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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8)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8)

柏道 2021. 3. 3. 13:15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8)

 

박사논문

2015. 8. 25.

공즉시색, 그러함, 다석사상, 색즉시공,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있음 자체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28)


3.2.2.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
절대적인 관점에서 “하나는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은 하나 안에 있다”
(One is in all things and all things are in one).

이 말은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초현상의 ‘하나’를 뜻하지만, 동시에 상대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현상화(現象化)된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한자 ‘空卽是色 色卽是空’에서 色=空 (rupam=ūnyatā)이고, 空=色 (Sūnyatā=rūpam)이다. 영어로는 ‘form=emptiness and emptiness=form’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색(色, Form, rūpam)은 공(空, emptiness, Sūnyatā)과 다르지 않으며, 공(空)은 색(色)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여, 절대적 관점에서는 색(色)은 공(空)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공(空)은 또 색(色)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는 사고는 반야계 경전(Prajñāpāramitā)의 근본철학 이다.

다석 유영모의 공(空)의 개념은 절대자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석은 우주 공간(空間)이라고 불리우는 허공(虛空)의 관점에서 절대자(絶對者)를 이해하였다. “단일 허공이라고 이 사람은 확실히 느끼는데 한아님의 맘이 있다면 한아님의 맘이라고 느껴진다. 우주가 내 몸뚱이다. 우리 아버지가 가지신 허공에 아버지의 아들로서 들어가야만 이 몸뚱이는 만족할 것이다.”

유영모에게 있어서 ‘허공’은 불이 모두 태우고 난 후, 불이 꺼진 상태와 같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마음이 다름 아닌 ‘빈 탕’ (虛)이라는 것이다.

방은 벽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방 한쪽에 책상이 있고, 다른 한쪽 방 에는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석의 공(空)의 개념은 이러한 빈 공간(空間)의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 부재(不在), 소화(消火), 또는 시간과 공간이 비워있는 것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의 의미는 유영모가 말하는 공개념이 아니다.

유영모가 이해하는 ‘공’은 상대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 주관과 객관, 신과 세계, 그리고 긍정과 부정의 어떤 형태를 넘어서 있는 절대공(絶對空)을 말한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되어감도 없고, 사물 자체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존재하게 그러한 공(空)이다. 다석 유영모가 이해하는 공(空)이란 무한 가능성의 텅빈 충만이고, 무진장(無盡藏)의 공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공(空)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다석은 기독교청년회관(YMCA) 연경반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가르치고 자주 암송하였다.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반야심경(Prajñāpāramitā)을 이해해야 한다고 다석은 강조한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자세히 알면 불교(佛敎) 일반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생명을 생각하는, 이 정신을 생각하는 이는 이 심경 (心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쯤 갔다는 것은 큰 재물(財物)이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사상(思想)이다.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자면 불교(佛敎)의 사상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불교를 모르고 사람 노릇을 바로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다석 유영모는 불교를 포함하여 세계의 위대한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불교경전 가운데 반야심경을 강조하였다. 완전한 지혜(智慧)로서 반야심경이 진리의 길로 안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다석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야심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항을 고려할 때,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 이해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무(無)에 대한 이중부정의 논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유영모의 종교체험은 ‘이것이면서도 저것’인 논리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고에 근거해서 유(有)이면서 동시에 무(無)인 궁극적 존재로서의 하느님과 깊이 관계가 있다. 유영모는 가장 미천한 미물 안에서 ‘그것의 있음’(its is-ness)과 ‘그러함’(suchness, 如來)의 모든 영광을 보았다. 다석은 깨달음의 신앙을 통해서 무(無)로서 하느님을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 이해는 ‘있음’의 체험이나 ‘그러함’의 체험인 불교의 깨달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그러함’을 공(空)으로 설명한다.

‘그러함’의 본질적인 핵심을 들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중부정의 사고가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은 ‘그러함’은 불교의 전형적인 사유 방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영모가 이해한 하느님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절대자(絶對者)의 긍정적 (肯定的)인 모습은 종교체험에서 나타나는 에크하르트(Eckhart)의 신성(神性, Godhead)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