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覺道重生者 不住自我(각도중생자부주자아) 본문
蘧然覺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覺道重生者 不住自我(각도중생자부주자아)
=진리를 깨달아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몸나와 마음나인 자아로 살질 않는다.
허당010ㅡ4327ㅡ2481
1.跂者不立(기자불립)
2.跨者不行(과자불행)
3.自見者不明(자현자불명)
4.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5.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6.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
7.其於道也(기어도야)
8.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9.物惑惡之(물혹오지)
10.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풀이편)
이 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제 24章(장)에 있는 말씀으로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ego)인 거짓나를 참나로 알고 살아서는 세상의 삶도 바른 삶이 될수도 없을뿐더러 더욱이나 참을 깨달아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성경 에베소서 4장 22절서 24절 말씀에 있기를
『너희는 誘惑(유혹)의 慾心(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舊習(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心靈(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義(의)와 眞理(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였다.
이 말씀은 바울이 罪囚(죄수)로 로마의 監獄(감옥)에 投獄(투옥)되어 受監生活(수감생활)중에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보내고자 쓴 獄中書信(옥중서신)으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다른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한 말씀의 核心(핵심)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을 대비시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강권적으로 懇切(간절)하게 呼訴(호소) 하는데에 있다.
그러면 벗어버릴 옛 사람과 새로 입을 새 사람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거짓나와 참나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誘惑(유혹)의 慾心(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舊習(구습=오랜 습관)을 좇는 옛 사람이 곧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를 벗어버려야 할 거짓의 나로 말한 것이고
하나님의 義(의=善과貞)와 眞理(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곧 우리 몸과 심령 깊은 곳에 넣어 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나가 새로 입어야 할 성령의 나요 참나요 얼의 나인 새 사람 이라는 말이다.
참나를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몸나와
몸나의 貪慾心(탐욕심)으로 쉼없이 꿈틀거리는 마음나에 늘 넘어지고 엎어지고 끄달리며 종질하는 마음의 나란 한갖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虛妄(허망)한 것인데 여기에 묶이고 잡히고 눌려 허우적이면서도 이 것이 참삶인 줄 알고 살던 것을 확 벗어 버릴 것을 강권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벗어버리라는 말씀의 참뜻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벗고 입으라 했지만
사실은 먼저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 씨알영이 참나임을 깨달아 아는 성령의 거듭남인 참나로 새 사람을 입게되면 몸나와 마음나는 이제껏 참나로 알고 살았던 옛 사람이 調伏(조복)되어 거짓나인 옛 사람의 허물 껍데기가 뱀의 허물이 벗어지듯이 저절로 벗어지는 것이다.
誘惑(유혹)의 慾心(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舊習(구습)을 좇는다는 것은
죽으면 썩어질 몸뚱아리의 本能(본능)인 貪慾心(탐욕심)의 貪.瞋.痴三毒心(탐진치삼독심)인 짐승 성질의 獸性(수성)을 채우고 充足(충족) 시키고자 그 몸뚱이 욕심에 부림을 받는 마음의 껄떡거림으로 참나인 정신의 靈我(영아=얼의나)가 習性化(습성화)되어 얼정신이 썩어져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義(의)와 眞理(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심령 속의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성령 씨알이 한점 흠없이 完全無缺(완전무결)한 義(의)와 永生生命(영생생명)인 絶對眞理(절대진리)의 主在者(주재자)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의 씨알로 우리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眞理(진리)를 찾아가는 求道(구도)의 삶 信仰(신앙)의 삶에서 늘 걸림이 되는 것은 온갖 誘惑(유혹)으로 因(인)한 것에 마음이 솔깃하여 葛藤(갈등)하고 미지근한 미련에 끄달리는 것이다.
誘惑(유혹)의 달콤한 魔力(마력)에 솔깃해 함에 마음이 기울어짐은 自我(자아)가 덜 죽어서 몸뚱이 나와 마음나의 들끓는 肉的感情(육적감정)의 未練(미련)과 執着(집착)의 끈을 온전히 끊어내질 못했다는 反證(반증)인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 있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否認(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였다.
여기서 나를의 나는 몸뚱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신 예수님의 얼나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성령 씨알의 참나인 우리의 얼나를 동시에 하나로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얼나나 우리의 얼나나 다 하나님의 성령 씨알이니 같은 얼나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 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로 잘못 알고 살아왔던 몸나와 마음나가 참나가 아니고 거짓의 나라는 것을 認定(인정)하라는 말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은
몸나와 마음나의 짐승 성질인 貪.瞋.痴(탐.진.치) 三毒(삼독)의 탐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말끔히 죽이고 이기라는 말이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너희 속에 있는 하나님 성령의 씨알 성령인 자기의 얼나를 따르라는 말이다.
孔子(공자)님은 이를論語(논어) 顔淵篇(안연편)에서 克己復禮爲仁(극기복례위인) 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일일극기복례천하귀인언) 爲仁由己而由人乎哉(위인유기이유인호재)라 하였다.
克己復禮爲仁(극기복례위인)이란
몸나와 마음나로된 自我(자아)가 오로지 나만 아는 利己心(이기심) 덩어리요 탐욕심의 捕虜(포로)인 거짓의 나임을 알아 그 自我(자아)의 나를 이기고 예를 회복 하는 것이 仁(인=어짐.사랑)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이고
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일일극기복례천하귀인언)이란
하루만이라도 사람들이 온전히 自我(자아)를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천하가 하나님이 주신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의 참나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랑인 어짐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爲仁由己而由人乎哉(위인유기이유인호재)란
어짐과 사랑을 행하는 것이 스스로에게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인 하나님이 심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공자님의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인 붓다님의 말씀이 佛經(불경) 涅槃經(열반경)에 있기를
『아난다야 너는 너 자신의 자기를 등불로 삼고 자기를 집으로 삼아라
다른 집에 의지하면 안된다.
그리고 法(법=dharma)으로써 등불을 삼고 法(법)으로써 집을 삼아 스스로 이에 歸依(귀의) 해야한다.』하였다.
여기서 自燈明自歸依(자등명자귀의)라 하여 자기를 등불로 삼고 자기를 집으로 삼으라는 말은
니르바나님(하나님)이 넣어주신 佛性(불성=성령)의 나를 참자기로 알고 그 불성의 나를 등불로 삼아 스스로를 밝혀 나가고 집으로 삼아 迷惑(미혹)되고 眩惑(현혹)되어 거짓나인 몸나와 마음나의 탐욕심에 엎어지고 거꾸러지며 마구니짓거리에 넘어가질 말고 佛性(불성)의 나인 참나에 安住(안주) 하라는 말이고
法燈明法歸依(법등명법귀의)라 하여 法(법)으로써 등불을 삼고 법으로써 집을 삼아라는 말도 앞구절을 더 明瞭(명료)하게 附言說明(부언설명) 하신 말씀이다.
佛經(불경)에서의 法(법)은 絶對眞理(절대진리)를 말하는 것도 되지만
여기서의 法(법)은 梵語(범어) dharma(다르마)인 불성의 나를 말하는 것이다.
붓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붓다 자신을 집으로 삼고 붓다 자신에게 歸依(귀의) 하라고 말씀 하신 것이 아니고
붓다 자신은 니르바나님(하나님)을 가리키는 오직 한 손가락에 지나지 않을뿐이고 니르바나님께로 가는 길은 붓다라 해도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로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 스스로의 속에 있는 불성의 나를 見性(견성) 하여 불성의 얼나로 깨달음을 이루는 길밖에 달리 무슨 길이 없다는 것을 붓다님은 愛弟子(애제자)인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 요한복음 6장 29절에 있기를
『예수께서 對答(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라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예수님으로 알아 들으면 잘못 알아 듣는 것이다.
勿論(물론)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신 예수님이야 당연히 하나님이 보내신자가 맞지만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성령의 얼나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 예수님 같이 하나님의 같은 성령의 씨알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니 우리도 다 하나님이 보내신자에 해당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 살아 생전에 들었던 제자들이나 그 무리들이 못 알아 들었듯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못 알아 듣는 것은 다름이 없다 하겠다.
예수님도 예수 자기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내신자인 保惠師(보혜사) 성령이 너희 心靈(심령) 가운데 있으니 그 보혜사 성령의 얼나로 거듭나 너 자신의 성령의 얼나를 믿으라고 말씀 하신 것도 붓다님의 말씀과도 같은 말씀인 것이다.
絶對眞理(절대진리)는 唯一不二(유일불이)하여 오로지 하나이기때문에 이 진리로 거듭나신 사람인 붓다님이나 예수님이나 孔子(공자)님이나 孟子(맹자)님이나 老子(노자)님이나 莊子(장자)님이나 그 몸사람인 個體(개체)로는 서로 다르고 그 살아온 지역과 시대는 다 다르지만 깨달으신 진리로는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해서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그 말씀의 核(핵=알짬)은 하나같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다들 이 걸 모르니까
불교와 기독교와 캐톨릭과 유교의 진리가 서로 다르다며 배척하고 헐뜯고 흠집내고 자기들의 종교만 옳다하고 남의 종교는 다 偶像(우상)을 섬기는 雜神(잡신)의 마구니 들이라고 멸시하고 하찮게 여겨 노골적으로 卑下(비하)하는 말을 서슴칠 않는 것이 오늘날 종교계의 현실이라 하겠다.
하기야 같은 종교끼리도 무슨 양파 껍질처럼 宗派(종파)가 수도없이 갈라져서 신자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매가 병아리를 채가듯이 못채가서 안달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종교의 성립성질과 樣態(양태)와 敎理(교리)는 물론 若干(약간)씩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진리의 核(핵=알짬)은 하나로 같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수천 수만벌의 옷을 이옷 저옷으로 갈아 입더라도 옷걸이인 몸뚱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종교의 이름인 내건 간판이 저마다 각기 다르지만
절대진리로 거듭나신 분들인 붓다님이나 예수님이나 孔子 孟子(공자 맹자)님이나 老子 莊子(노자 장자)님이나 각기 서로 다른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고 다들 하나로 같은 하나님(니르바나님)의 절대진리를 같은 깨달음으로 거듭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을 모든宗敎(종교)가 다 하나로 같다는 말로 알아 들으면 안된다.
宗敎(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그 가르치는 절대진리의 核心(핵심)의 宗旨(종지)는 하나님 하나로 같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說破(설파)하신 眞理(진리) 말씀인 가르침의 核心宗旨(핵심종지)가 오로지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영적 아들이 되라는 靈性(영성)의 가르침인데 이 걸 몰라서 세상의 기독교는 몸살이의 몸뚱이 종교로 變質(변질)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크게는 有史以來(유사이래)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지구촌의 각종 종교전쟁을 비롯하여 極端的(극단적)인 似而非(사이비) 異端輩(이단배)들이 하나님을 팔아 순진하고 선한 양무리들을 眩惑(현혹)시켜 그들의 선한피를 빨아 저들의 몸뚱이 잇속을 채우는 참으로 寒心(한심)하고도 破廉恥(파렴치)의 極(극)을 서슴없이 치닫는 인간 이하의 이리떼들의 惡辣(악랄)하고 醜惡(추악)한 作態(작태)들이 쉼없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현실임을 부인 할 수가 없다 하겠다.
종교 지도자들인 목회자가 하나님의 선한 종이 아닌 자기 몸뚱이를 먹여 살리고 자기 아들 딸을 먹여 살리고 자기 子息(자식)들의 未來(미래)를 위해 聖徒(성도)들의 피같은 믿음의 獻金(헌금) 十數億(십수억)씩을 不合理(불합리)하게 빼돌려 隱匿(은닉) 하는 짓거리나 하고 자기 가정을 꾸려나가는 직업 종교인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이 현실에선 예수님의 참 가르침의 진리인 값없이 주라는 말씀을 기대 할 수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 하겠다.
속는 사람이 있기때문에 속이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속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엉뚱한 욕심에 자기가 자기에게 속은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엉뚱한 욕심이란 것이 다른게 아니고 이게 다 몸뚱이로 죽질 않고 구원받아 영생한다느니 휴거가 된다느니 천년왕국에서 변화된 육신으로 왕노릇 한다느니 한다는 巧妙(교묘)하게 거짓된 그 말과 그 욕심에 스스로가 미끄러져 속는 것이 아닌가
여기 이 세상은 너나 없이 몸뚱이라는 겉옷을 입고 왔다가 잠시 다녀가는 곳이지 여기에 눌러붙어 몸뚱이로 영생하는 곳이 아님을 알고 내 몸뚱이와 이 세상에 미련스럽게 미련을 갖질 말아야 하는데
이게 잘 안되서 솔깃해 하다가 그만 몰래 파놓은 陷穽(함정)에 빠지고 덫에 걸려 허우적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설파하여 선한 양무리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 다들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영생의 영적 삶에 동참하게 하겠다는 교회가 정말 있기나 하는 것인지도 안갯속처럼 模糊(모호)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라 할 것이다.
저마다 다들 자기 울타리에 교회 財政(재정)의 먹거리로 양무리를 더많이 몰아 가두려는데 血眼(혈안)이 되어 하다못해 근근히 꾸려가는 開拓(개척)교회 양 한마리마저 꼬드겨 빼앗아 자기 울타리에 가두는 것을 볼짝시면 참으로 槪嘆(개탄)스러움을 禁(금) 할 수가 없다 하겠다.
종교란 것은 몸삶에서 초월하여 영적인 삶으로 정신이 바로 서자는 것이지
썩어질 몸뚱이로 영원히 살자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初發心(초발심)을 잊어버리고 무엇이든지 肥大(비대) 해지면 반드시탈이 나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사실들을 적지않게 보아서 알 수가 있다 하겠다.
사람이 가장 행복 할 때가 있기나 할까 싶지만
너무 가난하고 먹고 살기위해서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기에 급급할 때
그렇게 하질 않으면 하루를 살아 갈 수가 없어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할 그때가 어찌보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일지도 모를 것이다.
밥이 모자라서 서로 아빠가 더 드세요 아니야 너희들이 더 먹어 아냐 당신이 더 먹어 하며 밥 한숟가락씩을 서로의 밥그릇에 옮기다보면 오히려 밥이 남는다는 말처럼 말이다.
모자랄때가 넘칠때보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더 충만해진다는 말이 아닌가.
고난이 네게 有益(유익)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佛敎(불교)도 붓다님의 참 가르침인 佛性(불성)으로 니르바나님의 얼의나인 불성의 거듭남인 見性(견성)은 없고 잿밥에만 군침 흘리고 貪溺(탐닉)하는 것으로 적지않게 變質(변질)되고 떨어져버린 것이 基督敎(기독교)와 별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儒敎(유교)는 그 중에서도 孔子(공자)님의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하나님이 내속에 속알의 얼나를 낳아 주셨다) 와 知我者之天乎(지아자지천호=나를 알아 주시는 이는 하나님 한분뿐이시다)의 뿌리 말씀을 잊어버리고 立身(입신)과 修身(수신)과 仁.義.禮.知.信(인.의.예.지.신)에 置重(치중) 하여 가장 심하게 몸뚱이 살림의 종교로 떨어진 程度(정도)가 더 크다 할 것이다.
佛經(불경) 金剛經(금강경)에 있기를
『不取於相(불취어상) 如如不動(여여부동) 何以故(하이고)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하였다.
不取於相(불취어상) 如如不動(여여부동)이란
相(상=형상=꼴)을 取(취)함이 없어 마음이 生心(생심)하여 움직여 바뀜이 없이 한결같다 하였다.
相(상)을 取(취)함이 없다는 것은 形像(형상)을 가진 모든 物質(물질)의 個體(개체)는 다 生滅(생멸=나고 죽음) 하는 瞬間的(순간적)인 끊임 없는 變化(변화)의 連續線上(연속선상)에 있는 變易(변역=변하고 변함)의 相對性物質(상대성물질)들이라 그 形像(형상)이 恰似(흡사) 實相(실상)처럼 錯視現像(착시현상)으로 보이지만 事實(사실)은 虛相(허상)임으로 그 끊임 없이 바뀌어 가는 物質(물질)의 虛像(허상)에 붙잡혀 마음이 놀아나질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如如不動(여여부동)이란
이런 眞理(진리)의 理致(이치)를 確然(혹연)히 알므로 確固(확고)한 진리에 서면 움쩍도 않는다는 말이다.
움쩍도 않는다는 말은 내 몸뚱이를 비롯하여 無限宇宙虛空(무한우주허공)의 빔안에 明滅(명멸)하는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물질들에 眞理(진리)로 거듭난 마음이 휘둘리질 않는다는 말이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이란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모든 被造(피조)된 相對世界(상대세계)인 現像世界(현상세계)의 物質界(물질계)를 말하는 것이고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이란
우리가 迷惑(미혹)되는 상대세계의 모든 물질들이 다 하나같이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쩍하고 금새 사라지는 번갯불의 閃光(섬광)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같이 알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금강경의 이 말씀의 核心(핵심)은
因緣(인연)을 따라 이루어진 모든 物質(물질)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뚱이인 몸의 나와 몸뚱이에 붙은 마음나의 감정에 휘둘려 몸나에 종질하는 마음의 나는 참나가 아니고 거짓의 나라는 말이고
이런 거짓의 나에 속아 꿈같은 허깨비 삶에 붙잡히질 말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 허망한 삶에 執着(집착) 하질 말고 니르바나님(하나님)이 넣어주신 佛性(불성)의 얼벼락을 맞아 벼락맞듯이 불성의 참나를 見性頓悟(견성돈오) 하여 화들짝 깨어나라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 알짬이라 할 것이다.
金剛能斷經(금강능단경) 21章(장)에 있기를
『若人言如來有所說法卽爲謗佛(약인언여래유소설법즉위방불)』이라 하여
萬若(만약) 如來(여래)가 說法(설법) 한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곧 나를 批謗(비방)하는 것이고 헐뜯는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석가 붓다님은 서른 다섯이 되는 해 2월 8일 새벽 샛별을 凝視(응시)하시고 있다가 忽然(홀연)히 석가 붓다님은 니르바나님의 佛性(불성)이 자기 속에 있었음을 見性(견성)하여 깨쳐 아시고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인 anuttaraㅡ samyak ㅡ sambodhi(아눗다라삼막삼보디)의 大正覺(대정각)을 이루시고 45년동안 니르바나님의 절대진리를 說法(설법) 하시어 長廣舌(장광설)이란 別稱(별칭)까지 알려져 있는데 막상 석가 붓다님은 자신이 한마디도 설법을 한바가 없다고 하시고 만약 여래가 설법을 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따면 이런 사람은 석가 붓다를 비방하고 헐뜯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를 석가 붓다님의 生存時(생존시)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그렇듯이 몇이나 제대로 알아 들었는지를 모를 일이라 할 것이다.
붓다님이 하신 이 말씀의 참뜻은 몸의 붓다와 마음의 붓다인 겉 껍데기로 있는 色身(색신)인 이 몸뚱이의 입으로 말하는 설법은 붓다의 몸뚱이가 몸뚱이의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니르바나님(하나님)이 붓다 자기의 몸뚱이 입을 사용하여 니르바나님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라 자기는 실제 자기 생각의 말을 한마디도 설법 한바가 없다는 말씀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것은 성경 요한복음 5장 30절에 있는 예수님 말씀인
『나는 아무 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審判(심판) 하노니 나는 나의 願(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는고로 내 심판은 義(의)로우니라 』는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예수님의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로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신이의 원대로 하기 때문에 자기의 말과 심판이 절대적으로 의롭다고 말을 한것이다.
여기서 보내신이란 하나님의 성령 씨알이 예수 자신의 속에도 하나님의 神格(신격)으로 살아 계심을 確然(확연)히 깨쳐 알고 그 하나님의 성령인 얼의 참나로 거듭나신 保惠師(보혜사) 聖靈(성령)을 보내신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석가 붓다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 맹자님이나 노자 장자님 같은 聖人(성인)들의 말씀을 왜 잘 못알아 듣는가?....
絶對眞理(절대진리)는 본디 말이나 글로써 說明(설명)이 되어질 수가 없는 것인데 이 것을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限界性(한계성)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이나 글로 되어버리면 絶對眞理(절대진리)는 이미 相對眞理(상대진리)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글로된 모든 經典(경전)은 다 이미 죽은 말씀들이고 經典自體(경전자체)가 絶對眞理(절대진리)가 아니고 眞理(진리)로 가는 길라잡이의 한 손가락에 지나질 않는다는 말인 것이다.
一劃一點(일획일점)도 無誤謬(무오류) 한 것이 經典(경전)이 아니고
經典(경전) 속에도 적지않은 誤謬(오류)와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는 것이다.
說或(설혹) 一劃一點(일획일점)의 無誤謬(무오류)로 絶對眞理(절대진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聖靈(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질 못하면 이 말씀에 숨겨진 하나님의 隱密(은밀)한 참뜻을 바르게 꼭 집어내어 알아채질 못하게 되는 것이고
바르게 알아채질 못하면 經典(경전)을 보아도 헛본 것이 되고 그것이 곧 絶對誤謬(절대오류)요 가라지가 아닌가 말이다.
孟子(맹자)님의 孟子(맹자) 盡心下篇(진심하편)에 있기를
『盡信書則不如無書(진신서즉불여무서)』라 하여
經書(경서)를 다 믿는다면 經書(경서)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이 말이 곧 經典(경전) 자체가 다 완전무결한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眞理(진리)와 宗敎(종교)는 같은 것이 아니다.
宗敎(종교)는 絶對眞理(절대진리)를 찾아가는 길라잡이 役割(역할)을 하는 하나의 손가락일뿐이지 宗敎自體(종교자체)가 眞理(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걸 모르니까 似而非宗敎(사이비종교)가 버젓이 활개치며 우글거리고 또 善(선)하고 純眞(순진)한 양떼들이 그들의 먹거리로 標的(표적)이 되고 犧牲(희생)이 되는 것이고 社會惡(사회악)의 毒(독)버섯으로 暢獗(창궐) 하는 것이다.
예수님 붓다님 같이 온전히 眞理(진리)를 이루시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신 이들의 발자취를 우리도 誠心(성심)으로 좇고 同參(동참) 하여 眞理自體(진리자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宗敎(종교)인 것이 아닌가.
基督敎(기독교)인이라 해서 다 예수님 같이 하나님의 참아들이 된자 드물고
佛敎(불교)인이라 해서 붓다님 같이 니르바나님(하나님)의 참아들이 된자가 드문 것을 否認(부인) 할 수가 없다 할 것이다.
예수님 살아 생전에 예수님 말씀을 가장 못알아 듣고 예수님을 極端的(극단적)으로 미워하고 憎惡(증오)하고 排斥(배척)하고 十字架(십자가) 刑(형)틀에 못박아 죽게까지 한 자들이 바로 그당시 宗敎界(종교계)의 指導級(지도급) 인물들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믿은 것도 야훼 여호와 하나님 이었고
예수님이 믿은 것도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가장 잘 하나님의 眞理(진리) 말씀이 서로 잘 疎通(소통) 될 것이라 斟酌(짐작) 되지만
旣得權(기득권)의 制度圈(제도권)인 그들에겐 하나님의 진리를 說破(설파) 하시는 예수님이 한갖 異端(이단)의 존재로만 認識(인식) 되었지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알질 못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당한 이후 지금까지도 이런 현상의 틀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 昨今(작금)의 宗敎界(종교계)의 否認(부인) 할 수 없는 믿음의 實相9실상)이라 할 것이다.
眞理(진리)의 겉옷을 걸쳐 입은 종교는 많지만
眞理自體(진리자체)인 바른 종교는 눈을 씻고 씻어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이 세상에 들끓는 종교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金剛能斷經(금강능단경)에 있기를
無法可說(무법가설)이라 하여
眞理(진리)는 말로 설명 할 수가 없다 하였다.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第一章(제일장)에 있기를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라 하여
말로 할 수 있는 眞理(진리)는 絶對永遠(절대영원)한 不變(불변)의 眞理(진리)가 아니라 하였다.
이 두말씀이 같은 말씀으로 絶對眞理(절대진리)는 말이나 글로써는 說明(설명) 될 수도 없고 말이나 글로 되어버리면 이미 절대진리가 아니고 상대진리로 떨어지고 變質(변질)되어 버린다는 것을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도 말이나 글로나마 설명치 않을 수 없음은 이 것이 오직 眞理(진리)를 찾아가는 한 손가락으로 길라잡이는 될 수가 있어서 마지못해 말이나 글로 한다는 것을 밝히신 글이라 하겠다.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있는 自我(egoism)의 사람은 몸뚱이 肉身(육신)인 몸사람의 살덩어리 생명이 復活(부활)하여 變化(변화)된 육신을 입어 永遠(영원)한 새생명으로 永生(영생) 한다느니 새하늘 새땅의千年王國(천년왕국)의 王(왕)노릇을 한다느니
예수님 再臨時(재림시)에 空中(공중)으로 휴거되어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 간다느니 하며 虛荒(허황)한 몸사람의 생각에서 몸뚱이로 영생 할 것을 꿈꾸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信仰人(신앙인)들이 있는 걸 보면 저들이 정말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기나 한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움을 어쩔 수가 없다 하겠다.
몸뚱이는 너나 없이 다 죽자고 난 物質(물질)이고 죽어 滅亡(멸망) 하여 각기 원소로 분화되어 우주의 무한한 虛空(허공)의 本鄕(본향)으로 還源(환원) 되는 것이 하나님의 攝理(섭리)이고 絶對眞理(절대진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본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의 聖靈(성령) 씨알인 靈性(영성)의 精神(정신)인 靈我(영아)의 얼의 나가 永生(영생)하는 하나님의 참생명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바로 이 것을 말해 주심인데
이 걸 못알아 듣는 것이다.
성경 新舊約(신구약) 66券(권)을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성령으로 거듭남만이 唯一(유일)하게 靈(영)으로 復活(부활=거듭남)하여 救援(구원)받는 眞理(진리)의 길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 永生(영생) 할 수 있다는 바로 이 한 말씀인 것이다.
佛經(불경) 八萬四千(팔만사천) 法文(법문)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苦. 集.滅.道(고.집.멸.도)의 四聖諦(사성제)로 見性成佛(견성성불)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苦(고)란?
몸뚱이의 貪.瞋.癡(탐.진.치) 三毒心(삼독심)에 종이된 마음이 그 탐욕심을 채우고 누리질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아둥바둥하는 괴로움과 煩惱(번뇌)의 苦海(고해)에 빠져 허우적이는 苦痛(고통)스런 자아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集(집)이란?
이런 煩惱(번뇌)와 妄想(망상=망령된 생각)으로 因(인)해 스스로의 탐욕심이 뿌리가 된 마음이 원인이 되어 苦痛(고통)스런 마음의 때가 덕지 덕지 켜켜히 쌓이고 쌓인 苦(고)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고
滅(멸할 멸))은 이런 苦(고=괴롬)와 集(집=괴롬의 모임 덩어리)을 말끔히 죽여 없애어 몸나와 마음의 나인 自我(자아)가 헛껍데기의 거짓의 나임을 認識(인식) 하고 라는 말이고
道(도=니르바나님의 참 생명의 佛性<불성>)는 이렇게 苦(고)와 集(집)을 남김없이 죽이고 나면
니르바나나님이 넣어주신 니르바나님의 佛性(불성=니르바나님의 참생명)의 靈我(영아=얼나)인 本來面目(본래면목)을 참나임을 깨달아 알아 깨침을 이루어 니르바나님 佛性(불성)의 靈(영)과 하나로 연결되어 니르바나님 나라에 든다는 말이다.
見性成佛(견성성불)은 무엇인가?
見性(견성)은 니르바나님(하나님)이 넣어주신 니르바나님의 靈(영)인 佛性(불성=성령) 靈(영)으로 본디부터 내 속에 있었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깨달아 알고 그 본래면목의 나가 참나이고 지금까지 無明(무명)에 덮여 참나로 알고금이야 옥이야 하고 살았던 몸나와 마음의 나가 참나를 담고 있는 한갖 거죽 겉 껍데기의 허물 같은 것임을 거울을 보듯이 豁然(활연)히 알았다는 말이고
成佛(성불)은 佛陀(불타=梵語<범어=산스크리트어>budda<붓다>를 이룬다는 말인데
梵語(범어) 붓다는 깨닫다 또는 깨달음 이라는 말이니까
깨달음을 온전히 이룬다. 또는 온전한 깨달음을 이룬자라는 梵語(범어)budda(붓다)를 쿠마라지바가 成佛(성불)로 漢譯(한역)을 한 것이다.
온전히 이룬다는 말은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으로 더 위가 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인데 이 것은 梵語(범어) anuttaraㅡsamyakㅡsambodhi를 意譯(의역) 한 것이고 音(음)으로 漢譯(한역) 한 것이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눗다라삼막삼보리)이다.
聖經(성경)을 보고 佛經(불경)을 보고 說敎(설교)와 說法(설법)을 들어도 이런 絶對眞理(절대진리)의 核心(핵심)이치 그 正鵠(정곡)을 모르는 것은 다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慾心(욕심)이란 렌즈만을 통해서 보고 믿는데에 그 源因(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성경을 보고 불경을 보고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을 보고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를 보고 儒敎經典(유교경전)인 孔.孟(공.맹)의 四書五經(사서오경)을 보는 것은 다 한마디로 거짓나인 自我(자아)의 마음을 죽이고 또 죽이고 말끔히 남김 없이 다 죽이고 씨알 성령의 참나인 얼의 나를 回復(회복)하자고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인데
참나인 얼의 나를 담고 있는 겉 껍데기인 몸나와 마음나를 참나로 아는無明(무명)에 덮인 衆生(중생)들은 죽을 때까지 경전을 보고 들어도 이 것이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生命(생명)의 絶對基準(절대기준)을 靈(영)이 살았느냐 죽었느냐에 둔 것이지 몸뚱이 생명이 살았느냐 죽었느냐에 둔 것이 아님을 모르니까
예수님 말씀을 못 알아 듣는 것이라 자기의 몸생각에 붙은 헛소리들만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 누가복음 9장 60절 말씀에 있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葬事(장사) 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傳播(전파)하라 하시고 』하였다.
앞의 죽은 자들은 몸은 생때같이 펄펄 살아 있어도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靈(영)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고
뒤에 죽은 자들은 몸 생명이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몸뚱이가 팔팔하게 생때같이 살아 있어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靈性(영성)의 나인 靈我(영아)인 얼의 나를 참나로 깨달아 알고 거듭나지 못한 자를 아예 죽은 자라고 말씀 하신 것을 못알아 듣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있기를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 肉(육)은 無益(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靈(영)이요 生命(생명)이라』 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生命(생명)의 基準觀點(기준관점)이 몸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靈的)영적) 생명에 있다는 것을 極明(극명)하게 드러내신 말씀이다.
金剛經(금강경) 21章(장)에 있기를
『彼非衆生 非不衆生(피비중생 비불중생)於我阿耨多羅三藐三菩提乃至無有小法可得(어아아눗다라삼막삼보리내지무유소법가득)』이라 하였다.
彼非衆生 非不衆生(피비중생 비불중생)이란
저들은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衆生(중생)이라 漢譯(한역)된 산스크리트어인 梵語(범어)는sattva(사트바)이다.
사트바는 살아 있는 존재. 또는 생명의 실체적 실존이라는 뜻이다.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말은 곧 一切衆生皆有佛性(일체중생개유불성)의 다른 말로모든 중생은 다 하나 같이니르바나님으로부터 불성을 받아 나와 불성을 갖고 있는 귀한 존재로써 누구든 니르바나님의불성으로 깨달아 見性(견성)만 하면 다 成佛(성불)하여 붓다가 될 수 있는 예비 붓다들이라는 것이 이 말씀인 것이다.
於我阿耨多羅三藐三菩提乃至無有小法可得(어아아눗다라삼막삼보리내지무유소법가득)이란
내가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으로 더 위가 없는 最高(최고)의 깨달음인 니르바나님의 불성의 나가 참나임을 깨닫고 나니 이에 더 얻어진 참이 조금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본디 니르바나님의 완전무결한 절대생명의 참 생명이 내 속에 있었던 것인데 그 참 생명의 진리를 내가 알질 못했던 것은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가 나의 참나라는 無明(무명)에 덮여 그 거짓나를 참나로 알고 살았기 때문에 비록 寶位(보위=임금의 자리)를 물려 받기로 確定(홛정)되어 있던 太子(태자)로 王宮(왕궁)에서 살았지만 그 삶이 나에겐 苦海(고해)의 삶이었고 火宅(화택)의 삶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無明(무명)에 덮인 어리석은 衆生(중생)들은 이런 이치를 모르고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헛껍데기가 벗어버려야 할 한갖 허물 껍데기에 불과한 거짓의 나임을 모르고
그 헛껍데기 허물인 몸뚱아리의 自我(자아)로 거듭나서 永生(영생)을 하겠다고들 하고
聖靈(성령)을 받는다고들 한다.
이래서는 성령은 커녕 일곱길로 쫓겨났던 惡靈(악령)들이 한길로 터진 봇물처럼 몰려 오지 않는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성경 요한복음14장 6절에서 10절 말씀에 있기를
『⑥ 내가 곧 길(道)이요 眞理(진리)요 生明(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⑦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⑧ 빌립이 묻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봉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⑨ 예수께서 對答(대답) 하시길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는 어찌 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⑩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나희에게 이르는 말이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하였다.
⑥절 말씀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에서의 내가를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몸뚱이의 예수 자신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 들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못 알아 듣는 것이된다.
여기서의 내가라고 한 내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신 영아의 성령 예수님의 靈我(영아)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 속에도 예수님과 다름 없이 똑같이 하나로 있는 하나님 성령의 씨알 성령의 나인 참나의 靈我(영아=얼)의 나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이 하나님의 씨알 성령의 얼의 나로 거듭나기만 하면 그 씨알 성령의 나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聖靈(성령)임으로 우리는 다 너나 없이 자신의 속알 가운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原天的(원천적)인 絶對生命(절대생명)의 하나님의 眞理(진리)가 고스란히 갖추어져 있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길. 진리.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길. 진리. 생명인 셋으로 나누어 말씀 하신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絶對性(절대성) 하나로는 같은 말씀인 것이다.
씨알 성령의 시키심데로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하나님의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로 살아야 곧 영생하는 생명의 법칙이라는 말씀이다.
⑦절 말씀의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에서
나를의 나도 성령으로 거듭나신 예수님도 되지만 우리 속의 씨알 성령의 나도 되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너나 없이 씨알 성령의 참나로 거듭 나기만 하면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거듭난 사람은 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씨알 성령이 하나님의 성령이라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서 씨알 성령이 계시는 우리의 心靈(심령)을 두고 말하길 至聖所(지성소)다 聖殿(성전)이다 하는 것이 다 이 때문인 것이다.
⑧절서 빌립보가 말하길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足(족)하겠나이다 했는데
빌립보는 분명 예수님 말씀을 두 귀로 생생히 들었지만 그 걸 전혀 못알아 듣고 엉뚱하게도 자기 눈으로 봐야만 믿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처럼 빌립과 같이 썩어질 눈으로나마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믿겠다는 쪼의 이런 幼稚(유치)한 믿음은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至今(지금)까지 빌립은 하나님을 人態神(인태신)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이 사람처럼 무슨 形像(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빌립의 말에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宇宙萬有(우주만유)의 創造者(창조자)로 絶對(절대)하신 靈(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나고 죽는 相對性被造物(상대성피조물)처럼 무슨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닌 有無形像眞存(유무형상진존= 형상 없이 계신 참존재)임을
빌립이 모르진 않을텐데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자는 존재도 아니고 볼 수도 없는 無存在(무존재)의 存在(존재)이시다.
사람의 마음이 눈으로는 서로 볼 수 없으나 사람에겐 다 마음이 있는 것처럼 없이 있는 것이 마음인 것이고 없이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서로 사랑 한다며 살을 맞대고 살을 섞고 살지만 죽을 때까지 그 마음 하나를 거울을 보듯이 서로가 환하고 말끔하게 볼 수가 없고 믿을 수가 없어 서로 의심하고 갈등하며 한평생을 엮여서 살아 가듯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못보는데
어찌 하나님을 보자고 덤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宇宙(우주)의 無限虛空(무한허공)에 성령으로 없이 계시면서도 없지 않으심이 없고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神格(신격)의 씨알 성령으로도 계시는 것이다.
사람 속의 속알에 神格(신격)이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을 無意識的(무의식적)으로 찾게되어 있는 그런 宗敎指向的動物(종교지향적동물)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씨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멸망의 생명에서 영생의 하나님 생명으로 救援(구원)되는 生命復活(생명부활)의 일대 事件(사건)이 되는 것이다.
⑨절에서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신 것도
빌립아 네 심령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씨알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고 그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다
네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너는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그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의 거짓 나에 붙잡혀 그 썩어질 눈으로만 봐야 믿겠다고 하느냐 그러는 너는 네 마음을 볼 수 있고 또 남의 마음도 볼 수 있느냐 하시는 안타까움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고 계신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
⑩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로 알아 들으면 예수님 말씀을 제데로 알아 들은 것이 못된다.
지금까지 이렇게들 알아 들었기 때문에 聖肉身化(성육신화)한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예수님인 것으로 알아 예수님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웃지못할 일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은 사람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신 사람으로 써 우리와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시어 자기의 몸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 진리의 삶을 삶의 전목적으로 알아 사랑하고 온몸으로 생명 다 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순종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피와 물을 한방울도 남김 없이 다 쏟으시고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믿음 그 자체인 사람으로써 하나님 같은 사람이었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자기 잣대로 몸살림의 잇속을 저울질 하는 우리 사람들과 다른 것이라면 다른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죽도록 닮고싶은 것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란말은
씨알 성령이 내 心靈(심령) 속에 있는 씨알 성령의 나는 하나님 성령의 씨알이니 내가 하나님 성령의 한 씨알로 全體(전체)이신 아버지의 한 부분으로 있다는 말이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 심령 속에 한 씨알 성령이 되어 神格(신격)으로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보면
1.跂者不立(기자불립)이라 하여
발돋움 해서는 설 수가 없다 하였다.
까치발이나 깨금발의 발돋움으로도 물론 잠깐은 서 있을 수가 있지만 이렇게 서는 것은 정상적인 섬이 아니라는 말로 어거지로 욕심을 내서 선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心(자아심)의 本能(본능)인 自我中心(자아중심)의 利己的(이기적)인 貪慾心(탐욕심)과 好氣心(호기심)의 心理的(심리적) 衝動(충동)과 그 發現欲求(발현욕구)를 이렇게 드러내신 말씀이라 하겠다.
몸뚱이 나와 마음의 나가 實體的(실체적)인 實存(실존)의 참나로 알고 그 몸뚱이와 마음 나의 본능인 자아중심적 이기심과 탐욕심에 執着(집착)하다 못해 感情(감정)의 奴隸(노예)로까지 轉落(전락) 해버려서 자아의 有益(유익)을 위해서는 한점 良心(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온갖 欺瞞(기만)과 脅雜(협잡)과 術策(술책)과 假飾(가식)과 陰謀(음모)를 꾀하며 陰險(음험)한 陷穽(함정)과 덫을 놓고 竊盜(절도)와 奸淫(간음)과 殺人(살인) 까지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厚顔無恥(후안무치)한 惡魔的(악마적) 존재로까지 墮落(타락) 할 수 있는 것이 몸나와 마음 나가 일으킬 수 있는 惡(악)의 種子(종자) 씨앗이 自我(자아)의 마음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를 참나로 錯覺(착각) 하고 산다고 해서
다 이런 極端的惡(극단적악)을 행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潛在(잠재)되어 있는 것이 자아심의 본능이라는 뜻의 말이다.
까치발 까지 해 가면서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좀 더 남보다 잘 해봐야겠다는 탐욕심과 호기심의 誘惑(유혹)이 까치발로 까지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를 老子(노자)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라 하겠다.
人類歷史以來(인류역사이래)로 지금까지 다 잘 해보겠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잘된 것이라곤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 해보면 오늘의 현실을 보면 그 답이 나온다 할 것이다.
오늘날의 이 지구촌 현실이 무슨 이상적인 세상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다들 저들 나름데로 까치발을 딛고 애쓴다고 했지만 이 세상은 늘 요모양 요꼴을 벗어나질 못한 것이 이 세상의 한계요 영원하고도 遙遠(요원)한 宿命(숙명)이라 할 것이다.
2.跨者不行(과자불행)이라 하여
가랑이를 쩍 벌리고서는 갈 수가 없다 하였다.
이 말씀도 앞의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利己的(이기적=egoism)인 意欲(의욕)만으로는 세상 삶도 바르게 살 수 없을뿐더러
우리 心靈(심령)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성령 씨알 靈(영)인 참나로 거듭나기는 駱駝(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보다 그 可能性(가능성)이 稀薄(희박) 하다는 말이다.
우리 韓民族(한민족)인 배달겨레의 始祖(시조)이신 桓雄(환웅)과 檀君(단군)은 일찍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거짓의 나임을 아시고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인 얼나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아신지라
自稱(자칭) 天孫(천손)의 자식이라 하시고 民族理念(민족이념)의 開國國是(개국국시)로
弘益人間 理化世界(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大明題(대명제)를 宣佈(선포) 하셨던 것을 지난 歷史(역사)를 通(통)해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人類歷史(인류역사)를 通涉(통섭)해 보았을때 일찍이 紀元前(기원전) 2333년에 우리 한민족의 始祖(시조)이신 檀君(단군)께서 國是(국시)로 宣佈(선포)하신 弘益人間(홍익인간) 理化世界(이화세계)라는 국시를 능가 할만한 귀한 말씀의 국시가 세계만방의 어느나라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우리 한민족의 卓越(탁월)한 慧眼(혜안)과 슬기로우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하겠다.
國祖檀君(국조단군)님의 이 民族理念(민족이념)은 민족이념을 뛰어넘어 온 世界萬邦(세계만방)의 모든 인류를 하나로 아우르겠다는 正義(정의)와 自由(자유)와 平等(평등)과 博愛(박애)의 聖(성)스러운 거룩한 이념이요 고귀한 人類愛(인류애)의 發現(발현)에 그 뿌리를 두고 이루어진 인류역사상 絶對絶命(절대절명)의 진리의 말씀이라 해도 조금도 不足(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弘益人間(홍익인간)이란
널리 모든 인류를 이롭게 하겠다는 말이고
理化世界(이화세계)란 홍익 인간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말한 것인데
민족이란 용어를 쓰질 않고 세계라는 용어를 쓰신 걸 보면 그 사랑의 遠大(원대) 함을 가히 斟酌(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이 말씀 한마디로 언젠가는 우리 한민족이 이 세계를 다스리는 주인의 나라가 된다는 크고 雄大(웅대) 하신 비젼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다 하겠다.
理化世界(이화세계)란 다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알의 참사람인 얼의 사람으로 거듭나신 본래면목의 하나님의 성품 마음의 시키심을 따라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순종하며 爲無爲(위무위)함으로써 어거지로 하는 함이 없이 하지않는 것이 없는 다스림을 하겠다는 말이 곧 이 말씀의 참뜻이다.
物理的(물리적)인 힘과 人爲的(인위적)인 制度(제도)와 法(법)이라는 강제성의 울타리를 만들어 어거지로 인간을 다스리는 이념을 超越(초월) 한 인간본연의 정신을 고귀하게 생각한 세계만방의 모든 인류가 大同(대동)으로 하나로 되자는 큰틀의 거룩한 이념이라 할 것이다.
3.自見者不明(자현자불명)이라 하여
스스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는 자는 밝지가 않다 하였다,
누가 묻지도 않는데 저가 스스로 내가 이정도의 能力(능력)과 智慧(지혜)가 있는 사람이고
내가 이런 저런 좋고 훌륭한 善(선)한 일을 많이 해서 인류사회에 적지않은 有益(유익)을 끼친 사람이라느니 하며 스스로 자기의 功(공)을 떠벌리고 자기 입으로 나팔을 불어대는 사람치고 小人輩(소인배) 아닌자가 없다는 것이다.
얕은 물은 흐르는 물소리가 귀에 거슬리도록 요란스럽지만 깊은 물은 흐르고 흘러도 그 소리가 나질 않고
빈 수레가 짐을 실은 수레보다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고 크게 들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씨알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사람은 인격적으로 成熟(성숙)질 못한 오직 이기적인 욕심에 휘둘리는 수준이라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虛勢(허세)를 떨고 誇張(과장)을 하여서라도 자기를 어떻게든 자라와고 싶어서 늘 입이 간질거리는 그런류의 소인배라는 말이 이 말씀에 담긴 뜻이라 하겠다.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 逍遙遊篇(소요유편)에 있기를
至人無己(지인무기)라 하여
이른 사람은 自我(자아)를 내세움이 없다 하였고
神人無功(신인무공)이라 하여
자아를 버리고 정신을 자기의 참주인으로 삼은 神人(신인=영적인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 함이 없다 하였고
聖人無名(성인무명)이라 하여
거룩한 사람은 명예나 이름을 내세울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여기서 至인(지인).神人(신인).聖人(성인)은 똑같은 하나로
하나님 성령 씨알의 얼사람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으로써
하나님의 본래면목인 성령성품을 회복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몸나와 마음의 나인 자아가 말끔히 죽어 없어진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4.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이라 하여
스스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밝게 드러날 수 없다 하였다.
옳고 바름을 默默(묵묵=잠잠)히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默言(묵언)의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心襟(심금)이 저절로 感9감화) 됨으로써 옳음은 자연스레 發散(발산)되는 꽃의 香臭(향취)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지 스스로 자기가 옳다 하여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搖亂(요란)스레 저 잘났다고 떠벌려 나팔을 불질 말고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로 말없는 행함이 저절로 가르침이 되게 하라는 말이다.
知者不言(지자불언)이요 不知者多言(부지자다언)이라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없이 묵묵한데 참으로 잘알질 못하고 어정쩡하게 아는 사람들은 공연히 말이 많다질 않는가
5.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이라 하여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일을 하고도 자기 입으로 자랑을 해 버림으로써일을 한 공이 오히려 없어진다고 하였다.
6.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이라 하여
스스로 자기가 잘 났다고 자랑하고 떠벌리는 사람은 그 자랑이 오래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곧 虛勢(허세)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矜(자랑 할 긍)은 矛(창모)+今(지금 금)의 合成字(합성자)로써
지금 내손에 창이 들려 있으니 무서울게 없고 자랑 할만 하다는 글자이다.
3에서 6까지는 小人輩(소인배)들이 자기를 誇張(과장)하여 허세를 부리는 典型的(전형적)인 行態(행태)를 警戒(경계)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7ㅡ8.其於道也 (기어도야) 餘食贅行(여식췌행)이라 하여
其(그것기=1에서 6까지)는 진리로 비기면 먹고 남은 식은밥이나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군더더기 짓거리라 하였다.
여기서 小人輩(소인배)들이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 나에 마음 나가 몸뚱이에 종지하며 貪慾心(탐욕심)과 感情(감정)이 내키는데로 사는 肉身的(육신적)인 사람을 말한다.
道也(도야)는 뒤에 者(자)가 省略(생략)된 것이다.
해서 道也者(도야자)란?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나 얼의 나인 참나로 본래면목을 회복한 靈(영)적인 사람으로 하나님 義(의)와 眞理(진리)의 全身甲胄(전신갑주)를 입은 새 사람이 되어 구습의 사람이었던 몸나와 마음 나인 거짓 나의 옛 사람인 허물 껍질을 벗어 버리고 解脫(해탈)의 境地(경지)에서 大自由(대자유)에 든 사람이니
몸나와 마음 나의 貪慾心(탐욕심)으로 행해지고 빚어지는 모든 짓거리들이
한갖 식은 밥이요 군더더기들로 생각을 한다는 靈的(영적)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을 말하는 것이다.
9.物或惡之(물혹오지)라 하여무리들이 혹 그 것을 미워하고 싫어 하더라도 하였다.
여기서의 物(물)은 거듭나질 못한 소인배의 사람들을 말함이고
之(지)는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인 새사람인 精神人(정신인)을 말한다.
10. 故有道者 不處(고유도자 불처)라 하여
그러므로 참 진리를 가진 자는 머물어 살질 않는다 하였다.
참 진리를 가진자란
하나님의 성령 씨알의 참나로 거듭나 얼나의 영적 사람으로 하나님 씨알 성령의 시키심을 따라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함이고
머물어 살질 않는다는 不處(불처)란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인 거짓나에 머물어 살질 않는다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의 나가 생명을 걸고 追求(추구)하는 肉身的(육신적)인 榮光(영광)과 快樂(쾌락)과 富(부)와 名譽(명예)와 安逸(안일)과 幸福(행복)을 耽溺(탐닉)하는 貪慾心(탐욕심)을 한갖 식은밥과 군더더기 혹덩어리로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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