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비밀의 가르침 17: 인과응보의 법칙 본문
Chapter 17: 인과응보의 법칙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자신의 악한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씨앗을 심은
셈이 되어 그 결과 죽음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좋은 것을 심는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실망도 포기도 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면 복을 거두어 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
‘카르마’. 일명 인과응보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용어는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운과 불운을 단순히 카르마의 좋고 나쁨으로써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성스러운 법칙 이면에 있는 위대한 지혜를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그 이유는 아마
동방이 지녀온 카르마에 대한 제한되고 운명론적인 시각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르마란 인과응보의 법칙을 구성하는 영적 원소이다. 이 법칙은 단순한
상과 벌의 개념 정도로 이해되어선 안된다. 과학자들이 최근 수세기동안
배워왔고, 신비가들이 항상 알고 있어왔듯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이면에는 반드시 원인이 존재하고, 모든 원인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수반한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그에 상응하는 질의 진동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단절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성향이 있으며, 이러한 단절계적 측면으로써 인과
응보의 법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이 법칙이 마치 상과 벌의 법칙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떠한 심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란 단절계(물질계, 심령계, 이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은 그 나라 백성들에게는 은인이지만, 이웃나라 백성들에게는 적이자 악당이다. 선과 악이란 인간의 관점에 의해 만들어진 상대적 개념이다. 단절계보다 높은 차원인 실재계(원형계, 원리계)에는 선과 악이 없다. 다스칼로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예를 든 적이 있다. “기괴하게 생긴 짐승이 우리의 아이들을 잡아 죽여서 불에 구워 먹는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악마!
하지만 인간이 동물들에게 하는 행위를 보십시오. 악마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정말로 악마입니까? 어려운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온 생애를 헌신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정말로 악마인가요?” 만약 그들이 짐승고기를 먹는다면 그들은 천사일까, 악마일까?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선량한 천사요, 동물들에게는 극악무도한 악마일 것이다. 그러나, 신에게 있어서 이들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모두 완성을 향해, 진리를 향해가는 고귀한
영혼들이다. 그 과정에서의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 경험, 인상들은 좋고 나쁨을 초월하여 진리를 깨달아 성숙하고 완성되기 위한 재료이자 과정인 것이다. – 역자주)
카르마는 현재인격에게 작용한다. 하지만 영구인격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사실,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현재인격을 관리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영구인격이다. 영구인격은 현재인격이 적절한 경험을 수집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 생에 그가 살아갈 환경과 장소, 그리고 겪게 될 기쁨과 슬픔을 결정한다.
이 위대한 법칙의 주인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인 것이다. 이 법칙은 영구인격과 수호대천사가 지니고 있는 본성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옳고 그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위로를 받는 것은 다 그 때문입니다.’(로마서 2:15)
우리의 현재인격은 개구쟁이와 같아서 정기적으로 우리의 영구인격과 수호대천사에 의해서 따끔하게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린다. 수호대천사는 영구인격에 비하여 처벌에 있어서 관대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회초리는 때때로 매우 따끔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잘못한 만큼의 정당한 댓가이며, 궁극적으로 현재인격이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이다.
절대영원성의 전적지혜로써 탄생된 모든 대천사들은 청순함과 조화로움을 가득 머금고 있다. 그 중 수호대천사는 그가 함께 할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물질체, 심령체, 이지체, 원형의 설계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절계를 살아가면서 종종 그 이상형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육신을 수호대천사가 지니고 있는 이상적인 설계도의 모습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영적 진화이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성스러운 계획에 따라서 우리의 영적 진보의 과정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카르마의 법칙은 우리의 의식을 더욱 성숙시켜서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없어서는 안될
사랑의 손길이다.
괴로움, 질병을 비롯한 현생의 모든 열악한 환경들은 우리가 이생, 또는
전생들로부터 짊어온 빚의 결과물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해로운 에너지들을 정화하고 부정적 에너지의 생산량을 줄이며 우리의 내면을 선량하고 정교한 사념체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생각과 행동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제까지 지녀온 과거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고 참다운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카르마적 결과물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들보다 더욱 위대한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니고 있는 그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쇠사슬을 끊고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기회, 신성한 초질료 마음이 주어졌다. 우리가 부정적 에너지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낸다면, 훗날 그들과 부딪혀야만 한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마태복음 26:52)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카르마의 밭을 경작해 나간다. 이 밭의 수확물들은 진아와 인격 사이에 벌어진 격차, 진실과 환상 사이의 거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 인간의 카르마란 곧 그가 지니고 있는 의식의 질이다. 우리가 오늘날 지니고 있는 기호, 사상, 가치관, 경향, 생각, 행동, 품격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카르마적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한다. 질병, 혼란, 비운은 우리 인격 내의 부조화로부터 비롯되며, 이들은 현재의 자신과 진리,
사랑, 지혜 사이에 발생하는 격차를 나타내는 지표인 것이다.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선천적, 후천적 불행들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찰,
환상, 그릇된 사고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 속에서 직면하는 역경들의 강도는 우리가 본래의 조화로움을 회복하기 위하여 배우고 깨달아야 할 교훈의 깊이와 비례한다. 카르마란 우리가 메꾸어
나가야 할 인격과 진아 사이에 벌어진 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법칙은 우리를 고향으로 인도해주는 아버지의 가장 지혜롭고 사랑
가득한 손길인 것이다.
그러나 카르마의 법칙을 결코 과대평가하거나 신봉해선 안된다. 신인께서 가르치셨듯이, 농부가 밭을 한결같이 곧게 뻗어나도록 경장하기 위해선 손에 쟁기를 잡고 오직 앞을 주시해야 하며 도중에 ‘뒤’를 돌아보아선
안된다. (누가복음 9:62) 우리는 삶 속에서 댓가를 지불하며, 또는 받으며 매 순간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배우고 깨달아나간다. 그 속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댓가는 신의 성스러운 자비에 의해서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진다. 사도 바울이 말하였듯이,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15:1)라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예수께서는 진정 인류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써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짊어지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하는 누군가가 무거운 카르마의
짐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돕기 위해 기꺼이 그의 카르마를 나누어 함께 짊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카르마의 법칙조차 초월하는 신의 성스러운 자비이며, 이 또한 성스러운 계획의 일부이다. 이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강조하는 다른 종교나 진리탐구단은 그리 많지 않다.
카르마를 단순한 신의 심판이나 벌로써 받아들여선 안된다. 이는 곧 무한한 절대영원성을 낮은 차원 속 우리의 나약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과
같다.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란 단순히 ‘작용’이란 뜻이다. 이는 마치 중력의 법칙과 같이 카르마는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과도 같다.
하늘로 던져 올린 돌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인과응보의 법칙은 절대지성의 일부이자 절대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
[출처] 비밀의 가르침 17: 인과응보의 법칙|작성자 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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