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7.31 한겨레신문에 실린 조연현기자의 기사이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다. [한국 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21) ‘종교의 벽’ 허문 변선환 박사 1991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은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며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파문당한 뒤 ‘교회가 아니라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했던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1703~1791)가 세상을 뜬 지 200년 만이었다. | | | | | ▲ 종교의 벽’ 허문 변선환 박사 “기독교 밖에도 구원은 있다”라는 이유로 종교재판 받고 목사 자격 박탈, 그는 수많은 ‘교회 희망’길러낸 진정한 스승이다! | | |
다음해인 92년 5월 7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금란교회에서 ‘종교 재판’이 열렸다. 재판정은 김홍도 목사가 이끄는 금란교회 신자 3천여 명의 찬송과 기도 소리로 가득했다. 스승을 구하려는 감신대 대학원생들의 절규 어린 함성은 수천 군중의 함성에 묻혀버렸고, 수십 명의 대학원생들은 곧 억센 남신도들에게 예배당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감리회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처분을 내렸다. 감리교회 목사직을 파면하는 것은 물론 신자 자격까지 박탈한 것이었다. 종교재판 받고 목사 자격 박탈 현실 눈뜬 신학, 타종교와 대화, 수많은 ‘교회 희망’길러낸 스승 변선환은 서울 정동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올라 “나는 죽지만, 내 제자들은 노다지”라고 했다. 그가 내 제자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노 타치’(손대지 마라)의 어원인 ‘노다지’라고 했지만 말 그대로 그의 제자들은 그로 인해 세상에 빛을 나눠주는 노다지가 되었다. 그는 서구신학의 틀대로 만들어진 모조품을 찍어내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수천 수만년 동안 이 땅의 자연 속에서 잉태돼온 광맥을 찾게 해준 능숙한 사부였다.
비록 변선환 자신은 오직 책 속에만 묻혀 산 학자였지만, 그로 인해 이현주 목사, 최완택 목사, 2년 전 타계한 채희동 목사 등 동양적 영성의 우물을 길러내는 영성가들이 나왔고, 한국기독교청년회(YMCA) 환경위원장 이정배 감신대 교수, 연세대 교목실장 한인철 교수,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수원등불교회 장병용 목사, 홍천동면교회 박순웅 목사, 기독교환경연대 양재성 사무총장 등 한국교회의 ‘희망’들이 탄생했다.
변선환은 평안도의 항구 진남포에서 태어나 유가적 가풍에서 자랐다. 해방 후 그를 기독교로 인도한 것은 3·1운동 민족대표의 한명인 신석구 목사였다. 신석구는 처음엔 3·1운동 가담을 주저한 인물이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다른 종교인들과는 어울리지도 말고, ‘정치적 일’엔 관여치 말라고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기도하던 중 응답을 얻은 뒤 가장 늦게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6명의 기독교인 민족대표 가운데 마지막까지 지조가 꺾이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 신석구가 변선환의 첫스승이었다. 감신대와 한신대를 거쳐 육군 군목과 이화여고 교목을 지낸 그는 미국과 스위스에서 신학을 배웠다. 그 7년의 유학생활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나는 결코 서양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가족과 벗들과 동포들이 있는 고국의 역사 현장에서 우뚝 섬으로써 좋은 기독교인이 되고, 좋은 한국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교적 기독교신학을 했던 두 번째 스승 윤성범으로부터 배웠던 변선환은 불교학자 이기영 박사를 비롯한 많은 타종교인들과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변선환은 공항에서 책을 보다가 비행기를 놓치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 물 내려가는 소리가 자신의 오줌 소리인 줄 알고 30분을 바지춤을 내린 채 서있을 만큼 뭔가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 유학자 유승국 교수,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 강원용·김흥호 목사, 가톨릭 토착화 신학자 심상태 신부 등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렇게 집중했다. 대화가 깊어갈수록 그의 세계는 풍성해졌다. 마침내 그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성과 민중성(가난)을 놓치면 아시아의 신학일 수 없다면서 아시아인은 아시아의 현실에 눈을 감지 않은 신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 | | | | ▲ 감신대에서 스승 변선환을 회고하는 이정배 교수 | | |
늘 두루마기를 입고 보따리에 책을 싸들고 다니면서 제자들이 찾아오면 을지로4가 우래옥에서 냉면을 사준 뒤 비원과 창덕궁 길을 걸으며 동양과 자연의 신비를 넘나드는 신학과 개인적 고뇌를 나누고, ‘스승의 노래’를 부르는 제자들 앞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변선환은 당시 감신대생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이정배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학위 지도를 받으려했기 때문에 한 교수가 학생 6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새해 첫날이면 꼭두새벽에 스승에게 안부전화를 드렸던 이현주 목사는 변선환의 10주기 추모 예배에 올린 ‘우리의 스승 변선환’이란 헌사에서 “우리의 진실한 친구 변선환, 살아있는 동안 너로 하여 우리 외롭지 않았노라’고 노래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구원은 뒤로 한 채 마지막 한사람까지 지옥에 내보낸 뒤 가장 마지막에 지옥문을 나서겠다는 불교 지장보살의 서원을 들어 자신과 타자, 기독교와 타종교, 선과 악 등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다른 쪽을 지옥으로 내쳐버리는 기독교의 한계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년 8월8일이면 용인의 변선환 묘소에 하나둘씩 모여드는 제자들은 말한다. 우리에게도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교회 밖에 내동댕이쳐졌던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