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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5) 본문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5)
박사논문
2015. 8. 25.
다석사상, 삼위일체, 상호보완,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유영모, 윤정현, 음양원리
성공회 청주 수동성당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5)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this or that)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論理學)에 근거하고 있는 서구의 사고는 절대적으로 이원론(二元論)적인 사고,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간단 명료한 메시지는 포괄적이였으나 희랍(希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희랍철학과 사고에 의해 해석된 그리스도교 교리는 발전되고 확고하게 체계화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희랍사고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절대적인 바탕이 되었다.
예를 들어, 정통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인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는 희랍 사상의 존재론(存在論)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실재의 개념에 의해 설명되고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간단 명료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교리로 변모해 갔다.
희랍철학의 배타적인 사상을 깊이 영향받은 그리스도교는 ‘예수만이 길이다’ 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은 서구 교회 선교사들이 분명하게 보여 주였다. 대부분의 서구 선교사들은 타종교와 협력하기 보다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의 선교영역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공동선(共同線)과 진리를 구현하기 보다는 비그리스도인들을 개종(改宗)시키는데 거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서구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은 타종교와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분파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의 근거가 된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사고를 하루 속히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논리는 상호의존과 상호보완 의 정신을 나타내는 ‘이것이면서 저것도’의 논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고와는 상반된다.
비록 현대과학이 기존의 세계관을 혁신시키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서구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서구에 사는 우리 지성인들은 어떤 문제에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 해야만 한다” 고 스미스(Wilfred Smith)는 지적한 바가 있다. 서구의 논리는 언제나 주관과 객관을 상정하기 때문에 서구의 지성은 이원론적인 경향을 나타낼 수 밖에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가 서구 지성인의 삶에 깊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신학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동양사고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과정철학에서 조차도 이원론적 사고를 제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역의 신학자 이정용은 지적하고 있다. 서구 이원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이해하고, 주관과 객관을 나눈다는 것이 위험한 발상(發想)이라는 것을 인식한 화이트헤드 (Whitehead)마저도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이정용은 주장 한다. 왜냐하면 하이트헤드의 분석적 방법은 결국에는 배타적인 사고 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실재를 그 전체성(全體性) 이나 통전성(通傳性) 안에서 파악하지 않고, 과학 세계에 적용되어온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을 통해서 보편적인 상호시발(相互始發) 혹은 창조적 유입을 실제로 탐구하는 계기로 삼았다.
만약 궁극적 실재가 주객(主客)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로 궁극적 실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정용은 말한다. 윌프레드 스미스(Wilfred Smith)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궁극적인 문제에 있어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면서 저것도’의 사고 속에 있다.” 따라서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궁극적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 모두를 포용하는 ‘이것이면서 저것도’ 의 사고를 받아 들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 사고에 따르면, 존재의 범주는 주관과 객관의 실재의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변화의 범주, 즉 ‘이것이 면서 저것도’의 사고에 의하면, 주객(主客)의 실재는 서로를 포용하면서 상호보완적이다. 상호보완적인 동양적 사고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식상태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때, 주관 객관의 구분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객(主客)의 구분이 없을 때, 앎과 앎의 대상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된다. 아직 어떤 의미가 반영되지 않은 무의식의 상태, 즉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거나 나누어지기 이전의 일치의 상태가 유영모의 유기체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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