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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인간을 무능하고 불순종한 죄인으로 보는데, 기적수업은 왜 인간이 완벽하다고 가르치는가? 본문

영성수행 비전/초인생활. 기적수업

창세기는 인간을 무능하고 불순종한 죄인으로 보는데, 기적수업은 왜 인간이 완벽하다고 가르치는가?

柏道 2020. 2. 16. 22:58


기적 수업

창세기는 인간을 무능하고 불순종한 죄인으로 보는데, 기적수업은 왜 인간이 완벽하다고 가르치는가?

 


인간은 육체와 에고가 아니라, 영이라는 정체성이라는 전제에서 완벽함의 인식 근거가 나온다. 영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완전하고 영원불변한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으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이 가르치는 인간의 정체성은 창세기의 원죄가 가르치는 것과 모순된다. 창세기의 원죄는 인간은 악하고 어리석고 무능력하고 불순종하는 죄인으로 정의한다. 반면에 기적수업은 인간을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과 전일성을 갖고 있는 완벽하고 무죄한 존재로 본다.

 

 

“성령은 너를 완벽하다고 지각함으로써 시작한다. 이 완벽이 공유됨을 아는 성령은 다른 사람에게서 완벽을 인식하여 양쪽 모두에게 완벽을 강화한다. 그들이 공유하는 완벽은 서로를 포함하게 하므로 분노 대신 사랑을 일으킨다. 모두가 동등함을 지각하는 성령은 모두가 똑같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지각한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속죄를 불러오는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보편적으로 필요한 것은 속죄이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지각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이 세상에 네가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수업 p.99-5)

 

 

나의 완벽은 너의 완벽이며, 이는 서로의 동등함과 분노 대신 사랑을 일으키고, 이는 또한 자동적으로 속죄를 불러온다고 말한다. 기적수업이 가르치는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이 지각하는 바를 모두 거슬리기 때문에 이해가 불가하고 믿기조차도 힘들다. 기적수업은 이런 의미에서 성경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하고 난해하고 역설적이다.

 

 

기적수업은 인간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한 부분이며 한 속성으로서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은 육체도 에고도 아니고 그 본질이 영인데, 영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분신이라고 정의한다. 영은 완벽하여 죄를 지을 수 없고, 영은 본질적으로 너와 나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는 모두 동일한 마음과 같은 것이기에 네 것 내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기적수업이 인간을 보는 관점은 영의 관점이고, 인간의 감각이 보는 관점은 에고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기쁨의 불모지에서 네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외에 기쁨을 찾을 길이 있겠는가? 너는 하나님이 너를 두시지 않은 곳에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은 너를 당신의 부분으로 창조하셨다. 그것이 네가 있는 곳이자 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변경될 수 없다. 그것은 전체적인 포함이다. 그것은 네가 지금도 바꿀 수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참되다. 그것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처럼 참되다. 그들은 오로지 홀로 완벽하신 하나님 안에 완벽하게 포함되기에 참되다. 이를 부인하면 너 자신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니, 너와 하나님 중 하나만 받아 들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99-6)

 

 

영의 관점에서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다. 인간의 정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이고, 이는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창조했기에, 인간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하나님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은 영원한 진리이고, 영원한 참이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과 너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너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시공간의 개념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전일성,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계의 개념을 갖고 있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인데, 이는 너 자신이 이미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권세이며,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러나 완벽한 자는 분명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완벽은 너의 본질이므로 네가 완벽해지는 것이 어려울 리 없다. 너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그렇게 지각해야 하고, 너의 모든 지각을 성령이 보는 하나의 선에 일치시켜야 한다. 이 선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선이며, 너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수렴되게 한다. 이 지각은 그 어디에도 갈등이 없다. 이는 하나님께 마음이 고정된 성령이 모든 지각을 인도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 100-11)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완벽한 존재로서 하나님처럼 살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곧 너희 인간은 하나님처럼 완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고 보고 알고 있지만, 지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이를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네가 이 금지된 과일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속였다. 인간 아담은 감히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선악과를 취하므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는 죄인이 되었다고 창세기는 가르쳤다.

 

 

그러나 기적수업이 가르치는 영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해석은 교묘하게 본말이 전도된 해석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처럼 완벽한 하나님의 한 분신 같은 존재였는데, 뱀은 오히려 이를 부정하도록 하기 위해, 인간에게 이 과일을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교묘하게 속인다.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인간은 자신이 실재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잘못된 인식에 빠져버려서, 하나님과 하나된 본래적인 전일성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진 타락한 존재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는 실낙원 신화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기적수업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이미 갖고 있는 존재라고 가르치는 이유를 이로서 이해할 수 있다. 너희가 이 과일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꾀임은 너희는 하나님과 한 분신이라는 전일성을 단숨에 부정하는 교묘한 속임수를 실재로 믿게 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고가 던지는 모든 질문에 성령이 주는 유일한 답을 들으라. 너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분으로 창조하신, 값을 따질 수 없는 하나님 왕국의 일부다.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 만이 실재다. 너는 악몽을 꾸는 잠을 택했지만, 잠은 실재가 아니며 하나님은 깨어나라 부르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너는 잠에서 깨어나기에 너의 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꿈은 에고의 수많은 상징을 담고 있고 너는 그 상징 때문에 혼동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네가 다만 잠들어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너는 주위와 내면에서 진리를 볼 것이며 꿈은 네게 실재가 아니게 되어 너는 더 이상 꿈을 실재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왕국과 네가 왕국에서 창조한 모든 것은 아름답고 참되므로 네게 실재가 될 것이다.” ( 기적수업 p. 104-6)

 

 

기적수업은 너 자신이 하나님 왕국의 일부로서 완전한 실재라는 사실을 잊게 된 것이 곧 악몽 속에 들어가게 된 이유라고 한다. 너는 죄인으로서, 악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에고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에고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몽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쫓기고 두려워하며 도망 다니는 너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야, 자 그만 일어나라. 그것은 다 꿈일 뿐이다. 빨리 꿈에서 깨어나라고 하면 그 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너와 하나됨과 교통과 사랑의 관계는 처음처럼 그대로 완벽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단지 네가 거짓을 진실로 믿어서, 스스로 죄인의 멍애와 악인의 역할과 저주받은 삶을 사는 꿈을 꾸기 시작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믿어 이미 자신을 잘못 가르쳤다. 너는 네가 완벽하다고 믿지 않았다. 너의 마음을 오직 전일 하다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네가 분열된 마음을 만들었다고 가르치시겠는가?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당신의 소통 통로들이 당신께 닫혀 있어 당신의 기쁨을 전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충만한 기쁨에 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아이들이 잠을 자니 깨어나야 한다.”라고 생각하셨다.” ( 기적수업 106-1)

 

 

너와 내가 완벽하다는 인식은 하나님과의 전일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안에, 그의 한 부분으로서, 완전히 합일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다. 완벽함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에고가 아니라, 영이라는 전제에서도 완벽함의 인식 근거가 나온다. 영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완전하고 영원불변한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으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육체와 에고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육체와 에고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고체계이다. 육체와 에고는 속박되고 변하고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결핍과 불안과 두려움의 상징체계이다.

 

 

에고는 두려움과 불안을 투사하는 사고체계로서, 두려움과 불안을 삶이라는 화면에 투사한다. 그리고 삶이라는 화면에 자신이 투사한 두려움과 불안이 상영되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실재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수업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만들고 그것을 실재로 믿게 되는 과정을 ‘투사’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투사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들 예를 들면 두려움, 불안, 욕망, 소망 등을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펼쳐 놓는 일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투사함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간다. 따라서 현실이란 인간이 마음을 투사하며 만들어낸 것이지, 인간의 마음과 상관없이 신이 운명적으로 부여한 것이 아니라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기적수업은 마음의 투사 행위를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두려움, 불안, 욕망을 투사함으로써, 두려움과 불안 속에 항상 쫓기는 결핍하고 불안한 인간 존재를 항상 꿈꾼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이며 본질이라고 믿는다. 기적수업은 이런 황당한 믿음을 에고의 사고체계라 부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이미 완벽하고 전일 하며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영원한 존재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에고가 꾸고 있는 두려움과 분리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만들지 않으셨기에, 하나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셨기에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이 경험하는 에고의 거짓된 마음을 모두 아셨다. 따라서 예수는 이 땅을 떠나면서 자신처럼 이 모두를 잘 알고 있는,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알며, 동시에 인간의 에고가 갖고 있는 거짓된 마음도 알고 있다. 따라서 성령은 인간이 에고로부터 깨어나서 하나님의 지식으로 넘어가도록 가르치고 도와주고 안내하는 영이라고 예수는 가르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인간을 가르치고, 안내하는 영으로서 에고의 거짓을 드러내어 에고의 악몽으로부터 인간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지식을 깨닫게 하여, 인간에게는 두려워할 이유보다는 단지 기뻐할 이유 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악몽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이라는 에고의 꿈은 하나의 망상이며, 완벽함과 전일 함에서 생겨나는 영의 기쁨이 실재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나직한 음성으로 밤이 지났고 날이 밝았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더 부드럽게 아이를 깨울 방법이 있겠는가? 아이는 마술을 실재라고 믿기에, 너는 아이를 무섭게 한 악몽이 실재가 아니라고 아이에게 말하지 않는다. 너는 다만 이제는 안전하다고 아이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의 차이를 인식하도록 훈련시켜, 아이는 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 악몽을 꾸면 아이는 악몽을 몰아내고 빛을 스스로 청할 것이다.” ( 기적수업 p.106-2)

 

 

하지만 인간이라는 어린 아이는 두려움과 불안의 꿈을 꾸면서, 그것이 실재라고 믿고 있다. 성령은 두려운 악몽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에게 그 꿈은 실재가 아니고, 실재는 이러 저러한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먼저 아이를 잠에서 깨우고 이제는 안전하다고 안심시킬 뿐이다. 그러면 아이는 악몽을 꿨음을 깨닫고,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성령은 결코 오류를 조목조목 나열하지 않는다. 지혜가 없는 자가 아이며, 성령은 결코 아이들을 무섭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은 아이들이 부르면 언제나 답하고, 그가 미덥기에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더욱 확신한다. 아이들은 참으로 환상과 실재를 혼동하고, 그 차이를 몰라서 무서워한다. 성령은 꿈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빛을 비추어 꿈들을 몰아낸다. 네가 어떤 꿈을 꾸고 있든, 성령의 빛은 언제나 깨어나라는 부름이다. 꿈에서는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지만, 하나님에게 온 빛을 비추는 성령은 영원히 지속하는 것 만을 대변한다." (기적수업 p.107-4)

 

 

우리는 다시 한번 기적수업의 서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서문은 인간은 꿈 속에서 두려워하지만, 그 꿈은 실재하지 않는 비실재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소통으로 완벽함과 전일성을 가진 인간은 실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꾸고 있는 악몽이라는 비실재는 인간이란 실재에 조금도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업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다.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기적수업 서문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