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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믿음에 들어간이의 悟道頌(오도송=깬 노래) 유영모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믿음에 들어간이의 悟道頌(오도송=깬 노래) 유영모

柏道 2020. 1. 13. 05:32


믿음에 들어간이의 悟道頌(오도송=깬 노래)

 


허당010ㅡ4327ㅡ2481

2013. 11. 17. 8:04

 

1.無憂於我(무우어아) 나는 시름 없다네

 

2.自今無憂(자금무우) 이제부턴 시름 없다네

 

3.任占領我(님점령아) 님이 나를 차지했네

 

4.任保管我(님보관아) 님이 나를 맡으셨네

 

5.任所有我(님소유아) 님이 나를 가지셨네

 

6.身面皆棄(신면개기) 몸도 낯도 다버렸네

 

7.死前何爲(사전하위) 죽기전에 뭘 할까도

 

8.他言何爲(타언하위) 남의 말을 어쩔까도

 

9.皆去無望(개거무망) 다 보내고 아무 바램도 없네

 

10.復生之身(부생지신) 새로 삶의 몸으로는

 

11.彼言陪承(피언배승) 저 말씀 모셔잇고

 

12.復生之面(부생지면) 새로 삶의 낯으로는

 

13.顯此宇宙(현차우주) 이 우주가 드러나고

 

14.諸行線終(제행선종) 모든 행함 줄그어 마치니

 

15.列萬有物質(렬만유물질) 만유물질 늘어섰네

 

16.探世無我於表(탐세무아어표) 온세상을 뒤져봐도 거죽에는 나 없구나

 

17.位無而成脫我(위무이성탈아) 나를 벗어 자리 없음 이뤄

 

18.言有生命(언유생명) 말씀가운데 생명 있어

 

19.對任之面(대님지면) 님을대한 낯으로요

 

20.言體之光(언체지광) 말씀 체한 빛이로세

 

21.任視之面(님시지면) 님 뵈옵잔 낯이요

 

22.言讀之身(언독지신) 말씀 읽잔 몸이라

 

23.踐愛之面(천애지면) 사랑하실 낯이요

 

24.捧志之身(봉지지신) 뜻받들 몸이러라

 

 

 

 

이 悟道頌(오도송)은 1931년 1월 10일자 聖書朝鮮(성서조선)이라는 雜誌(잡지)에 실린 多夕(다석) 柳永模(유영모)님이 41세때에 첫 깨달음에 이르러 쓰신 글이다. 원문은 다석님이 한글로 쓰셨는데 畏濫(외람)되게도 拙人(졸인)이 漢譯(한역)을 해본 것이다.

 

多夕柳永模(다석유영모)님은 그 當時(당시) 우리나라 다섯 天才(천재)라 불리웠던 六堂(육당) 崔南善(최남선).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 爲堂(위당) 鄭寅普(정인보). 외솔 崔鉉培(최현배)님과 더불어 다섯 천재중의 한분이셨고 특히 최남선과 이광수 함석헌이 존경하며 정신적 스승으로 섬기던 사람이었다.

 

多夕(다석)님은 15세에 기독교를 접하시어 23세까지 儀式(의식)과 形式(형식)만 있고 하나님의 참진리가 없으심을 알고 制度圈(제도권)교회를 다니시다가 홀로 깨달으신 바가 있어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시고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섬기시며 홀로 무소의 뿔처럼 하나님 찾기에 勇猛精進(용맹정진)하셔서 거룩한 깨달음을 이루시고 말씀 하시길

 

예수. 석가에게 나타났던 永遠(영원)한 生命(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이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을 超越(초월)하여 存在(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라고 하셨다.

 

다석님이 남기신 것은 오로지 漢文詩(한문시) 일천삼백수에 우리말 시조 일천 칠백수가 씌어있는 多夕日誌(다석일지)가 전부이다.

 

이 일지는 1955년 4월에서 1974년까지 기록하신 일기이다.

 

人類有史以來(인류유사이래)로 傳(전)해져 내려온 東西洋(동서양)의 모든 古典(고전)을 다 훑어 꿰뚫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懇切(간절)한 求道一念(구도일념)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석가 붓다님의 깨달음이나 예수님의 깨달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로 같은 것이라 하셨다.

 

특히 그중에서도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고 스승님으로 생각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붓다를 신으로 섬기는 것은 사람들이 저들 욕심으로 잘못 믿고 참진리를 몰라서 사람인 예수와 석가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지 예수님과 붓다님도 肉身(육신)인 몸사람으로는 우리처럼 밥먹고 똥누고 살다가 죽었던 사람이었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 깨달음을 완성하신 분들로 하늘나라에 드신분들이므로 우리도 그들을 스승님으로 섬기고 생명바쳐 진리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제도권 종교의 가르침이 예수님과 붓다님의 참진리인 알짬 核心(핵심)은 없고 모양과 형식에 기울어져 겉껍데기만 있지 참교회도 참불당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셨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붓다님의 참진리의말씀이 사람의 욕심에 분탕질이되고 병들어 엉망진창이 되버렸다는 것이다.

 

같은 종교가 파가 갈리고 갈갈이 찢어져 수많은 종파로 갈리고 자기들끼리도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고 나팔을 불어대며 대가리가 터지도록 싸우는 것도 다 저들 욕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알려고 하기때문이고 하나님을 기대서 국물이라도 더많이 얻어먹겠다는 허튼 수작이라고 하셨다.

 

꼭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씀 하신 것은 아니지만 다석님의 말씀 알짬이 이렇다는 말이다.

 

다석님은 기존의 종교단체나 개인의 믿음생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시거나 헐뜯거나 하신 일은 아예 없으셨지만 님의 말씀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걸 알아듣는다는 것을 이렇게 말해보는 것이라 하겠다.

 

성경말씀 로마서 8장 5절에서 6절 말씀에 있기를

 

『肉(육)으로 난 것은 肉(육)이요 聖靈(성령)으로 난 것은 靈(영)이니

 

肉身(육신)을 좇는자는 肉身(육신)의 일을 靈(영)을 좇는 자는 靈(영)의 일을 생각 하나니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잘 알면 다석님의 말씀이 알아진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육신이 다시 復活(부활)하여 휴거가 되고 무슨 천년왕국이 온다느니 하는 잠꼬대같은 소릴 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다 육신에 붙은 몸욕심으로 잘못 알아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생하는 것은 우리의 영이지 육신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알아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절서 8절 말씀에 있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참뜻은 하나님을 꼭 만나고자 목숨을 걸고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라는 形以上(형이상)의 진리의 말씀인데

 

이것을 모르고 몸살림에 필요한 썩을 물질이나 부귀나 명예나 無病長壽(무병장수)같은 肉身(육신)의 썩어 문드러질 몸뚱아리 살림에 要緊(요긴)한 것을 찾으라는 形以下(형이하)의 소리로 알아들으니 가르치는이나 듣는이나 한가지로 장님이라는 것이다. 장님이 장님을 따라가면 뻔한 것이 아닌가.

 

다석님은 一日 一生(일일일생)이라 하여 40년동안 줄곧 하루 한끼만 드셨다고 한다.

 

석가붓다님은 日中(일중)이라 하여 평생토록 하루 한끼니만 점심때드셨다고 하여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으로 點心(점심)이라고 한다.

 

오늘 지금 하루를 사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고 하루살이가 사람의 인생인데 이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하였다.

 

잘 모르니까 생명준 존재자가 허락하여 살게한 거룩한 뜻을 몰라서 옳고 바르게 살질 못하고 몸나와 마음나에 매이고 묶여 눌려 죽으면 썩어질 몸나가 참나인 줄 알고 깜빡 속아 살다보니 시원하게 살질 못하고 쫓기고 눌려서 산다고 했다.

 

사람은 한사람 속에 크게는 두사람이 존재 하는데

 

그 하나는 참나이고

 

그 둘은 거짓나이다.

 

사람은 한사람 속에 세사람이 존재 하는데

 

그 하나가 靈我(영아=얼나=참나)이고

 

그 둘이 肉我(육아=몸나)이고

 

그 셋은 心我(심아=마음나)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靈我(영아)는 하나님의 永遠(영원)하신 참생명인 하나님 성령의 씨알 성품이 內在(내재)된 참나이고

 

몸나와 마음나는 짐승마음과 다름없는 거짓의 나라는 말이다.

 

物質(물질)을 우리말 고유어로는 몬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육신도 흙으로 빚어진 물질이라서 우리 몸뚱이가 한글자로는 몬인 것이다.

 

얼의 마음은 全知全能(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성품의 씨알 성품이라서 거룩하고 淸精(청정)하고 純粹無垢(순수무구)하고 完全(완전)하며 無欲無望(무욕무망)하여 스스로 그러한 마음이라 변함이 없는 남도 죽음도 없는 永生(영생)하는 얼나의 마음이고

 

몬마음은 물질에 뿌리가 박힌 마음이라서 자기 몸뚱이 욕심을 充足(충족)시키고자 血眼(혈안)이 되어 貪.瞋.癡(탐.진.치) 三毒心(삼독심)의 猛烈(맹렬)한 불길로 늘 불타오르는 미쳐 날뛰는 짐승같은 마음인 것이다.

 

몬마음으로만 본다면 사람은 짐승가운데서도 가장 더럽고 殘忍(잔인)하고 卑劣(비열)하고 恥拙(치졸)한 짐승임이 분명하다

 

얼맘으로 본다면 사람은 다 하나님과 하나로 같다 할 수 있다.

 

얼맘에 하나님의 씨앗성품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짐승으로 한평생 더럽게 살다가 끝내버릴 것인지

 

하나님이 넣어 주신 하나님의 씨알성품을 存心養性(존심양성)으로 고이 보존하고 나날이 잘 키워서 온전히 다자라 하나님 아들에 이르기까지 키워서 참사람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로 인침을 받아 하늘사람이되어 영생의 삶을 살것인지

 

이건 다 사람 個個人(개개인)의自由意志(자유의지)에 걸어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宿題(숙제)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걸어둔 이 숙제를 제대로 푸신이들이 석가붓다요 예수요 공자요 맹자요 노자요 장자요 톨스토이요 에크하르트요 간디요 데이빗소로우요 다석 유영모님이다

 

다석님의 말씀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이 거짓나를 참나로 깜빡 속아서 다 하나같이 예수님 말씀도 붓다님 말씀도 몸에 걸리고 마음에 걸려 거꾸로 알아 듣는다고 했다.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바로 이 참나를 말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 참나를 거듭난 나 (그리스어로 메타노에아의 나)라 하셨고

 

붓다님은 滅我(멸아)라 하였고

 

노자님은 無我(무아)라 하였고

 

장자님은 忘我(망아)라고 하였다.

 

서로 다르게 말씀 하셨지만 뜻은 하나로 같은 말씀이다.

 

붓다님 말씀에 있기를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己(생멸멸기)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 하여

 

인생사 모든 짓거리 늘함없어 시시각각 쉼없이 변함이 번갈아드니 이것은 다 나고 죽는 진리라 나고 죽는 나를 죽여 니르바나(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기뻐하리라 하였고

 

苦集滅道(고집멸도)라 하여 괴로움과 煩惱(번뇌)로 덩어리진 몸나와 마음나를 죽여야 참의 진리로 확 뚫린다는 四聖諦(사성제)를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의 요지가 거짓나인 몸나와 마음나를 죽여야만 寂滅(적멸=니르바나)에 들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일뿐이다.

 

성경말씀 마태복음 16장 24절과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에 있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否認(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 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돌아가신 사건이 사람들의 죄를 代贖(대속=대신갚음)하시고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예수님이 다 짊어 지시고 돌아가신 것이니 내 죄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걸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우리의 지은 모든 죄가 다 赦(사)해지고 救援(구원)받아 우리도 죽어서도 꼭 復活(부활)昇天(승천)한다고 헛소릴 한 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祭物(제물)로 짐승을 죽이고 그피로 치뤄졌던 犧牲(희생) 祭祀(제사)에 그루터기를 둔 사도 바울의 궤변일뿐이고 예수님의 뜻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다들 이걸 모르고 깜빡 속고 있는 것이다.

 

자기 몸 욕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속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멸망의 길인 넓은문으로 가든지 생명의길인 좁은문으로 가든지 선택권을 사람의 자유 의지에 맡기신 것이지 강제성을 요구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져야 할 십자가를 주셨는데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처럼 사람도 저마다 자기 십자가에 다 대못을 쾅쾅박아 나라고 내세우는 自我(자아)를 죽여야 참생명인 영생의 생명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진리가 숨겨져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父母(부모)로부터 받아나온 살덩어리의 이 몸뚱이 거죽 껍데기 나와

 

세상을 다 깔고앉아도 성에 차질않는 貪慾心(탐욕심)의 불덩어리인 이 마음나는 참나가 아니고 거짓나로 이 몸나와 마음나의 묶이고 매인 自我(자아==ego

 

가 십자가에 못박고 온전히 죽여야 할 십자가라는 것이다.

 

이 걸 사람들이 못알아 듣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빌붙어 덕을 보겠다는 믿음이 있고

 

작은 부분이나마 그 것을 내가 생명을 다 불태워서라도 반드시 짊어지겠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의 몸나와 마음나인 거짓나는 몸이 죽으면 그 것으로 다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 몸나와 마음나가 참나가 아니고 거짓나라서 그런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거짓나가 자기가 뭘 좀 안다고 나팔부는 것들이 다 虛空(허공)에다 그림을 그린답시고 물감을 칠하려고 덤비는 것같이 虛妄(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고 사람의 지식과 지혜가 하잘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나로 사는 동안은 그걸 모르고 그 잘난 앎으로 깐죽거리며 是是非非(시시비비)를 따지고 한갖 물거품같은 그 잘난 재물로 거들먹거리며 그 잘난 권력으로 남을 짓뭉개고 그 잘난 명예나부귀를 등짝에 업고 거짓나를 하늘처럼 믿고 으시대며 고개 빳빳이 쳐들고 하나님 말씀을 칼질하고 붓다님 말씀을 잘근잘근 씹어 자기 생각의 잣대 눈금으로 찢어 발기고 傲漫(오만)과 驕漫(교만)에 醉(취)해 죽으면 썩어질 몸뚱이가 참나고 현실의 내존재이고 참의 나이지 무슨 말라 비틀어진 개뼉다귀같은 헛소리를 하느냐며 너같은 작자들이야말로 似以非(사이비)고 異端(이단)이고 夢想(몽상)가고 허깨비같은 놈들이라고 氣勢登登(기세등등)하게 마구 삿대질을 해대는게 보통이다.

 

거짓나를 참나로 알고 사는 사람들은 사람은 붓다가 될 수 없고 예수가 될 수 없다고 아예 잘라서 토막을 내버린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늘나라에 들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見性成佛(견성성불)이라 하여 참나를 찾아 보기만 하면 바로 붓다를 이룬다는 붓다님의 말씀도 이들은 못알아 듣는 것이다.

 

그게 자기만의 몸에붙은 욕심과 저잘났다는 교만감때문에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거짓나인 몸나와 마음나에 붙은 생각을 말끔히 벗어버리면 바로 참나가 시원하게 드러날텐데 그 뒤집어쓴 거짓나에 미련이 쩌들어붙은 때처럼 눌어붙어 있어서 그것이 안되는 것이다

 

禪宗祖(선종조) 三祖(삼조)이신 僧璨大師(승찬대사)님의 信心銘(신심명)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에 있기를

 

至道無難 唯嫌揀擇(지도무난 유혐간택)이라 하여

 

참나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미주알 고주알 그 잘난 거짓나의 생각의 잣대로 온갖 경계를 짓고 꾀랍시고 내서 잔머리 굴리는 것만 싫어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생각만 뒤집으면 바로 되는 것인데 그게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14절 말씀에 있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滅亡(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길이 險(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하였다.

 

여기서 좁은 문이란 참나인 얼나로 사는 靈性(영성)의 삶을 말하고

 

넓은 문이란 자아인 몸나와 마음나의 貪慾心(탐욕심)으로 사는 짐승같은 肉身所欲(육신소욕)의 삶을 譬喩(비유)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에 있기를

 

『悔改(회개)하라 天國(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다.

 

이게 금방 천국이 온다는 말처럼 들으면 잘못 알아듣는 것이다.

 

이말씀의 뜻은

 

성령으로 거듭나라

 

몸나와 마음나인 거짓나의 껍데기를 훌러덩 말끔히 벗어던지고 몸과 마음의 욕심에 취해 꿈꾸듯 살아오던 그 꿈속에서 펄떡 깨어나라

 

너가 애써 찾던 하늘나라가 너 아닌 다른 어느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너 속에 있다는 말이다 .

 

회개하라고 옮긴 그리스어 메타노에오는 메타 + 노에오의 合成語(합성어)인데

 

메타는 (...을 떠나 생각한다)는 말이고

 

노에오는 (깨닫는다) 라는 뜻으로서

 

(....를 떠나 생각하여 깨닫다라)는 뜻이 메타노에오인데 이걸 우리말 성경에선 회개한다로 옮긴 것이다.

 

悔改(회개)란 뉘우칠 悔(회)자에 고칠改(개)자이니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 아닌가

 

메타노에오는

 

지금까지의 판을 송두리채 뒤집어 엎고 새판을 짜야 된다는말인 것에 비기면 좀 모자라는듯한 옮김이지만 뉘우치고 고치는 것도 딱 한번으로 끝낸다면 뭐라고 할 말은 없다하겠다.

 

거짓나인 自我(자아)의 탐욕심에 부림을 받아 몸과 마음에 종질하며 살던 삶이 온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채고

 

이 잘못된 생각을 훌훌히 털어버리고 속알성품의 본래의 나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성령의 씨알이 들어와 있는 얼의나가 참나이고 그 참나가 내 속에 있음을 알아 깨닫고 찾으라는 것이 메타노에오의 참뜻이라 하겠다.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예수님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거듭나라는 말은 완전히 새사람으로 다시 나라는 말인데 니고데모가 이말을 못알아듣고 다 큰 어른이 어찌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어쩌구하는 허튼 소리를 한 것이 아닌가.

 

정신이 깨어서 몸나와 마음나에 갇혀있던 거짓 껍데기를 빨리 확 벗어던지라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나 그것은 참의 나가 아니고 참나를 가리우고 있는 휘장막과 같은 겉껍데기라는 것이다. 참나가 있는 곳이 성전이고 성소인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실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막이 아래로 확 찢어진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깨닫다라는 말은 깬다는 말이다.

 

깬다는 잠이 깬다는 말도 되고

 

陶公(도공)이 구워낸 질그릇이 잘못 나와 마음에 안들때 던져서 깨부수는데 그때의 깨부순다는 뜻도 되고

 

병아리가 알껍질 속에서 자기 생명이 다 자라면 알껍질을 깨트리고 나오듯이 그때 알껍질을 깨트린다는 말도 된다

 

이게 다 무슨 말이가 하면 스스로 자각하여 지금까지의 현실을 다 깨부수고 다시 깨어난다는 말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새롭게 거듭난다는 말이다.

 

참인 줄 알고 鐵石(철석)같이 믿고 생각하며 나라고 내세우며 살았던 몸나와 마음나가 한갖 거죽의 껍데기요 거푸집이요 참나의 그림자임을 알아채고 그 것이 내 참나가 아니고 거짓나란 것을 깨닫고 그 것을 박살을 내어 깨부수고 참나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몸나도 버리고 마음나도 버릴때 참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알속에 생명이 다 영글어 익으면 알껍질을 깨고 새생명이 나오듯이 우리 사람도 자신의 속알 생명을 키우고 또 키우고 漸漸(점점) 키워서 종당은 자아의 껍질을 탁 깨트리고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석가붓다와 예수님이 별개 아니고 바로 헛된 인생이란 顚倒夢想(전도몽상)한 꿈에서 이렇게 알뜰히도 싹 깨트리고 깨어나신 분일뿐이지 더 무엇이 아니다.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祖師(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비록 붓다라해도 거기에 얽매이지를 말고 예수님이라 해도 거기에 매이질 말고 스스로 自覺(자각)하여 자기 자신의 참나를 찾고자 무소의 뿔처럼 勇猛精進(용맹정진)을 하여 홀로 우뚝 서라는 말이 아닌가

 

깨닫는다는 것은 일말의 未練(미련)도 없이 몽땅 통채로 다 엎어버리고 깨부수어 산산조각을 내고 새롭게 거듭난다는 말이다.

 

석가붓다님이나 老子(노자)님이나 莊子(장자)님이나 예수님이나 孔子(공자)님이나 孟子(맹자)님이나 이천몇백년전에 살았던 이분들이 진리를 찾아가는 求道(구도)의길라잡이도 오늘날에 넘쳐나는 情報(정)보의 바다에 비기면 거의 없다시피한 그런 時代(시대)였음에도 이런 聖人(성인)들이 나타나신 걸 생각한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나는 절대로 안돼 하고 머리 흔들어 젖힐일인지 한번쯤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할일이고 참으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聖職者(성직자)는 佛敎(불교)든 基督敎(가독교)든 카톨릭이던 조금 말라 보이는 것이 보기에 좋고 聖殿(성전)도 허름하고 아담해 보이는것이 더 서민적으로 다가와서좋게 보여진다고들 말한다.

 

몸살이는 띠룩띠룩 번들 번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데

 

정신은 다들 바짝 쪼그라붙어 말라 비틀어졌는지 정치판도 저들이 국민의 머슴이라고 입나팔은 잘도 불면서 오로지 저들 욕심에 눈알이 시뻘개져선 깽판에 싸움판으로 殺氣(살기)가 등등하고

 

종교판도 썩어빠졌는지 진리를 등짝에 업고선 입으로는 거룩한척 진리의 냄새를 풍기는척 하면서 무슨 뒷주머니라도 차기라도 했는지 모조리 하나같이뭘그리 잘먹었는지 볼때기는 늘어지도록 살이 올랐고 턱은 또 이중 심중 턱에돼지처럼 살은 왜 그리 띠룩띠룩들 찐것인지

 

썩어 문드러질 그살뭉테기 찌우느라 순진한 어린 양같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속았을 것이며

 

교회 건물 짓기 겨루기라도 붙었는지

 

교인 숫자키우기 경쟁이라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헌금 딴데로 샐까봐서 어찌관리 하는 것인지 종교계에서 비자금이란 말이 다 나오고 멀리 이사가버린 어린양 하나라도 다른 곳에 뺏길까봐 노심초사하는 건지 아들놈한테 수십억씩이나 비자금으로 물려주질 않나 목자 자리도 자기 아들한테 대물림하느라 쌈박질이 안나나

 

이렇게들 썩어빠진 정신에 진리는 무슨 진리설파가 되겠는가 말이다.

 

다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처음마음을 잃어버리면 세상에선 커지는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망해가는 일이고 썩어가는 일임을 알아야한다

 

정치가 왜 썩고 시끄러운가

 

머슴이 뺏지달고나니 엄청 컸다는 것이고 다들저만 잘났다는 것땜에 그런 것이고.

 

종교계가 왜 그런가

 

이것도 한교회에 교인 숫자가 너무 많고 財政(재정)이 넘쳐나서 그런것이다

 

그러면 교인이 적은 이웃교회로 재정도 많이 도와주고 교인도 좀 보내주면 될텐데 그런 것은 죽어도 안한다

 

政治人(정치인)도 宗敎人(종교인)도 企業家(기업가)도 公務員(공무원)도 다들 겉모양은 번쩍번쩍한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는지 썩은내가 이나라 이땅에 온통 振動(진동)을하니 어찌 백성들이 마음 편할 것인가

 

이게 다 利己心(이기심)과 貪慾心(탐욕심)에 종이 되고

 

돈맛에 눌려 돈의 종이되고 權力(권력)맛에 눌려 권력에 종질하고

 

體面(체면)에 눌려 체면에 종질하느라 다들 얼이 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참나를 찾으신 이들인 聖人(성인)들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성령으로 하나로 뚫리셨으니 이들의 말씀이 곧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의 참나에게 속삭여주신 말씀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인들의 말씀은 사람의 限定(한정)된 보잘것없는 智慧(지혜)와 앎과 머리로서는 아무리 分析(분석)하고 생각하고 파헤치고 비교하고 서로 따지고 니가 옳네 내가 옳네 하면서 티각태각해도 시원하고 바르게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줄곧 뚫린 사람에게만 저절로 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서로 캐묻고 무슨 말씀 무슨장 몇장 몇절하며 따질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속의 속알을 바닥이 훤하게 드러날때까지 파고 들어가는 생명을 다 걸고 하는기도의 길밖에 달리 무슨 방법이 없다 하겠다.

 

말씀은 참나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라잡이이지 말씀에 붙잡혀도 안되고 석가붓다님에 매여도 안되고 예수님에게 매여도 안된다 .

 

참나를 찾아서 참나의 永遠(영원)한 生命精神(생명정신)으로 우뚝 서는 獨立(독립)이 되면 다 된 것이다.

 

擇善固執(택선고집)과 眞理把持(진리파지)의 한 생각으로 말씀을 고스란히 窮究(궁구)하고 稽考(계고)하여 따라가면 내 속의 속을 환하게 비추이고 있는 참나의 하나님 성품씨알의 빛을 만나 窮極(궁극)의 깨달음을 이루어내는 것이고 이것이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의 宿題(숙제)가 사람을 이 세상에서 한번 살게하신 하나님의 참뜻임을 알게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세상에 한번 살도록 하신 뜻이 딱한번 사는 그 人生(인생)삶의 시간동안 하나님이 숨겨 넣어두신 참나를 찾아 영생의 생명으로 하나님나라에 함께 동참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되라는 하나님의 隱密(은밀)하신 숨은 秘意(비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성경말씀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에 있기를

 

『天國(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寶貨(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發見(발견)한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所有(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하신 譬喩(비유)의 말씀이 있다.

 

사람의 마음밭에 하나님의 씨알 성품인 참나(하나님)가 본디 태어날때부터 숨겨져 있다는 말씀이 다.

 

이걸 사람들이 못알아 듣는 것이다.

 

참나를 찾으면 다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한 것이니 생명처럼 아끼고 벌벌떨며 아둥바둥했던 이제껏의 모든 것은 다 허접한 것들이었음을 알아챈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 놓아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거짓나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참을 깨닫기 전에는 거짓것이 거짓인 줄을 모르고 그 걸 참인 줄만 안다.

 

偶像(우상)이 따로 없다.

 

거짓을 참으로 알고 그 거짓에 종질하는 것이 바로 偶像(우상)이지

 

더 무엇인가

 

그러니까 영적인 귀가 열리질 않아 같은 말씀을 보면서도 몸에붙은 생각으로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

 

무엇에도 매이질 말아야한다.

 

매인다는 것은 묶이고 拘束(구속)되어 自由(자유)함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 것에도 털끝만큼도 얽매이질 말아야한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내려 놓아야한다.

 

마음을 내려 놓는다 함은 몸나와 마음나인 利己心(이기심)과 執着心(집착심)으로 慾心(욕심)의 불덩어리가 된 自我(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다.

 

나라고 내세우던 自我(자아)가 온전히 죽어버리면 모든 매임은 저절로 다 풀어져버리는 것이다.

 

매어 있는 동안은 자아에 끌려다니므로

 

늘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헛된 慾望(욕망)에 눌려 한瞬間(순간)도 참된 자유함이 없는 것이다.

 

죽여야 할 것은 自我心(자아심)이고

 

살려야 할 것은 얼나심이다.

 

이 걸 가르친게 예수님이고 석가붓다님이다.

 

그런데 이 걸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모르는 것같다.

 

죽고 망해야 될 自我(자아)가 자기라며 그 자아심에 붙잡혀 몸뚱이가 바라고 원하는데로 그 시킴을따라 몸뚱이 비위 맞추며 몸뚱이 욕심에 빌붙어 종살이 하다 主人(주인) 한번 못되어 보고 한평생을 내몸뚱이 남몸뚱일 파먹다가 마지막 몸뚱이 숨을 거두는게 뭇 衆生(중생)들이다.

 

죽은 물고기는 물살에 실려 떠내려가고

 

살은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制度圈(제도권)의 으리번쩍하는 宗敎(종교) 建物(건물)을 들락거리며 저들만 옳은 믿음의 사람들임을 자처하여 종교건물 바깥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며 전도한답시고 들 하지만

 

傳道(전도)하고 宣敎(선교)하기에 앞서 자신이 바른 믿음에 서있는가를 반드시 살펴야하고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자기가 먼저 온전한 빛이 되어야 한다.

 

내가 빛이되면 주변의 영적 어둠에 갇힌 그 어둠이 저절로 걷히는 것이다.

 

저들 믿는다는 사람들의 속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가 盲信的(맹신적)이고 저들 몸삶을 위한 욕심을 쫓는 허풍선이 믿음이고 大槪(대개)가 祈福避災(기복피재=몸뚱이의 복을 구하고 몸살이의 재앙을 피함)의 샤머니즘적 信仰(신앙)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몸욕심으로 믿는 믿음이 偶像崇拜(우상숭배)의 신앙과 무엇이 다르다 할 것인가.

 

비록 예수님이라 해도 참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에게도 매이질 않는다.

 

하나님은 그냥 믿는다는 모양이나 형식으로 끝내자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과 내리 하나로 뚫려서 통하고 종당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이시다.

 

하나님과 뚫리려면 하나님과 이어져 있는 그 참나를 찾는 것이 곧 修道(수도)가 아닌가

 

修道(수도)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생각을 자꾸 하는 것이다.

 

자기 속으로 속으로 하나님과 잇대어놓고 생각을 파들어가는 冥想(명상)이요 參禪(참선)이요 祈禱(기도)이다.

 

祈禱(기도)가 다른게 아니고 하나님과 이어져 하나로 뚫리고 通(통)하고자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이다.

 

뭘 자꾸 몸살림을 위하여 달라고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끝도없이 달라고만 하며 떼쓰는 것은 저들의 몸욕심으로 하는 더러운 욕심의 기도이지 이런건 참 기도가 아닐 것이다.

 

몸욕심으로 쫓아가는 하나님은 저만의 욕심일뿐 그것은 滅亡(멸망)으로 내달리는 헛짓거리요

 

맘욕심으로 매달리는 하나님은 허수아비의 몸부림일뿐 그것은 死亡(사망)의 那落(나락)으로 떨어지는 광대짓거리일뿐

 

몸나와 마음나는 한갖 일었다가 꺼져버리는 물거품같음을 알아

 

속알 깊은 靈魂(영혼)에 심기운 하나님의 씨알심으로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하나님 받듦 삶이 성령이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마태복음 6장 32절서 34절 말씀에 있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義(의) 를 求(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허시리라

 

그러므로 來日(내일)일을 위하여 念慮(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念慮(염려) 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足(족)하니라.』하셨다.

 

기도를 한답시고 重言附言(중언부언=한말을 하고 또하고)) 橫說竪說(횡설수설=말에 條理(조리)가 없이 뒤죽박죽으로 長慌<장황>하게 巧言令色<교언영색>의 말을 함)) 하지를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義(의)를 구하라 하였다.

 

하루살이의 目的(목적)이요 平生(평생)살이의 출발점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옳으심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생명인 얼의 나인 참나를 찾아 그 얼뜻데로 사는 것이 참살이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밤에 잠 잘자고 아침에 눈이 떠지면 맨 먼저 할 일이 죽었던 잠에서 깨어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感謝(감사)드리는 마음을 먼저 아뢰고 허락하신 오늘도 하나님의 뜻데로 살겠습니다 하고 하루를 出發(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은 오늘뿐이다

 

오늘을 넘어야 내일이 내날이 될수 있다.

 

내가 사는 것은 오늘의 지금 여기지 어제도 아니고 내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에 내 모든 것을 하나님 뜻으로 불태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온전히 죽고 하나님만이 내 속에 사는 그런 하루가 되어微微(미미)하나마 남에게 어둠이 되질 않고 빛이되는 하루로 살아야 할 것이다.

 

 

禪宗祖(선종조) 六祖(육조)이신 一字無識(일자무식)의 나뭇꾼이던 慧能(혜능)스님이 五祖(오조) 弘忍(홍인) 祖師(조사)로부터 法通(법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決定的(결정적) 契機(계기)가 된 悟道頌(오도송)에서 혜능스님이 깨달은 참나를 잠깐 살펴보면

 

弘忍祖師(홍인조사)가 자신의 法通(법통)을 이을 다음 조사를 指目(지목)하고자 境內(경내)의 모든 제자 스님들에게 揭頌(개송)을 지어 佛堂壁(불당벽)에다 써붙이라 했는데 自薦他薦(자천타천)으로 다음은 의당 자기라고 마음 속으로 꼬누고 있던 神秀(신수)스님이 揭頌(개송)을 써붙이길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莫使有塵埃(막사유진애)라고 써붙였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끼질 않게 하라는 말이다.

 

모든 스님들이 이 게송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신수 스님이야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으니 다음 조사자리는 신수 스님이구먼 하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절에 들어온지 겨우 여덟달밖에 안된 慧能(혜능) 행자가 지나치다 이 게송을 보았는데 一字無識(일자무식)의 까막눈이라 무슨뜻인질 몰라서 곁에 있던 스님에게 물은즉 그 스님이 안타깝다는 듯이 힐끗 보고서는 그 뜻을 일러주었다.

 

그걸 다 듣고난 혜능은 속으로 혼잣말하길 덜깨달은 게송이로군 했다.

 

그리고선 글을 몰라서 그러니 제가 말하는 것을 글로 저 벽에다 써 주실수 있느냐고 부탁을 드렸더니 곁에 있던 스님이 대신 받아 쓴 게송이 이러하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無臺(명경역무대) 佛性常淸淨(불성상청정) 何處有塵埃(하처유진애)라 하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神秀(신수) 스님의 게송을 완전히 까뒤집어 놓은 것이다.

 

뜻인즉

 

깨달음에는 본디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엔 또한 받침대가 없고

 

불성은 본디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끼일 것인가이다.

 

 

神秀(신수) 스님은 아직까지 거짓나인 몸나와 마음나인 자아에 붙잡혀 있어서 몸이 깨달음의 나무라는둥 마음이 맑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다는둥 그래서 마음의때를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가 안끼게 해야한다며 修道者(수도자)의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慧能(혜능)은 무슨소릴 하느냐

 

깨달음에 무슨 실체가 있느냐 마음이 본디 空(공)한 것인데 마음에 무슨 나무니 받침대같은 소릴 하느냐 깨달음의 성품인 불성은 본디 완전하고 깨끗한 것인데 털고말고 할 것이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낀다는 허튼 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 혜능 행자의 揭頌(게송)이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몸나와 마음나가 우리의 참나가 아니라는 말을 이렇게 하신 것이다.그래서 몸나와 마음나에 붙어 미련이 남아있는 신수스님의 게송은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이다. 이러고서는 小覺(소각)은 몰라도 無上正覺(무상정각)은 틀렸다는 말이다.

 

깨달음의 흉내는 낼 수 있을진 몰라도 깨달음은 아니라는 말이다.

 

 

五祖弘忍(오조홍인) 스님이 두 게송을 보신후 신수 스님에게 말씀 하시기를

 

게송은 참 그럴듯한데 문지방 앞에까진 왔는데 아직 문지방을 넘지는 못했구나. 다시 문지방을 넘는 게송을 가져오면 너에게 法脈(법맥)을 넘기리라 하였고

 

아무도 몰래 혜능을 불러서 말하길

 

너에게 내 法通(법통)을 넘길 것이니 너는 지금 이절을 떠나 멀리 도망하여 몸을피해야 한다. 다른 스님들이 이일을 알면 반드시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니 내가 주는 증표를 가지고 속히 이밤안으로 멀리 떠나서 7년동안 숨어 있어야 한다.하고 그 밤으로 혜능을 떠나 보냈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신수스님 과 많은 스님들이 그를 죽이고자 뒤쫓았으나 찾아내질 못했고 그로부터 15년후에 당당히 六祖宗祖(육조종조)로 座定(좌정)하셨다고 한다.

 

慧能祖師(혜능조사)님의 六祖壇經(육조단경)은 붓다님의 말씀과도 같으며 성경말씀과도 다름이 없는 말씀이라 하겠다.

 

慧能大師(혜능대사)님은 사람의 마음을 두마음으로 보셨는데

 

그 한마음을 直心(직심=곧은마음)이라 하셨고

 

또 한마음을 曲心(곡심=굽은마음)이라 하셨다

 

直心(직심)을 直指人心(직지인심) 또는 本來面目心(본래면목심) 自淨心(자정심) 淸精心(청정심) 自性(자성)이라고도 하셨는데

 

이 말은 사람이 날때에 본디 신으로부터 받아나온 신의성품 마음이라는 말을 이렇게 나타내신 말이다.

 

曲心(곡심)을 邪心(사심=사악한 마음) 魔心(마심=마구니의 마음)이라고도 하셨는데

 

이 건 몸뚱이에 열린문인 眼(안=눈) 耳(이=귀) 鼻(비=코) 舌(설=혀) 身(신=몸) 意(의=생각)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되는 色(색=빛깔과 모양) 聲(성=소리) 香(향=냄새) 味(미=맛) 觸(촉=닿음과 부빔) 法(법=삼라만물)에 迷惑(미혹)하여 일어나는 몸뚱이의 본능적인 또 한마음이라고 하셨다.

 

世壽(세수) 76歲로 入寂(입적)하시며 마지막으로 남기신 揭頌(게송) 머릿 부분을 보자

 

1.眞如淨性是眞佛(진여정성시진불) 2.邪見三毒是眞魔(사견삼독시진마)

 

3.邪見之人魔在舍(사견지인마재사) 4.正見之人佛卽過(정견지인불즉과)

 

5.性衆邪見三毒生(성중사견삼독생) 6.卽是魔王來住舍(즉시마왕래주사)

 

7.正見忽則三毒心(정견홀칙삼독심) 8.魔變成佛眞無假(마변성불진무가)

 

 

1.眞如淨性(진여정성)은 참으로 깨끗한 성품 마음이라는 말이고 是眞佛(시진불)은 이것이 참붓다다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이가 하면

 

참나가 바로 붓다라는 말을 이렇게 하신 것이다.

 

 

2.邪見三毒(사견삼독)은 삼독심인 貪.瞋.癡(탐.진.치)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으로 사악한 견해에 붙잡히면 이라는 말이고 是眞魔(시진마)란 이것이 진짜 마구니다라는 말인데

 

이걸 간단히 말하면

 

거짓나인 몸나와 마음나에 붙잡혀 살면 마구니가 딴게 아니고 이것이 바로 마구니의 삶이다라는 말이다

 

 

3.邪見之人(사견지인)은 삿된 견해로 사는 사람은이고 魔在舍(마재사)는 마구니가 사는집이라는 말이다.

 

해서 거짓나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사람이 사는게 아니라 자기속에 마구니가 살고 있어서 그 마귀의 시킴데로 사는 마귀의 삶이라는 말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4,正見之人(정견지인)은 바른 견해로 사는 사람은이고 佛卽過(불즉과)는 붓다를 넘어섰다는 말이다.

 

해서

 

참나로 사는 사람은 붓다를 넘어선 사람이다라고 참나를 강조하는 말이다

 

 

5.性衆邪見三毒生(성중사견삼독생)은 본성이 뭇 사악한 견해로 물들면 저절로 삼독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다.

 

몸나와 마음나인 거짓나에 사로잡히면 삼독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6.卽是魔王住舍(즉시마왕주사)란 곧 이것이 마귀의 왕이 들어와 머물러 사는 집이라는 말이다.

 

거짓나를 참나로 알고 살면 바로 그것이 내 속에 마구니가 사는 것이지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7.正見忽則三毒心(정견홀칙삼독심)은 바른견해로 삼독의 마음을 홀연히 다스린다면이다. 정견이 곧 참나의 성품인데 바로 참나의 성품으로 삼독심을

 

홀연히 이긴다면 이라는 말이다.

 

 

8.魔變成佛眞無假(마변성불진무가)는 마귀가 변하여 참붓다를 이룬다는 말이다.

 

거짓나가 멸하고나면 참나가 드러나는데 그 참나가 바로 붓다인 깨달음의 主人公(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참나를 깨달은 이는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肉(육)은 썩어 없어질 것이고 잠시 번쩍 보였다가 없어지는 것이니 쓸모가 없고 靈(영)은 영원한 생명을살리는 것이라 하시어서 聖靈(성령)으로 거듭나라 하셨고

 

석가붓다님은 生滅滅己寂滅爲樂(생멸멸기적멸위락)이라 하여

 

나고 죽는 나를 죽여 니르바나(하늘나라)에 들어 기뻐하리라 하였고

 

 

老子(노자)님은 谷神不死(곡신불사) 孔德之容(공덕지용) 惟道是從(유도시종)이라 하여

 

谷神(곡신=하나님=얼의 참나)은 죽지않는다. 뚫린 속나(참나)의 모습으로 오로지 道(도=진리=하나님)를 쫓아갈뿐이라 하였고

 

 

莊子(장자)님은

 

懸解而指窮於爲薪火傳也(현해이지궁어위신화전야)라 하여

 

매어달린데서 풀려나 뜻다해 궁구하고 하나님의 땔감이되어 불씨를 전하리라 하였고

 

 

孔子(공자)님은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 知我者 其天乎 (지아자기천호)라 하여

 

하느님이 내게 속알(참나)을 낳으셨고.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나님뿐이라 하였다.

 

 

孟子(맹자)님은 盡其心者知其性也 知其性즉知天矣(진기심자지기성야지기성즉지천의)라 하여

 

그마음을 다하는자는 그 바탈을 알고 그 바탈마음(참나)을 알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간디는 자신의 명상록에서 말하길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버림으로서만이 참나인 얼나를 깨닫는다라 하였고

 

 

헨리데이빗 소로우는

 

단지 먹고 사는 일에 내 인생을 송두리채 바쳐서 살고싶지는 않다

 

나는 얽매임이 없는 영원한 영적 자유를 갈망 할뿐이다라고 하였고

 

 

다석님은

 

나의 至誠(지성)스런 힘씀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져서 참나를 깨닫는데 이르렀다라고 하시면서

 

거죽 껍데기인 몸나로는 석가붓다와 예수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얼의나로는 붓다님이나 예수님이나 다 하나로 같은 참나로서는 다르질않다 하셨다.

 

 

톨스토이는 동물로서의 사람은 苦難(고난)과 苦痛(고통)으로해서 망하는게 아니고 그 苦惱(고뇌)와 고통의 어려움으로 因(인)하여 참사람이 완성된다 하였다.

 

오늘 날의 佛敎(불교)와 基督敎(기독교)는 석가붓다와 예수님의 참가르침인 진리는 변질되고 歪曲(왜곡)되어 그 겉모양만 남아있고 사람들의 慾心(욕심)으로 가리워지고 병이들어 외형적인 성전 건물만 비대해지고 교인 숫자만 불어났지 붓다님의 참가르침과 예수님의 처음 가르침의 진리가 사람들의 욕심의 祭物(제물) 이 되어 어둠의 장막 뒷켠으로 밀려나버린게 현실 종교의 참모습이라 할 것이다.

 

旣存(기존)의 制度圈(제도권)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正通信仰(정통신앙)이라는 말은 좀 웃기는 말일 수도 있다.

 

정통이면 구태여 正通(정통)이니 異端(이단)이니 하며 舌戰(설전)을 벌리며 나팔을 불일이 없고

 

정통이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것인데 정통이라고 강조하고 差別化(차별화)한다는 것은 정통이라는 개념의 쇠사슬에 얽매여 병적으로 저들이 매어있다는 것이 아닌가

 

정통이니 이단이니 어쩌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아니라도 너무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가 의심스럽다 할 것이다

 

 

【聖靈(성령)으로 거듭나라】.【서로 사랑하라】. 【謙遜(겸손)하라】.【자기 자신을 부정하라】. 【惡(악)을 善(선)으로 갚으라】

 

이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核心(핵심)의 알짬이다.

 

 

석가붓다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眞理(진리)의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必要(필요)한 말씀이 아니고

 

不必要(불필요)한 말씀이다.

 

석가붓다님이 임금자리를 버리고 王宮(왕궁)을 떠나 苦行修道(고행수도)의 길로 出宮(출궁)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진리의 말씀을 세상살이에서 자기 몸뚱아리 삶에다가 자꾸 써먹을려고 하니 믿음이 참믿음으로 바로서질 못하고 祈福信仰(기복신앙)과 巫俗信仰(무속신앙)인 샤머니즘으로 빠져버려 하나님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헛껍데기 믿음임을 모르면서도 저들은 그래도 자신의 믿음만이 온전한 믿음이라며 나팔을 불어대는 것은 성도 개인이나 종교집단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겠다.

 

진리의 말씀은

 

몸으로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몸에붙은 생각이 온전히 죽어야만 그 말씀이 풀어지고 알아지는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성인들의 하나같은 가르침임을 알아듣는 영적 귀가 열려야 할 것이다.

 

 

이제 多夕(다석)님의 詩(시)를 살펴보면

 

1에서2까지의

 

【나는 시름 없다네

 

이제부턴 시름 없다네】는

 

이제껏 몸나와 마음나가 참나임을 알고 살아왔던 생각에서

 

그 몸나와 마음나가 거짓의 나임을 忽然(홀연)히 깨달아 알고 거짓나의 껍데기를 말끔히 벗어버리니 모든 시름과 걱정이 꿈을 깬 것처럼 한순간에 싹 다 없어졌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 하신 것이다.

 

3에서6까지의

 

【님께서 나를 차지 하셨네

 

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맡으셨네

 

님께서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렸네 】는

 

몸나와 마음나가 나의 참나가 아니고 거짓나임을 알고나니 나의 참나가 오롯이 드러나靈眼(영안)이 열려 하나님이 나를 맡아 주관 하시고 지키시고 온전히 나를 가지셨으니

 

그토록 중하다던 몸도 낯짝도 체면도 저절로 다 버려졌다는 말이다.

 

7에서 9까지의

 

【죽기전에 뭘 할까도

 

남의 말을 어쩔까도

 

다 없어지고 아무 바램도 없다네 】는

 

몸뚱이 삶을두고 어찌 살고 뭘 할 것인지도

 

남이 나를 어찌 생각하고 무슨 말을 할까하고 지금껏 염려하고 눈칠보며 살던 것도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렇게 봐줬으면 하던 그런 바램도 다 없어졌다는 말이다.

 

10에서15까지의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씀 모셔 잇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가 나타나고

 

모든 행함 줄그어 마치니

 

만유물질 늘어섰다 】는

 

참나를 깨달아 알고나니 거듭난 새삶이되어 하나님 말씀 삶이

 

사람 삶의 참목적이요 참가치임을 알아 말씀 모셔 사는 삶에 이 몸뚱이나와 마음나를 불쏘시게로 불태우는 삶을 살겠다는 말이고

 

내 몸과 내마음에만 몰입되어 나만 나만 하며 살던 것이 그 생각을 벗어버리고나니 우주만유의 모든 것이 어느것 하나 나와 다름없이 저마다 다 귀하고 귀하게 생각키운다는 말이다.

 

19에서 24까지의

 

【임을대한 낯으로요

 

말씀 체한 빛이로세

 

임 뵈옵잔 낯이요

 

말씀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오

 

뜻 받들 몸이라】는

 

하나님을 얼굴을 마주대한듯이 섬기는 삶을 살 것이요

 

말씀을 내 몸으로 삼아 빛이되는 삶을 살 것이요

 

오로지 하나님만 뵈올 낯으로만 살 것이요

 

하나님 말씀 읽는 것에만 쓰임받는 몸으로 살 것이요

 

하나님 사랑에만 존재할 낯으로만 살 것이요

 

하나님 뜻 섬겨 행함에만 필요한 몸으로 살 것이라는 말이다.

 

多夕(다석)님은

 

사람은 本能的(본능적)으로 사랑의 대상을 渴求(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의 대상을 찾아 彷徨(방황)하는 存在(존재)라고 말씀하셨다.

 

마음 그릇이 작은 사람은 땅의 것인 자잘하고 시시콜콜한 것들로 滿足(만족)해버린다 하였고

 

마음 그릇이 아주 큰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땅에 두질 않고 永遠絶對(영원절대)인 하나님에게 둔다고 하였다.

 

땅의 것들이란 다 썩을 것들로 돈이나. 財物(재물). 名譽(명예)나 權力(권력).암컷이나 수컷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湖岩(호암) 文一平(문일평)님이 죽자 多夕(다석)님이 쓰신 그 追悼辭(추도사)끝에 詩(시) 한수가 적혀있는데 그 걸 한번 吟味(음미)해보면

 

 

스스로 느낌(一生鮮<일생선>)

 

 

1.한 마리면 몇 토막에 한 토막은 몇 점인가

 

2.하루하루 져며내니 어느덧 끝점 하루

 

3.하루는 죽는 날인데 萬(만)날 수만 여기네

 

 

4.맛 없이도 머리 토막 죅여내어 없이 했고

 

5.세간살이 한답시고 가운데 토막 녹았으니

 

6.님께는 무얼 바치나 꼬릴 잡고 뉘웃네

 

7.국거리는 못되어도 찌게라도 하시려니

 

8,찌게감도 채 못되면 고명에는 씌울거니

 

9.성키만 하올 것이면 님께 돌려보고져

 

 

10.오십 구비를 돌아드니 큰 토막은 다 썼고나

 

11.인간의 도마 위에선 쓸데없는 찌꺼기나

 

12.님께서 벌려주시면 배부르게 5천 사람

 

 

이詩(시)는 사람의 한평생을 생선 한마리에 비유하여 쓰신 글이다.

 

문일평님이 하나님 영접을 채 못하시고 돌아가시니 문일평님을 생선한마리에 비유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쓰신 글이 아닌가 생각하여 여기 옮겨보는 것이다.

 

1.인생 한평생에 굴곡이 몇구비며 그 구비마다 喜怒哀樂(희노애락) 그 얼만가?

 

2.하루하루 산다지만 종당은 죽음쪽으로 걸어가니 어느새 臨終日(임종일)이 오늘일세

 

3.하루를 사는게 아니고 하루는 죽는 날인데 그걸 모르고 마냥 살 것처럼 깜빡속아 살아가네

 

 

4.정신머릴 내던지고 생각없이 얼이빠져 허둥지둥 살다보니

 

5.몸살림 한답시고 몸에매여 살다보니 그새 내몸 다 衰(쇠)했네

 

6.죽음앞에 맞닥뜨려 하나님 언뜻 생각키워 한숨지어 보네마는

 

7.비록 늦었으나마 하나님 날 받아주셔 찌겟거리로라도 써주실런지?

 

8.그 것도 아니되면 고명에라도 써 주실런지

 

9.다시 내몸 성해진다면 님위한 삶 살으련만

 

 

10.오십구비 사는동안 몸은 다 망가졌고

 

11.사람 사는 세간에선 쓸모없는 늙은이네

 

12.님께서 들어 써 주신다면 五餠二魚(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사람 배불릴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