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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쳐 주는 인간의 정체성(2) 본문
기적 수업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쳐 주는 인간의 정체성(2)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단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교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정체성을 알려주는 교리임을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음성인 성령을 듣는 자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자기 자신 안에서 경험하고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두 개의 관념이 있는데, 하나는 네가 만든 에고의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관념이다. 에고의 관념은 분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모르는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나오는 관념이다. 성령의 관념은 분리 이전의 상태에 가졌던 관념인데, 너는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완전하게 보호받고 평화로운 영원한 존재라는 관념이다. 기적수업에서 예수는 성령의 관념을 힘써 배워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이 관념을 가르치는 음성을 듣는 것이 자신이 육체로 이 땅에 있었을 때 배운 마지막 교훈이었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과 동등하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배우는 학습자로서 또한 동등하다고도 가르친다.
“너의 안에 있는 두 음성 중 하나님을 듣기로 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는 네가 만든 음성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것이며, 하나님은 네가 이 음성만 듣기를 청하신다. 성령은 문자 그대로 네 안에 있다. 성령의 음성은 네가 이전에 있었고 다시 있게 될 곳으로 돌아오라 부르는 음성이다. 이 세상에서도 다른 음성은 듣지 않고 오직 이 음성만을 들을 수 있다. 그러려면 굳건한 배움의 의지와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내가 배운 마지막 교훈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들로서 만이 아니라 학습자로서 도 동등하다. ( 78-4 )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우리는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시점에 있는 듯하다. 기적수업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분신이라는 것이다. 기적수업의 화자인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나는 너희들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기에, 나의 마음은 언제나 너의 마음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즉 예수는 자신은 인간으로서 너희와 동등하다고 하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자신과 동등하게 너희 인간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는데, 그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자신이 성령의 음성을 따른 결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너희들도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것이 내가 주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결정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이는 하나님을 택하게 하는 결정으로서, 이 결정을 내리는 것은 가능하고 모든 인간은 그렇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등하게 창조되었기에 나의 마음은 언제나 너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내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준 것은 오직 나의 결정이었다. 너도 같은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것이 내가 주는 유일한 선물이다. 그 결정 자체가 공유하겠다는 결정이기에 결정을 공유한다는 선택이다. 줌으로써 결정하고, 따라서 이것은 진정한 창조를 닮은 유일한 선택이다. 나는 결정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하나님을 택함으로써 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고 너도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적수업 p.79-9 )
성자 예수는 인간과 동등하게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성령을 따름으로써 어떻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취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확실한 정체성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깨어나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라는 부름인데, 안식은 잠이 아니라 깨어남에서 온다고 한다. 따라서 깨어남이란 너는 하나님의 분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졌고, 네가 이를 취하는 결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 수 있다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은 바로 이를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음성이며, 예수도 인간으로서 이 음성을 듣고 따름으로써 하나님 아들의 권세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단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교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정체성을 알려주는 교리임을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음성인 성령을 듣는 자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자기 자신 안에서 경험하고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결정한 마음이 너에게도 있고, 그 마음이 너를 변화시키도록 너도 허락할 수 있다고 나는 분명하게 밝혔다. 이 마음은 오직 한 음성을 듣고 오직 한 방식으로 답하기에 명확하다. 너는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의 빛이다. 안식은 잠이 아니라 깨어남에서 온다. 성령은 깨어 기뻐하라는 부름이다. 세상은 피로라는 관념이기에 몹시 지쳐 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지친 세상을 깨워 하나님을 위한 부름을 듣게 하는 즐거운 일이다. 모두가 성령의 부름에 답할 것이며, 그 때 비로서 성자단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왕국의 부분에게 그들을 전일 하게 할 수 있는 완전한 통합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소명이 있겠는가?” ( 기적수업 p. 79-10)
기적수업은 성삼위(성부, 성자, 성령)에서 성령만이 상징적인 기능을 가졌다고 한다. 성부는 무한하고 불변하며 유일한 실체로서 우주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요 아버지로서 실체로서 계시된다. 성자 예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서 길 잃어버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실체를 몸소 보여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실체로서 계시된다.
반면에 성령은 유일하게 상징적인 기능을 가졌다고 한다. 상징적 기능이란 문자 그대로 무언가를 지시하고 가르치는 기능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즉 성령은 인간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가르침으로서 인간을 도와주는 안내자, 동행자, 보호자로써 상징의 기능을 할 뿐이지 어떤 실체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삼위에서 성령만이 상징적인 기능을 가졌다. 성령은 치유자, 위로자, 안내자로 불리며, 성부, 성자와 분리된 존재로 묘사된다. 나 역시 “내가 가면 너희에게 또 다른 위로자를 보낼 것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령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는 상징적인 기능을 가졌고, 상징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령, 즉 만유의 영감에서 비롯된 나의 바른 생각은 사람이자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 하나인 나에게 이 영감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제일 먼저 가르쳤다. 이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것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 기적수업 p.76-4)
성령은 표지판처럼 신호등처럼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성령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마음이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의 마음 안에서 알려준다. 이와 달리 에고는 너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며, 너의 마음 안에만 있고, 하나님 마음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된 관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일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참된 관념을 받아들이는 일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이다. 반면에 에고의 음성을 듣는 일은 네가 만든 두려움과 죄책감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하나님의 관념을 부정하는 일이다.
“성령은 너의 선택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성령은 하나님을 대변하기에 언제나 바른 선택을 대변하는 마음의 부분에 있다. 성령은 너에게 남은 하나님과의 소통로이다. 너는 이 소통을 방해할 수 있을지 언정 파괴할 수는 없다.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하늘에서 와 같이 땅에서 이루는 길이다. 하늘과 땅은 네 안에 있기에 양쪽의 부름은 너의 마음에 있다.” ( 기적수업 p.79-8 )
성령은 에고의 사유체계를 해제시키는 하나님의 관념을 대변한다. 성령은 에고의 잘못된 관념을 해제시키는 해법으로 주어졌는데, 성령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에고의 잘못된 관념을 부인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에고의 관념은 네가 만든 허상으로서 단지 네가 그것이 거짓임을 깨닫고 버리면 해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왜곡된 관념을 버리고, 성령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을 속죄라고 일컫는다.
‘나는 너의 생각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너에게 그 기반을 주기 위해 왔다. 너는 증대시키기 엔 너무 약한 공유되지 않는 관념의 짐을 지고 있지만, 네가 만든 짐이기에 해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혼자서는 네 과거의 오류를 없앨 수 없다. 너의 오류는 네가 만들지 않은 치료법인 속죄가 없다면 네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기적수업 p. 83-2)
성령을 받는 일은 성령이 주는 관념을 공유하는 일이다. 배운다는 것은 다른 이의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다. 생각은 공유되면 될수록 더욱더 커지고 강화된다. 예수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배웠고, 이를 가르쳤고, 이를 알지 못하는 모두에게 전파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로서 성령의 관념을 너희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쳤고, 너희가 이를 듣기로 선택할 때 기뻐하였다고 가르친다.
“가르침은 치유라야 하니, 가르침은 관념을 공유 함이요, 관념의 공유란 관념의 강화임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잊을 수 없으며, 나는 배웠기에 그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네가 배운 것을 가르치기를 너에게 청하니, 너는 가르침으로써 네가 배운 것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아들의 이름이니, 나의 이름으로 그것을 의지할 만한 것이 되게 하라. 나는 배우는 것을 아낌없이 너에게 주며, 네가 그것을 듣기로 선택할 때 내 안에 있던 마음이 기뻐한다.” ( 기적수업 p. 84-5 )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념이고, 에고와 성령도 관념이다. 인간은 에고의 관념을 받아들이면, 에고의 인간이 되고, 성령의 관념을 받아들이면 영의 인간이 된다. 에고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에고의 사고체계로 사고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영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생각대로 사고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적수업은 에고의 사고체계를 따르는 것은 단지 망상을 품는 일이지 사유하는 일이 아니라고 일갈한다. 에고의 사유는 실재하지 않고 조작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령의 관념을 따르는 것은 진정으로 사유하는 것이 된다. 성령이 바른 사유, 바른 관념, 바른 마음인 것은 하나님의 생각으로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도 에고처럼 네가 내리는 결정이다. 마음이 수용하고 따를 수 있는 대안은 성령과 에고 뿐이다. 너는 오직 성령과 에고 중에 택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므로 네가 없앨 수 없다. 하나는 네가 만들었기에 네가 없앨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만이 취소나 변경이 불가하다. 네가 만든 것은 언제나 변경이 가능한데, 네가 하나님처럼 생각하지 않을 때 너는 사실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망상적인 관념은 실재 생각이 아니지만 너는 그것을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너는 틀렸다. 생각하는 기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생각의 부분인 너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 기적수업 p. 87-6)
성령은 바른 생각, 바른 마음, 바른 관념의 동의어이고 에고는 망상, 허상, 거짓, 죄책감, 두려움의 동의어가 된다. 그렇다면 에고의 생각을 버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고, 성령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에고도 성령도 관념이며 생각이기에 어떤 것이 에고의 것인지 성령의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기적수업 텍스트가 3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적수업 5장에서 본격적으로 성령과 에고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된다. 에고의 삶을 살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성령과 에고를 구분하는 일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수업은 텍스트뿐만 아니라 워크북까지 이용해서 이를 구분하고 적용하는 법을 가르친다. 바른 관념과 바른 마음을 가지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훈련되어야만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관념은 큰 테두리에서 보면, 두려움과 죄책감에 대한 거부이고,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함과 책임하에 맡기고 내려 놓는 일이기에, 에고의 판단과 계획을 내려 놓는 일이기도 하다. 성령은 속죄를 주는데, 속죄라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모든 일과 앞으로 오는 모든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준비하지 않고 내어 맡기고 현재에 집중해서 사는 일이다. 하지만 에고의 생각은 복잡 다단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정리 정돈하여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 성령의 관념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가만히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주는 일이다.
“불합리한 생각은 연결되지 않은 혼돈된 생각이다. 너의 생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정돈하신다. 죄책감은 언제나 네가 이 점을 모르고 있다는 표시다. 또한 죄책감은 네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다고 믿으며, 분리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혼돈된 생각은 죄책감으로 시작되고 죄책감으로 유지된다. 자신의 생각은 자신이 정돈하고 그 생각의 지시대로 따라야 한다고 믿는 자들은 죄책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로 인해 그들은 오류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데, 그들은 이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무책임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기적을 행하는 자의 유일한 책임은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속죄되었는 지는 너의 책임이 아니다. 이 딜레마는 해제라는 해결책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벗어날 길이 없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가 해제될 수 없다면 그 결과는 너의 책임일 것이다. 속죄는 과거를 정화된 형태로만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결되지 않는 혼돈된 생각을 치료하는 의심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닌 치료법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그 증상이 남을 수 있겠는가?” ( 기적수업 p.88-7 )
기적수업은 천국과 땅이 모두 네 안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이 땅에서 지옥을 경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에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다. 성령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에고는 두려움으로 이끈다고 한다. 기적수업이 강조하는 바는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거부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두려움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성령처럼 에고도 목적이 있다. 두려워하는 자만이 이기적일 수 있기에, 에고는 두려움을 목표로 한다. 에고의 논리도 성령의 논리처럼 결함이 없다. 너의 마음은 선택하기에 따라 천국이나 땅을 편들 수 있는 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이르노니, 천국과 땅이 모두 네 안에 있음을 기억하라.” ( 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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