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비밀의 가르침 18: 내면을 향하여 본문
Chapter 18: 내면을 향하여
내면을 탐구하는 훈련은 물질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자의식에 집중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것이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우리의 물질체와 에테르 복체의 다양한 부분에 집중하는 훈련부터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여 인체 내부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세포들을 비롯하여 물질체의 모든 부분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이때부터 우리는 인체에 어떠한 이상이 생기더라도 해당부위에 우리의 의지를 투사하는 것만으로 완전하게 치유할 수 있다. 물론 인과응보의 법칙으로부터 비롯된 카르마적
질병이 아니라면 말이다. (질병은 원인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변 환경이나 본인의 부정적 사념체들에 의하여 발생하는 자연적 질병이고, 다른 하나는 전생의 업보로부터 비롯된 카르마적 질병이다. 전자의
질병은 문제의 부위에 치유의 에테르를 투사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과거의 카르마를 청산하지 않고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다. 후자는 전자보다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더욱 큰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 역주)
더불어 우리는 초물질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눈부신 심령이지적 이미지들을 생성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태까지 우리 인격은 사나운 갈망들과 통제되지 않은 욕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해로운 심령이지적 이미지들을 생성해왔다. 이러한 자신의 과거 경험들을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그 동안 자신의 내면세계와 사념체들을 얼마나 서투르고 잘못되게
관리해왔는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아름답고 완전하다. 창조주에 의해 탄생된
모든 만물, 특히 살아숨쉬는 생명체들은 놀랄 만큼 경이롭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왜곡된 관점으로 해석하려 하며 그것들이 자신의 소유라고 착각한다. 집착은 인간을
길을 잃게 하고 방황하게 만든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자산이며, 어떻게 하여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지 배워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 모든 것을 빚어낸 질료인 에테르 생명력에 대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은 크나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심령질, 이지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진아를 되찾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한다. 이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자기정화와 내적 성장을 향한 간절함은 더욱 지극해진다. 이는 곧 영혼이 장차 입게 될 눈부신 의복의 재료를 한 올씩 모아가는 과정이다. 이 옷은 영혼이 ‘주님의 앞’ (사도행전 3:19)에 서기 위해 입게 될 ‘혼인 예복’ (마태복음 22:11)이다.
우리의 자기계발은 단순한 이론적 지식에서 그쳐서는 안되며, 꾸준하고
인내있는 수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수련은 다양한 차원의 세계 속에서 함께 병행해나가야 한다 .
이지계와 심령계는 서로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지닌다. 우리는 종종 ‘심령이지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세계를 서로 분리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령계와 이지계는 모두 표현된 원형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심령이지계를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계의 시공간의 구조와 판이하게 다르다. 이지계는
생각들이 일어나는 차원이고 심령계는 감정들이 일어나는 차원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왜 이지계와 심령계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 결여된 생각, 또는 생각이 결여된 감정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세계를 종종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물질계는 절대영원성의 절대지혜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질계를 이루는 모든 물질입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심령이지질이 있다. 우리는 수련을 통하여 이러한 심령이지질을 다루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인간은 ‘아버지의 아들’이자 우주의 공동창조자로써, 마음빛을 사용하여
심령이지적 이미지들을 형성하여 심령계 속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이미지들을 물질계 속에 물질로써 형상화할 수 있으며, 그 형태 또한 다양하게 빚어낼 수 있다 (물현 - 역주).
이것이 바로 절대적 초지성을 지니신 만유의 아버지께서 마음을 사용하여 다차원 우주를 빚어내신 원리이다. 인간은 아들로써 ‘그분의 일’
(요한복음 4:34)을 관찰하며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배워나가야 한다.
아버지가 물질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들 자신의 물질체를
창조한다. 그 설계도는 물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다.
우리는 가장 먼저 동적에테르와 인상에테르를 사용하는 심령이지적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물질체를 감싸는 에테르 복체의 특정한 부위에 의식을 집중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감정에테르를 모아라. 곧 그
부위 안에서부터 인체 밖까지 에테르로 가득 찬 느낌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의지력으로써 동적에테르를 사용하여 에테르 복체의 다른
부위로 집중점을 옮길 수 있다. 처음에는 에테르들이 집중점을 주위로
하여 동그랗게 운집되며, 훈련을 거듭할수록 그 원의 운집 영역은 더욱
확장되어서 나중에는 그 영역이 물질체의 에테르 복체 전체를 가득 메우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에테르 복체 속의 모든 에테르의 흐름을 느낌만으로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게 되며, 육신 전체가 매우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장미 한 송이를 예로 들어보자. 그 장미가 지니는 모양, 크기, 형태, 색깔 등의 특성을 유심히 관찰하라. 장미를 한 손에 쥐고 꽃의 외관적 세부사항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외워라. 이제, 눈을 감고 인상에테르를 이용하여 반대쪽 손 위에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을 한 장미의 심령이지적 이미지를 연상하라.
동적에테르를 투사하여 장미의 이미지를 이리 저리 돌리며 움직여 보라.
이미지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집중하라. 일정한 양의
강한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는 한 심령이지적 움직임의 느낌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의 시각적 영상과 움직임을 유지한 채로 감각에테르를 가미하여 장미의 이미지 속에 투사해보라. 그러면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며, 살랑거리는 꽃자루가 손가락 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붉은 장미 대신에 똑같은 모양과 크기를 가진 하얀 장미를 연상해
보라. 장미의 기존의 특성들을 똑같이 유지한 채 색깔만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하얀 장미를 꺼내와서 그 중 색깔만 취하여 전에 생성했던 장미의 이미지에게 이를 적용시켜라. 그러면 우리의 손에는 순백색의 장미가 놓여있을 것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이번에는 색깔만 그대로 유지한 채로 다른 종류의
꽃으로 바꿀 수도 있다. 가령, 흰 장미 대신 흰 카네이션으로 말이다.
의지력을 강력하게 집중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은 잠시 제껴두고, 오직 우리가 원하는 소망만 취하라.
선택된 소망을 난폭한 환상들과 비교하여 둘의 차이를 느낀 후, 신중한
사고를 통하여 조화로운 이미지들을 생성해내라.
내면을 탐구하는 훈련 또한 이와 같은 원리이다. 사용하는 에테르의 종류만 다를 뿐,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해 나간다. 인체의 다양한 부위,
또는 잠재의식 속에 집중을 하여 그곳에 어질러져 있는 심령이지적 찌꺼기들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고, 복체의 특정부위에 저장되어 있는 에테르
에너지를 끌어다가 쓸 수도 있다.
우리가 내면을 탐구하는 가장 주된 목적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함이며, 그리하여 자신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이론적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우리는 영혼이다. 영혼이란 무엇일까? 고통과 갈망의 짐에 허덕이는 우리의 물질체 이면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다. 우리는 그 동안 단순한 물질적 쾌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어리석음과 우를 범하여 왔는가. 이제는 우리가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다. 우리가 이제껏 저질러온 실수들에 대한 카르마의 빚은 엄연히 값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결코 두려움이나 열등감을 갖지 말고 이 모든 것을 밝고 행복하게 받아들여라. 완성을 향해가는 소중한 과정으로써.
영혼은 성원소로부터 발산된 한 줄기 빛이 인간 이데아를 통과함으로써
탄생되었다. 사실, 진리탐구자인 우리들에게 조차도 이 개념은 체험적이라기보단 이론적 이해에 가깝다. 우리의 목표는 선각자들에 의해서 탐구되어온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만의 탐구와 체험으로 이어나감으로써 진리를 향한 자신의 고유한 이상을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마치 의사들이 인체를 탐구하기 위해서 해부학에 대한 기초 지식과 다양한 장기들의 기능에 대하여 끊임없이 연구하듯이, 진리탐구자인 우리는
자신이 영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기 위하여 진실한 노력과 정성을
들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무언가가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에 대한 믿음을 재촉하여선 안된다. 대신 그것을 하나의 탐구분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이란 그 대상에 대하여 하나씩 알아가며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우리의 선조들께서도 ‘너 자신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다스칼로스가 살고 있는 싸이프러스는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의 문물적, 문화적 영향을 받아온 이웃나라이다. - 역주)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하여 태연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이미 물질체 너머의 사후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사도 도마는
예수의 손에서 ‘못자국’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선 그를 꾸짖으시는 대신 그에게
손의 못자국을 직접 보여주시며 만져서 확인하도록 하셨다
(요한복음 20:25-27).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신비가들은 모든 시대를 걸쳐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를 얻는 법을 가르쳐왔으며,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 중 한 분이시다.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63) 이 말씀은 물질의 존재성 자체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물질계는 애초부터 성스러운 계획의 청사진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다만,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말씀이며, 해로운 동물령들의 유혹을 조심하도록 경고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화적 인물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는 성스러운 실재이다(요한복음 1:9). 그는 인간으로 화현하셔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지혜가 무엇인지 말씀으로써, 그리고 행동으로써 가르쳐주셨다. 우리의 진아는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위에 다른 옷들을 잔뜩 끼어입고 그 옷들이 자신이라는 그럴듯한
환상 속에 빠져 있다. 하지만, 진아는 여전히 그 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어던지고 그 속에 항상
있어온 참 나에게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진아가 곧 자신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내면의 진아를 되찾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으며, 이를 이루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성령과 함께 우리가 사는 집인 육신을 정화하고 가꾸는 일에 힘써야 한다. 육신은 우리의 집인
동시에 신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대천사들 또한 우리의 육신을 관리하는
일에 동참한다. 이들 모두는 우리가 진아실현을 하는 순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게 기뻐한다. 우리가 진아를 되찾는 것이 곧 그들이
임해온 모든 작업의 궁극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탐구란 우리의 물질적 이미지를 비추는 거울을 깨부수고 그 이면의 우리의 심령적, 이지적 이미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정진하여 이들조차도 초월하는 더욱 근원적인 내면의 ‘나’를 찾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나아가 그것의 진정한 주인이 됨으로써 물질을 본래의 존재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과 자신을 둘러싼 심령이지적 환경을 맑고 투명하게 정화하고, 더 나아가 주변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줌으로써 진정한 천국을 건설해나가게 된다.
내면의 탐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기분석이다.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왜 그때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곰곰이 확실하게 되짚어보며 그 원인을 숨김없이 밝혀내야 한다. 어떠한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난 후 나중에 우리 자신에게 그때 왜 그랬는지 물으면, 우리의 교묘한 현재인격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유창한 변명을 할 것이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1:14) 이때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사색을 하며 그때 그 행동의 진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동안 현재인격은 항의를 멈추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 부정적 생각,
감정, 행동들을 일으켰던 존재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고 가정하라. 이렇게 제 3자의 위치에 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해야
한다.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라. 내가 행한 일이 진실한 목적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현재인격의 가벼운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었는지를.
우리의 인격과 행동을 분석할 때에는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모든
상황을 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현상 이면의 원리를 곰곰이 파헤쳐야 한다. 이러한 탐구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솔직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어렵게 느껴질 테지만, 궁극에는
엄청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반항하는 현재인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는 진아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끊임없이 돕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들 대부분은 잠재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 끝에 언젠간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단계가 온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옳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능숙해지며, 비로소 ‘의지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옳은 생각을 하는 훈련을 계속 해나가면 어느 순간 난생 처음으로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자아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참 나를 되찾는 진아실현을 성취하는 순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는 나다.’ 진아를 되찾은 이 순간은 단절계 너머의 더욱 위대한 깨달음의 경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초석이 된다.
진아실현을 이루어낸 순간부터 우리는 물질체의 에테르 복체를 비롯한
우리 주위를 둘러싼 환경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영혼에게는 이 모든 권한이 주어진다. 반면, 허약하고 갈망뿐인 현재인격에게는 이러한 권한이 없다. 우리는 자기분석을 함으로써 진리에 바탕을 둔 사고와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며, 그로부터 얻게 되는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우리의 내면은 수많은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있는 잡탕과 같다. 이를 정리
정돈하고 질서정연하게 다스리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하다. 각각의 갈망들이 지니는 강도를 정확히 측정하여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불필요한 일시적 갈망들을 잠재움으로써
자신이 더욱 위대한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기반을 다져나가게 된다.
갈망이란 심령이지질로 구성된 사념체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시공계 속을 살아가는 동안 사념체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받는다. 우리가 이 사념체들에게 동조하면 할수록
이들은 더 많은 심령이지질을 모아가며 전보다 더욱 강렬해진다. 이같은
과정은 그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된다. 반면, 우리가 갈망이 아닌 진리에 바탕을 둔 사고를 한다면 이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무시해버릴 수 있다. 우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처음엔 사념체들도 몇 번 계속해서
반복하여 시도하지만, 매번 그들의 힘은 조금씩 약해지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자연스럽게 내면의 진아를 반영하는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애시당초 초기에 품은 갈망이 사념체화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한번 생성된 사념체는 해체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노력이 들어가게 된다.
(반면, 사념체를 좋은 방법으로 사용한다면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소원을 품고 그 소원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면, 그에 따른 사념체가 생성되고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발산된 사념체는 심령이지공간을 떠다니며 우리가 품은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심령이지환경을 조성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념체는 우리에게 돌아와서 에너지를 충전한 후 다시 한번 발산된다. 우리가 소원에 마음을 집중할수록 해당사념체는 더욱 강력해진다. 이 사념체의 존재목적은 주인이 품은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념체는
성장을 계속하며 심령이지환경을 조성하는 작업을 무한히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한 소원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 진실인 것이다. - 역주)
현재인격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선천적 주특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내면의 영혼을 향한 경외심을 놓지 말며 그를 통하여 현재인격의 통제와 감독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시작은 가까운 주변을 밝히는 조그마한 횃불과 같다. 하지만 그 불은 점점 커지게 되며, 우리는 서서히 내면과 주위환경을 다스릴 수 있는 심령이지적 주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서 불가능하게 여기던 일들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심령이지적 능력들을 얻게 된다. 가령 다른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지고, 아무 힘 들이지 않고 그가 거짓말하는지 순식간에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능력들을 다른 이들의 인격의 성장에 부당하게 개입
하고 방해하는 일에 사용하여선 안된다. 그러한 능력은 지닐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행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더욱 더 경계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큰 힘을 얻을수록 그만큼 유혹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샛길로 빠지지 않고 오직 곧은
진리의 길만을 걸어가겠다는 굳은 신념을 지녀야 한다.
인격이 영혼을 향하여 스스로를 확장해나갈수록 영혼의 손길은 인격에게 더욱 가까이 닿게 되며, 서로는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현재인격의 진리적 사고 이면에는 항상 진아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여기까지의 설명이 수도법에 대한 대략적 개요이다. 더 깊은 세부사항들을 다루려면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해진다. 사람들의 인생은 제각각이고
그들이 진리를 바라보는 안목 또한 영적 성숙도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렇기에 참된 스승은 절대로 모든 제자들에게 획일적인 수련법을 내려주지 않는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들을 현재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분류하여 그룹짓고, 개개인에게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내려준다.
내면을 탐구하는 수련을 해나갈수록 수면하는 동안의 무의식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물질체가 잠자고 있는 동안 의식적 유체이탈을 하여 영혼으로써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언젠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심령계를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의식을 초자의식의 경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면, 물질계에서 특정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에도 다른 멀리
떨어져 있는 수많은 장소들 속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그곳들로부터 다양한 인상을 수집하거나, 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울 수 있다.
평범한 인간이 지닐 수 없는 초월적인 힘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초자의식을 지닌 상태에서는 물질체를 지니고 현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면서도(강의를 한다고 예를 들어보자) 그 일을 하는 데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수마일 밖의 다른 존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두 가지 다른 상황을 마치 하나의 상황 속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 같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현재인격이 영구인격의 지도 하에 이루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그가 생각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성스러운 선물을 받은 만큼 그에 걸맞는 존재가 되도록 이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공계 속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 곰곰이 사색해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욕망과 본능이 현재의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무질서로 가득한 그 광란의 도가니를 고요하고 평화로움이 흘러넘치는 눈부신 낙원으로 전환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이러한 기적을 이루어내는 순간 현재인격은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천지창조에 있어서 얼마나 큰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그리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갚진 선물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스러운 능력을 헛된 갈망, 애착, 욕망 따위를 만들어내느라 그 동안 얼마나 무분별하게 사용해왔는지 자중해야 한다. 그리고 시공계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격을 지혜와 사랑을 통하여 내면의 진아,
영혼에게 동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사명이다.
내면의 탐구가 깊어짐에 따라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그 중심에는 나 자신이 아니라 절대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사랑, 그것은 만유 생명을 낳아 길러내는 근원이자, 만물이 지향해가는 목적지이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보다 우월한 관점에 서서 내려본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의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자세로써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주고 그를 치료해주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라.
진리탐구자로써 우리는 제자이자 스승이다. 현재인격이자 영구인격인 것이다. 우리의 궁극 목표는 이 둘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진리적 사고와 명상을 통하여 우리가 아직까지 지녀온 제한된 사랑, 개인적 욕구를 향한 사랑을 무제한적인 사랑, 초월적 사랑, 우주적인 사랑, 불멸의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할지어다. 그리하면 그대의 ‘죽을 수밖에 없는 땅 위의 몸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 (고린도전서 15:53)이 되리라.
[출처] 비밀의 가르침 18: 내면을 향하여|작성자 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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