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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덕경 54장, 너 자신을 알라.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도덕경 54장, 너 자신을 알라.

柏道 2020. 7. 1. 12:35

노자 도덕경

도덕경 54장, 너 자신을 알라.

무어 2019. 8. 9. 11:55

 

 

善建者不拔

잘 지어진 것은 뽑히지 않고

善抱者不脫

잘 감싸진 것은 벗겨지지 않고

子孫以祭祀不輟

자손들이 모시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修之於身 其德乃眞

스스로를 닦으면 그 덕은 이에 참되어지고

修之於家 其德乃餘

집안을 닦으면 그 덕은 이에 넉넉해지고

修之於鄕 其德乃長

동네를 닦으면 그 덕은 오래가고

修之於國 其德乃豊

나라를 닦으면 그 덕은 가득해지며

*豊 : 우거지다, 무성하다, 성하다(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두텁다, 살지다(살이 많고 튼실하다), 풍만하다, 넉넉하다, 가득하다, 크다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세상을 닦으면 그 덕이 이에 두루 미친다.

*普 : 넓다, 광대하다, 두루 미치다

故以身觀身

그리하여 나로 남을 보고

以家觀家

내 집으로 남의 집을 보고

以鄕觀鄕

나의 동네로 다른 동네를 보고

以國觀國

나의 나라로 다른 나라를 보고

以天下觀天下

나의 세상으로 다른 세상을 본다.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나는 어찌하여 이 세상이 그러함을 아는가, 이로써 이다.

54장 개인감상

무엇을 닦기 이전에 해야 할것은

사실은 그 무엇을 보아야하며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故)

닦기 위해서는 나부터 보라는 말을 54장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修(닦을 수)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로, 원래는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쓰이던 것이 '덕'과 같은 함양을 기르고 연구하는 뜻으로 쓰입니다. '길고 닦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많이 쓰이며 수련, 수행과 비슷한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닦음에 대해서 먼저 말한 것은

일종의 목표를 심어주기 위한 짜임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나'를 알기 위해서는 목적이 따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은연중에 나는 '나'를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그것은 오만도 편견도 아니고 따로 계기가 있어 의심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전제입니다.

예로부터 사람은 나를 알기 위해서 생각하고 궁금해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먼저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들에 관심을 갖죠.

덕이 무엇인지 모르는 X라고 상정하여도,

스스로부터 이 세상까지 닦아나가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닦아서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인데,

그것을 어떻게 닦고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을 겪고 관찰하다보면

그 사람이 많이 배웠든 못배웠든 재물이 많든 적든, 못생겼든 잘생겼든, 어떤 피상적인 것들과는 관계없이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깨달음을 주는 정도, 사물을 비롯한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인간이 무언가를 닦고 쌓을 때 이 정도가 커진다는 것을 이치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내공을 여기서는 '덕'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예전에 '덕'의 정의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할 때에,

'덕'은 '도'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저 인간의 인식적 차이에 의한 구분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현댓말로 '본질'과 동치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그 대상 자체를 지칭하는 말임과 동시에 행위 할 수 있는 말도 되는 것처럼,

'본질'이 사물에 속한 어떠한 핵심임과 동시에, '본질적 인간'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덕 역시 굳이 닦지 않아도 모든 존재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인식과 깨달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니만큼, '덕'을 잘 알아보고 '덕'과 물아일체가 될 수 있는 어떠한 내공 역시 통틀어 '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도(진리)니 덕(본질)이니 인간의 언어나 체계로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오해의 지름길이니 덕 그 자체이건 덕을 알아보고 수행하는 능력이건 날카로운 구분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도덕경은 도와 덕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기도 하구요.

다만 도와 덕을 구분하게 된 경위는,

사람이 '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궁금해하게 되고 그를 통해 나를 알게 되는 절대적인 순서가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도'를 유레카처럼 알게 되는 인간은 없고, 먼저 모든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에서 시작해서 그것들의 core를 들여다 보게 될 때 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발견하는 당시에는 도(진리)인지 알지 못하기에 더 가벼운 의미로 부르다가 나중에 그것이 도인지 알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와 덕에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본질과 진리라고 부르듯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본질과 진리의 무게 차이에 대해서는 알 것입니다. 진리는 뭔지 몰라도 본질이 뭔지는 조금 가닥을 잡을 수 있구요. 인간의 지식도 이 본질에 대한 부분적인 앎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진리는 몰라도 본질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며, 본질이 사실은 진리와 다름이 없다는 점은 생각보다 진리가 우리 바로 곁에, 아니 나 자신처럼 숨쉬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하죠. 내가 나를 작동시키고 나로서 살면서도 '나'를 잘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스로를 함양하면 덕은 진리와 역행하지 않고 바르게 가고,

나의 함양으로 집안으로 닦으면 그 바른 덕이 넉넉해지고,

내 집안의 넉넉한 덕으로 동네를 닦으면 그 덕이 오래가고,(나의 덕이나 내 집안의 덕은 주체의 시간안에 머물지만, 나-너-우리-모두의 순으로 주체가 확대되면 당연히 주체의 시간도 길어지겠고, 또한 여러모로 남게 될테니 오래감이 당연하겠죠.)

그 오래가는 덕으로 나라를 닦으면 나라 전체로 풍성해지게 되고,

한나라를 뒤바꾼 덕이 온세상을 두루 미치겠습니다.

나 하나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망상일 뿐이지만,

저렇게 단계를 밟는 것은 꽤나 현실적인 목적이 되죠.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이 되기까지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이렇게까지 현실적인 목적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글쓴이는 도가적, 진리적 유토피아를 그리며 즐겼던 것 같습니다. 점진적 문장 자체에서 그 여흥이 느껴지거든요.

단순히 나의 힘이 종국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 것이 아니라,

나의 '닦음'이 세상의 '닦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미침, 영향을 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함양할 수 있는 어떠한 대상이 통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core가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이고,

모든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 core는 인간들이 구성하고 체계화하는 동네, 나라, 세계 모두에도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인위적인 의도나 힘을 (포함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작용입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의도를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아무리 위대한 사기꾼도 본질을 꿰뚫는 이 앞에서는 속아넘길 수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죠. 덕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앞서 말했듯,

도를 유레카하듯, 접신하듯, 계시를 받듯, 천부적으로 아는 사람은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절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죠.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한 영역의 일들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 발생하는 것 뿐이지, 진리를 거스르며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틈이 없는 촘촘하다 못해 그 자체인 진리의 망인 이 세계 안에서 진리에 벗어나는 존재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생판 모르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으니, (한국에서 알레스카 주민이 입고 있는 옷 색깔은 알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왜 그러한지를 알려거든, 내가 보고 느끼고 겪을 수 있는 것이 왜 그러한지를 알라고 글을 맺고 있습니다. (옷색깔은 맞출 수 없어도 색깔의 한계는 알수 있죠. 인간이 직물에 발현할 수 있는 색깔의 범위)

인간이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나를 통해서 남을 알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나를 먼저 알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무 잘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나를 통해서 타자를 해석하면 모든 것이 오류가 됩니다.

나보다 남을 관찰하는 것이 다소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어느정도 피상적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질로 파고들기엔 내면을 알아내기 힘들죠. 관심법을 쓰는 초능력자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나'는 스스로 잘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보고자 하면 '볼 수' 있습니다. 보고자하면 볼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것(나)부터 시작을 하면, 나를 통해 남을 알 수 있게 되고, 남을 알게 되면 내 주변을 알게 되고, 주변을 알게 되면 생전 보지 못한 나라 전체와 세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점쟁이처럼 현재의 형태를 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있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한 본질을 알게 된다는 뜻이죠.

중력이라던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던지, 과학이나 지식이 알려주는 이치와 닮은 보편법칙들을 보면, 세계를 안다는 것에 대한 기대심리는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이 이성을 칭송하여 이성만을 극대화시켜 알아낸 진리의 파편이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모든 능력, 인간의 정체, 모든것의 본질, 내적 외적 좌우 위아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방향, 차원을 파악하게 되는 덕(본질)이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이 같을 리가 없겠지요.

[출처] 도덕경 54장, 너 자신을 알라.|작성자 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