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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도래 본문
기적 수업
하나님 나라의 도래
기적수업은 하나님 나라는 ‘너’ 안에 즉 ‘너의 내면’ 있다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라고 말한다. ‘너’의 실재는 육체와 에고가 아니라, 영이라고 가르치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라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안에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기적수업 1장에서 시작한 기적수업 텍스트는 7장에서 전반부의 결말을 맺고 있다. 1장에서 7장의 전반적인 내용은 창세기의 원죄, 십자가의 구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왜곡된 에고적인 해석과 관념이 속죄와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떠한 혼동과 두려움을 만들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7장에서 구원의 마지막 단계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선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적수업은 여러 곳에서 시간과 공간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에고의 관념을 부정한다. 그리고 하나님 왕국은 영의 세계이지, 육체와 에고가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한다.
기적수업은 하나님 나라는 ‘너’ 안에 즉 ‘너의 내면’ 있다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라고 말한다. ‘너’의 실재는 육체와 에고가 아니라, 영이라고 가르치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라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안에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취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너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에 집중할 때 너의 것이 된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네가 그것을 인식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이지, 네가 하나님 나라를 찾거나,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거나, 육체가 죽어 영이 되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에게 주어졌고, 너는 단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너’이고 ‘너’ 만이 실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너’ 자신의 실재를 바로 보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취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왕국에 존재한다는 것은 왕국에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참이 아닌 것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너는 갈등을 너의 선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왕국인 너는 겉모습과 무관하다. 너는 실재이므로 실재는 네 것이다. <…> 너의 마음에 있는 제단만이 실재이다. (기적수업 p.120-4)
‘너는 실재이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이해되기 어려운 명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적수업에서 말하는 실재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실재는 허상의 반대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존재하기에 실재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하고 변함없이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 만약 잠깐 있다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비 존재하는 것이라서 실재가 될 수 없다. 영원불변 하도록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라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 즉 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분신으로서 영원불변한 실재라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하나님의 피조물과는 구분되는 용어처럼 보인다. 창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처럼 창조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용어로 보인다. 인간은 창조하는 힘을 가진 창조물로서 여타의 피조물과 구분하는 기적수업이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기적수업은 인간은 투사를 통해서 실재를 만든다고 한다. 투사는 인간이 가진 마음의 창조하는 힘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이 투사를 통해 만들어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허상이다. 인간은 지각을 통해서 투사하기 때문이다. 지각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 사유, 감정, 감각과 같은 것을 모두 지칭하고 있는데, 지각으로 투사한다는 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판단한 생각을 통해서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지각은 세상의 것 만을 투사하고 인식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영의 차원에 속한 실재를 인식할 수 없다.
"네가 투사하거나 확장하는 것은 네게는 실재다. 이는 왕국에서 뿐 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불변하는 마음의 법칙이다" (기적수업 p.117-2)
“왕국 안에서 널리 통용되는 이 법은 왕국 밖에서는 “너는 네가 투사하는 것을 실재라고 믿는다.”로 조정된다.” ( 기적수업 P. 118-3)
투사의 법칙은 인간은 투사한 것을 실재로 믿지만, 실재는 인간이 투사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준다. 실재는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과 이해를 넘어서 객관적으로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그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실재를 인간은 결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재는 지각의 영역을 넘어서는 영의 영역에 속하지만 인간은 오직 지각을 통해서만 투사하고 인식하므로 인간은 결코 지각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에 다가갈 수 없다는 분명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기적수업은 투사를 통해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이를 실재라고 믿는 마음을 ‘에고’ 라고 부른다. 에고는 지각을 통해 이 세상을 보고 듣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을 방어하거나 타인을 공격하기 때문에 에고는 본질적으로 두려움과 불안, 욕망과 결핍을 투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에고를 통해서 두려움과 불안, 욕망과 결핍을 만들어 놓고 이것들을 실재라고 철썩같이 믿는다.
하지만 실재라는 것은 인간이 지각하고, 투사한 것일 수 없다. 오직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만이 실재이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은 하나님이 알고 있는 실재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이라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분신인 영으로서 창조되었기에 영으로서 완전하고 영원불변한 실재이다. 완벽하고 영원 불변한 속성을 가진 영은 무한한 사랑과 평화와 기쁨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실재는 영이기 때문에 무한한 기쁨과 평화와 사랑 그 자체라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그러나 에고가 투사하는 실재는 두려움과 불안과 욕망과 결핍 그 자체이다. 이처럼 에고가 인식하는 ‘실재’와 하나님의 지식이 가르치는 ‘실재’는 서로의 반대 쌍이기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이라는 에고의 인식과 평화와 기쁨과 충만함이라는 하나님의 지식은 공존할 수 없으며 서로 어떠한 타협이 가능치 않은 실재에 대한 다른 인식이다.
그러므로 기적수업은 에고는 하나님의 지식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에고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이 사랑과 평화와 충만한 기쁨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고, 반대로 사랑과 평화와 충만한 기쁨이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와 영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는데, 에고는 영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고, 영은 에고의 존재를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이지 어둠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영에게 에고는 단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에고와 하나님의 지식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인간은 그 존재의 도움을 받아서 진정한 실재인 영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수업은 인간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지식인 실재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성삼위 일체인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에고라는 망상이 어떻게 인간에게 실재로 인식되는 지를 알기 때문에 영과 에고 사이에서 중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성령은 에고와 영 사이에 있는 마음의 부분이며, 언제나 영의 편에서 둘 사이를 중재한다. 에고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편파적인 처사이기에 에고는 마치 따돌림을 당하는 듯이 반응한다. 영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진리이니 영은 자신의 충만함을 알며 자신이 제외되는 부분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 136-1)
성령은 너의 진정한 정체가 영이며, 따라서 너의 존재는 실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시말해 너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너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부여받은 강력하고 완벽한 존재임을 알고 있다. 성령은 이 같은 하나님의 지식을 부정하는 모든 다른 생각과 믿음들은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리며,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너 자신의 무한한 권능을 약화시켜 버린다고 가르친다.
“성령만이 너를 의미 있게 지각할 수 있으니, 너의 존재는 하나님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에 대해 네가 받아들인 다른 모든 믿음은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고 따라서 하나님을 너에게 가릴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은 분리되지 않기에, 하나님의 창조물을 참되게 지각하지 않는다면 너는 창조주를 알 수 없다. 창조주와 창조물의 하나님이 너의 전일함이요, 너의 제정신이며, 너의 무한한 권능이다. 무한한 권능은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선물이니, 그것이 너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너의 마음을 이 권능에서 떼어낸다면 너는 자신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의 일부임을 믿지 않기에 그 힘을 약한 것으로 지각한다.” ( 기적수업 P. 129-10)
에고라는 것은 너를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너에게서 거세해 버리기 때문에 너는 스스로를 약하고 무능한 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너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이유로 너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는 너 뿐 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에고의 세상은 이렇게 너와 타인을 무가치하게 보고, 공격하는 것이 전부이기에 에고의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해될 수 없고, 어떤 정당화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에고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망상이며, 단지 망상으로 존재할 뿐이기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 그 자체이다.
“너는 너의 부분이 빠진 하나님의 창조물을 지각했기에 하나님의 창조물은 약해 보이며, 자신을 약해졌다고 보는 자는 공격한다. 하지만 공격할 대상이 없어 그것은 눈먼 공격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가치 없다고 지각하고 무가치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공격한다. 에고의 세상은 이것이 전부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고의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에고의 세상이 이해될 수 있고 따라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에고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정당할 것이다. 하지만 에고의 세상은 정당화될 수 없다. 너는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정신 나간 시도일 뿐이다.” ( 기적수업 P.130-11)
성령과 에고가 각각 알려주는 ‘너 자신의 실재’는 서로 상충하므로 ‘너’는 둘 사이에서 갈등 속에 빠지게 된다. 성령과 에고 사이에서 선택은 실재와 허상 사이의 선택이 된다. 에고를 선택하는 일은 실재를 거부하는 일이 된다. 물론 실재는 결코 사라질 수 없지만, 네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 너는 그 실재를 의식할 수 없게 되므로 너에게서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도 실재는 사라진다고 한다.
“네가 부인하는 것은 너에게 결핍되니, 그것이 네게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서 그것을 부인했기에 네 안에서 그것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131-2)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마음은 실재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나타나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이 에고에 투자하면, 에고가 살아나는 대신 실재는 사라지고, 반대로 성령의 안내를 따르면, 영의 실재가 인식되기 시작한다. 성령과 에고 사이의 선택은 ‘너의 마음’에 달려 있다. 네가 에고의 허상을 몰아내는 유일한 길은 에고의 생각에 쏟은 모든 투자를 회수하는 것이다.
“허상은 투자다. 네가 가치 있게 여기는 한 허상은 지속된다. 가치는 상대적이지만 마음이 내란 판단이기에 강력하다. 허상을 몰아대는 유일한 길은 허상에 쏟은 모든 투자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에서 허상을 몰아냈기에 허상은 네게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마음에 허상을 담고 있는 한 너는 허상에 생명을 주고 있다. 그러나 허상에는 너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 기적수업 p.131- 4)
이처럼 기적수업은 ‘마음’의 힘을 강조한다. ‘마음’은 네가 양자택일에서 무엇을 선택할 지를 결정하는 힘이다. 만약 네가 너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의 힘을 부인한다면 너는 마음이 무력하다고 믿는 것이고, 이는 너 자신을 무력하다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네가 마음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서 실재를 만날 수도 실재를 거부할 수도 있기에 마음의 힘은 강력한 권능을 갖는다. 마음은 인간의 참된 자아로서, 영의 한 부분이다. 에고는 마음을 왜곡되게 잘못 사용한 경우로서, 에고는 스스로 생겨날 수도 지속될 수도 없고, 단지 마음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라 한다.
“거부자체는 힘이 없지만, 너는 무한한 권능을 지닌 마음의 힘을 거부에 쏟을 수 있다. 네가 마음의 힘으로 실재를 부인한다면 실재는 너에게 사라진 것이 된다. <...> 마음은 대단히 강력해서 제외될 수 없다. 너는 결코 너 자신을 너의 생각에서 제외할 수 없다.” ( 기적수업 p.131-1)
마음은 무엇을 생각할 지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마음이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선택하여 생각하는 능력 때문이라 한다. 허상을 만드는 법은 무언가를 선택하여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자신이 만든 허상을 실재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령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기 때문에 허상은 단지 존재하지 않는 망상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성령은 마음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불안과 욕망과 결핍이 만들어내는 갈등 자체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령은 실재만을 진정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 실재는 하나님의 사랑일 뿐이기에, 성령은 사랑만을 실재로 인식한다.
“무엇을 생각할 지 선택하는 너의 능력은 그 힘의 일부다. 네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믿는다면 너는 네 생각이 지닌 힘을 부인했고 따라서 너는 마음이 무력하다고 믿은 것이다.” (기적수업 p.127-2)
“마음은 허상을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허상을 실재라고 믿을 것이니, 그것이 허상을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허상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해제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허상을 전혀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에게 허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은 갈등을 의미없다고 지각함으로써 허상이 일으킨 갈등처럼 보이는 것을 해결한다. 나는 전에 성령은 갈등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지각한다고 했는데, 갈등은 진정 의미가 없다. 성령은 네가 갈등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성령은 갈등은 의미가 없기에 이해될 수 없음을 네가 깨닫기 바란다. 전에 말했듯이 이해하면 가치를 인식하고 가치를 인식하면 사랑하게 된다.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실재가 아니며 따라서 의미가 없기에, 너는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기적수업 p.128-6)
마음은 성령과 에고 가운데서 어느 한 편에 서야 한다. 마음은 성령과 에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둘을 모두 취하려는 타협을 시도한다. 하지만 성령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분명한 거짓이기에 진리와 거짓은 공존할 수 없다. 성령과 에고 사이에서 판단의 기준은 네가 과연 평화를 원하는가 라는 너의 열망이 될 수밖에 없다. 에고는 두려움과 불안과 욕망과 결핍이라는 관념 그 자체이기 때문에 성령의 평화와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 갈등은 네가 성령과 에고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말해줄 뿐이다. 성령과 에고 사이의 완전히 상반된 체계 사이에서 선택은 마음이 결정한다. 성령을 선택하는 일은 사랑과 평화를 구하는 것이므로 제정신을 의미하며 마음이 경계하고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에고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을 놓치 못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제정신이 아니며 잠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고는 너의 마음을 자신의 망상체계로 끌어들이기를 원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네 이해의 빛이 에고를 몰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이 거짓이므로 진리라면 그 어떤 부분도 원치 않는다. 진리가 전체적이라면 거짓은 존재할 수 없다. 너는 어느 쪽이든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마음을 쪼개지 않는 이상 진리와 거짓은 너의 마음에 공존할 수 없다. 만약 네가 평화를 원하고 진리와 거짓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면, 너는 갈등이란 관념을 영원히 완전하게 포기해야 한다. 네가 진실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만 갈등이란 관념을 경계하면 된다. 완전히 상반된 사고체계를 둘 다 진실이라고 믿는 한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 기적수업 p. 129-8)
성령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식은 너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이는 너 스스로를 축복하게 하는 일이다. 에고는 결핍되고 사랑받지 못하며 상처받은 너의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기에 너는 너를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의 지식은 온전하게 사랑받는 완벽한 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에고가 보여준 너에 대한 왜곡된 모습을 단숨에 날려 버린다. 그러므로 기적수업은 하나님의 축복을 너는 이미 가졌기에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은 필요하지 않지만, 너 자신에 대한 너의 축복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식은 너 자신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졌기에 너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필요 없으나, 너 자신의 축복은 절실히 필요하다. 에고가 그린 너의 그림은 결핍되고, 사랑하지 않으며, 상처받기 쉬운 모습이다. 너는 그 그림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너는 그 형상을 뒤로하고 떠남으로써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너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네가 아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그러한 그림을 보지 말라. 그것을 본다면 너는 그것을 자신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성자단에 대한 허상은 한꺼번에 만들어졌듯이 한꺼번에 물리치게 된다.” ( 기적수업 p. 131-3)
에고가 투사를 통해서 인간의 결핍과 고통을 그의 정체성이라고 믿는다면, 영은 투사가 아니라 확장을 통해서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한다고 한다. ‘투사’는 에고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라면, ‘확장’은 영이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충만을 밖으로 넓히는 행위이다. 영은 하나님의 충만과 기쁨과 사랑을 확장하는 역할을 가졌다면, 에고는 영의 확장을 가로막아서 너의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빼앗는 역할을 한다.
“영의 유일한 기능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다. 창조주의 충만을 억누를 수 없듯이 영의 충만도 억누를 길이 없다. 충만은 확장이다. 에고의 전체 사고체계가 확장을 가로막고, 따라서 너의 유일한 기능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에고는 너의 기쁨을 가로막아 너는 자신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지각한다.” ( 기적수업 p.136-3)
하나님 영이시고, 하나님의 영은 우주에 충만하고, 그 충만은 계속 확장되고, 그 확장을 창조라고 한다. 인간의 자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확장된 영으로서,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분신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영’은 너의 본질이며, 너의 실재이고, 이는 하나님의 소유인 ‘하나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와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본래의 정체성이며, 이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듯 인간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과 하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자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인간을 예표한다.
영은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확장한다. 영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이며,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확장하는 존재이다. 반면에 에고는 단지 너의 마음이 잘못 만들어낸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관념이고, 이에 대한 믿음이다. 따라서 에고는 너의 왜곡된 믿음이며, 정체성의 혼란이다.
“에고는 너의 믿음이기에 에고의 생존은 너의 마음에 달려 있다. 에고는 정체성 혼란이다. 결코 일관된 모범을 따른 적이 없는 에고는 일관되게 발달되지 않았다. 에고란 자신의 힘을 오용한 왜곡된 마음들이 하나님의 법을 잘못 적용해서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적수업 p.135-4)
인간의 마음은 생명이고 투사나 확장은 마음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은 투사하거나 확장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확장이라는 법을 통해 너를 창조하셨기에 너의 확장은 사랑과 풍요와 기쁨을 창조한다. 반면에 인간의 에고는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과 욕망을 투사하기 때문에 분노와 박탈감을 표출한다.
“투사하지 않으면 분노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확장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이다. 투사와 확장은 마음의 기본 법칙을 반영하며, 따라서 항상 작용한다. 너는 그 법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것은 왕국을 통합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간직하는 법칙이다. 에고에게 그 법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지각된다. 성령에게 그것은 확장의 법칙이며, 에고에게 그것은 박탈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적용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풍요나 결핍을 낳는다. 어떻게 적용할지는 네가 선택하지만 그 법칙의 사용여부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마음은 투사하거나 확장할 수밖에 없으니, 마음은 생명이고 투사나 확장은 마음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134-1)
기적수업은 지속적으로 에고가 행하는 마음의 투사를 해제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에고는 네 마음이 에고를 포기해서 너 자신을 에고로부터 해방하지 못하도록 갈등의 해결책을 자신이 줄 수 있다고 설득하나 그것은 갈등의 해결책이 아니라, 갈등을 지속시키는 책략들 뿐이라 한다. 에고는 너의 갈등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서 네가 그 문제를 제거할 수 있거나, 제거했다고 설득시킨다. 이는 단지 문제를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너의 갈등을 보존하여 너의 에고를 유지시키는 책략이라 한다.
“투사와 분노의 불가피한 연관성이 마침내 해제되려면, 먼저 에고가 어떻게 투사를 이용하는지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에고는 언제나 갈등을 보존하려고 한다. 에고는 갈등을 줄이는 듯한 매우 영리한 방법을 고안해낸다. 에고는 네가 갈등을 견딜 수 없다고 느껴 갈등을 포기하겠다고 나서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에고를 포기해서 너 자신을 해방하지 못하도록 에고는 자신이 너를 갈등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고 설득한다. 하나님의 법을 제 맘대로 왜곡해서 이용하는 에고는 마음의 힘을 오직 마음의 진정한 목적을 좌절시키는 데 이용한다. 에고는 너의 마음에 있는 갈등을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투사해서 네가 문제를 제거했다고 설득하려 한다.” ( 기적수업 p.134-2)
따라서 에고를 내려 놓는 방법은 모든 갈등을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나의 탓으로 돌리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에고의 투사를 실재로 믿음으로써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을 실재로 믿었던 마음을 바꾸라는 것이다. 에고는 두려움과 불안과 결핍을 실재로 믿게 함으로써 너 자신과 타인을 향해 분노와 공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오류의 근원은 에고라는 잘못된 관념 또는 왜곡된 마음에 있다는 것이 기적수업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그러한 분노와 공격의 마음이 생겨나면, 그것들은 너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거나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하지 말고, 성령에게 넘겨 해제시키라고 한다. 성령에게 넘긴다는 것은 판단을 중지하고, 모든 문제를 성령이 해결할 것임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에고를 두려워 말라. 에고는 너의 마음에 달려 있다. 너는 에고를 실재라고 믿음으로써 에고를 만들었듯이 그 믿음을 철회함으로써 에고를 물리칠 수 있다. 에고에 대한 너의 믿음을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투사하지 말라. 너의 믿음을 투사하면 너는 그 믿음을 보존하게 된다. 에고의 존속을 오직 너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용의를 낼 때, 너는 모든 분노와 공격을 내려 놓을 것이다. 분노와 공격은 오류의 책임을 투사하려 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오류를 너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면 간직하지 말고 재빨리 성령에게 넘겨 완전히 해제되게 하라. 그러면 그 모든 결과는 너의 마음과 성자단에서 한꺼번에 사라질 것이다.” ( 기적수업 p.135-5)
기적수업은 이 수업의 유일한 목적은 에고는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서, 네가 에고에서 벗어나가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에고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관념이기에, 너를 하나님의 왕국으로부터 분리 시켜버리고 하나님과 전일한 관계 안에 있는 너의 참된 정체를 잊어 버리게 한다. 기적수업에서 속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전일한 너의 참된 정체성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너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다.
“이 수업의 유일한 목적은 에고는 믿기지 않는 것이며 영원히 믿기지 않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써 에고를 만든 너는 이 판단을 혼자 내릴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임으로써 너는 혼자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반대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리하여 분리관념을 몰아내며 왕국 전체가 문자 그대로 너의 부분이라는 너의 참된 정체를 확언한다. 이 정체는 믿음을 넘어서기에 의심을 넘어선다. 존재는 무한하므로 너의 전일함은 한계가 없다.” ( 기적수업 p.135-7 )
기적수업에서 기적이 갖고 있는 의미가 마침내 7장에서 드러난다. 기적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너의 전일한 정체성을 확신하는 일이다. 기적은 너의 정체성을 통해서 너로 하여금 너와 하나님과 창조물이 함께 공유하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의 확장이 하나님과 너와 형제의 전일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따라서 기적은 하나님 사랑의 무한한 확장을 확신하는 일이다.
“너는 너의 정체성을 결코 상실하지 않았고, 그것을 전일하고 평화롭게 유지하는 확장들도 결코 상실하지 않았음을 확신하라. 기적은 이 확신의 표현이다. 기적은 네가 형제들과 같고 확장을 통해 너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기적은 전체를 지각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너는 너의 가르침에 전체의 어느 일부라도 포함함으로써 전체를 포함한 것이다.” ( 기적수업 p. 137-7)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산다는 것은, 은총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내어준 것은 은총이 지배하는 실재세계로, 다시 말해 기적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만약 인간이 이 은총과 기적의 세계를 벗어난다면 그는 모든 것에서 힘들고 두려울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든 환경에서는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킬 수도 없고, 그 환경을 자신에 맞게 변형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행복하고, 그곳이 힘겹게 느끼지 않을 유일한 환경이 된다. 기적수업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여기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영의 정체성을 깨달은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원래 상태는 은총의 상태이다. 그가 만일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그는 자신의 타고난 환경을 벗어났기에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만든 환경에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기에 하는 일마다 힘겹게 느껴진다. 그는 스스로 환경에 적응할 수도, 환경을 자신에게 맞춰 조정할 수도 없다. 그런 노력은 헛수고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알 때만 행복하다. 그는 그곳에 속하므로 그것이 그가 힘겹게 느끼지 않을 유일한 환경이다. 또한 그것이 그에게 걸맞은 유일한 환경이니, 그의 가치는 그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 기적수업 p.140-2)
기적수업은 인간은 전일성, 은총상태, 기적, 영의 정체성과 같은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너 자신을 오랫동안 훈련시켜 왔고, 이는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은총, 기적, 전일성, 영의 정체성은 즉각적이고 명료하고 자연스런 인식이기에 이 보다 더 쉬운 인식은 없다고 한다. 반면에 에고는 오랜 시간을 통해 세뇌 당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으면서 생겨났고 습득된 것이기에 매우 힘든 배움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적수업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배우고 믿은 에고의 관념과 훈련을 버리도록 이끈다.
“진리만큼 인식하기 쉬운 것도 없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명료하고 자연스런 인식이다. 너는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 왔고, 그것은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 기적수업 p.141-5)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므로 너의 본성을 거스르고, 너를 약하게 하고, 너를 두려워하게 하고, 너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이 세상은 너의 에고가 투사해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적수업은 가르친다. 성령은 하나님의 지식을 대변하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지식은 네가 살도록 만들어진 너의 환경이기에 너에게 가장 쉽고 유일하게 쉬운 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은총의 법이며, 기적의 법이기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너의 타고난 상태에서 너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지식이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 안에서 어떠한 난이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자연스럽고 쉽고 기쁜 세계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라고 하나님의 지식은 가르쳐 준다.
출처 : 기적수업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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