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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15장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노자 도덕경 15장

柏道 2020. 1. 8. 00:29



老子 道德經 노자 도덕경 15장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옛날에, 도를 잘 행하는 자는

微妙玄通(미묘현통) 꼼꼼하고 묘하며 그윽하고 열린 사람이라

深不可識(심불가식) 깊이를 알 수 없었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나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하라 한다면

豫兮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사방을 두려워하듯 주저하고

儼兮其若容(엄혜기약용)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渙兮若氷之將釋(호나혜약방지장석) 얼음이 녹으려는 듯 풀어지며

敦兮其若樸(동혜기약박)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계곡물처럼 트이고

混兮其若濁(혼혜기약탁) 흙탕물처럼 혼란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혼탁함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게 할 수 있는가.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누가 편안함을 끊임없이 움직여 점점 생동하게 할 수 있는가.

保此道者(보차도자) 이 도를 가진 이는

不欲盈(불욕영)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채워지길 원치 않기 때문에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낡게 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다.

 

개인감상

 

도 역시 말로 할 수 없는데,

도를 알고 행하는 자 역시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참 오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존재를 쉽게 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궁극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심지어 도를 알게 된 사람마저 도와 같아집니다.

그는 사람인데 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표현하기 어려워집니다.

 

15장에 도를 행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표현은 결국 '도' 자체를 묘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이는 곧 도를 아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도와 같은 속성을 가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도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지식은 같은 것을 안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안다고 해서 이데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 역시도 우리가 공부를 하듯 새로운 지식을 익히듯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도와 같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가 아니라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데아로 불리든 도로 불리든 그것이 이 세상의 근원적인 무엇이라고 한다면 나와 일체가 될 정도로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될때, 그제서야 그것은 '도'가 되는 것이고, '알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도가 통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절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으니 그저 드러난 모습만을 가지고 억지로 표현하도록 합니다."

보이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단순하고, 말이란 건 결국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언어는 모호해지고 둔해지고 불명확해지죠.

 

도를 깨친 사람은

겨울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주저하고,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얼음이 녹으려는 듯 풀어지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계곡물처럼 트이고, 흙탕물처럼 혼란합니다.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풀어지고 소박하고 혼란합니다.

 

이게 보이는 모습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세상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은 결단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치고 화려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고 명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 또한 자세하게 들어가면 균형적인 덕목을 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은 혼란스럽기보다는 명확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도를 아는 사람은 되려 혼란스러운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 혼탁은 아무것도 오르는 혼란과 겉으로 보이는 것은 같으나 같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몰라 두리번 거리는 것과 많이 알아서 두리번 거리는 것은 같으나 같지 않죠.

 

"누가 혼탁함을 고요히하여 점점 맑게 할 수 있을까.

누가 편안함을 움직여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이는 도를 깨친 이는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맑게 하고 생동하게 하는 것이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이상적인 것이겠죠. 실제로 도를 깨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를 깨쳤기 때문에 맑고 생동하는 것은 더이상 이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혼탁할 때는 혼탁해야 하고 멈출 때는 멈춰야 합니다. 죽거나 살거나 이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죽을 때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를 알게 되면 반드시 생동하려고 하고 반드시 맑아야 하려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혼탁할 때는 혼탁하고 맑을 때는 맑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압니다.

 

멈출 때를 알고 생동할 때를 아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순환입니다. 그러니 "늘 새롭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뻘

이것은 여담인데, 15장을 쓸 때 노자는 때는 겨울, 어느 자연 풍경 안에 있지 않았을까요. 묘사하는 소재를 보세요. '겨울의 강' '얼음이 녹듯' '다듬지 않는 통나무' '계곡물' '흙탕물'. 그림이 그려지는 듯 합니다.



[출처]|작성자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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