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4) 본문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4)
박사논문
2015. 8. 25.
다석사상, 무아론,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자아실체, 지혜직관, 참나, 허상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4)
3.2.3.2. 불교의 무아론(無我論)
콜린스(Steven Collins)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불교의 고유한 사상을 말하라면 일반적으로 무아(無我, anātman or anātta, non-ego)에 관한 교리, 즉 무아론 (無我論)을 든다. 한편으로는 복합체(skandha or khandha)로서 모든 사물은 덧없는 것이고, 거기에는 영원한 어떤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 각자는 온갖 종류의 슬픔과 고통을 겪도록 되어 있으므로, 어떤 사물에 집착할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으로보터 떠날 목적으로 부처는 출가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길을 찾기 위해 6년이란 긴 세월을 방황하였다. 결국 부처는 무아(無我, non-ego, anātta)의 생각에 부딪침으로써 그 길을 찾았다.
부처가 깨달은 무아론(無我論)은 자아실체(自我實體) 의 개념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아개념 자체(自我觀念 自體, ego-idea itself)의 허상(虛像)을 지적하였다. 내(我, atman)가 없다고 말한 부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심리학을 떠나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즈키(D. T. Suzuki)는 말한다:
“개별적인 존재자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사는 한, 우리 모두는 개인적인 자아(自我)의 관념을 갖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결코 자아의 실체성(實體性)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 사실 현대 심리학은 자아실체(自我實體, ego-entity)를 무시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실제적인 일에 적용되는 효과적인 가설이다. 자아의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이전되지 않으면 안된다. 부처가 아무런 아(我, ātman)도 없다고 한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들이 고(苦)의 마지막에 도달하기를 원하고 우리들 자신이 세상과 아울러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그저 아무런 아(我)도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못하기 때문이다.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하여 있는 우리 스스로를 보기 위하여 우리는 긍정적인 어떤 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순한 심리학은 이러한 것을 부여해 주지 않는다. 우리들은 지혜 직관(智慧 直觀, prajñā-intuition)이 작용하는 보다 넓은 실재의 영역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불교신자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의 무아(無我, egolessness, anattā or anātmya,)에 관하여 말하지만, 사물의 무아(無我)란 지혜 직관(prajñā-intuition)에 의해서 통찰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자아 실체를 심리학적으로 무화(無化) 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자아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지혜 직관의 눈을 가려 놓고 있기 때문이다.”
다석 유영모에 의하면, 자아(自我, ego)는 ‘거짓 자아’이고 참나(眞我, true Self) 는 스스로 반영된 것으로서 ‘그 자체’를 바라보는 마음(心)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그러함(如, tathatā)의 상태, 즉 자아 일치의 활동이다. 마음 그 자체가 비어있을 때, 즉 마음 ‘그 자체’를 제외하고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없는 때, ‘그러함’(如)이나 ‘있음 자체’의 상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잘못 이해되기 쉬운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자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하고 질문을 할 것이다. ‘그 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혜 직관이 열려 자신의 참 자아를 깨달은 각자(覺者)에게 가능하다. 스즈키(Suzuki)가 앞에서 설명한 것 같이, 궁극적 존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다석 유영모의 무아(無我) 개념은 불교의 무아론(無我論)과 서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석의 무아 사상을 이해하려면 깨달음의 믿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본다.
1912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 유영모는 불교를 이해하려고 공부하였다. 이 때의 불교공부가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불교와 관계를 맺게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통종교적(通宗敎的)인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도교와 한국의 민속종교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이 깨달음의 믿음은 불교의 용어, 득도(得道)와 일치한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다석 유영모는 깨달음의 신앙을 체험하지만 깨달음의 신앙이 다석으로 하여금 종교적 다원주의 신앙을 취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종교를 서로 거울로 비추어 자신의 신앙을 살펴보게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견지하면서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서로 비추어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신앙은 불교의 득도신앙(得道信仰)을 의미한다. 스즈키(Suzuki)는 깨달음의 신앙을 새로운 관점(觀點)에서 절대자를 포착한 것으로 정의한다. 스즈키가 정의한 것처럼, 다석의 깨달음의 신앙은 한국의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종교간의 신앙을 서로 조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면에서 다석의 가르침은 부처의 가르침과 유사한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부다’라는 말도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유영모의 사상은 자아실체(自我實體)를 거절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아개념 자체(the ego-idea itself, 自我觀念 自體)를 하나의 허상(虛像)으로 본다. 사람이 자아를 부인할 때, 하느님의 실존을 체험한다고 다석은 말한다.
나(自我, ego)가 죽어야 참나(True Self, 眞我)가 산다. 나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다. 참나(中)가 우주의 중심이요 나(自我)의 임자다. 나의 임자란 자아를 지배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무애(自由無礙)의 존재라는 것이다. 나가 죽어 내 맘이 깨끗해지면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부귀(富貴)와 미색(美色)을 초월했다는 말이다. 참나와 하느님은 하나다. 참나와 성령은 하나다. 참나로서는 내 생명과 하느님의 생명이 하나이다. 참나와 하느님은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이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진선미한 생명이다.
자아의 부정을 통해 하느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활동을 거절하고 참나를 깨닫아야 한다고 유영모는 주장한다. “불경이나 성경은 마음을 죽이는거다. 살아 있어도 죽은거다. 자아가 한 번 죽어야 맘이 텅 빈다. 한번 죽은 맘이 빈탕(太空)의 맘이다. 빈 마음에 하느님 나라 열반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라고 유영모는 말한다. 말도 언어도 계시도 의식도 사라진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이를 때, 불교에서는 참 진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마스터와 가르침 > 다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6) (0) | 2021.03.03 |
---|---|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5) (0) | 2021.03.03 |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3) (0) | 2021.03.03 |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2) (0) | 2021.03.03 |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1) (0) | 2021.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