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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대속과 같은 신화적 용어를 버리고 에고와 영과 같은 정신과학의 심리학 용어를 사용하는 기적수업 본문
기적 수업
원죄, 대속과 같은 신화적 용어를 버리고 에고와 영과 같은 정신과학의 심리학 용어를 사용하는 기적수업
에덴 동산의 실낙원 이야기는 원죄의 기원을 가르치는 신화이다. 뱀에게 속아 금단의 열매를 먹고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저주를 받게 된다. 이렇게 낙원에서 쫓겨나 생존을 위한 무한한 투쟁에 던져진 인간의 근원적 불행을 기독교는 원죄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실낙원은 단지 신화가 아니라 이 현실세계에서 무한 반복되는 생생한 현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존재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원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된다. 사도 바울은 첫째 아담이 타락하여 원죄를 지었고, 두 번째 아담인 예수는 십자가에서 원죄를 대속함으로써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석했다.
그렇다면 원죄가 대속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교리가 말하는 대속은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기독교 교리 용어로는 칭의라고 부른다. 즉 의인이 아니지만,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칭의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무엇인가? 의로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인정받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이 현실 세계에서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를 남기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 땅에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들이 많아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더 혼탁하게 만든다는 사람들의 통념은 이를 반증한다. 실질적으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대속 즉 칭의를 받고자 하는 목표는 원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의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칭의는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 정도로 이해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독교의 구원론은 인간을 근원적 불행으로 집어넣은 원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현세의 모든 불행을 내세에서 보상 받는 맹신적인 종교 체계로 바꾸어 버렸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서 천국과 지옥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 아래 시작된 포교가 기독교의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기적수업은 ‘원죄’나 ‘칭의’와 같은 교회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끌어낸 개념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신학자들이 ‘원죄’라 부르는 용어를 기적수업은 ‘분리’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칭의’라는 의미는 기적수업에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기적수업은 십자가 사건을 인류의 대속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을 당하는 우주적인 퍼포먼스로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칭의라는 개념은 십자가의 희생과 대속이 인간에게 대가없이 의롭다 함을 주었다는 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희생없이 칭의란 개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게 된 것이 ‘원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칭의’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신화적인 해석이다. 이 방식은 인간 불행의 근원인 원죄가 상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해석할 뿐이다. 또한 원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십자가의 대속과 칭의는 결과적으로 현실세계의 불행을 사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장시켜 버린다는 의미에서 혹 떼려다 혹 붙인 구원론처럼 보일 정도이다. 결국 기독교의 구원론은 내세적이고 신비한 도그마가 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죽어야만 알게 되는 두렵고 해석 불가능한 비밀이된다.
인간은 오랫동안 신화를 통해서 형이상학의 지식을 탐색하고 전달해왔다. 인류가 과학적 합리적 언어와 이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는 3-4백여년에 불과하다.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든 신화는 믿을 수 없는 유치한 이야기로 전락해버렸지만, 신화는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꾸며낸 거짓으로 무시할 순 없다. 창세기의 창조 신화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많은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신화를 상징 언어로 해석하지 않고, 이를 마치 실재 사건 인양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할 때, 문제가 생긴다. 기적수업은 “신화는 완전히 지각적이며, 그 형태는 지극히 모호하고 특성상 선악의 본성을 지녀 가장 자애로운 신화조차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그 신화 언어의 한계성과 해석의 위험성을 주지시킨다. (기적수업 60- 9)
기적수업의 지적처럼 아담의 원죄와 예수의 대속 신화는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로 가르치기보다는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무섭고 두려운 심판을 내리는 신으로 그려낸다. 먹음직한 선악과를 에덴 동산 가운데에 두어 아담을 시험하여 죄에 빠뜨리고,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여, 대속 시키는 신을 단순하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부르기는 쉽지 않다.
기적수업은 기독교 신화의 상징을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신화의 내용이나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상징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죄’라는 개념 대신에 ‘분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추방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원래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영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육체와 에고가 되어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사건 자체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우주적이고 신비한 희생제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사역을 적대시하고 불편해 했던 소수의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가 죽임을 당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부활이 의미가 있는데, 이는 모든 속임수와 악한 행위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라 한다. 기적수업은 원죄로부터 비롯된 죄라는 개념 자체는 에고가 생각해낸 허위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서 존재하지도 않고, 따라서 이를 대속해야 한다는 관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죄 대신에 실수, 잘못이라는 용어가 적절한데, 죄라는 용어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잘못된 개념이라 한다. 이 세상에 결코 돌이키지 못하는 실수나 잘못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의 개념에 대해서 기적수업 텍스트의 다른 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기적수업 4장 서문에서 기적수업을 구술하는 화자로서 예수는 직설적으로 십자가는 내가 전하려던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십자가에 연연하지 말고, 십자가를 떠나 보내라고 권고한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여행은 마지막 ‘쓸모 없는 여행’이라야 한다. 십자가에 연연 해하지 말고 성취된 것으로 여겨 떠나보내라. 네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너의 마지막 쓸모 없는 여행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너는 나의 부활에도 동참할 수 있다. 그러기 전까지는 참으로 삶을 낭비할 것이다. 너의 삶은 분리, 힘의 상실, 상실을 보상하려는 에고의 헛된 시도, 마침내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을 재연할 뿐이다. 그것은 네가 자발적으로 포기할 때 까지 계속될 것이다. ‘낡고 험준한 십자가에 집착’하는 가엾은 실수를 범하지 말라 십자가가 주는 유일한 메시지는 네가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극복할 때까지는 너는 얼마든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전하려던 복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여행이 있고, 이 가르침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적수업 p. 53-3)
십자가를 붙드는 일은 구원과는 상관없는 일로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죽음을 계속 연장하는 헛된 행위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의미 있게 이해하는 일은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는 벗이났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십자가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영이 아니라 에고의 정체성으로 살게 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에고를 버리고 영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지, 특별한 육체의 희생을 통해 어떤 마술적이고 획기적인 구원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설명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앙인들이 걸려 넘어질 만한 가르침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십자가의 대속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붙들어서 칭의를 받는 방식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기독교 교리가 설명하는 십자가의 대속이 칭의를 만드는 지,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도 아니고 , 내가 계속 생각할 수 있는 개념도 아니다. 칭의라는 개념 자체가 네게 믿기지 않겠지만 너는 의인이 되었다는 개념이니, 경험할 수도 검증될 수도 없는 기독교 변증을 위한 순수한 관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에고’라는 개념은 심리학에서 나온 지 100여년 정도밖에 안되는 심리학 용어이다. 다시 말해 기적수업은 인간이 최근에서야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 ‘에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원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기적수업은 수천년간 사람들이 익숙하게 쓰던 신화의 용어를 버리고, 20세기 이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마인드로 훈련된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 일반화되고 검증된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심리학과 동일하게 기적수업에서 ‘에고’라는 용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무심코 ‘나’라고 여기는 관념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고’는 수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익숙하게 인식해 왔던 개념이다. 단지 20세기에 ‘나’라는 구어체가 ‘에고’라는 심리학 용어로 대체되었다는 것은 ‘나’라는 일상의 주체가 본격적으로 과학적 심리적 종교적 탐구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양에서 힌두교나 불교에서 ‘나’라는 주체에 대한 인식과 가르침은 수천년 전부터 중요한 중심 주제로 내려오던 것이다. 동양종교는 거짓된 나에서 참된 나로 향해 나가는 해탈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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