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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3)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3)

柏道 2021. 3. 3. 13:19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3)

 

박사논문

2015. 8. 25.

다석사상, 무아, 무아론,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자아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33)

 

불교의 근본적인 이론인 무아론(無我論) 이외에 다른 사고로 이 복잡한 개념을 이해한다면 분명하게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여러 가지 난해한 사실 들을 해명(解明)하려 할 때, 역사적이고 해석학적이며 철학적인 애매모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느님의 개념이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 이해와 관계가 있는 한, 절대자의 개념을 설명해야 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힌두어 ‘anātman’을 영어로 ‘non-self’(無我) 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콘즈는 번역어로서 ‘not the self’, ‘not a self’, ‘not-I’, ‘not the self’, ‘unsubstantial 중 어느 것이 보다 적절한지는 결정하지 못하였다.

무르티(Murti)는 불교학파가 크게 다양화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교학파가 생각하는 것은 실체(ātman)를 거절하는 것으로 본다. 무르티는 실체(ātman)의 거절을 무아(無我, anātman)로 보았다. 즉, 실체의 부정을 변화가 없는 영원하고 실체적인 일체의 부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콜린스(Steven Collins)는 「무아의 인격」(Selfless Persons)에서 소승불교 (Theravāda)의 무아(無我)의 개념을 소개한다. 라후라(Rāhula), 말라라세케라 (Malalasekera)와 냔아티로카(Nyanatiloka) 등의 세 학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이 세 학자는 일구동성(一口同聲)으로 무아론(無我論)은 불교를 다른 종교, 신조, 철학체계에서 분리해 내고, 세계 역사에서 불교를 유일하게 만드는 교리라고 주장한다.

세 학자의 무아의 개념에 따르면 무아론은 부처의 해탈(解脫) 교리의 본질을 형성한다. 무아론으로 불교의 전적인 체계가 확고히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이러한 면에서 콜린스 (Collins)는 무아론(無我論)에서 불교는 전능하고 영원한 신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실존을 받아들이더라도 불교는 궁극적 실존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어떤 결정적인 종교적 가치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콜린스에 의하면, 불교는 예배드리고 기도할 필요도 없고, 종교의 범주 안에서 정의되는 것들을 위한 장소도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불교의 자아(自我)나 무아(無我)에 대한 견해와는 달리, 서양에서의 ‘나’, ‘자아’, ‘실체’의 개념은 더 쉽게 이해되는 경향이다. 윈스톤 킹(W. L. King)은 동서양 사이의 인간 개성(個性)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고 ‘자아’, ‘무아’, ‘무자기성’의 문제를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서구적 자기이해는 주로 개념적이며, 불교와 동양의 자기이해는 실존적이라는 사실 속에서 기본적인 이해가 되리라 본다. 서양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아는 날카롭게 분리되어 고정되고, 폐쇄된 개체가 되고 만다. 이 개체는 비인간적이거나 비인격적인 존재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서양은 특별한 자기의식, 다른 자아와 사물로부터 분리된 인격적 자아의식을 특히 강조한다.

또한 핑가레트(Fingarette)가 ‘불안한 상태에 있는’ 주체와 자아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불안한 주체는 내적인 정신 갈등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주체를 처해있는 실존적 상황과의 감정적 긴장관계 안에 있는 의식(意識)의 자아(自我)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구사람들은 지배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요구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을 약화시키거나 그러한 자기부정을 좁은 의미로 그리고 분명한 형식으로 한정(限定)시켰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서양은 신비주의 언어와 무아(無我) 의식이나 비인격적인 앎을 추구하는 것을 불안한 나머지 거부하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지배적인 신앙인 ‘자기부정’을 약화 시킨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무아의식 (無我意識)이나 비인격적 지식을 추구하라는 요구와 신비주의적 체험을 거절했다는 윈스톤 킹의 지적은 옳다고 본다.

다석 유영모는 서구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무(無)나 원대(遠大)한 ‘하나’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서구사람들은 무(無)의 차원보다는 유(有)의 차원에서 사물을 분석(分析)하고 연구하여 제법 효과를 내었으나, 원대(遠大) 한 무(無)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 가르침에 충실하려면 무아사상(無我思想)이나 자기부정(自己否定)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다석은 강조한다.

유영모는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예수를 깨달은 성인으로 여긴다. 그래서 다석은 “예수, 석가는 상대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한 부정(否定)이다. 철저한 부정을 안하려면 불교, 기독교를 믿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한 것이다. 특히, 유영모는 ‘자기 부정’을 말하고 있는 마르코복음 8장 34-36절과 요한복음 12장 24-35절 말씀을 주목하였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궁극적인 실체를 얻을 수 있다는 표현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죽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영모의 참나(眞我)에 대한 사고가 불교의 무아(無我)의 개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관련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참나에 대하여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윈스톤 킹(King)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사람의 무아(無我)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개념적 자아(自我)를 본래 악한 것으로 거부하고, 서양과는 전혀 반대의 입장에서 동양사람들은 무아(無我)의 상태를 높이 평가한다.

불교는 자아의 실체를 모두 멸하고, 자아의식의 망상적 상태를 부정하는 등 서구사람의 이해와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윈스톤 킹은 지금 우리들은 “불교가 어떤 자아로부터(또는 어떤 상황에 있는 자아로부터) 인간성을 해방시키는가?”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불교의 사상인 무아(無我)의 개념이 불교도나 비불교도 간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아(自我) 안에 강력하고 고유한 실존적 생명력이 있다는 주장을 가로막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