정도에서 대단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불안하고 낮선 감정에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대량생산과 상업적 성공으로 인정받고 명성을 얻는 것을 주 목적으로 삼는, 미술계의 아류에 나 자신이 영합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나의 성공 기준은 직업으로 학문적으로도, 또 전통적인 기준에서도 언제나 건전했어, 그래도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이 내 작품을 구입했고, 나는 일류 미술관에서 단독 전시회까지 열었잖아. 그리고 미합중국 상원의장 대행을 포함하여 유명인들 초상화도 많이 그렸고 폴 펙의 초상화는 스미소나언 연구소에 걸려있고, 내가 그린 다른 초상화들은 뉴욕 시립 미술관에 전시돼 있어 뉴욕의 한 출판사는 내 화집을 발간해주기도 했고, 내가 그린 초상화들 중 다수가 미국 내의 유슈한 수집가들의 소장품 속에 들어 있어. 요컨대 내 이력서 자체가 미술계의 우수성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이 인정한 재능과 성공 호감을 반영하고 있잖아. 그런데 뭣하러 굳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려고 이런 불쾌한 꼴을 당해야 하지?
외적인 추구가 남긴 뒷맛은 씁쓸했다. 이렇게 굴요감을 느끼던 나는 남은 여행기간을 나 자신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가능하다면 나 자신 안에서 참된 동기를 검토해보고 재정립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온한 지점을 찾고 싶었다.
우리는 애리조나 주의 주간도로에서 우회하여 아름다운 붉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처진 세도나의 풀래크스텔 남쪽 지역으로 차를 달렸다. 별달리 사건은 없었지만 그 고대 사암의 뽀죽답들 한가운데서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활력을 느끼면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처리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모든게 달라 지리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에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그 아름다움이 내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도록 뇌두었을 때,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일들에 조명을 비춰볼 수 있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정리되고 침묵이 나를 감싸자, 새로운 출발점에 서야 할 필요 외에는 그 무엇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내 말이 던질 충격을 생각하지도 않고 남편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 생각에는 내가 직업을 버린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난 상관없고,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요"
그렇다면 30년 넘게 고생한 건 뭐란 말인가? 어쨌든 뭔가 다른 게 나타나리란 확신은 분명히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당시에 알았더라면 아마 그렇게까지 느긋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뉴멕시코 주의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을 때 그 광활한 지평선만큼이나 나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 사막의 정적 속에는 믿기 힘든 아름다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주는 평화로운 몽환이 있었다. 시각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다루는 데는 왠만큼 익숙한 나였지만, 이풍경은 특히나 빼어났다. 그러더니 머릿속에 아름다운 풍경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들판이 넘실거리는 푸르른 강 계곡으로 굽이져들어가는가 싶더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가운데가 양 갈래로 나눠진 몸통을 가진 나무 한 그루가 강뚝에 서 있는 풍경이었다 '내 상상력이 풍경에 돌려지는 일은 좀체 없는데 이상한 일이네'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내 존재 전체가 그 풍경의 아름다움에 공명하고 있었다.
절정에 달한 내 몽환상태는 겉보기에도 알아챌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던 걸로 봐서 말이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그냥 마음의 눈으로 정말 아름다운 풍경하나를 보고 있어요"
" 아, 그래" 1분쯤 지났을까 " 최근 들어서는 왜 초상화 그리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았소?"
나는 갑작스런 남편의 질문에 깜짝 놀라면서, 내 몽환이 왜 그런 반응을 일으켰는지 의아해했다.
" 그건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에요. 이런저런 이유들로... 나는 그프로젝트에 매달릴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나는 반대 이유들을 조목조목 들어서 결국 그 계획 전체가 저절로 무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툴레인 대학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내 전공분야는 중세유럽 미술인데 그 중에서도 주로 기독교 미술이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 미술의 역사가 신학에서 그 기법을 빌려왔다는 점을 설명할 정도의 지식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기독교 미술은 독자적인 기호언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교육 도구이자 신학의 보조물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은 예수의 인생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창조적 영감이 너무나 자주 교리의 경계를 뛰어넘곤 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좋은 본보기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다 규정을 무시하고 그리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다. 교황은 신학적인 공리를 구현하는 사람이지만, 예술가 또한 영원의 왕국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교리에 제한당하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역사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분명히 신약성서에는 그런 묘사가 없다. 초상화가로서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당장 그 계획을 중단시킬 수가 있었다. 게다가 전문 초상화가로서 나는 초상화라는 예술이 육체와 영혼 사이의 긴밀성에 얼마나 강조를 두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이 예수를 대신해서 모델이 될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림에 감정을 제대로 집어넣을 수도 없는 것이다.
자아, 이런 반대 이유들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예수의 초상을 날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게 내 마지막 변론이었다.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나름의 방식으로 예수를 볼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의 의식에 나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단호한 태도로, 더 이상의 논의가 의미 없음을 강조하면서,나는 결론 삼아 말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만일 그분이 모델이 되겠다고 찾아오시면, 그때 그분을 그리는 거예요"
더 이상 항의하기에는 너무 격양되어 있던 터라, 나는 모든 감정을 접고 자신만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때,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눈에 보이는 한 개의 화살이 '어린양과 사자'라고 쓴 가느다란 깃발을 뒤에 달고 내 마음속을 가로질러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단어들이 획하고 스쳐지나가자 초원에 양 한 마리가 나타나면서 지평선 위의 커다란 뭉개구름이 사자 모양이 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의 형상 같은 건 없었지만, 나는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돌연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이미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보겠다는 정도의 동의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그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자료를 찾는데 3개월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선 신약성서를 다시 읽었다. 예수의 모습을 묘사해 놓은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수의 외모를 시사하는 몇 가지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수가 다윗 가문 출신이라는 것과 목수이자 어부였다는 것, 그리고 잔혹한 고문을 견디고 나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만큼 신체가 강인했다는 것 등이다.
나는 우선 목수라는 예수의 생계수단에 초점을 맞추어 그 당시 목수들은 목재의 치수를 재고 짜맞추는 기술 뿐만 아니라. 숲으로 들어가 통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 그것을 용도에 맞게 목재로 만드는 기술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냈다. 2천년 전의 목수라는 직업은 명백히 펄 번연의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진짜 사나이들의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예수의 가족이 유대부족 중 다윗가문에 속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기록에 남아 있는 그 집안 사람들의 특징을 연구했다. 이스라엘 12부족은 각기 나름의 특성과 외모와 영역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유전 잠재력은 우리의 제한된 고정관념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편이었다. 12부족 가운데 10개 부족은 바빌로니아인들이 디아스포라로 유대인을 이산시켰을 때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가 자주 읽는 '이스라엘의 사라진 부족들')오로지 다윗과 벤자민 부족과 레위 부족, 그리고 여타 부족의 잔존세력들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대사회의 지배자와 귀족, 고위 군인들은 다윗 가문에서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정복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로마가 성지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다른 부족들은 내버려두고 다윗가문 사람들을 10명에 1명꼴로 죽였다.
몇 세기 후, 중세 유럽인들이 성지순례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특성과 유산을 묘사하는 기록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런 보고들에는 전형적인 사막 의상을 착용하는 아랍인들 및 여타 중동인들에 대한 묘사가 함께 뒤섞이기 일쑤여서, 그런 부정확한 정보들이 고정관면을 낳고, 그 고정관념은 다시 특히나 기독교 미술에서 지금 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그림식 묘사의 중추를 이루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대 유대인에 관한 몇 안 되는 묘사들 중에는 유대족이 키가 크고 금발에 아주 흰 살갗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다. 내가 유대인 친구에게 이 경우의 금발'fair'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자 그는 북유럽식의 금발머리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옅은 금빛 갈색에서 적갈색의 머리칼과 옅은 올리브색의 흰 피부, 개암나무빛과 청록색에 이르는 눈이라면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고 했다.
예수의 외모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였을 수 있지만, 이방인들과 군중을 끌어들이는 예수의 카리스마가 특별히 강했던 건 분명한 듯했다. 적어도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는 그런 강한 카리스마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가를 추측할 수는 있지만, 추측은 진정한 초상화가라면 절대로 피해야 할 금기사항이다. 1세기와 2세기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핸섬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초상화들은 진짜 나자렛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아폴론에 매료된 로마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상징적인 평행선은 교회가 로마화 되어가면서 더 많이 이용되어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였다.
이런 이유로 초대 교회지도자들은 화가들이 예수의 몸을 강하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금지했다. 그들은 구세주가 장차 도래하리라고 이야기하는 기원전 700년의 예언인, 구약성서 이사야서 53장 2절 즉 "늠름한 풍체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를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예언이 예수의 신체상 외모라기보다는 메시아의 특성과 지도자로서의 자세에 대한 언급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 찾아올 구세주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배려나 특권이나 경제적 이익을 구할 수 있는 부유하고 풍모 번지르르한 세속의 왕이 아니란 것이다. 이건 전적으로 옳은 해석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도 살리는 생명의 주님이 건강한 신체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나로서는 이런 추론이 불가피하지만, 그부분이 영적 우위성을 확립하는 데만 몰두하던 교회지도자들로서는 이사야서의 그 한 구절이 그분의 신체 형상에 초점을 맞추려는 모든 시도를 배제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었다. 지난 1700년 동안 그려진 예수 초상화의 대부분이 이런 결정의 유산이었다.
기존관념의 힘은 엄청난 것이어서, 더 많이 알수록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는 건 도저희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게다가 나는 그림을 그릴 때 통합성에 가장 역점을 두는 편인지라 이런 입장에서 보면 그건 더더욱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내가 어떻게 그런 것들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수많은 단편들이 나름대로 재미있는건 사실이지만, 그 조각들을 모두 합쳐봤자 누비이불 정도면 모를까. 전체 이미지를 특성 있고 힘있게 만들기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말이다. 3개월이 지났지만, 내가 밟아온 모든 길이, 지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자, 지금까지 알게 된 것들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지? 그런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도, 실용성도,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거잖아? 나는 이런 비관적인 결론을 코앞에 두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11월 23일 전혀 예기치 않은 해답이 주어졌다 그 아름다운 가을날은 자신의 아름다움 말고는 아무것도 예고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그날 일어날 일이 지난 몇 년 동안 간헐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조차 못했던 미래를 향해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리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투명한 아침 햇살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손가락들을 펼쳐가며 자신들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넓은 공터의 나무들에 아직 매달려 있던, 붉은 잎사귀들이 햇살을 받으니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생각에 잠기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사실 내게는 생각할 일들이 무척 많았다.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김은 내 얼굴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해먹은 11월의 찬 공기를 가만가만 휘저으면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일들을 더듬어가던 나는 파노라마와도 같은 그 회상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갑작스런 반전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패턴이 되풀이 되어 왔음을 확인하면서.... 만약 그 당시에 내가 지금만큼 역설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내 인생의 반전에서 모순 대신 예언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투명한 11월의 햇살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찾아낸 유일한 평화는 해먹은 리드미컬한 흔들림뿐이었다. 그것은 부드럽게 포기해 ....포기해.... 포기해...라고 권하는 것 같았다.
그 기분좋은 몽롱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필요한 내적 단순성을 유지하기에는 햇살이 너무 강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점심 시간이었다. 재빨리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나는 식당에 남아서 명상과 기도를 하기로 했다. 이 방은 집의 중앙에 있어서, 샹들리에를 끄면 한낮에도 기분좋을 정도로 어스레했다.
그곳은 하느님과 단둘이 있기에 안성맞춤인 방이었다. 내 기도는 항의하고 하소연하고, 내가 저항의 정당정으로 내세우고 싶어하는 조건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을 감히 욕심낸 것에 용서를 빌고, 그 프로젝트에 대한 열의 부족이 그 일의 중요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고백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런 프로젝트에 내가 말려든 게,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좀더 의미 심장한 과업으로 가는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어떤 일일지 가능성을 이리저리 탐색하느라 지쳐버린 나는 마침내 식탁 위의 겹친 팔에 머리를 얹고 말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1시간 이상을 잤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은 방안에서 찬란하게 밫나는 섬광이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이 내 몸을 감싸더니 내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 빛의 광원이 바로 내 삶을 영원히 바꾸고 만 성스런 예수의 현존이었다. 이로써 나는 내 평범한 인생과 인식을 끝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순간, 나는 내 인간적인 감각으로는 너무나도 완전하고 완벽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상화가 현실이 되고, 새로운 현실이 진리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끔
[출처] 끝없는 사랑 서문 (행복한 뜨개방) | 작성자 꿈짜는행복한부자
'마스터와 가르침 > 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 2장 그가 말하다 (0) | 2022.02.07 |
---|---|
끝없는 사랑_ 글렌다 그린 - 제1장 빛이 있으라 (0) | 2022.02.07 |
네바돈 은하의 구조 (0) | 2022.01.28 |
고대의 석판기록: 신들의 도시 삼발라, 초인족 -우주의 정보 (0) | 2022.01.28 |
아카식레코드(우주도서관, Akashic Records) (0) | 202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