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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절대 기도의 비밀 1700년 -두 번째 비밀 : 치유의 숲 본문

영성수행 비전/명상과 기도

절대 기도의 비밀 1700년 -두 번째 비밀 : 치유의 숲

柏道 2020. 2. 18. 16:47


절대 기도의 비밀 1700년

두 번째 비밀 : 치유의 숲

        

두 번째 비밀 :

치유의 숲

"그대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열매 맺는다면

그것이 당신을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를 파괴할 것이다."

_ 도마 복음서

처음에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영상을 보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 장면은 지난 몇 주 내내 텔레비전에 줄기차게 방영된 장면 중의 하나였지만 내게는 낯설기만 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더러운 몰골로 불에 타거나 공포에 질려서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그날 나는 호주의 시드니에서 하루 종일 강연을 마치고

호텔 숙소로 돌아와 그날 일어난 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막 튼 참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그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드니의 지방 방송국들은 러시아의 베슬란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편집하지 않고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수백 명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개학 첫날에 테러리스트에게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밀고 당기며 협상이 벌어지는 며칠 동안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소요 사태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처음에 학교 체육관에 억류되었던

1,200명의 인질 중에서 무려 35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중에서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몇몇 성난 사람들의 무의미한 논리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각 가정의 사정을 살펴보니 그날의 현실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 도시의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을 잃었거나 죽은 사람의 친척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 명 이상의 가족을 땅에 묻었다.

비탈리 칼로에프라는 주민은 아내와 아들과 딸, 가족 전부를 묻었다. 목사 피스토르 테이무라즈 토티에프와 그의 아내는 다섯 명의 자녀 중에 네 아이들을 땅에 묻었다.

여덟 살 보리스, 열한 살 알비나, 열두 살 루바, 열네 살 라리사였다. 다섯 째 아이 마디나는 부상을 입고 집에서 회복 중이었다. 운명의 잔인한 소용돌이 속에서

목사인 토티에프의 형과 그의 아내도 세 자녀 중에서 둘을 잃었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며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던 뉴욕 시 9/11테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베슬란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저리를 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고난의 시대에도 신앙을 굳건히 지켜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던 사람들마저 이 무자비한 비극에 의해 그들의 신앙은 시험에 들었다.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죄 없는 아이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순간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의심했다고 인정했다.

"베슬란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그는 물었다.

윌리엄스 대주교는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 느꼈을 상처받은 마음을 공개적으로 토로했다.

베슬란 주민들이 느낀 충격과 불신과 고통은 언론을 통해 전파되었고, 전 세계 사람들은 그 아픔을 나누었다.

그날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마음을 다한 기도로 러시아 사람들의 가슴 아픈 상처에 공감했다.

러시아의 베슬란 사건이나 미국의 9/11테러처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참사든, 각자 인생에서 일어난 일이든, 상실과 비극에 대처하는 자세는 우리 각자가 평생에 걸쳐 해답을 구해야 할 난제이다.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상처에 대처하는 자세는 각기 다르다.

누구나 살면서 실망하는 일을 겪기 마련이지만 고통과 상실감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면 그것이 건강과 인생과 아끼는 관계들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상처 안에서 지혜를 찾는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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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고통 너머에 치유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 세기 전부터 알고 감사해왔다.

그 사실이 나그함마디 문서에 기록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2천 년 전 2세기 무렵이었는데,

기록될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고대 그노시스 문서 중에는

우리가 고통에 취약한 것을 치유와 생명으로

통하는 출입구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다.

또한 영감으로 가득한 도마복음서에서

예수는 상처를 받음으로써 얻는 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고통받고 나서 삶을 찾은 인간은 축복받은 인간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그대 마음속에 가진 것을 열매 맺는다면 그것이 그대를 구원하리라."

결국은 각자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이

모든 치유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에 취약해야 한다.

상처는 감정의 한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신의 고통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연민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방증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데,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가끔씩 상처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지혜와 상처 사이의 관계를 알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다.

베슬란에서 소요 사태가 계속되는 며칠 동안 러시아 사람들은 한결같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테러리스트가 내무부 건물을 장악한 사건으로 92명이 죽었고 이륙하자마자 두 대의 여객기가 거의 동시에 폭발하면서 90명이 목숨을 잃은 데다 베슬란에서 350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러시아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고대의 전통은 이 질문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직접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커다란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에게는 이미 역경을 견디고 스스로를 치유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이 불변의 진리를 명료하고 따뜻한 문장 안에 담아 세대를 거쳐 전수해왔다.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이상의 것은 주지 않는다."

이 단순한 말속에 담긴 약속은 오랜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 내려왔으며 이제는 과학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시련을 이겨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갖고 있다. 위안과 통찰력은

자기 개발서와 잡지 기사, 세미나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도구는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어디까지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어쩌면 의외로 간단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감정과 경험이 이끄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이제부터 자연으로 눈을 돌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