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레프.톨스토이 편역 要約 福音書 -서언 1 하나님의 아들 .2 .3 본문
레프․톨스토이 편역
要約 福音書
...레프.톨스토이 편역 要約 福音書
서언(序言)
이 요약복음서(要約福音書) 는 아직도 원고(原稿)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출판할 수 가없을 (러시아에서는) 훨씬 많은 저서(著書) 중에서 뽑아낸 것이다.(이 서언이 써진 다음부터 여기 말한 (여러 책-복음서연구 상해) 는 바로 외국에서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다.
그 책은 4부로 나누어 이루어 졌다
1.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에 진리가 있다라는 확신에 이르게 한 나의 생활 및 사상의 경로의 서술
2. 첫째는 오로지 정교회(正敎會)의 해석에 의해, 둘째는 일반교회, 사도(使徒)및 이른바 교부(敎父)들의 해석에 의한 그리스도의 교리의 연구 및 그들의 해석 중에 있는 허위(虛僞)의 적발(摘發).
3. 그들의 해석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복음서 중에 쓰여 있고 덧붙여 쓰이기도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서 직접 우리에게 전해진 것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연구 그리고
4. 그리스도교의 진의(眞意) 그 곡해(曲解)된 원인 및 그 설교가 의당히 받지 않으면 안될 결과들에 대한 서술 그래서 이 요약은 위의 제 3부로부터 편찬된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교리의 의미에 따라 4복음서를 통일했다. 그런데 그 통일에 즈음해서 복음서에 서술돼있는 순서를 바꿀 필요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복음서의 시귀(詩句)바꿔놓기는 글레췰레뷔치의 4복음서나 나의 알고있는 여러 복음서에 비해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간 적은 편이다.
요한복음과 같은 것은 나의 통일에 의해 전연 시귀를 바꿔놓은 것은 없고 모두 원본과 같은 순서로 서술돼 있다.
복음서를 12장, 혹은 6장(2장을 1장으로 통일) 에 분류 한 것은 교리의 의미에 따라 자연스런 흐름의 결과다. 아래 각 장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1. 사람은 무한(無限)한 본원(本源)의 아들이다. 육(肉)에 의하지 않고 영(靈)에 의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2.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서 이 본원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3. 만인의 생명은 신성(神聖)한 본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본원만이 신성하다.
4. 그러므로 사람은 만인의 생명 속에 존재(存在)하는 이 본원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5생명의 아버지 뜻에 대한 봉사는 생명을 준다.
6. 그러므로 자기 하나의 뜻에 만족은 생명에 있어서 필요치 않다.
7. 한때(一時)의 생명은 참 생명의 양식이다.
8. 그러므로 참 생명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그것은 항상 현재 속에 있다)
9. 생명의 속임수(欺滿)는 시간 속에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생명은 사람 앞에 현재의 참 생명을 은폐(隱蔽)한다.
10. 그러므로 사람은 과거와 미래의 일시적 생명의 속임수를 깨뜨려버리기 위해 항상 노력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참 생명은 만인에게 공통되는 현재의 생명이 어서 사랑(남을 돌봐주는 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12. 그런고로, 현재에 있어서 만인에 공통하는 생명인 남을 돌봐주는 일에 사는 이야말로 아버지 본원 및 기초적(基礎的) 생명과 일치(一致)하는 것이다.
이렇게 각 장마다 두 장씩 서로 원인(原因)결과(結果)로서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 12장 이외에 이 해설에는 요한복음서의 필자(筆者)가 자신이 전교리(全敎理)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제 1장의 서론과 같은 필자의 편지의 결론(다분히 복음서보다 먼저 써진 것일 것이다.)으로서, 그 이전의 일체의 교리의 일반적 결론이 들어있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서언과 결론은 교리의 주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론도, 결론도 다함께 교리의 의미에서 말하면 생략해서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었는데 불구하고-(항차, 이들 부분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임에 있어서랴)- 내가 이것을 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교리의 단순한 해석에 즈음하여 이들 부분이 하나가 다른 쪽 및 교리전체를 확증하면서 교회의 기괴(奇怪)한 해석에 대항하여, 교리의 본래의 의미에 대한 가장 간명(簡明)한 지시(指示)로 되어 있는 까닭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또 각 장 첫머리에 내용의 간단한 정의 이외에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 중에서 각 장에 알맞는 말도 발췌해 놓았다.
내 일을 끝냄에 즈음하여 내가 놀라고 또 기뻐한 것은 주의 기도가 내가 배열한 각 장의 순서와 완전히 같은 순서로 가장 긴축된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전교리를 표현한 것에 다름이 없는 것과 기도의 한마디 한마디가 각 장의 의미와 순서가 꼭 들어맞는 일, 이런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1. 우리의 아버지시여,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2. 하늘에 계신 이,
하나님은 생명의 무한한 영적 본원(靈的本源)입니다.
3. 당신의 이름이 높이게 하옵소서.
이 생명의 본원은 신성 하여 이다.
4.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옵소서.
당신의 권력은 만인의 속에 실현될 것입니다.
5.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무한한 본원의 뜻이 그 자신 속에 행해지는 것 같이,
6.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육신에도 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7. 우리에게 날마다의 양식을 주시 옵소서.
한때의 생명은 참 생명의 양식입니다.
8. 오늘도,
참 생명은 현재(지금)에 있사옵니다.
9.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를 용서해 줌과 같이 우리의 빚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과거의 잘못과 오해(誤解)가 우리에게 이 참생명을 가리어 숨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0. 우리를 홀리는 꾀임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그러면, 우리를 거짓으로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1. 우리를 악한 일로부터 구해주옵소서. 그때에는 사악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12. 나라와 권력과 영광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권력과 힘과 이성(理性)이 오시리이다.
이 책의 원본에 있는 제 3부의 해설 중에는 사복음서의 필자에 의해 설명된 복음은,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서술돼 있다. 허나, 이 요약에서는 아래 말하는 부분은 생략했다.-즉 세례요한의 수태(受胎)와 출생, 저의 투옥(投獄)과 죽음, 그리스도의 출생. 그 계보(系譜), 어머니와 함께 애굽에의 탈출(脫出),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의 그리스도의 기적(奇績), 악마의 축출, 바다 위의 보행(步行), 무화과나무의 건조(乾燥), 병자의 치료, 죽은 이의 소생(蘇生),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復活) 및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성취된 예언의 지적(指摘)들이다.
이들 시귀를 이 요약에서 약략한 것은 이런 것들이 조금도 교훈(敎訓)을 담고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설교이전 그 시대 및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아, 글을 번잡하게 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시구는 설사 어떻게 해석되더라도 그 교리의 반대에도 그의 진실성(眞實性) 의 증명도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들 시구의 유일한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이에 대해 그것을 증명하는 것 뿐 이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의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뿐만 아니라 저의 교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혹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이 시구는 그 불필요성에 의해 자연히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상해(詳解)의 편에서는 보통 번역과 다른데 라든지 삽입(揷入)된 주석이라든가 생략이라든가 모든 복음서의 각종 개작(改作)의 비교연구나 문맥(文脈)이나 언어학상 그 밖의 고찰 등으로부터 설명도 되고 증명도 되어 있다.
이 요약에서는 모두 이런 증명이나 교회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반박이라고 하는 것은 자세한 주해나 인증과 같이 그 대목에 대한 논의는 아무리 옳고 또 적절하다 하더라도 그 논의는 요컨대 참 교리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못한다는 이유로서 생략하고 말았다.
교리의 진정한 이해에 대한 증명은 하나하나의 문제에 대한 논의 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의 통일, 명료, 단순, 충실, 및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의 내적 감정과 교리와의 부합되는데 있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나의 해석과 교회에서 인정하고 있는 원서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점에 대해서 독자는 우리들의 선입견으로 되어있는 4복음서는 일언 일귀의 끝까지 신성한 글이라고 하는 것의 과오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또 그리스도는 플라톤과 같이 필론과 같이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와 같이 자신의 글을 쓴 일은 한 번도 없고 또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가르침을 교육과 지식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 일 마저 없이 불학무식한 군중들에게 말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의 사후에 오래 있다가 비로소 사람들이 그에 대해들은 것을 적기 시작한데 지나지 않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또 그러한 수사본(手寫本)이 퍽 많았다는 것과 그중에서 교회가 최초로 세 가지를 나중에 또 하나의 복음서를 골라냈다는 것 이들 가장 좋은 복음서를 골라내면서도 교회는 ‘휘지 않는 막대기는 없다’라는 속담과 같이 그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문헌에서 분리해내는데는 많은 왜곡도 껴잡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 교회법에 의한 복음서에서도 위교(儰敎)라 해서 배척당한 복음서와 같이 많은 좋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다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성하겠지만 그 한자 한 마디가 신성할 수는 단연코 없고 또 사람이 그것을 신성하다고 하는 것만으로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시구가 신성해진다는 것도 있을 리가 없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뿐 아니라 독자는 이들 골라낸 복음서도 역시 몇 십 명이란 서로 틀리는 사람의 지식과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수세기 동안에 선택되어 증가되고 주석된 것이라는 것 또 현재까지 전해진 제4기 의 복음서는 모두 아무기호도 없이 써 내려간 필사여서 그 때문에 제4 제5세기 이후에는 극히 다양한 책이 돼서 이렇게 제각기 읽는 법이 틀린 책이, 복음서에는 5만종이나 이나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이런 것들을 모두 잘 기억해서 복음서가 현재 이해되고 있는 것과 같이 틀림없이 성령으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것과 같은 상투적 견해에 혹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독자는 복음서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때버리고 각 장의 구절을 비교 대조해서 그 뜻을 밝히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그렇게 하지 않고 한자 한 구절의 끝까지를 신성시함의 불합리성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내가 나의 요약복음서의 독자에게 기억해주기 바라는 것은 만일 내가 복음서를 보기를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신성한 책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한층 더 그것을 종교문학의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서에 대한 신학적 아울러 역사적 견해를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입장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독자에게 희망하는 것은 나의 해설을 읽어 가는데 있어서 내가 택하지 않는 교회적 견해나 또는 근래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 상투적으로 돼있는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견해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것을 특수한 신의 계시로서도 아니려니와 역사적 현상으로서도 아니고 인생에게 의미를 주는 교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교에 인도 된 것은 신학적 연구도 역사적 연구도 아니고 내가 50세 때 나는 무엇이냐?
나의 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라는데 대해 자신에게 묻고 또 주위의 모든 현인에게 물어서 너는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고 하는 대답을 얻은 것 때문이었다.
인생의 의미는 없다. 인생자체가 악이다. 이런 대답을 얻은 것으로 인해 나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고까지 했으나 그때 예전에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에는 인생이 내게 있어서 의미가 있던 일 및 나의 주위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부귀에 의해 타락되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을 잃지 않고 인생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주위 현인들의 해답의 진실성에 의심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해답을 다시 조사해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교 가운데 무엇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쪽에 대해 그 교리의 연구를 시작했다.
나는 내가 실생활에 있어서 그것을 법칙(自然原理)으로 삼고 있는 것을 목격한 그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그 교리의적용과 그의 원천을 비교 대조해 보았다.
그리스도교의 원천은 복음서였다. 그래서 나는 그 복음서에서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의미의 설명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맑고 깨끗한 생명의 물위 원천과 아울러 나는 거기에 나를 위해서 오늘까지 그 맑고 깨끗함을 가리고 있던 진흙탕이 부당하게 섞여있는 것을 알았다.
숭고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아울러 나는 거기에 그와는 상관이 없는 유대교와 교회의 추악한 교리가 들러 붙어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악취를 풍기는 진흙주머니를 받은 사람이 오랜 고투(苦鬪)와 심로(心勞) 끝에 비로소 그 주머니 속에 진흙투성이 가 되어 값을 알 수 없으리만큼 비싼 진주가 여러 개나 실재로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 그때의 상태와 흡사하게 찾아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악취를 풍기는 진흙탕에 대해 혐오감을 가졌다고 해서 별로 죄가 아닌 것은 당연하고 또 이 진주를 진흙탕과 함께 모아 보존한 사람들도 단지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 것도 당연한 도리가 아니면 안 된다.
나는 빛을 몰랐었다. 그래서 인생에게는 진리의 빛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오직 이 빚에 의해서만 사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러 나는 그 원천을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그것을 잘못된 교회의 주석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중에서 찾아 낸 것이다.
그래서 이 빚의 원천에 도달함과 함께 나는 그 빚의 휘황함에 어우러지면서도 나의 생과 다른 사람의 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에 대해 완전한 해답, 내가 알고 있는 한 다른 국민이 얻은 해답과 완전한 일치 할뿐만 아니라 내가보는 바로는 그 모든 것에 비해 월등한 해답을 얻은 것이다.
본래 나는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한 것이었지 신학상의 문제나 역사상의 해답을 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주요한 문제는 예수그리스도가 신이냐 아니냐?
성령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 운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또 언제 누구 손에 의해 어떤 복음서가 써졌다 라든가 어떤 비유는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라든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느니 하는 것들은 아는 것도 다함께 중요하지 않으려니와 필요치도 않은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1800년간 인류를 비춰주고 과거에 나를 비춰주었고 현재 또 비춰주고 있는 이 빛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빛의 근원은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 요소가 무엇인가? 또 어떤 사람의 손으로 불 붙여진 것일까? 이런 것은 내게서 어찌되었건 관계가 없는 일이다.
만일 복음서가 오늘날 발견된 책이라면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1800년간 허위의 해석이 가해지지 않았다면 이 서언은 이쯤에서 끝이어도 좋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허위의 해석의 주된 기초를 명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습관적으로 되어 분간키 어렵게 되어있는 허위의 해석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지극히 적은 부분이 포함돼 있는데 불과한 모순에 찬문서의 설명으로부터 성립되어 다른 문서의 설명의 요구로 왜곡되고 꾸부려 뜨려진 교회의 가르침이 선전되고 있는데 있는 것이다. 이 허위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오직 단순히 세상시작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 이어져오는 계시(啓示)의 사슬의 고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 허위 해석자 들은 예수를 이름하여 하느님(神) 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러나 저를 신(神) 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저들로 하여금 신의 것인 말씀이나 교리에 모세의 오서(五書), 시편, 서간, 묵시록, 기타 교회의 규정과 교부들의 문서 이상의 의미마저 주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들 허위 해석자 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 이전 및 그에 이어지는 모든 계시와 일치하지 않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저들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뜻을 설명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서로 모순을 극 한 각종문서 모세오경 시편 복음서 편지 사도행전등 즉, 일반적으로 신성시(神聖視) 하고 있는 모든 전적(典籍)들 사이에 가급적 모순이 적은 뜻의 일치점을 발견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리가 아니며 조화될 수 없는 것의 조화 즉 신약(新約) 구약(舊約) 두 가지 문서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 해석이 수(數)에 있어서 많은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사실이 또한 그러하다.
바울의 편지 “우리와 성령의 이름으로”란 형식으로 써 내려간 교회의 규정도 모두 같은 것이다. 로마법왕 종교회의 편타교도와 그 밖에 저들의 입을 통해 성령이 말한다고 단언하기를 서슴치 않는 모든 허위적 해설자의 규정도 모두가 그런 것이다.
저들은 모든 것이 다 자기 해석의 진실성을 확인함에 있어서는 저들의 해석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조잡한 상투적인 수법을 쓰는 것이다.
각각 자기만을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앙 그 자체를 분류하지 않고 소위 구약 신약의 그 많은 문서를 꼭 같이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고자 한다. 저들 모두의 공통된 태도에는 저들 자신의 손으로 자기 앞에 놓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가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모든 계시의 조화수가 다만은 한없이 다종다양(多種多樣)일 수 있으나 신이라고 숭배하는 한 사람의 가르침과 해석이 부조화가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땅위에 내려온 신의 가르침이 땅위에 신으로 내려오신 그 목적을 보더라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이 만일 인류에게 진리를 계하기 위해 땅위에 내려 오셨다고 한다면 적어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를 계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이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조차 그것을 인류를 위해 이해하기 쉽게 할 수가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면 사람이 그것을 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예수가 신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위인이라고 한다면 한층 더 그의 가르침은 그런 여러 가지의 부조화가 생길 리 없다. 원래 위인의 가르침이란 오직 일반 사람이 말한 것으로는 알기 어려워 분명치 않는 것이 알기 쉽고 분명하게 말해진 점에서 비로소 위대한 것이다.
위인의 가르침에도 불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하다고 할 수 가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어떤 위인의 가르침도 분파가 생기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성령의 계시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진리다. 다른 모든 것은 허위다. 이렇게 주장하는 해석 이런 해석만이 부조화를 일으키고 거기서 파생하는 교회가 상호간에 적대심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교파의 교회가 얼마나, 우리는 다른 교파를 비난하지 않고 다만 일치하기를 바랄 뿐이며 저들에 대해 결코 증오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강변해도.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이리(아리우스)로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교리라 해도 하나같이 반대교리의 허위를 비난하는 것 이외에서 출발한 것이 없다.
이러한 교리의 표현이 성령의 신선한 표현이란 성명(聲明)은 가장 극단적 오만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악의(惡意)이다.
극단의 오만이라 함은 자기가 하는 말은 자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말한 것이라고 하는 이상으로 오만한 말은 다시없겠기 때문이다. 또 악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유일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를 파악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바로 자기와 같지 않는 모든 것은 허위라고 단정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모두가 이것만을 말하고 있고 신앙이란 이름으로 일찍이 이 세상에서 행했으며 오늘날에도 아직 행해지고 있는 모든 악폐는 바로 여기서 생기고 또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와 같은 해석과 분파를 만들어낸 이 일시적인 악폐 이외에 그것은 또 하나의 가장 중대한 저들의 단정에 불확실하고 애매한 불신한 내부적 결함을 가져다준다는 내부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결함은 모든 교회가 처음에 사도에게 내려오고 나중엔 차츰 가상적으로 선출된 사람에게로 옮겨간 성령의 계시를 최후의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계시가 과연 어떠한 것인가는 어디에도 직절(直節)하고 확실히 결정적으로 천명(闡明)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 가상적으로 연속돼있는 계시에다 자기의 신앙의 기초를 두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그 한 가지일 때문에 이 결함이 생기게 되었다.
성령의 계시를 인정하고 있는 모든 교회적 관습은 마호멧교도 들과 같이 모세 예수 및 성령의 세 가지 계시를 승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호멧교의 신앙에 따르면 모세와 예수의 뒤에는 마호멧이 모세와 예수의 계시의 의미를 설명하는 최후의 예언자이고 그래서 이 마호멧의 계시야말로 모든 정교도(正敎徒)인 자기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은 이와는 좀 다르다. 그것은 마호멧교와 같이 모세 예수 및 성령 이 세 가지의 계시를 인정은 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부르기를 최후의 계시자의 이름을 따서 성령교 라고 하지 않고 그 신앙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저들은 자기교리를 전도하면서 그 교리의 권위를 예수에게 돌리고 있다.
교회적 관습은 어느 사람은 바울 어느 사람은 하나의 회의(會議) 어느 사람은 다른 회의 누구는 법황 누구는 주교의 그것을,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최후의 계시라고 인정했다고 하면 그것을 그대로 발표하여 자기의 신앙을 최후에 계시를 제공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최후의 계시가 교부들의 것이라든가 혹은 동방교회(東方敎會)의 주교들의 편지라든가 법왕이 결정한 것이라든가 유론표 라든가 또 루터나 휘라렡의 교리문답 이라고 한다면 저들은 그렇게 말하고 그 신앙을 그렇게 명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최후의 계시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계시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하지 않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와는 도대체 상관도 없는 교리를 전하면서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주장한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아담이래 타락한 인류를 대속(代贖)했다고 말하며 신(神)은 창조주라고 하면서 성령(聖靈)은 사도들에게 내려와서 안수례를 거쳐 성직자에게 옮겨진 것이라고 하고 구원을 위해서는 일곱 가지의 거룩한 비밀예식이 필요하다고 하며 성찬식은 두 가지 종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등등을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의 암시조차 주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일이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돼 있는 것이다.
본래 이들 거짓교사들은 자기의 가르침 자기의 신앙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고 성령의 가르침 또는 신앙이라고 명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서 중에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최후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 신앙뿐이기 때문이다.
얼른 보아 이것은 지극히 간단명료해서 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무리 괴이하더라도 오늘날까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편에서는 구약성서(舊約聖書)와는 인위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는 견강부회(牽强附會)적 조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리의 자의적 추가나 곡해(曲解)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로 어떤 사람은 예수를 삼위일체의 제 이의 인격(아들인 神)이라 부르며 그의 가르침을 저들이 구약성서나 사도의 편지나 회의(會議)의 교부(敎父)들의 결의 중에서 볼 수 있는 제 삼의 인격(聖靈)의 예의 가상적 계시와 연관돼 있는 것에 틀림없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예수를 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역시 저의 가르침을 저에 의해 말해진 대로 이해하지 않고 바울과 그밖에 저의해석자가 해석한 것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예수를 신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하면서 이들 해석자들은 예수에게서 가장 정당한 인간의 권리, 자기의 말에는 책임을 지지만 그 말의 거짓 해석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들 지식층의 해석자들은 예수가 말하려고 생각치도 않은 것들까지 저에게 둘러씌우고 있는 것이다.
해석자중 이 파의 대표자들은 그중 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르낭을 선두로 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친 것과 그의 해석자들이 그에게 둘러씌운 것들은 분간하려고 하지 않고 또 이 가르침을 얼마만큼 이라도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의 출현과 그 교리의 전파의 의미를 예수의 생애의 사건과 그의 시대상황으로부터 이해해 보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는 다음의 한가지로 1800년 전에 어떤 가난한 사람하나가 나타나서 그가 무엇인지 모를 여러 가지 말을 지껄이고 갔다는데 있다.
그는 매를 맞고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그 이후 자기의 정의를 위해 죽은 의인은 그 밖에도 무수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우(賢友) 지무지(知無知)를 망라하여 몆 억의 사람들이 이 사람, 오직 이 사람만이 神 이었다는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놀라운 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인가? 교회 신도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예수가 신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만일 그렇다면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신이 아니었다면 이 일개 단순한 인간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신이라고 인정받게 된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파의 학자들은 아무리 이 사람의 생애의 미세한 것을 탐구해 보더라도 (실제 아무 것도 찾아 낸 것은 없지만) 설령 예수의 전 생애를 아주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재현해 보았자 어째서 그가 즉 그란 인간이 그렇게 까지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라는 것은 여전히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진다고 하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열심히 이 사람의 생애를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의 해답은 예수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 라느니 누가 그를 양육했냐? 라느니 하는 것들에 있지 않다. 항차 로마에서 무엇이 있었다느니 백성이 미신에 기울어져 있었다느니 하는 데는 있을 리가 없고 그것은 오직 이 사람이 아주 이상한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를 구별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신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한 가지에만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여기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제일의 것은 그것은 이 사람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힘쓸 것, 즉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파하고 있는 그의 가르침의 예의 조잡한 해석이 아니고 그의 가르침 그것을 이해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들 그리스도교의 학식 있는 역사가들은 자기들이 예수가 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도깨비머리라도 잘라 온양 기뻐서 그의 가르침이 신성한 것이 아니니까 따라서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급한 나머지 저들이 그는 단 한 인간에 지나지 않고 그 가르침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문제의 해결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전력을 기울여 그가 다만 인간이라는 것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놀라운 오해를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르낭의 추종자 하붸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점으로 보아도 기독교도가 아니다” 라는 것을 확인한 문장이나 예수그리스도는 심히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인간이었다는 것을 양양하게 증명하고 있는 쏘우리의 말을 상기해보면 족하다.
문제는 예수가 신이 아니었으니까 그 가르침이 신성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가톨릭교도도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사람들이 그 가르침의 설교자를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 만큼 사람들에게 높고 귀하게 여겨지게 된 가르침의 요소가 무엇이냐를 그 완전하고 순수함에서 이해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독자가 교회의 신앙에 따라 교육을 받아왔긴 하나 그의 불합리를 부인하고 있는 건전한 사상과 양심을 가진 교양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속한다면(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교 정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남아 있는지 어떤지 혹은 이가 무는게 화가 난다고 외투를 태워버린다고 하는 속담과 같이 그리스도 전체를 해로운 미신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냐는 차지하고) 나는 이런 독자에 대해서는 저를 배척하는 것도 저에게 미신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다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 또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에 덧붙여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참칭(僭稱)한 예의 추악한 전설에 대해 책임이 있을 리가 없는 것 및 진정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 그 가르침만을 즉 그리스도 그 사람의 것으로서 참으로 교훈적 의미를 가진 그의 언행만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연구할 때 이런 유의 독자는 반드시 그리스도교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혼합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엄숙하고 청순한 그리고 충실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윤리학(倫理學的) 이고 인간의 이성이 오늘날까지 도달한 최고의 교리이며 인간의 모든 활동 정치적 과학적 시적 철학적 활동이 이렇다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 범위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교리인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만일 독자가 또 교회의 신앙을 고집해서 외부적 목적 때문이 아니고 내부적 평정을 위해 그를 신앙하고 있다고 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의 극소수의 사람들에 속한다면 나는 이러한 독자에 대해서는 이 책 중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명칭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전연 다른 것 이어서 그가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그에게 있는 문제는 여기서 말한 교리가 그의 신앙과 일치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어떠한 교리 모든 경전의 조화로부터 성립된 그 교회적 교리와 단순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떤 것이 저의 이성과 감정에 보다 더 조화되느냐고 하는 그 한 가지에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그에 있어서의 문제는 오직 그가 새로운 교리를 갖기를 바라느냐 의연히 자기의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느냐의 한 가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자로서 만일 교회의 신앙을 그의 진리로 믿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그 신앙과 설교를 자기를 위해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외부적인 고려만으로 존중하고 있는 측에 속해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저들 사이에는 아무리 많은 동지가 있다하더라도 저들이 아무리 유력하다 하더라도 어떠한 옥좌에 앉아 있더라도 또 아무리 귀한 이름으로 내노라해도 저들은 고발하는 이가 아니고 고발당하는 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독자에게는 저들이 증명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저들의 할 말은 이미 오래 전에 해 버렸다는 것. 만일 저들이 또 증명하려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저들 각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서로들 부정하고 있는 모든 교회 신앙을 증명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을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저들에게 증명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저들은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이 신인 예수의 가르침을 에스라의 가르침 종교회의(宗敎會議) 및 쇼피락트의 가르침들과 같은 수준에 놓고 어리석게도 신의 말씀을 사람의 말을 기본으로 해서 곡해하고 변경하여 범한 성물 모독죄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저들은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광신을 신인 예수에게 떠넘기고 그것을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고 한 독신죄(瀆神罪)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 저들은 저들이 이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온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려놓고 그 자리에 자기의 성령의 신앙을 갖다놓아 바꿔놓은 것으로 인해 몇 억의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저들에게 가져다준 행복을 빼앗고 그로 인해 오게 된 사랑과 평화 대신에 세계에 종교분열과 비방과 살인과 모든 죄악을 가져오게 한 기만의 죄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독자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의 빠져나갈 길이 있을 뿐이다. 조용히 참회하고 그 허위를 거부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과거에 그러했고 현재 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저들을 적발하는 이를 추방 하든가 이다.
저들이 만일 그 허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저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하나 나를 추방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나는 이제 이 책을 완성함에 이르러 일종의 환희와 아울러 자신의 약함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복음서 (福音書)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
머 리 말
생명(生命)의 깨달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에 대한 외면적(外面的)
신앙을, 생명의 깨달음으로 바꿔놓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막 1:1).
이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여, 저들에게 참 생명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요 20:31).
만물의 근원과 시초는, 생명의 깨달음이다. 생명의 깨달음은 하나님이다(요 1:1).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것의 근원과 시초가 되는 것이다(요 1:2).
모든 것은, 깨달음을 거쳐서 생명으로 태어났다. 깨달음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요 1:3). 깨달음은 참 생명을 가져다준다(요 1:4). 깨달음, 이는 진리의 빛이다. 빛은 어둠에 비친다. 어둠은 빛을 소멸(消滅) 할 수는 없다(요 1:5).
진리의 빛은 항상 세상에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비추인다(요 1:9). 빛은 세상에 있으며, 세상은 오직 깨달음의 빛을 자기 속에 가짐으로서만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 1:10). 빛은 자기나라에 왔었으나, 자기백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요 1:11).
오직 그 깨달음을 받은 이,―그이만이 그의 본질(本質)을 믿음으로서, 저와 같은 이가 될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요 1:12). 깨달음의 생명을 믿는 이는, 혈육의 아들이 아니고, 깨달음의 아들이 되었다(요 1:13).
생명의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혈육 속에 자기의 몸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즉, 깨달음의 아들은 혈육에 있는 사람이어서, 생명의 시초인 아버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이 같은 생명의 시초(始初)인 것을(요 1:14).
예수의 가르침은 완전해서, 참된 신앙(信仰)이다(요 1:15). 왜 그러냐 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행함으로서, 우리들은 먼저 있던 것의 대신으로, 새로운 신앙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요 1:16).
율법(律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였다(요 1:17).
아직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또 나중에도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직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아들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 것이다(요 1: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에 대한 외면적(外面的)
신앙을, 생명의 깨달음으로 바꿔놓았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아래와 같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들이 부부로서 생활하기 전에, 마리아는 어느 사이에 임신(姙娠)해 있었다(마 1:18). 요셉은 선량(善良)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여인을 부끄럽게 할 수가 없었다―그는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가 그의 첫 아기를 낳기까지 그와 관계하지 않고,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마 1:19, 24, 25).
아기는 점점 자라서 건강해지고, 그리고 나이에 비해 영리했다(룩 2:40).
예수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때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의 명절에 갔었는데, 그 때 아이도 함께 데리고 갔다(룩 2:41, 42). 명절이 끝나자, 그들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아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있었다(룩 2:43). 나중에야 생각이 났으나, 필시 아이들끼리 돌아가려니 생각하고, 이리저리 아이의 일을 물으면서 걷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를 찾으려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룩 2:44, 45). 그래서 사흘 만에 겨우 교회 안에서 아이를 찾아냈다―그는 교사들의 옆에 앉아서,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었다(룩 2:46).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지혜에 놀라고 있었다(룩 2:47).
어머니는 그를 보자 말하기를―어째서 너는 이런 짓을 했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고 찾았는데(룩 2:48). 그런가? 그가 저들에게 하는 말은―그럼, 어디서 저를 찾으셨죠? 그럼 당신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찾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룩 2:49). 허나 그들은 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가 누구를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룩 2:50).
그 후에도 예수는 어머니집에 살며, 모든 일에 어머니를 순종하였다(룩 2:51). 그래서 나이와 함께 지혜가 날로 더해갔다(룩 2:52).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했다. 그래, 그도 삼십세가 되기까지 그대로 생활했다(룩 3:23).
그 무렵 유대지방에 예언자 요한이 나타났다(마 3:1). 그는 요단강 근처인 유대광야에 살고 있었다(룩 3:3). 요한의 옷은 낙타털로 짠 것으로 거기에 가죽 띠를 매고 있었다. 그는 나무껍질과 풀과 같은 것을 양식으로 하고 있었다(마 3:4).
요한이 말하기를―여러분 회개하시오, 천국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활방식을 바꿀 것을 권하고 그 생생의 표로서 저들을 요단강에서 목욕시켰다(마 3:2). 저는 말하기를―소리가 있어 당신에게 빌고 있습니다.「숲 속에 하나님의 길을 내어, 그 길을 고르게 하라」고(룩 3:4). 어디에도 웅덩이가 없고, 산도 없이, 높고 낮은 데가 없이 아주 평탄하게 하여라(룩 3:5).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너희 가운데 오셔서, 만인이 모두 구워(救援)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룩 3:6).
그래서 사람들은 저에게 물었다―우리가 무엇을 해야 겠습니까? 하고(룩 3:10). 그는 대답하기를―옷을 두벌 가진 이는, 갖지 않은 이에게 나눠주시오. 먹을 것을 가진 이는, 갖지 않은 이에게 나눠주시오(룩 3:11). 징세인(徵稅人)들도 그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룩 3:12). 그는 저들에게 말하기를―정해진 것 외에 아무것도 더 받아내지 마시오(룩 3:13). 군졸들도 또 물었다―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는 말하기를―사람을 모욕하거나, 속이지 말며, 받는 봉급만으로 만족하시오(룩 3:14).
이렇게 해서, 요단강 근처에 사는 예루살렘사람과, 모든 유대인은 그의 앞에 모여들었다(마 3:5). 그리고 그의 앞에 자기 죄를 참회하였다. 그래서 그는, 갱생(更生)의 표로서 저들을 요단강에서 목욕시켰다.
바리새파 교도와 사두개파 신자들도, 신분을 감추고 요한에게 찾아왔다. 허나, 그는 바로, 그것을 간파(看破)하고 말하기를―독사의 족속들아, 그대들은 하나님의 뜻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렇다면 회개하고, 신앙을 바꾸시오(마 3:7). 만일 신앙을 바꾸려면, 그 성과로서 당신이 뉘우치고 고쳤다는 것을 알게 하시오(마 3:8). 도끼는 이미 나무 밑등에 놓여졌습니다. 만약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것 같으면,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마 3:10). 나는 여러분을 갱생의 표로, 당신들을 물로서 청결케 하지만, 이 세례 다음에 당신들을, 더욱 영으로 깨끗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마 3:11). 영은 여러분을, 주인이 곳간을 치우기 위해 보리알은 모으고, 껍데기는 태워버리는 것과 같이 청결케 할 것이오(마 3:12).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왔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요한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마 3:13).
저는 요르단에서 광야로 가서, 거기서 영의 힘을 깨달았다(마 4:1).
예수는 40일 40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광야에서 지냈다(마 4:2).
거기서, 저의 육신의 음성이 저에게 말하기를(마 4:3)―네가 만약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 뜻에 따라 돌로 빵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룩 4:3, 마 4:3). 그러나 예수는 자신에게 말하기를―만약 자신이 돌로 만들 수가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육신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영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뜻한다. 나는 빵에 의해서가 아니고 영에 의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영은 육신을 가볍게 여길 수가 있는 것이다(룩 4:4, 마 4:4).
그러나 주림은 여전히 저를 괴롭혔다―거기서 육의 음성은 또다시 저에게 말하기를―만일 네가 영으로만 살아서, 육신을 경히 여길 수가 있다면, 네가 육신을 떠나서도 네 영은 살아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저에게는 자신이 교회당 지붕꼭대기에 서있는 느낌이 들어서 또 육의 음성이 들려왔다―만일 네가 영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붕에서 몸을 날려도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룩 4:9). 보이지 않는 힘이 너를 지키고, 너를 떠받쳐서 일체의 해를 면하게 할 것이다(룩 4:10,11)― 그러나 예수는 자신에게 이르기를―나는 육신을 경히 여길 수는 있어도, 그것에서 떠나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영으로서 육체 속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내 영인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그에게 배반 할 수는 없다(룩 4:12, 마 4:7).
그때 육의 음성은 저에게 말하기를―네가 만일 교회당에서 몸을 던져, 생명을 버리는 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반할 수가 없다면, 먹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을 때에 주리는 것으로서 아버지에게 거역 할 수도 없을 것이 아니냐. 너는 육의 욕망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속에 있게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너는 그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래서 예수에게는 지상의 모든 나라들과 모든 사람들이 육신을 위해 살며, 육을 위해 일을 해서, 거기서의 보수를 기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룩 4:5, 마4:8). 거기서 육의 소리는 또 말하기를―보아라, 저들은 나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들에게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준다(룩 4:6). 네가 만일 나를 위해 일을 하면, 너에게도 같은 것을 줄 것이다(룩 4:7).―그러나 예수는 자신에게 이르기를―내 아버지는 육이 아니고 영이시다. 나는 그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 나는 항상 그를 내 속에서 알고, 그 한 분을 존경하며, 그 한 분을 위하여 일하고, 그 한 분으로부터 보수를 기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룩 4:8, 마 4:10).
그래서 시련은 끝났다. 그리고 예수는 영의 힘을 알게 되었다(룩 4:10).
이렇게 해서 영의 힘을 알게 됨과 함께, 예수는 광야를 나와, 다시 요한의 곁으로 가서, 그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예수가 요한의 곁을 떠나려 할 때, 요한은 저에 대해 말하기를―이 분이야말로 인류의 구주(救主)이시라고(요 1:36).
요한의 이런 말로 인해, 요한의 두 제자는, 자기의 먼저 스승을 떠나, 예수의 뒤를 따랐다(요 1:37). 예수는, 그들이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 길을 멈추고 말하기를―무슨 일이요? 저들은 그에게 말하기를―선생님! 우리는 선생님과 생활을 함께 하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습니다(요 1:38). 그는 말하기를―그럼 함께 따라 오시오, 무엇이고 이야기 해 봅시다. 그래서 저들은 그를 따라가, 그와 같이 묵으며 열시까지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요 1:39).
두 제자중 한사람은 안드레라고 불렀다. 안드레에게는 시몬이라는 형제가 있었다(요 1:40).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안드레는 형제인 시몬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우리는 예언자들이 써놓은 그 메시아(그리스도)를 보았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일러준 사람을 보았다(요 1:41). 안드레는 시몬을 데리고 예수의 곁으로 같이 갔다. 안드레의 이 형제를 예수는 베드로라 불렀다―즉 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두 형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요 1:42).
그 후 갈릴리로 들어가기 전에, 예수는 또 빌립보를 만나서 그도 자기와 함께 오라고 불렀다(요 1:43). 빌립보는 벳새다 사람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요 1:44). 빌립보는 예수를 알게 되자 가서 자기형제 나다나엘을 찾아 그에게 말하기를―우리는 예언자들과 모세가 써놓은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이를 만났소. 그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요(요 1:45). 나다나엘은 예언자들이 써놓은 그 사람이 이웃마을 사람이란 말을 듣고, 놀라며 말하기를―하나님의 사자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빌립보는 말하기를―나와 같이 가서 직접 보고 들어 보시요(요 1:46). 나다나엘은 동의하고 형제와 함께 가서, 예수를 만나 그 말을 듣고서 ; 예수에게 말하기를―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저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이 진심임을 알았습니다(요 1:47, 48). 예수는 저에게 말하기를―그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다음에는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은 하늘의 힘과 교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은 벌써 사람들에게 특수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요(요 1:51).
그래서 예수는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례(前例)에 따라 안식일에 교회에 가서, 읽기 시작했다(룩 4:16).
사람들이 그에게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주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룩 4:17).
「주의 영이 나에게 계시다. 주가 나를 택하심은 불행한 이와 마음이 상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며, 속박(束縛) 당한 이에게 자유를 선포케 하며, 눈먼 이에게 빛을 보게 하며, 피곤한 이에게 구원과 휴식을 알리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알리기 위함이시다」(룩 4:18, 19).
저는 책을 접어 맡은 이에게 돌려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일동은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룩 4:20). 그는 저들에게 말하기를―이 기록은 지금 여러분들 눈앞에 성취돼 있습니다(룩 4:21).
2. 하나님께 봉사(奉仕)
그런고로 사람은 육신(肉身)을 위해서가 아니고, 영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토요일에 들(田野)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제자들이 시장해서 길을 가면서 보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보리알을 먹었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세와 약속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토요일(土曜日―安息日)을 지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규정(規定)하고 있다. 바리새파의 교리에 따르면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고 있었다(마 21:1, 막 2:23, 룩 6:1).
바리새파 교도들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보리알을 비비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좋지 않소.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데, 그런걸 당신들은 이삭을 자르고 있소. 하나님은 안식일을 정해서 이를 어기는 이는 사죄에 처하도록 명하고 있소(마 12:2).
예수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나는 연민(憐憫)을 좋아하고 제물(祭物=儀牲)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의 뜻을 이해한다면, 여러분들도 아무 죄도 안 되는 일에 사람을 단죄(斷罪)하는 일과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요(마 12:7). 사람은 안식일보다 존귀한 것입니다(마 12:8).
또 어느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會堂)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룩 13:10), 한 병든 여인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도와주기를 빌었다(룩 13:11). 그래서 예수는 그 여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룩 13:12).
그때 회당을 맡은 바리새파의 장로가 이 때문에 예수에게 노하여, 군중에게 말하기를―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일 할 날은 한 주간에 6일이오(룩 13:14). 예수는 이에 대하여 바리새파의 율법 지키는 이들에게 반문하기를―그럼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안식일에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도 못한다는 것입니까?(룩 14:3). 저들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룩 14:6).
그때 예수는 말하기를―위선자여! 그럼 그대들은 모두 안식일에는 가축을 외양간에서 풀어서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는가? 그때 만약 누군가의 양이 웅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이라 해도 아무나 곧바로 달려가서 그것을 끌어낼 것이요(룩 14:5, 마 12:11). 사람은 양보다 더더욱 존귀한 것이요. 그런데 당신들은 사람을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오. 도대체 당신들의 생각에는 안식일에는 무엇을 하는 것이 좋겠소?―선이요, 악이요? 영을 구할 것이요, 멸할 것이요? 선은 안식일이던 아니던 언제나 이를 해야 할 것이요(마 12:12).
어느 때 예수는 징세인(徵稅人)을 세금을 받고 있는 장소에서 마주친 일이었다. 징세인은 마태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태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기뻐하여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마 9:9).
예수가 마태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기에는 마태의 친구인 징세인과 불신자(不信者)들도 같이 참석했는데, 예수는 그들을 꺼리지 않고 제자들과 같이 거기에 앉았다(마 9:10). 바리새파 교도들은 그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당신네 선생은 어째서 세리(稅吏)와 불신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가?―바리새파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은 불신자와의 교제를 허락지 않는데(마 9:11).
예수는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건강을 자랑하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이 난 사람은 그를 필요로 합니다(마 9:12). 나는 연민을 좋아하고 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스스로 바리새파 교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신앙의 변혁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불신자라고 생각하는 이야말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마 9:13).
바리새파의 율법 지키는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왔다(마 15:1, 막 7:1).
저들은 그의 제자들과 그 자신도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고 그 때문에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9마 15:2). 왜 그러냐 하면, 저들 자신은 교회의 전설(傳說)에 따라 접시의 닦는 법이라든지 손을 씻지 않고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들을 엄격히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막 7:3). 이와 같은 저들은 시장에서 가져온 물건도 씻기 전에는 결코 입에 대지 않는 것이었다(막 7:4).
바리새파의 율법 지키는 이들은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당신들은 왜 교회의 전설대로 생활하지 않고, 씻지도 않은 손으로 빵을 떼며, 그것을 먹습니까?(막 7:5). 그는 저들에게 대답하기를―당신들은 어째서 당신들의 교회의 전설로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는 것입니까?(마 15:3). 하나님은 당신들에게 가르쳤습니다.―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마 7:10). 그런데 여러분은 방책(方策)을 써서 누구든지 양친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말하도록 해서(막 7:11). 그렇게 하면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 것처럼 하고 있소(막 7:12).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교회의 전해오는 말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막 7:13). 위선자들아! 예언자 이사야가 당신들에 대해서 한 말은 진실이요(마 15:7).
이 백성은 말로는 내게 복종하고 혀로 나를 공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먼 것이다(마 15:8). 그리고 또 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는 다만 사람의 명령을 암송할 뿐―그런고로 나는 이 백성 위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깜짝 놀랄 일을 할 것이다―곳 그 현인의 지혜는 소멸하고, 그 학자는 이성을 어둡게 하리라.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자신의 소망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는 이는 화를 당하리라. 어둠 속에서 행동을 하는 이는 화를 당하리라(마 15:9).
여러분들 또한 그렇습니다―율법 중에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자기들 인간의 전설 즉 석기(石器)를 닦는 일과 같은 것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막 7:8).
그리고 예수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하기를―여러분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으시요(막 7:14). 밖에서 사람의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막 7:15). 오직 여러분의 마음에 남을 돌봐주는 것과 자비(慈悲)를 간직하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이 될 것입니다(룩 11:41). 이것이야말로 깨달아야 합니다(막 7:16).
이렇게 해서 저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 제자들이 그에게 그 말의 뜻을 물었다(막 7:17).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그럼, 당신들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까? 모든 밖에서 들어가는 육적(肉的)인 것은 사람을 해 할 수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막 7:18). 이는 사람의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배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배로 들어가서 그 후에 밖으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막 7:19). 사람을 해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막 7:20).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는 악한생각, 음탕한 생각, 염치없는 생각, 살인, 도적질, 욕심내는 것, 적대심(敵對心), 속임수, 뻔뻔스러움(厚願), 질투, 헐뜯음(誹謗), 업신여김, 그밖에 모든 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막 7:21,22). 모든 이런 악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고, 그래서 이것들만이 사람을 해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막 7:23).
그 후 파스하(解放節=유월절)가 가까워져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신전에 들어갔다(요 2:13). 신전복도에는 수소, 암소, 양 같은 가축들이 서 있기도 하고, 필기 위한 비둘기를 기르는 새장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돈 바꾸는 가게를 벌여놓기도 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로 필요한 것으로 동물은 죽여서 신전에 바쳐지게 되는 것이다. 즉 그 안에 바리새파의 율법 지키는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의 기도와 소원이 있는 것이었다(요 2:14). 예수는 신전에 들어가자 채찍을 만들어서 가축들을 모조리 복도에서 쫓아내고, 비둘기를 남김없이 날려 보내고(요 2:15), 돈을 쏟아 흩트려 놓고 이제부터 이런 것들은 무엇이나 신전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명하였다(요 2:16).
저는 말하기를―예언자 이사야는 당신들에게 말하기를―「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의 신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온 세계(全世界)이다」라고, 또 예언자 예레미야도 당신들에게 말하기를―「이야말로 영원한 이의 집이라 둥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런 말을 믿지 말고, 자기의 생활을 고치며, 거짓재판을 하지 말고,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지 말고, 죄 없는 피를 흘리지 말고 하나님의 전(殿)에 와서, 이제야 말로 우리는 마음 놓고 악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등 떠들지 말라 내 집을 도적의 소굴(巢窟)이 되게 하지 말라」고(마 21:31).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색(顔色)을 변해가며 저에게 대들었다.―당신은, 우리의 제사(祭祀)를 옳지 않다고 하오. 무슨 증거로 그렇소?(요 2: 18). 저들을 돌아보고 예수는 말하기를―내가 이 신전을 헐고, 3일이면 새로운 살아있는 신전을 세울 것이요(요 2:19). 유대인들이 말하기를―이 신전을 짓는데 40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당신은 어떻게 즉석(卽席)에서 새 신전을 세울 수 있소?(요 2:20). 예수는 저들에게 말하기를―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신전보다도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요(마 12:6). 여러분이 만일, 예언자의 말―「신인 나는 너희의 제물을 좋아하지 않고, 너희가 서로 돌봐주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한 말의 뜻을 깨달으면, 이러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요. 살아있는 신전이란 바로, 사람들이 서로 서로 돌봐줄때의 인산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마 12:7).
그때 예루살렘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가 말한 것을 믿었다(요 2:23). 다만 그 자신은 외부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2:24). 그에게는 사람에 대해 증거를 설 사람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속에는 영(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요 2:25).
어느 때 예수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요 4:4). 저는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 근처에 있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을 지나갔다(요 4:5).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예수는 걷기에 피곤해서 그 우물곁에 앉았다(요 4:6). 그의 제자들은 읍내로 빵을 사러갔다(요 4:8).
수가에서 한 여인이 물을 길러왔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물을 청(請)했다(요 4:7). 그 여인은 저에게 말하기를―잘도 우리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는군요? 당신네 유대인들은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요 4:9)
그런데 그는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만약 그대가 나를 알고 내가 말한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내게 물을 주었을 것이요(요 4:10). 그대가 주는 물을 마시는 이는 다시 목이 말라 또 마시고 싶을 것이요(요 4:13).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이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내가 주는 물은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요(요 4:14).
여인은 그가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으므로, 그에게 말하기를―나는 당신이 예언자이시고, 나를 가르치시려는 줄 압니다(요 4:19). 그렇지만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인데, 어째서 당신은 나를 가르치려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사마리아 사람은 이 산(山)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당신네 유대인은 하나님의 집은 오직 예루살렘에만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네에게는 당신네의 신앙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4:20).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부인(婦人), 나를 믿으시오. 벌써 산 위에서나,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기도할 때가 온 것입니다(요 4:21).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가 영과 진실로, 하늘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온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예배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요 4:23). 하나님, 그는 영이기 때문에 영과 진실로 예배드려야 할 것입니다(요 4:24).
여인은 그가 한 말을 잘 몰랐기 때문에 또 말하기를, 나는 성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모든 것을 일러 주시겠지요(요 4:25).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그가 바로 나요, 그대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요. 이보다 더 기다려도 올 사람은 없습니다(요 4:26).
그 후 예수는 유대지방으로 가서 제자들과 거기서 살며 가르쳤다(요 3:22). 당시 요한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애논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요 3:23). 그것은 요한이 아직은 투옥(投獄)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3:24).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가르침과, 어떤 것이 나으냐고 하는 것으로 언쟁이 일어났다(요 3:25). 사람들은 요한의 곁을 찾아와서, 그에게 말하기를―당신은 물로서 깨끗케 하시나 예수는 다만 가르칠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로 갑니다. 당신은 그를 어떻게 보십니까?(요 3:26).
요한은 말하기를―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사람은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는 없습니다(요 3:27). 땅의 것을 말하는 사람은 땅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입니다(요 3:31). 그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냐, 그렇지 않으냐, 이것을 증명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그는 영(靈)입니다. 하나님은 재어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영의 말씀을 이해하는 이는 그것만으로 그가 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 3:32~34).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여, 만물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요 3:35).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는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이는 생명을 갖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이란 사람의 속에 있는 영입니다(요 3:36).
그런 후에 예수에게 한 바리새파 교도가 와서 그를 자기 집의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가서 식탁에 앉았다(룩 11:37). 바리새파 교도는 그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룩 11:38). 그래서 예수는 저에게 말하기를―바리새파 교도여, 그대들은 물건의 겉은 씻는데 여러분의 속은 과연 깨끗합니까? 사람에 대해 자비한 생각을 가지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룩 11:39, 41).
그가 바리새파 교도 곁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 읍에 사는 여자가 들어왔다―그 여자는 불신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가 바리새파 교도의 집에 있는 것을 알고서, 그리로 향수가 담긴 병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었다(룩 7:37). 그리고 그의 발 옆에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하며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터럭으로 닦고 병의 향수를 뿌렸다(룩 7:38).
바리새파 교도는 이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하기를―이래도 이 사나이가 예언자일까. 저가 과연 예언자라면, 자기의 발을 씻기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가 불신자임을 알고서 자기에게 접촉하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룩 7:39).
예수는 이것을 알고, 그를 향해, 말하기를―내 생각을 그대에게 말하리까?―말씀하시요―라고 주인은 대답했다(룩 7:40). 예수는 말하기를―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어느 부자에게 돈을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이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 이었습니다(룩 7:41). 두 사람이 다 같이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부자는 그 두 사람을 함께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럼 그대의 생각에는 두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부자를 사랑하고 또 그를 위해 진력(盡力) 하겠습니까?(룩 7:42). 상대 쪽은 말하기를―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빚이 많았던 자 이지요(룩 7:43).
예수는 여인을 가리키며 말하기를―당신과 이 여인도 그와 같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바리새파 교도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적은 빚을 진 사람입니다. 저 여인은 스스로 불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빚을 진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네 집에 온 사람인데, 당신은 나에게 발을 씻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저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룩 7:44). 당신은 나에게 입 맞추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룩 7:45). 당신은 나에게 머리에 바를 기름을 주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값비싼 향수를 내 발에 부었습니다(룩 7:46). 스스로 바리새파 교도라고 생각하는 이는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불신자라 생각하는 이는 사랑의 실천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모든 것이 용서 되는 것입니다(룩 7:47). 이어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당신의 죄는 모두 사해졌습니다. 다시 예수는 말하기를―모든 것은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자신을 착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오히려 착한 일을 하지 않지만,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오히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룩 7:48).
예수는 더 계속해 말하기를―어느 때,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전에 갔습니다―한 사람은 바리새파 교도이고, 한 사람은 징세인 이었습니다(룩 18:10).
바리새파 교도는 이렇게 빌었습니다―「주여, 저는 다른 사람과 달리,―즉 수전노(守錢奴)가 아니고, 방탕 자가 아니고, 위선자(僞善者)가 아니고, 또 이세리(徵稅人)와 같이 무뢰한(無賴漢)이 아님을 당신께 감사합니다(룩 18:11). 저는 한 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룩 18:12)
그런데 징세인은 훨씬 멀리서 선채로 눈을 하늘을 향하지 조차 못하고 오직 자기의 가슴을 치며, 말을 시작했다.―「주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룩 18:13). 보시오. 이 사람은 바리새파 교도보다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이는 낮춰지고, 스스로 낮춰 생각하는 이는 높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룩 18:14).
이런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말하기를―우리와 바리새파 교도들은 때때로 단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단식할 것을 명령 받았는데요(룩 5:33).
그래서 예수는 저들에게 말하기를―신랑이 혼인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룩 5:34). 다만, 신랑이 없을 때에는 이를 슬퍼합니다(룩 5:35).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사람은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형적인 예배를 사랑의 행동과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옛날 가르침의 외형적인 예배를 가까운 이를 돌봐주라는 나의 가르침과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의 가르침을 옛 가르침과 일치시키려는 것은 마치 새 옷에서 천을 잘라내 가지고, 그것을 헌옷에 기워 부치는 것과 같습니다. 새 옷도 상하고, 헌 옷도 기워지지를 않습니다. 즉 나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이느냐, 옛것을 모두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옛것―청결례(淸潔禮) 단식, 안식일(룩 5:36)을 그냥 지킬 수는 없습니다. 마치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넣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억지로 넣으면 부대는 찢어지고, 술은 흘러나올 것입니다(룩 5:37).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지 않으면 안됩니다.―그러면, 어느 쪽도 상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룩 5:38).
3. 생명(生命)의 원천(源泉)
만인의 생명을 아버지의 영(靈)에서 나온다.
이일 후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저에게 묻기를―요한이 말하는 것은 당신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분이고, 영으로서 사람을 다시 새롭게 하는 이는 당신이십니까?(마 11:2,3)
예수는 대답하기를―여러분이 먼저, 보고들은 다음에 요한에게 알리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왔는가 아닌가, 사람은 영으로 다시 새로워 졌는가? 아닌가, 또 그에게 알리시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마 11:4). 예언자의 글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에는, 사람들은 다―행복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서 저에게 알리시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이가 행복해 지고(마 11:5), 나를 이해하는 이가 행복해지는 그런 유의 나라라는 것을 말이요(마 11:6).
이렇게 요한의 제자를 돌려보내고 나서, 예수는 군중을 향해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하기를―여러분은 광야인 요한의 곁에 세례를 받으러 갔을 때, ‘무엇을 보려고 그곳에 갔었습니까? 바리새파의 율법 지키는 이들도 같이 갔었는데, 요한이 한 말은 깨닫지 못했고, 그리고 그들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마 11:7). 이 종족―바리새파의 율법 지키는 이들은―오직 저들 자신의 생각과 서로 듣던 것들을 진리로 생각하고 또, 저들 자신이 생각해낸 율법도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마 11:16). 요한이 말한 것과 내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한 말 중에 저들이 깨달은 것은 오직 저가 광야에서 단식하고 있더라는 것 한 가지뿐이며, 「저의 속에는 악귀(惡鬼)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1:18). 내가 한 말 중에서 저들이 알게 된 것은 다만, 나는 단식을 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뿐이며, 거기 대해서는
「저는 세리(稅吏) 방탕 자와 마시고 먹는―저들의 친구다」라고 합니다(마 11:19). 저들은 장터의 아이들처럼, 서로 맘 내키는 대로 지껄이며, 누구하나 저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대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마 11:16,17). 저들의 지혜는 저들의 행동으로서 밝혀집니다(마 11:19). 여러분이 만일 값비싼 옷을 차려입은 사람을 보기 위하여 갔던 것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여기 궁전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마 11:8). 그렇다면, 여러분은 광야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요? 여러분은 요한이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이로 생각하고 갔던 것으로 여깁니까? 그렇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저는 모든 예언자보다도 큰 인물입니다. 저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있는 일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에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마 11:9).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일찍이 이 세상에 요한보다 큰 인물이 났던 일은 없습니다(마 11:11). 율법과 예언자―이것들은 모두 요한까지는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이후, 오늘에 와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있고, 거기에 들어가려고 힘쓰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룩 16:16).
그래서 바리새파 교도들은 예수에게 와서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어떻게 해서 또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까? 그는 저에게 대답하기를―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부터 예언자들이 말하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에는 명백한 여러 가지 현상이 따른다고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룩 17:20).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그것이 거기 왔다거나 올 것이라거나 그게 거기 있다거나, 저기 있다거나 해도, 여러분은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이나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룩 17:23). 마치 번개 빛과 같이―거기에도, 여기에도,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룩 17:24). 그것은 때도 없고 장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여러분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룩 17:21).
그 후 유대인의 관원 중 한사람인 니고데모라는 바리새파 교도가 밤에 예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당신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지도 않고, 결례(潔禮)를 지키라고 하지도 않고, 제물을 바치라고 하지도 않고, 단식을 하라고도 않으시고, 신전은 이를 폐기(廢棄)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것은 영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그것은 당신들 속에 있다고 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요 3:1,2).
그래서 예수는 저에게 대답하기를―여보시오, 사람이 만일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천국은 그 속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시요(요 3:3).
니고데모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기를―사람이 만일 아버지의 육체에서 난 것이라면 나이 늙은 후에 다시 어머니의 태(胎)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고쳐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요 3:4).
그래서 예수는 저에게 대답하기를―내가 하는 말을 잘 깨달으시오.―내 말은, 사람은 육체 외에 더욱 영으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사람은 육과 영으로 나고, 따라서 그 속에 천국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9요 3:5). 육에서 나는 것은 육입니다. 육에서 영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영은 오직 영에서 나올 수 있을 뿐입니다(요 3:6). 영은 당신 속에 살아 있는 그것이고, 자유로이 합리적으로 생활합니다. 즉, 당신이 그 처음을 모르고 나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각 사람이 스스로의 속에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요 3:8). 그런데 왜 당신은 내가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을 때 그렇게 놀랐습니까?(요 3:7)
니고데모는 말하기를―어찌 되었건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습니다(요 3:9).
그때 예수는 저에게 말하기를―그대는 그러고도 교사요,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고서!(요 3:10). 먼저 내가 말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나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눈으로 본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뿐입니다(요 3:11). 당신이 만일 이 지상의 것을 믿지 않고, 그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하늘에 있는 것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요 3:12).
하늘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 지상에 하늘에서 내려와 자신이 하늘의 것이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요 3:13). 사람은 이 사람의 속에 머물러 있는 하늘의 아들을 높이 받들어 만인이 저를 믿고 하늘의 생명을 얻어 멸망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요 3:15). 하나님이 그 자신과 같은 그 아들을 각 사람에게 준 것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 아들을, 만인이 그를 믿음으로서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요 3:16). 하나님이 그 아들―생명―을 사람의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람의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기 위해서 입니다(요 3:17).
저의 속에 생명을 의식하는 이는 죽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속에 생명을 의식하지 않는 이는 거기 생명이 있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 때문에 자기가 자신을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요 3:18). 분리(分離)<죽음>는 생명이 이 세상에 왔는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생명에서 떠나가는데 있습니다.
빛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빛은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요 3:19). 이런 까닭에 악을 행하는 이는 빛에게 오지 않고 따라서 그 행한 바가 들어 나지 않아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요 3:20). 그러나 진리에 사는 이는 빛에게 나아가 따라서 그 행한바가 들어나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인을 위해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오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어디에나 항상 사람인 하늘의 아들을 믿는 이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아들이 되고 저를 믿지 않는 다른 이는 멸망할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그 영의 아버지는 오직 자신을 그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이만의 아버지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에 있어서는 다만, 그가 주신 것을 자기 속에 보존할 수 있는 이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요 3:21).
그 후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냐 라는데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비유로 설명했다.
저는 말하기를―영이신 아버지가 이 세상에 깨달음의 생명을 뿌리는 것은 마치 주인이 그의 밭에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마 13:3). 저는 어떤 씨가 어디에 떨어지나를 고려하지 않고 밭 전체에 뿌립니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서 새가 날아와 그것을 쪼아 먹고(마 13:4). 다른 씨는 돌밭위에 떨어져 돌밭 위에서는 싹은 트긴 트지만 바로 시들어 버립니다. 뿌리를 내릴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13:5). 또 어떤 씨는 쑥덤불에 떨어져 쑥덤불에 눌려서 이삭은 나도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마 13:7). 그런데 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멸실한 다른 씨를 보충하여 이삭을 내고, 열매를 맺어 어느 이삭은 백배, 어느 이삭은 육십 배, 어느 이삭은 삼십 배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사람의 속에 영을 뿌렸습니다.―어떤 이의 속에서는 그것이 멸해버리나, 어떤 이의 속에서는 백배로 생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조직하는 것입니다(마 13:8).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배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영을 뿌릴 뿐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그 영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막 4:26).
하나님은 사람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마치 땅에 씨를 뿌리는 주인이, 자신은 씨에 대한 일은 생각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막 4:27). 씨앗은 스스로 부풀어 눈이 터서 싹이 되고, 줄기도 자라고, 이삭이 나서 드디어 열매를 맺습니다(막 4:28). 그래서 그 열매가 익자마자 주인은 낫을 대어 밭을 거둡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그 아들―영―을 세상에 보내어 영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자라 영의 아들들이 서로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막 4:29).
여인이 가루 통에 누룩을 넣어 거기에 밀가루를 섞자마자, 벌써 그것을 저을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발효되어 부풀게 됩니다.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 생활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에 영을 주시고, 영 스스로가 사람의 속에서 생활하고, 영으로 사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듭니다. 영을 위해서는 죽음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죽음과 악은 육에 있어서는 존재하나 영에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마 13:33).
하나님 나라는 마치 다음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주인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주인이란, 바로 영이시고 아버지이시며, 밭이란, 바로 세상이며, 좋은 씨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아들들입니다(마 13:24). 주인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적이 와서 그 밭에 독 보리를 뿌렸습니다. 적이란, 이는 바로 홀리게 하는 꾀임이고, 독보리란 바로 꾀임에 빠져 홀린 끝의 열매입니다(마 13:25). 하인들이 와서 주인에게 말하기를―당신이 뿌린 씨가 좋지 않았나 봅니다. 당신의 밭에는 독 보리 싹이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를 보내 주십시오.―우리가 그것을 뽑아내겠습니다(마 13:27, 28). 주인의 말이―아니다, 그렇게 할 것까지 없다. 그대들은 독 보리를 뽑으려다가, 필연코 보리를 짓대길 것이다(마 13:29). 같이 자라게 내버려 두라. 수확할 때만 되면 내가 거드는 일손들에게 말하여 독 보리는 뽑아서 태워버리게 하고 보리만 곳간에 저장케 할 것이다.―수확할 때란, 바로 사람의 생의 끝이고, 거드는 일손이란, 바로 하늘의 힘입니다. 즉 독 보리는 태워지고, 보리는 깨끗하게 해서 거둬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애의 끝에 가서도 한 때의 거짓은 모두 소멸되고, 오직 영으로 있는 참 생명만이 남는 것입니다. 영인 아버지에게는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은 그 필요한 것을 보전합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에게는 없는 것입니다(마 13:38).
하나님 나라는 그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물을 바다에 치면 모든 물고기가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마 13:47).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끌어 올릴 때에는 좋지 않은 것은 골라서 바다에 버립니다. 세상 끝날에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하늘의 힘은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내어버릴 것입니다(마 13:48).
이렇게 그가 말을 마쳤을 때, 제자들은 그에게 그런 비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을 시작했다(마 13:10). 예수는 대답하기를―이 비유들은 두 가지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런 비유로 말한 것은 일부 사람은 그대들 내 제자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는 각 사람의 속에 있음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를 알지만, 다른 이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아도 안보이고, 들으나 깨닫지 못합니다(마 13:11,13,14). 이는 저의 마음이 굳어진 까닭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런 비유로서 이것저것 두 가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나라가 무엇인가를 설명함으로서, 저들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들에게는 내가, 그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그것이 여러분의 속에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마 13:15).
이렇게 여러분은 씨뿌리는 비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또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 비유는 다음의 의미가 있습니다(마 13:18).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깨닫고도 그것을 자기 마음에 간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악한 생각의 꾀임을 받아서, 뿌려진 씨를 도적맞습니다. 이는 노상(路上)에 뿌려진 씨앗입니다(마 13:19). 돌밭 위에 뿌려진 씨앗이란, 이는 기쁨으로 즉석에서 그를 받아들인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마 13:20). 그러나 그에게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다만 한때 받아들인 것뿐이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근본취지(根本趣旨) 때문에 곤란(困難)과 속박(束縛)을 발견하면 즉시 그것을 부정해 버립니다(마 13:21). 쑥 덤블 속에 뿌려진 것이란,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취지는 깨달으면서도, 세상의 심로(心勞) 재보(財寶) 홀려(惑) 그 취지를 압살(壓殺) 당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따위입니다(마 13:22).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란,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취지를 잘 이해하여, 그것을 자기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 이여서 이런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내지(乃至)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마 13:23). 그런고로 가진 이는 점점 더 많이 받고 안 가진 이는 마지막 것까지 빼앗기는 것입니다(마 13:12).
그런고로 여러분은 조심하여 이 비유를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거짓(虛僞), 모욕(侮辱), 심로(心勞)에 굴복하지 말고,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룩 8:18).
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에서부터 나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줍니다. 그것은 자작나무의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그것은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커서는 모든 나무 중에 가장 큰 나무가 되어 공중에 나는 새가 그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기에 이르는 것입니다(마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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