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1) 본문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1)
박사논문
2015. 8. 25.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학살하고 유대교네 기독교네 이슬람이네 하면서 종교전쟁의 양상이 벌어지는 지구별입니다.
한국 또한 문창극의 경우에서 보듯 기독교라 하지만 모두 다른 하느님을 섬기거나 말하는 것 같습니다. 페친님들도 자신만의 하느님이 있고 또 고민하는 듯 해서 그 하느님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글을 연재합니다.
이 글은 성공회 청주 수동성당의 윤정현 신부님의 영국에서의 신학박사 논문이며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재합니다. 모자라는 부분은 앞으로 직접 윤정현 신부님의 가르침을 받아 동영상이나 기타 자료들을 보강하면서 긴 장정을 시작해 봅니다. 한 사람의 페친님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이길 빌면서 시작합니다.
성공회 청주 수동성당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1)
하느님의 개념의 재개념화
오늘날 아시아 신학자들은 진리가 어느 곳이나 어떤 문화에서나 똑 같이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다. 제3세계 신학자들은 식민지 유산과 잔재를 청산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신학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제 3세계 신학자들은 기존의 신학에서 토착화 신학에로 또는 신학의 상황화를 시도해 왔다. 더 나가서는 탈식민주의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아시아 신학자들의 서구신학에 대한 비판은 구체화되고 있고, 아시아 상황신학은 세계신학으로 새롭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주요쟁점은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인 스스로 복음을 재구성하고 재개념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수기따라자(Sugirtharajah)는 개념화를 넘어 재개념화해야 한다며 ‘탈식민지적 비평’(postcolonial criticism)을 적용한다. 수기따라자는 “이 작업은 아시아인의 언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념화하는 일이 아니라, 아시아인의 현실과 상황 아래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재개념화 하는 일이다” 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학을 상황화한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나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토착 언어로 문화를 분석하거나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주제화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출발점은 자신의 종교 체험과 자신의 개인 체험에서 시작된다.
어느 누구라도 백지 상태에서 신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아래서 매 순간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베반스(Stephen Bevans)는 지극히 사적인 체험일지라도 개인적인 체험이 같은 상황 속에 사는 다른 사람의 체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말은 가장 개인적인 체험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한 사람의 개인 체험이라 할지라도 같은 체험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체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카우프만(Gordon D. Kaufman)은 신학 이란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것이기 보다는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것을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신학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카우프만(Kaufman)도 말하고 있다. 신학 작업에서의 혼란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대상의 개념을 연구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개념이 다양한 면에서 이해되는 상상력의 작업이라는 것을 외면하는 데서 온다고 카우프만은 지적한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 하지 못하거나 파악하지 못한다면, 신학함에 있어서 주제를 잘못 잡았거나 판단 기준을 잘못 설정하게 된다고 카우프만은 우려한다. 이와 같은 베반스 나 카우프만(Kaufman)의 신학방법론은 종교다원화 상황에서의 하느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다석 자신이 처한 다원적 종교 상황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 개념화한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 이해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된다.
다석 유영모는 서구 열강에 의해 조선의 문호가 열릴 당시에 살았기 때문에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인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사회의 대안이 되리라 보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
당시에 다석 유영모는 쇠망해가는 조선에 있어서 하나의 대안인 그리스도교와 성서를 철저하게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한국의 다원종교 상황은 동양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보완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유영모에게 주었다. 개화기 당시에 조선사람은 점차로 서구문화를 수용하였고, 서구의 과학적 사고와 논리방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위해야 할 점은 아무리 우리가 서구의 과학적 사고와 논리를 수용하고 그 논리에 따라 사물을 해석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한국사람은 한국의 사상과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사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곳은 서양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유영모는 한국의 문화에서 서구의 문화로, 그리고 서구의 문화에서 다시 자기 자신의 문화와 사상의 관점에서 새롭게 한국의 사상과 종교를 이해하였다. 유영모는 직접 한국의 다종교 속에서 종교간 서로를 이해하는, 즉 통종교(通宗敎)하는 사고를 통해서 동양적 관점으로 그리스도교를 재해석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동양화를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서양 사상의 상호보완과 결합이라는 그의 독특한 방법은 앞으로 동서양 사상의 화합과 상호보완의 새 틀을 마련해 주리라 본다. 새로운 동서양의 문화의 창출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더 깊게 그리고 폭 넓게 이해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동양사상으로 하느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신학작업을 하고자 한다. 사실, 유영모의 하느님 개념은 범재신론(汎在神 論)이나 범신론(汎神論)에 가깝다.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이고 초월적 이면서도 내재적인 하느님을 말하고 있다.
서구신학의 실패는 우주적인 하느님에 대한 지극히 배타적인 상징물을 사용한데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초월적 존재로서 왕, 주, 구주, 주인 등등으로 표현된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을 말한다. 하느님을 인격적인 이름이나 상징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종교적 상상력의 이해 범위에서 비인격적이고 내재적 인 절대자 개념을 거의 제거해 버렸다. 비인격적이고 내재적인 개념이 배제된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이나 만물의 주관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자로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떠한 개념이나 설명을 넘어 존재하시는 분이므로 하느님은 인격적인 범주에 가둬두거나 어떤 개념에 국한시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마스터와 가르침 > 다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3) (0) | 2021.03.03 |
---|---|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2) (0) | 2021.03.03 |
윤정현 신부의 "다석의 하느님"(4) (0) | 2021.03.03 |
「유영모柳永模의 귀일신학歸一神學: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를 읽고 (0) | 2021.03.03 |
다석(多夕)* 신학 속의 불교 / 이정배 (0) | 2021.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