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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수업 인간의 영과 에고의 사고 체계에 대해서 (1) 본문

영성수행 비전/초인생활. 기적수업

기적 수업 인간의 영과 에고의 사고 체계에 대해서 (1)

柏道 2020. 2. 16. 23:10

기적 수업

인간의 영과 에고의 사고 체계에 대해서 (1)

 

창세기의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해 버렸고, 그로부터 인간을 지배하는 사고체계가 만들어졌다. 인간이 자기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하고 싸워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한 체계를 기적수업은 에고의 사고체계라고 이름 붙인다.

 

 비 실재와 실재의 관계는 에고와 영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기적수업에서 가장 많이 설명되고 대비되는 실재와 비 실재의 관계는 영과 에고의 관계이다.

 

 

에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있지만, 기적수업 3장에서 에고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게 되는 정체성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너 자신에 대해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너의 바램이지 실재의 너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모든 오류가 발생한다.

 

 

기적수업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인식을 에고로 정의하고 있고, 이는 실재가 아닌 비실재로서 일종의 오류이기 때문에 이를 교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허상과 거짓과 불행 속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기적수업을 읽으면서 에고의 정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읽을 때 마다 새롭고 다른 이해가 생기는 것을 보면, 에고는복잡 미묘하게 자기정체를 감추고 있어서 단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고는 용어의 정의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벗어나야만 비로서 그 전체 지평이 열리면서 에고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기적수업 텍스트가 31장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현재의 3장은 이제 에고를 이해하기 위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기적수업에서 실재와 비실재를 규정하는 첫번째 요소는 실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영원히 존재하고, 비 실재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영을 창조하셨기에 영은 실재로 존재하지만, 에고는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셨기에 실재가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에고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기적수업은 “에고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분리 이후에 만들어진 자아의 질문하는 일면”(기적수업 p.43-3)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기 이전에 인간은 영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된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았고, 온전한 평화와 기쁨을 창조하는 존재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이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게 되었고,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불확실성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분리 이후 인간은 보고 듣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지각 기능을 모두 동원하여 자기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냈는데, 창세기 3장에서 육체인 인간은 이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결핍을 채우고 생존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이 정체성은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인간은 죄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원죄의 기원을 알려주는 창세기의 신화로 상징화되었다.

 

 

기적수업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취한 것은 인간이 자기를 창조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며 이는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해 버렸고, 그로부터 인간을 지배하는 사고체계가 만들어졌다. 인간이 자기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하고 싸워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한 체계를 기적수업은 에고의 사고체계라고 이름 붙인다.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자기를 창조하는 능력을 찬탈함을 상징한다. <…> 너는 너 자신을 스스로 창조한다고 지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믿을 수 있을 뿐, 그것은 진실로 만들 수는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네가 마침내 자신을 바르게 지각할 때 너는 네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다만 기뻐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너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너의 사고체계의 초석이며, 너는 너의 사고체계를 빛으로 가져가는 관념을 공격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방어할 것이다. 너는 여전히 네가 만든 형상이 너라고 믿는다. 너의 마음은 바로 여기에서 성령과 갈라지고, 말 그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한 가지를 믿는 한 해결 방법은 없다. 그것이 네가 창조할 수 없고, 스스로 만든 것을 온통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기적수업 p.52-4)

 

 

그러나 기적수업이 가르치는 바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을 확신할 수 있고 이를 실재라고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실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그렇게 믿는 바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믿음으로 그렇게 살게 된다고 한다. 성령은 인간의 이러한 사고체계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창조하지 않은 자가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혼란과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이다.

 

 

따라서 기적수업은 인간이 잘못된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자는 누구인가’ 라는 권위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한다. 로봇을 만든 발명가가 있다면, 그 발명가가 입력한 프로그램 대로 로봇이 작동하는 것처럼, 인간도 결과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자의 의도에 따라서 살아가게 끔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진실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은 스스로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고,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인간을 투쟁 속에서 결핍된 욕구를 채워가는 존재로 규정했기 때문에 인간은 결핍 가운데 공격과 방어를 실행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프로그램은 단지 오류일 뿐이고, 인간을 한없는 두려움과 불행에 빠트리는 원인이 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잘못을 저지른 인간을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처음에 만드신 프로그램인 ‘지식’을 회복하기를 바라신다고 한다.

 

 

“권위의 쟁점은 사실 누가 창시했는 가의 문제다. 네가 권위 문제를 겪을 때는 언제나 너를 너 자신의 창시자로 믿으며 그러한 너의 망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는 말 그대로 누가 너를 창시했는가를 놓고 다른 사람들이 너와 싸우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각한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을 찬탈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범하는 근본적인 오류다. 이 믿음이 그들을 매우 두렵게 하지만 하나님께는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해제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시니, 자녀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것이 그들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누가 진정으로 그들을 창시했는지 알 수 있게 하셨지만, 네가 너의 창시자로부터 분리되기로 선택한다면 너는 진정한 너의 정체를 버리고 에고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너는 누가 너의 진정한 창시자인지 확신하지 못해, 누가 너를 창시했는지 모른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너는 네가 너 자신을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 그럴 듯하다고 여긴다. 너는 누가 창시자인지를 논쟁하기에 너의 마음은 확신하지 못하며, 네가 진정으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기적수업 p.49-8)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속에 인간은 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아무런 책임이나 계획없이 하나님이 주신 평화외 기쁨과창조를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기적수업은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부른다.

 

 

기적수업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의 유산을 거부할 자유는 있지만 무엇이 자신의 유산인지를 즉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는 없다고 한다. 평화와 기쁨과 창조는 영이 받은 타고난 유산인데, 만약 네가 이를 거부한다면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가 누릴 수 있는 네 삶의 근거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평화는 영의 타고난 유산이다. 누구나 유산을 거부할 자유는 있지만 무엇이 자신의 유산인지 정할 자유는 없다. 모두가 결정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창시자인가이다. 모든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때로는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창시자를 부인하는 데서 비롯된다. 공격은 결코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에게 로만 향한다. 하나님이 창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네 평화의 근거를 자신에게 부인하는 것이고, 따라서 너는 오직 조각들로 나누어진 자신을 보게 된다. 이 기이한 지각이 바로 권위 문제다.” (기적 수업 p.50-10)

 

 

하나님이 인간에게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정체성을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결코 너를 해치지 못하며, 네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이미 모두 주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에고의 사고체계는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 영리한 방법과 수단을 고안해 내는 일이다. 에고는 이처럼 영의 비전과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데, 영의 비전은 일상적 경험과 일반 상식에 어긋나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준비하고 땀 흘려야 한다는 에고의 사고체계는 쓸데 없는 짓이며, 오류이고, 영의 비전은 단지 네가 단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영의 비전은 단순히 무능력한 네가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네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악몽에서 깨어날 것을 청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결백을 바라보는 일과 동일하다고 한다.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긴 하나님의 아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잠에서 깨어나 창조주를 기억한다. 모든 분리감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한 성삼위의 일부이지만 성삼위 자체는 하나다. 그들은 한마음, 한 뜻이기에, 성삼위의 수준 들에는 혼동이 없다. 단일한 목적이 완벽한 통합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확립한다. 하지만 이 광경은 진실로 결백한 자만이 지각할 수 있다. 결백한 자는 마음이 청결하기에 참된 지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참된 지각을 방어한다.” (기적수업 p.40-5)

 

 

기적수업의 화자는 예수이다. 기적수업이 사도 바울의 기독론과 다른 점은 예수의 오심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려 하심이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의 뜻을 완벽히 알고 있었기에 인간이 잊어버린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다시 일깨워주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 핵심은 너희는 영이며, 영은 결백하고,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영의 온전한 평화와 기쁨을 창조하고 누리는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지식을 배우라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의미는 대속을 위한 희생 때문이 아니라 죄 없음과 하나님과 하나됨의 진리를 다시 일깨워주어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합하여 이 땅에서 이 순간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은 지각과 인식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공격과 방어를 신봉하고 그 속에서 두려움과 불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지각이 만드는 에고의 사고체계이다. 예수는 네가 지각에 의존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지만, 예수의 안내를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지각을 교정하여, 하나님의 뜻과 영의 지식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예수는 영과 영의 진정한 목적을 기억하고 가르치기 위해 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느니라”라는 구절은 “모든 이가 청함을 받았지만, 듣기로 택한 자는 거의 없다.”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르게 선택하지 않았다. ‘택함을 입은 자’는 다만 더 일찍 바르게 선택한 사람들이다. 바른 마음은 이제 바르게 선택할 수 있고, 그리하여 영혼의 안식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평화속에 있는 너를 아시며, 그것이 너의 실재다. (기적수업 p.4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