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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이 가르치는 십자가의 메시지 본문
기적 수업
기적수업이 가르치는 십자가의 메시지
기적수업에서 십자가의 메시지는 공격과 정죄는 부당하고 오직 사랑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예수는 가르친다.
기적수업 6장은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다른 아들들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공격하였는지를 그러나 그러한 공격은 가능하지 않고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의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른 몇몇 아들들이 얼마나 극렬히 공격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고, 너는 그 점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배움의 모범으로 기여할 수 없다.” ( 기적수업 p.94-3)
기적수업이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의 관점과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다. 사도 바울이 해석한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렸고, 이로써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기적수업의 1인칭 화자인 예수는 십자가의 희생을 바울 사도처럼 우주적인 희생을 가져온 신화적인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을 소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극렬하게 십자가 형으로 예수를 처형했던 단순한 역사적 사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사건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에서 흔하게 일어났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인 박해와 탄압이 만들어내는 억울한 죽음 가운데 하나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기적수업이 예수의 죽음을 단순하게 한 정치범의 억울한 죽음으로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부활하여 죽음 마저도 예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온 인류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대속이라는 신화적인 의미부여보다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을 넘어섰기에 그 어떠한 공격과 박해도 하나님의 아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공격은 궁극적으로 육체에만 가해질 수 있다. 육체가 서로를 공격하고 심지어 파괴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파괴자체가 불가능하다면 파괴될 수 있는 것은 실재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파괴되었다고 해서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분노가 정당하다고 믿는 만큼, 너는 잘못된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십자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너는 박해 받을 수 없기에 박해에서 그 어떤 형태의 폭력도 지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네가 분노의 반응을 보인다면 너는 파괴될 수 있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따라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 기적수업 p.94- 4 )
따라서 십자가의 메시지는 대속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과 같은 육체에 대한 최고의 공격 마저도 하나님의 아들을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는 몸소 보여주었다는 메시지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예수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인 모든 인간에게도 동시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육체에 대한 공격은 단지 육체의 파괴만을 의미할 뿐이지, 인간의 실체인 영을 조금도 건드릴 수 없으므로 그런 공격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자신은 분노할 수 없었고, 그의 제자들처럼 분노를 정당화하지 않았다고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박해 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형태의 폭력과 공격을 지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십자가의 메시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인간은 육체나 에고가 아니라 영이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없는 영의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를 모든 인간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향한 인간의 공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인간은 죽음과 상관없이 영원히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예수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인류는 죽음 아래 놓여있지 않는 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정체성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가르친다.
“너의 부활은 너의 다시 깨어남이다. 나는 거듭남의 모범이지만 거듭남 자체는 이미 있던 것이 너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활을 거기에 두셨으니 그것은 영원히 참되다. 나는 부활을 진실이라 믿었고, 나에게 해당하는 진실로 받아들였다. 하나님 왕국의 이름으로 부활을 가르치도록 나를 도우라. 그러나 먼저 부활이 너에게 해당되는 진실임을 믿으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잘못 가르칠 것이다. 소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난’의 시기에 나의 형제들은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버림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분노할 수 없었다.” ( 기적수업 p. 95-7)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의 소멸이며, 에고의 소멸이다. 그런데 기적수업은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았고, 또한 인간의 생명을 담을 수 없는 물질로서, 옷과 같이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불변한 영으로 만드셨지, 육체와 같은 소멸되는 물질의 정체성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육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육체를 자신의 상징으로 본다.
“하나님은 육체를 만들지 않으셨다. 육체는 파괴될 수 있고, 따라서 왕국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는 네가 자신으로 여기는 너를 상징한다. 육체는 명백히 분리의 도구이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 마음은 육체를 치유할 수 있는 반면 육체는 마음을 치유할 수 없다면, 마음이 육체보다 강함에 틀림없다. 모든 기적이 이것을 보여준다.” ( 기적수업 p.107-2)
따라서 인간이 두려움과 신비를 느끼는 죽음이란 것은 실재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 땅에서 육체와 에고에 대한 너의 관념이 사라진다면, 그것이 곧 육체와 에고의 죽음이며, 이 죽음은 너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줄 뿐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네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이기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너의 숙제를 미뤄버린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아무런 시도가 아니지만, 네가 살아서 결정하고 결단하는 마음이 바로 너의 본질이고, 너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너의 육체와 너의 에고와 너의 꿈이 사라지면, 너는 네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너는 어쩌면 죽음을 통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죽음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 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생명을 통해 성취되며, 생명은 마음에 속하고 마음 안에 존재한다. 육체는 생명인 너를 담을 수 없어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면, 내가 죽음을 이겼기에 너도 죽음을 이길 수 있다. 죽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음으로서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에고가 시도하는 다른 불가능한 해결책처럼 죽음도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 기적수업 p.107-1)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영원하고 완벽한 영의 존재라는 것을 마음이 다시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는 너의 부활은 너의 다시 깨어남으로써, 이미 있었던 것이 마음에 다시 떠오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 교회는 부활 신앙을 가르치지만,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만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고, 오직 예수를 믿은 자만 영원한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지옥에 간다고 가르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복수극 마냥 두려운 심판론이 되며, 교회에 속한 자에게만 공짜로 주어지는 편파적인 구원론이 된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인간의 실존과는 관계가 없는 예정론과 같은 허위 의식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어느 편에 속하는지에 더 관심을 두는 배타적인 종교 이데올로기로 변해 버린다. 기독교 내에서 수 많은 이단이 나타나고, 항상 이단 논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십자가 대속의 교리를 제대로 받아들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관념을 추궁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 검증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가 가졌던 사유체계를 배우고, 그 사유체계를 통해서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죽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이와 달리 이 땅에서 에고와 육체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 하늘나라에서 영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이원론적인 가르침은 단지 이 땅에서 에고의 사고방식을 유지시켜서 에고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에고의 전형적인 책략이라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하늘나라와 에고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하나의 선택지로서 네 앞에서 너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2천년간 십자가의 메시지는 영의 정체성을 가르치기 보다는 에고의 배타성과 복수심의 성격을 담게 되었는가? 기적수업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많은 것들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리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율법이 가르치는 두려움과 죄의식에 근거한 유대교적 전통에 속했던 제자들은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소수의 제자만이 이를 이해한다고 해도 이를 오해의 여지없이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최근 그 존재가 드러난 도마복음은 기존 4복음서와 달리 도마가 예수님의 어록을 직접 기록한 복음서라는데, 이 중요한 기록이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전파되지도 해석되지도 이해되지 않은 채, 동굴의 항아리에 숨겨져 있다가 2천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예수의 복음이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의 필요와 선호도에 따라서 선별되고 다른 것들은 소외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될 때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면서 다양한 다른 기독교 종파들이 영지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단으로 축출되었던 역사도 예수의 복음이 교권주의라는 정치권력의 다툼 속에서 일정부분 왜곡되고 그 의미가 축소되는 반복을 겪을 수밖에 없었음을 추론하게 해준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살았던 정치 종교 사회 문화적 상황의 한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는 당시에 필요했고 적절했으며 효율적이었던 바울의 해석을 임시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나중에 재해석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시기를 기다리셨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가 바로 그 때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신화적 언어가 사용되지 않고, 오직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시대이며, 특히 인간의 정신과 심리가 과학적 방식으로 규명되고 그 지식이 보편화되고 있고, 세계가 하나가 됨으로써 타 종교 사상과의 교류가 일상화된 시대이다. 이런 시기에 기적수업이 마치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합리적이고 정신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타종교와의 패권적인 충돌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공유라는 목표를 가지고 2천년전에 기록된 복음을 재해석해 주는 것은 너무도 적절하고 절실한 타이밍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을 때, 내가 그들이 많은 것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리라고 말했음을 기억하라. 그들은 당시 나를 따를 준비를 완전히는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이끄는 사고체계에 대해 네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순교자가 아니라 교사가 필요하다. 그 누구도 죄로 인해 벌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죄인이 아니다. 벌의 개념은 비난의 투사와 관련이 있고 비난이 정당하다는 관념을 강화한다. 그 결과 비난을 가르치게 되니, 행동은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 신념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명백히 상반된 사고체계들의 결과이며, 에고와 하나님의 아들의 갈등’을 완벽히 상징한다.” ( 기적수업 p.97-16)
기적수업에서 십자가의 메시지는 공격과 정죄는 부당하고 오직 사랑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예수는 가르친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사를 복음서에 기록하면서 복수와 심판의 기대감을 자연스럽게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하나님의 천벌을 받았다는 암시를 주는 장면들, 예수가 나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로 왔다고 말하는 장면들은 제자들이 두려움과 복수심 속에서 예수의 말을 잘못 기록한 예이며, 이런 기록은 배반과 복수와 심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예수의 마음을 왜곡했던 예라고 설명한다.
“신약복음은 참으로 오직 사랑만을 전하지만, 다음의 표현들은 뒤집힌 사고를 보여주는 예다. 사도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는 말을 나의 말이라고 전할 수 없었으리라. 이 말은 내가 가르친 모든 것과 명백히 반대된다. 그들이 진실로 나를 이해했더라면 내가 유다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고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배반이 가능했다고 믿지 않고는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려느냐?”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 십자가는 내가 배반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내가 유다에게 ‘벌’을 내렸다는 말도 비슷한 잘못이다. 유다는 나의 형제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처럼 성자단의 일부였다. 정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준비가 된 내가 유다를 정죄하려 했겠는가?” ( 기적수업 p.97-15)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고 용서하셨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기적수업에서 예수는 십자가의 대속이라는 특별한 수단이나 우주적이고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죄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죄와 심판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죄와 심판은 처음부터 인간의 에고가 만들어낸 거짓된 관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대속, 배반, 심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한 사랑, 기쁨, 행복만을 만드셨고 인간은 처음부터 그러한 기쁨과 행복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 구원이요, 복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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