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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의 오류와 성령의 재해석 (1) 본문
기적 수업
에고의 오류와 성령의 재해석 (1)
에고의 해석과 성령의 해석이 가지는 중요한 차이점은 에고는 두려움과 죄의식의 관점에서 성경구절을 읽고 해석한다. 반면에 성령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해석한다.
기독교에서 성삼위일체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개념으로 합리적 이해를 넘어서는 기독교의 비밀과 신비를 간직한 교리이다.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는 기독교의 탄생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2천년간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한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라고 가르쳐진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가르치시는 데, 성령을 그의 제자들을 도울 안내자, 위로자로 소개하고, 자신이 부활 승천한 이후에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명하시고,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서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과 힘을 입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교회가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교회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이해했고, 성령을 가르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신비한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 소개되는 성령에 관한 내용은 비유적인 설명이라서 명확하지 않을 뿐 더러 아주 간략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수업은 성령에 대해 직접적이고 자세한 설명과 해석을 가하고 있다. 또한 기적수업은 일부 성경구절을 성령의 관점에서 재해석을 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부지불식간에 에고의 지배를 받았던 제자들과 해석자들이 에고의 관점에서 에고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구절들을 해석하여 원래의 뜻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에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에고를 증거한다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에고의 판단에 따르면 성경은 두려운 것이다. 에고는 성경을 무서운 것으로 지각하기에 두려워하며 해석한다.” ( 기적수업 p.89-4)
에고의 해석과 성령의 해석이 가지는 중요한 차이점은 에고는 두려움과 죄의식의 관점에서 성경구절을 읽고 해석한다. 반면에 성령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해석을 가한다.
기적수업 5장에서 성령이 재해석을 가한 구절로써 소개되는 예들은 다음과 같다.
“성령은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라는 구절을 사람은 경작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 안에서 경작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네가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은 너에게 가치 있게 된다.” ( 기적수업 p.89-6)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인간의 에고는 그가 행한 것에 대해서 그대로 대가를 치루거나 보상을 받게 된다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특히 네가 잘못한 만큼 너는 그만큼 대가를 치룰 거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에고의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
성령은 이 말씀을 사람은 자신에게 경작할 만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신 안에서 경작할 것이다고 해석한다. 즉 네게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너에게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해석은 사람이 행하는 것에 대한 경고나 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그가 믿은 대로, 그가 바란 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존재라는 비밀을 가르친다. 즉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를 미치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믿음, 소망, 즉 마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너에게 무엇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네가 투자한 것을 너는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주가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은, 관념은 오직 공유될 때 증대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쉽게 재해석된다. 이 구절은 복수는 공유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수를 성령께 맡기라. 복수는 하나님의 부분인 너의 마음에 속하지 않기에 성령이 네 안에서 해제할 것이다. ( 기적수업 p.89-7)
위 구절을 보통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원수를 갚으시니, 너희들은 나서지 말고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성령은 복수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에고에게 복수가 정당할 뿐 아니라, 없어서는 안될 정의로 여겨진다. 에고의 관점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복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간 대신 갚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복수를 확실하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성령은 복수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님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하나님 안에 존재하지 않는 복수의 관념은 네 안에서도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성령께서 하나님은 네 안에서 복수라는 관념을 깨끗이 없앨 버릴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버지의 악행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라는 구절은 에고가 해석한다면 특히 잔인한 구절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려는 에고의 시도가 될 뿐이다. 이 구절은 선조가 오해했던 것을 성령이 후손들에게 재해석해 줄 수 있으며 따라서 생각을 해방하여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 기적수업 p.89-8)
위 구절을 부모의 악행과 불행이 삼사대까지 저주로 내려간다고 해석한다. 특히 자식들은 자기가 원치 않더라도 부모의 행위를 부지불식간에 모방 함으로써 그 저주가 대물림 된다고 가르친다. 에고에게 죄와 벌에 대한 관념은 확고한데, 그 이유는 죄의식 자체가 에고라는 관념이기 때문이라 한다. 에고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의식이기에, 자신은 하나님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의식이다. 이 분리 의식은 하나님과 자신의 뜻이 다르다는 의식이며 죄의식이다.
하지만 성령은 분리 자체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으므로 분리는 일어날 수 없고 인간은 하나님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분리는 인간이 자신을 에고의 생각과 동일시하면서 만들어진 오해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성령은 대대로 이어지는 죄의식과 두려움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런 잘못된 의식을 해제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삼대에 걸쳐서 부모의 잘못된 행위와 인식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석한다. 즉 선대의 잘못을 교훈 삼아서 후손이 바르게 나아가도록 훈련시킨다는 축복의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한다.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요”라는 구절은 ‘멸망’을 ‘해제’로 이해한다면 속죄의 선언이 된다. 사랑 없는 생각은 해제되어야 하지만, 에고는 해제라는 말을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에고에게 있어서 해제는 곧 파괴를 의미한다. 에고는 네 생각의 일부라서 파괴되지 않지만, 창조적이지 않고 따라서 공유하지 않기에 너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재해석될 것이다. 네가 에고에게 준 마음의 부분은 너의 전체 마음이 속한 왕국에 돌려질 뿐이다. 너는 왕국의 완성을 지연할 수 있지만 두려움의 개념을 왕국에 도입할 수는 없다.” (기적수업 p.90-9)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요”라는 구절을 에고는 문자 그대로 악인은 심판을 받을 거라고 해석한다.
에고는 두려움의 관념 그 자체이기에 심판이라는 두려움은 곧 에고의 정당성과 에고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심판이 없다면 두려움이 존재할 수 없고, 동시에 에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에고는 절대로 심판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은 죄의 대가를 의미하는 심판을 부정한다. 앞서 보았듯이, 기적수업은 최후의 심판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심판으로 이해한 것은 에고가 최후라는 용어와 심판을 연결시키면서 잘못된 두려움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성경은 심판 자체를 두려운 종말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속죄로 해석한다. 심판이란 것은 인간이 자신의 악을, 즉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그 오류를 버리고 벗어남으로서, 그 악에서, 또는 오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성령은 심판을 속죄와 동의어로 해석한다.
기적수업은 에고가 하급법원이라면, 성령은 상급법원이라고 한다. 에고라는 하급법원이 너에게 유죄를 선고하지만, 성령이라는 상급법원은 에고의 고소를 모두 기각해버린다고 한다. 성령과 에고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본다. 에고는 너의 분리와 두려움과 죄악과 유죄만을 본다. 하지만 성령은 너를 하나님의 일부로서 하나님 왕국에 속한 영으로 본다. 지각으로 판단하는 에고는 이 세상을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바라보지만, 지식을 가진 성령은 세상 자체를 환상으로 보고 하나님이 만드신 실체는 영원불변하고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에고의 모든 고소는 성령의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소이므로 모두 기각해 버린다.
“너는 상급법원이 너에게 유죄를 판결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상급법원은 너를 고소하는 소송을 기각할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고소하는 소송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창조물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모든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위증일 뿐이다. 네가 믿는 모든 것을 기꺼이 하나님의 상급법원에 항소하라. 그곳은 하나님을 대변하고 따라서 진실되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네가 제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서 소송을 걸었더라도 하나님의 상급법원은 너에 대한 소송을 기각할 것이다. 누가 봐도 너의 유죄로 여길 만한 소송일지라도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 성령은 진실되게만 증언할 수 있기에 너에 대한 소송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성령은 언제나 “왕국은 너의 것이다.”라고 판결할 것이니, 성령은 너의 정체를 상기시키기 위해 너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 90-10 )
에고는 나에 대한 환상에 불과한 관념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은 주로 죄책감으로 표출된다. 왜냐하면 에고는 하나님을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하나님을 적대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하나님은 왜 이런 고통스런 세상을 창조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나’라는 연약한 존재를 이런 막 되 먹은 세상에 내 동댕이쳐 버렸는가에 대한 분노로 구성된다. 에고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무책임하고 사악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적대감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바뀐다.
“에고가 분리의 상징이라면 죄책감의 상징이기도 하다. 죄책감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 이상이다. 죄책감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을 상징한다. 하나님을 공격한다는 개념은 무의미하지만, 에고게 만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다는 에고의 믿음이 지닌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참으로 모든 죄책감이 그 믿음에서 뻗어 나온다.” (기적수업 p.86-2)
에고와는 달리 성령은 너를 ‘천국’ 그 자체라고 본다.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처럼 창조와 기쁨 속에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는 죄책감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고 성령은 가르친다. 하지만 에고는 분리와 죄책감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더군다나 에고의 믿음은 거짓이고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실제처럼 경험된다.
인간의 실존은 관념으로 구성된다. 네가 에고의 사고와 관념을 받아들이면 너는 에고처럼 두려움속에서 이기적으로 살게되고, 네가 성령의 지식과 관념을 받아들이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즉 자신이 갖고 있는 관념대로 자기자신을 만든 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해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즉 네가 생각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너라는 사실이다. 네가 생각한 대로 되는 존재가 너이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고, 인간이 갖는 관념이 그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갖고 있는 강력한 창조의 힘에 대한 증언이다. 기적수업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마음은 실재를 만드는 자유롭고도 강력한 창조적인 힘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뜻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분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도 일종의 관념으로서 너 자신이 만들어낸 관념이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은 네가 만든 관념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관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개념으로 가르친다. 모든 것은 네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고, 네 마음이 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네가 마음에 무엇을 받아들이든 그것은 너에게 실재성을 갖는다. 너의 받아들임이 그것을 너에게 실재가 되게 한다. 에고를 마음의 왕좌에 앉힌다면, 에고는 네가 들어오도록 허락했기에 너의 실재가 된다. 이는 마음이 실재를 창조하거나 허상을 만드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기에 죄책감이 아니라 기쁨을 일으킨다. 죄책감은 자연스럽지 않은 생각을 한다는 확실한 신호다. 자연스럽지 않은 생각은 죄를 실재라고 믿는 것이므로 항상 죄책감이 따른다. 에고는 죄를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행위로 지각한다. 에고가 생존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 기적수업 p. 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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