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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연구 6/ 제 7장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여호수아

여호수아 연구 6/ 제 7장

柏道 2019. 6. 7. 13:49


여호수아 연구 6/ 제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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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리고성을 함락한 후 이스라엘의 사기와 영광은 드높았습니다. 6장 마지막 절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고 하여 사기가 충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는 쓰라린 패전의 경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범죄의 주체를 이스라엘 자손 공동체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록 바로 뒤에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고 하여 죄를 저지른 사람은 아간 한 사람인 것을 밝히면서도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 전체의 죄로 간주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도 한 사람 아간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 전체에게 임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악이 관영한 땅에서는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최대한 그 은혜가 확대되는 것을 보았는데,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는 한 사람의 죄가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원리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전시나 환란시에는 반드시 소수의 의인이 나타납니다. 작년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때도 침착한 사람이 철로를 통하여 10여명을 구출한 의로운 사례가 있었고, 9.11사태 때에도 이런 저런 생명을 구하는 영웅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온통 환란과 재앙이 임할 때에는 한 사람의 의로 인하여 많은 생명이 구원을 받는가 하면 오히려 평화와 영광의 시기에는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와지는 것을 얼마든지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잘못은 개인의 잘못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그 영향이 전체 공동체에 미치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그 책임의 중함을 늘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선한 행위가 공동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최근 나온 영화 가운데 “Butterfly Effect“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는데 이 제목을 직역하면 나비효과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 어원은 이렇습니다. 동경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그것이 뉴욕에 도달할 때는 태풍이 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물론 터무니 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나 어떤 특별한 주파수의 파장은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그 동심원이 점점 밖으로 확산되어 가듯이 갈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특별한 파장은 가면 갈수록 세력을 확장하여 그 영향이 지대해짐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러한 특별한 파장 외에도 내가 지금 선택하는 아주 조그만 결정이 급기야는 전 지구상에 영향을 주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연쇄반응이라고 하지요.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차를 움찔했는데 그로 인하여 옆에서 오던 차가 놀라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그 때 그 차에 타고 있던 아이가 머리를 부딪히면서 울자 짜증이 난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기분이 얹짢아 졌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출근을 하였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눈에 거슬려 불평을 하게 되고 그 불평을 들은 사람은 공연히 기분이 나빠져서 주의해야 할 공정에 실수를 합니다. 그로 인해서 업무에 차질이 생기고 잘못없는 사람이 문책을 당해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해고를 당한 사람은 앙심을 품고 공장에 불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 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가면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습니다. 세계 전쟁까지도 가능한 것입니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이나 9.11테러 등도 얼마든지 한 사람의 생각이 한 나라, 나아가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 미국 대선 때 보여준 것도 그런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의 결과로 인해 대통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유권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부시가 되지 않고 고어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지구의 상황이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혹성에 함께 살고 있는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에 이이상 자신의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고도로 복잡해지고 얽혀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책임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인구는 60억이 넘어서 나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공생의 원리에 입각해서 의식이 발전하지 않으면 사소한 잘못과 부주의로 인해 전 인류가 함께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특히 최근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각의 파장이 결코 없어지지 않고 확산되어 우주 끝까지 미친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나의 한 부정적인 생각이 우주까지 퍼져서 별들에 영향을 주고, 나의 한 긍정적인 생각이 또한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터무니 없는 소리로 들렸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화성에 가 있는 스피릿이라는 로봇이 전파를 통하여 수억마일 떨어진 곳에서 생생한 화면을 보내오는 것도 바로 전파의 위력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뇌파, 사념들도 그만큼 빠르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 하나의 긍정적인 생각, 말 한마디가 인류의 생사를 좌우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 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14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 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19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20 아간이 여호수아에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22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를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취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23 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놓으니라 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 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이 성은 여리고에서 서북쪽으로 약 18Km지점에 위치한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곳 주민의 수가 약 12천명쯤 되었는데(8:25) 이스라엘 백성에 비하여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라는 이름은 파괴의 무더기,” 혹은 돌 무더기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엣텔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엣텔이라는 말 뜻이 아이와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아이성에서 패배를 체험하게 됩니다. 여리고 성에서의 엄청난 승전에 이은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아이성에서의 패배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이성에서의 실패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아이성에서의 실패의 근본 원인은 아간의 범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은 바친바 되었기 때문에 그 성에 있는 물건은 아무 것이라도 취하면 안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엄중하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6:18)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취하지 말라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친바 되었기 때문에 만일 그 중의 물건을 취하면 이스라엘 진이 그 바친바 된 것과 연결되어 화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타오르는 곳에서 불씨를 하나 당겨와서 이 곳에 옮겨 붙이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그러한 일을 엄두도 내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말씀을 소홀히 하고 불씨를 옮겨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욕심에 이끌려서 물품과 돈을 취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이 불씨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취하신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은 아간의 범죄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진노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자주 대화를 나누시던 여호수아에게는 일체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도 전쟁을 하기 전에 적어도 여호수아에게 만큼은 아간의 범죄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비록 악하고 어리석은 아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내 버려두셨다 해도 아무런 죄가 없는 여호수아에게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전에 아간의 죄를 처단하고 아이성에서의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내 버려두십니다. 아무런 간섭이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실패하도록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계시다가 나중에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말씀을 하십니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 현장에서도 같은 일을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뱀이 유혹하는 것을 보시고도 그냥 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하와가 꾐에 빠져 죄를 지으려고 할 때 막지 않으셨고, 아담까지 동참하려고 할 때도 그냥 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고만 계셨다는 말입니까? 이런 점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가? 참 고민스럽고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다하며 넘어가야 하는지 고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얻은 답은 이와 같습니다. 독특한 영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은 아무렇게나 그저 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못하셔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방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이 아닙니다. 송신과 수신은 쌍방입니다. 수신이 되지 않는 경우를 보면 송신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송신이 아무리 잘 되어도 수신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신자 입장에서 스스로 주파수를 변경하여 듣지 않고자 하면 아무리 송신을 보내어도 수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나 본문의 경우에도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리고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의 정확한 메시지는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수신자 입장에서 스스로 주파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어 두니 성령의 말씀은 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소리만 강하게 들렸습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아간의 범죄로 인해 그 영향이 이스라엘 자손 진영에 다 미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리고성에서의 대승은 그들의 마음을 우쭐하게 하였고 흥분에 들떠서 마음의 소리를 크게 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여호수아까지 그 수신력이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채널보다 자신의 생각의 채널이 강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별 생각없이 정탐군을 파송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는 삼천명 정도만 보내게 되었고 - 물론 더 보내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 대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기적으로 이끄는 과정”(Course in the miracles)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성령의 음성은 희미하고 듣기 어려워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작고 분열된 자아에게 말하는 자아의 소리가 훨씬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뚜렷하고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육신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도 성령의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듣지 못할 자가 없고 스스로에 대한 그릇된 자아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시각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할자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한 순간도 약해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욕심에 이끌려 자아의 음성을 가까이 두고 듣기 시작할 때 성령의 음성은 상대적으로 약하게되어 자아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시작되면 겉잡기 어렵습니다. 계속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합리화하게 되고 정당화하며 그 길로 계속 가게 됩니다. 결국 철저히 실패를 경험한 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과정이 없고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려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듣습니다. 깨어지고 회개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순간을 놓치는 것이 순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자아가 나꿔채면 그 자아의 소리를 듣고 망할 때까지 가고 마는 것이 영적 통신의 메카니즘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일시적으로 놓쳐버리면 다시 잡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미 자아가 교묘하게 합리화하면서 끌고 가기 때문에 망할 때까지 가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상입니다.
다윗이 범죄할 때도 보십시오. 그 경건한 왕이 욕심을 품는 순간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는 차단이 되어버렸고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음성만 들렸습니다. 결국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그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속에 겸손한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창 망하고 난 다음이었고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능이 순간적으로 상실되면 자아의 소리로 끌려가고 말게 됩니다. 그러면 크든지 작든지 그로 인한 결과를 맛보고야 맙니다. 쓰리고 아픕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훈련과 성장을 시키지만 지혜롭지 못한 길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나 하와, 여호수아,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스스로 그 기능을 차단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영원히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로부터 귀를 돌릴 때 그 소리는 작아지고 자아의 소리가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기회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항상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그 기능을 항상 뚜렷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 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아이성에서의 뜻밖의 패전으로 인해 여호수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하여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한참동안이나 앉아있다가 마침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그가 부르짖는 내용을 들어보면 왜 실패하였는지 여호수아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무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사실을 알았음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드린 모세의 기도를 들었고 지금 그 기도와 꼭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32:11-12)
거의 꼭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세가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긍휼을 얻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군데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도 거의 흡사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군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며 난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셨고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때도 모세는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중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14:13-19)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을 했어도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를 계속 품으실 수 없으시다는 사실을 가지고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이 또한 엄살입니다. 여호수아는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사오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해도 이렇게 큰 피해를 입는다면 그 은혜가 어떻게 온전한 은혜가 되겠는가 하고 따지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어떤 이유든지 우리가 망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크신 이름이 어떻게 되겠는가고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관찰과 분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드리는 여호수아의 기도는 결코 두려움이나 절망과 좌절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선배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끌어내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모세가 그렇게 하였듯이 여호수아도 최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긍휼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님의 언약과 영광을 들고 나오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존엄과 언약을 내세워 기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철저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10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여호수아에게 회복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마음이 급하신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하나님께서 급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다시 은혜가 임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담대함의 비결과 응답얻는 기도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거의 우리의 소원 중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마구 생떼를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효력이 별로 없습니다. 실컷 하소연하다가는 금방 시들어 버리거나 녹음기를 반복해서 틀어놓는 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연약하고 잘못해도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당당하게 하나님께 따지며 복을 주실 것을 요구하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만하게 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그런 기도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모세나 여호수아 등 신앙의 선배들이 쓴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존엄과 그 이름의 영광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받아도 할 말없는 그런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우리를 복주고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엄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고 하더라도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쇄할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긍휼을 능가할 만한 죄는 없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커서 태산같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에 입각한 언약은 그러한 죄라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따져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히려 기뻐하시고 대견해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이 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인정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 중심적이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믿음인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좋은 믿음은 그런 수준을 넘어섭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주홍같고 진홍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크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하신 약속을 붙들고 당당하게 도움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우리의 죄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중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욱 크시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비록 징계는 하실지라도 버리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깨우침을 주시는 징계를 감사드립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속히 우리를 회복시키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14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 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그럼, 하나님의 응답을 살펴보십시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에 근거한 믿음의 기도를 드리자 오히려 하나님께서 급해 지셨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불평을 하는 자에게 책망을 하는 내용도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사죄해 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강한 격려의 느낌을 받습니다. 만일 여호수아의 이 기도가 불평이나 원망이었다면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책망을 하셨을 것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가 회개하자 요나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합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1-3)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이 말은 네가 나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한 것이냐?”는 의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가 보자며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그늘을 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다 다시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넝쿨을 씹게 하셔서 시들게 하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또 죽겠다고 야단을 부립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4:8)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인의 경우도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같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는 것을 보자 속이 상하여 분을 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하시면서 그가 분을 내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을 때 아론과 미리암이 비방을 했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의 반응은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라고 하시면서 비방하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시고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당한 불평과 원망, 비방 등에 대해서 그 자체의 그릇됨을 지적하심으로 책망을 하셨습니다. 만일 지금 여호수아도 그런 차원에서 불평을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불의가 있는 것처럼 항의하느냐혹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탓하느냐
그런데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이렇게 낙담하여 엎드려 있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내가 명하는 대로 속히 순종하여 이 잘못된 일을 고치라는 격려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우리 힘으로는 넘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갈 때 얻게 되는 응답입니다. 불평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책망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근거해서 도우시기를 구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하시며 회복과 승리의 길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우리가 진정 죄인이요 연약함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실패와 범죄에 대해서 놀라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스스로 괴로와하는 일에 오래 매여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요, 넘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것가지고 고민하기보다 이를 전제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이름의 존귀함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은 책망이나 질책이 아니라 격려로 임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화를 내며 불평하느냐?”도 아니요 너 또 넘어졌구나. 이제 너의 연약함을 알겠느냐?”는 말씀도 아니어야 합니다.
아니 여지껏 무엇하고 있느냐?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속히 일어나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행하거라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속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을 따라서 즉시 순종하는 반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믿음의 자세요, 참된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져서 울고 주저앉아 있는 것은 오히려 교만한 것이요, 믿음이 없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죄에 대해서 깨우침을 얻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실패의 원인이 된 죄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시고 그에 따른 해결책까지 알려주셨습니다.
1절에서는 범죄자와 범죄의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는데 비해 11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다 자세하게 범죄의 내용과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하나님께 이미 바쳐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은 이 도적질한 행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도적질 한 행위 때문에 일부러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도적질 한 죄 때문에 내가 벌을 내려서 아이 사람들에게 패하게 했다고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적극적인 차원에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12절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즉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불을 태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을 꺼내어 가져갔다고 불을 이쪽에 지른 것이 아닙니다. 불이 붙은 것을 꺼내어 가져가니 그 불이 이쪽까지 번져서 불에 해를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벌을 내리시거나 재앙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거의 이런 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은 오히려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주시는 테스트와 같은 것이지 벌을 주시거나 재앙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댐으로 화를 당하는 일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주 원인인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해 감에 따라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우리 것이 아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단순히 고백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실제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몸을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 이이상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거룩한 산제사로 우리 몸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드리는 모습이 거의 없습니다. 내 몸 내 마음대로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바친 물건에 손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재물이든, 자녀든, 명예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졌다는 고백은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듭니다. 과연 달라야 합니다.
자녀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양육해야 하며, 재물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청지기로 관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과 더불어 행동의 변화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따라 나 자신도 드리고, 시간과 재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는 여러가지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같은 원리가 적용될 것입니다. “바친 물건을 취하였기 때문이라는 원칙입니다.
 
이어서 하신 말씀에는 준엄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만일 화근이 된 바친 것을 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조건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바친 것을 제하면 함께하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차원의 조건을 내세우는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바친 것을 제하라는 명령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만일 이 말씀을 조건으로 보면 앞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러번에 걸쳐서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을 것이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을 내세워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다시는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다면 앞의 약속은 결국은 영원한 말씀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결국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이 변개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과 의미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받은 은혜 언약의 복음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약속이 우리가 잘하면 임마누엘이고, 우리가 잘 못하면 이카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이 된다고 하면 결국 은혜로운 언약이 아니라 율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좌지우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서 영원한 은혜언약의 요소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언어분석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행위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면 이미 그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율법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표현들이 성경에 그토록 많이 나올까요? 마치 구원이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다고 여겨질 만큼 우리의 순종과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양자택일 조건문으로 보지 않고 강조형 조건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양자택일 조건문은 이렇습니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공할 것이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다양자 택일입니다.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이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많이 못벌 것이다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조형 조건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오늘 일찍 들어오면 맛있는 케익을 먹을 수 있을거다” “이번 학기에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자전거를 선물로 사주겠다
여기서는 선택의 여지를 둔 조건문이 아닙니다. 늦게 들어오면 안준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오지 못하면 자전거 선물을 안사준다는 표현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열심히 해서 자전거를 상으로 받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조건문도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할 것이다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바친 것을 제거하라는 데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물론 바친 것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상이요 실제적으로는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여호수아가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불순종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의 복음도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표현들은 모두가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를 공부하면서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하면 다시는 새롭게 할 수 없다는 말씀도 사실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모르면 언어가 가지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오해를 하거나 왜곡을 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언어가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서 참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종종 이런 형편없는 자식, 그래 가지고 뭘 할 수 있겠어?” ”너는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야는 등 극단적인 표현들을 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말들을 정황파악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매우 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교훈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섣불리 언어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도 다 하나님의 언어요 사람의 언어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하고 사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왜곡이나 오해를 하지 않고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일깨워 실패의 원인을 말씀하신 후에 회복과 승리를 위한 지침을 자세하게 내려주십니다. 먼저 그 백성들을 성결케 하라고 명하신 후에 바친 물건을 제할 것과, 또 바친 물건을 취한 자를 가려내어 그와 그 모든 소유를 불사르도록 지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명령은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친 물건을 취한 것 때문에 진노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실제적으로 화를 당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성결케 하고, 범죄자를 가려내어 형벌하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 혜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차원만 생각하고 더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그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여 벌을 받는다는 정도 밖에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자 하는 노력의 차원에서 머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범죄하면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욕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범죄의 속성입니다.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을 짓밟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여 믿지 않고 멸시하는 것이지요. 광야에서 보여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심각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14:11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라고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죄라는 차원에서 그 심각성을 말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해서 두렵게 생각하고 조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보다 본질적인 면이 드러납니다. 사실 성경에서나 우리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요 영광과 권능이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영광이 누구로 인하여 손상을 받거나 해를 당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잘못하고 온 우주가 다 반역하여 들고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는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도움이 될 것도 없습니다. 그럼 왜 성경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다는 표현이 왜 나오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한계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철이없고 무지하여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우리로 경각심과 조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본문에서 뚜렷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함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그들 스스로 화를 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안타까와 하시고 노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 이런 경험을 종종하지 않습니까? 뛰어놀다가 다치면 매우 화가 납니다. 왜 화가납니까? 제가 잘못해서 다쳤는데 왜 내가 화가 나는가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몸이 다치고 상하는 것이 그렇게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우리 세째가 제 사무실에서 놀다가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소파가 푹신푹신하다고 그냥 뒤로 벌렁 자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팔걸이 부분에는 쿠션 안에 딱딱한 나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뒷머리를 세게 부딪힌 것입니다. 그래서 혹이 이만큼이나 크게 났더라고요. 얼마나 화가 나는지 막 야단을 쳤습니다. 사실 달래주고 감싸주어야 하는데 화가나서 도리어 꾸중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아이성에서 실패하게 된 것을 하나님이 매우 속이 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범죄함으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에 대해서 매우 속이 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어디에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도록 하시는 지시가 없습니다. “성결케 하라는 지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함이요, 바친 물건을 제하라는 지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들에게 승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으며, 가려내어 모든 소유를 불사르라고 하신 명령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신 말씀이든지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함입니다. 우리가 망령된 일을 행함으로(15) 우리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 때문에 속이 상하셔서 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손해는 우리가 봅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상하는 것입니다. 남이 그래도 마음이 아픈데 사랑하는 자기 자녀가 그렇게 해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마음 아픈 것이 없습니다. 불효중의 불효가 무엇입니까? 부모에게 잘못 하는 것도 불효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불효는 자식들이 스스로의 몸을 해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죄를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손해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이 자충족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광에 더할 수도 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사실 그 깊은 의미를 보면 그렇게 함으로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손해는 우리가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옵니다. 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이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불행하면 하나님이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행복해지고 영광스러워지면 하나님이 흐뭇해 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우리의 가치를 드높이고 우리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요, 그 혜택을 우리가 그대로 받는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자신을 위해 살라는 말이 옳은 말이 됩니다. 이 말은 남을 위해 살라는 말씀과 꼭 같이 진리입니다. 서로 상충되는 말 같지만 같은 말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삶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삶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바로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자신을 위한 삶이요, 가장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인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실패하면 하나님이 더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여러분이 잘 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십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냥 말씀을 하시지 않고 제비를 뽑는 과정을 통하여 범죄자를 색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14절 이하를 보면 반복해서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이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제비를 통하여 찾아내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6절 이하에는 실제로 그런 제비뽑는 과정을 통하여서 유다지파, 세라족속, 삽디 가족.. 이렇게 점차 범위가 좁혀지더니 마침내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제비를 뽑도록 하셨을까요? 여호수아와 대면하여 말씀을 하시는 분이 왜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서 범죄자를 찾아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말로 번역된 제비 뽑기는 우리가 생각하듯 심지뽑기는 아니었습니다. 제비로 번역된 원문은 원래 작은 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처럼 종이나 투표용지를 사용하지 않고 작은 돌을 그릇에 넣어서 거기서 뽑는 방식을 택한 듯 합니다. 신약에서는 제비뽑기를 cast lots라고 하여 막대기를 던지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아마 이것도 한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가지 방법이 사용되었겠지요. 어쨋든 형식은 비슷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이 적힌 돌이나 나무 막대 같은 것이 그릇에 담겨 있고 거기서 하나를 뽑았을 것입니다. 지파로서는 유다지파가 뽑혔고 유다지파 족장들 가운데서는 세라족속이, 그리고 삽디 가족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맨 나중에는 아간이 뽑혔습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하나님은 이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에서 제비뽑기를 하는 경우가 몇 번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곳이 오늘 본문이고 요나서에도 나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누구 때문인지 확인하고자 제비를 뽑았고 요나가 걸렸습니다(1:7). 그런가 하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속옷을 가지려고 군병들이 제비를 뽑는 모습(23:34)이 나오고, 또 가룟유다의 궐석을 메우기 위해 유스도와 맛디아를 두고 제비를 뽑는 등(1:26) 여러 사례들이 등장을 합니다. 제각기 나름대로 의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제비뽑는 방식은 요나서에 나오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죄인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특별히 이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요나도 꼼짝없이 뽑혔고 본문에서도 아간이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 방법을 쓰셨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런 저런 의견들을 내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악한 아간으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런 과정을 택했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점점 그 범위가 좁아져 올 때 속히 깨닫고 자복하고 나오도록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간은 뽑힐 때까지 숨기고 있을 정도로 패역무도한 자였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런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아간으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이런 제비뽑는 방식을 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반복해서 가까이 나아오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지파대로, 족속대로, 가족대로 ,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14).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까이 나아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냥 제비를 뽑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파와 족속들이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어떤 의도가 들어 있습니까? 보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전 민족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도록 하신 뜻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체 백성이 다 일어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일보 앞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 중에서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그러자 유다 지파 전체가 다 앞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 중에 족속별로 서 있는 가운데 다시 세라족속이 뽑혔습니다. 이제는 세라족속이 모두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서 삽디 집안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삽디 집안의 사람들이 또 가족별로 나왔더니 갈미 집이 뽑혔습니다. 갈미 집에 속한 남자들이 모두 앞으로 나왔고 갈미 집에서 마침내 아간이 뽑힌 것입니다.
단순한 범인 색출의 목적이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를 이렇게 기가막히게 뽑아내신다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에 중심이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제비뽑기를 통해 찾아 들어가는 것은 공동체 전체 속의 한 인물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거꾸로 돌아가 봅시다. 아간은 갈미의 아들로 그 집에 속했습니다. 갈미는 삽디집안의 한 아들이었습니다. 또 삽디는 세라 족속에 속하였고, 세라 족속은 유다 지파의 소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 지파인 것입니다. 결국 아간은 이스라엘 민족 속에 있는 자로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임을 분명하게 확인시키심으로 아간의 범죄는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인 것을 깨우치시고자 하신 뜻이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몸을 정밀하게 검진을 하듯 하여 그 병의 근원을 찾아내고 아주 작은 암세포가 결국은 치명적인 해를 가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먼저 피검사, 소변검사로 이상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장기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 위장이든지 췌장이든지 정밀 검사를 들어갑니다. 내시경을 찍고 초음파 검사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조직검사까지 하여 감염여부를 확인하고 판정을 내립니다. 그 후에 적절한 치료조치를 내리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작은 바이러스요 작은 암세포이지만 결국 그것이 자라면 생명을 빼앗는 것임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간은 한 개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화를 당케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킬 뿐 아니라 그 아간이 남이 아닌 바로 나의 동족이요 가족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욥이 보기에는 완벽해 보였고 그런 칭찬을 받을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치유되어야 할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 하나 앞으로 나오게 해서 결국은 그 깊은 속에 들어 있는 자아를 폭로하도록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욥 자신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환란과 시련, 친구들의 정죄 등의 과정을 통하여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교만의 죄가 머리를 내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치유를 받았을 때 비로소 그는 정금같이 나오는 축복을 받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목적은 온전함입니다. 죄나 연약한 것을 조금도 남겨두시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 쪼개어 마음 깊이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치유하시기 위함이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은 그 영향력이 전 공동체에 미칩니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자로서 개인이 아님을 늘 인식하고 내 말한마디, 생각 하나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나의 좋은 말 한마디, 생각 하나가 전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하여 온 인류가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오늘도 그렇게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심으로 우리 주위와 세상이 밝아지도록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간처럼 이기적인 마음, 불순종하는 망령된 행실을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으로 바꿀 때 그를 통하여 세상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100마리 원숭이 이론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100사람의 의식이 일깨워지면 그 영향력이 전 세계로 전파된다는 이론인데 우리는 이미 100명이 넘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그 빛을 발한다면 세상의 인류가 그러한 의식으로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처럼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20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여차 여차히 행하였나이다 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22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를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취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23 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놓으니라 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 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마침내 범죄한 아간이 제비에 뽑혔습니다. 마치 로또에 뽑히듯 차례차례 그 범위가 좁아지더니 마침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 범죄자로 색출이 된 것입니다. 이제 공개 심문과 재판이 진행됩니다. 여호수아는 부드럽게 질문을 합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사뭇 부드러운 어조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준엄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이렇게 부드러운 말로 그를 대하는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심문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는 거국적인 재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마치 임재해 계신 것처럼 행동합니다. 23을 보면 “..그것을 여호와 앞에 놓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니라 여호와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23, 24, 25)라는 표현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지금 재판을 받고, 또 집행관과 증인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는 이 재판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제비를 뽑으라고 하셨는지, 그리고 그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재판을 행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의 재판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어서 마음에 깊이 각인을 새길 순간입니다. 그래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합니다. 아마도 이 순간 여호수아는 선임자 모세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잘 아시는 사건입니다. 므리바에서 물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회중들이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그만 모세는 흥분을 해서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 모세는 그만 화를 내며 반석을 두번이나 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물은 나왔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여호와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9:12)는 엄중한 문책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모세나 아론이 화를 낼만 했습니다. 그렇게 패역하게 말을 듣지 않고 원망하니 분을 낼만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자비하심을 나타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모세가 일을 그르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자비하심이 잘 드러나야 할 순간에 화를 냄으로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켜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모세의 이러한 상황을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바로 그러한 순간임을 알았습니다. 아간의 범죄만 생각하면 분을 내며 책망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뺨이라도 한대 올려야 할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신중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무언가 귀중한 교훈을 주시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침착하게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의 역할만 합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 속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드러내시지만 하나님의 본 마음은 형벌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화를 내면서 다그쳤다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흥분하고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뜻을 그르치고 맙니다. 공동체의 범죄라는 의식을 망각하고 정죄하는 마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부드러운 말투로 아간에게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빼놓지 않고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비록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 수치스럽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순간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냄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 속깊이 생각하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권징과 심판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행하여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아간에게 권하자 아간도 솔직하게 자신의 범죄를 자복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다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간의 말을 듣고 숨긴 물건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여호와 앞에 두었다고 합니다(23).
지금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있고 지금 행해지는 모든 심문과 재판의 과정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거룩함을 나타내시고 계심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더불어 행동을 합니다. 24절에 일부러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재판이 이스라엘 모두가 동참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 것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공의를 행할 때 취해야 할 중요한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훈계할 때 화를 냄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또한 자녀로 하여금 혼자 죄의식을 갖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살리는 데 목적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행함과 동시에 엄중하게 불의를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책임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자칫 망각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한다고 하면서 분노를 표시함으로 자기 의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손상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교만한 태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로서 모든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하고, 특히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짐을 지며, 그런 가운데 죄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죄를 다 자복을 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시행되어야 했습니다. 아간과 그에 속한 모든 가족들, 짐승들, 그리고 물품들은 모두 돌로 침을 당했고 불사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돌무더기를 높이 쌓아서 모든 민족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아간의 자녀들의 처형입니다. 범죄는 아간이 했는데 왜 그의 자녀들까지 돌에 맞아서 죽어야 하는지 그 뜻을 이해하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족보의 나열을 보면 아간이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세라 족속까지는 족속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삽디부터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간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살아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100세를 넘지 않았을텐데 손자뻘의 아간이라면 지금 제 나이 정도였을 것입니다. 40세 정도로 본다면 그의 자녀들은 아직 10살 전후였을텐데 어떻게 이들을 다 돌로 쳐 죽여야 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형벌받을 자를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고 하셨지만 이 말씀은 악의 결과가 자여손 삼사대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말씀이지 아비의 죄를 함께 처벌을 받는다는 의미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아비의 죄를 아들이 담당하지 않을 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에스겔 18:19이하를 보면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빚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셔서 이런 연좌제 형벌이 합당치 않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간이 범죄했는데 죄없고 어린 자녀들이 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까? 도무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지만 여리고 성의 백성과 짐승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뜻이 어떤 잔인한 살육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되었기 때문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는 내용적인 의미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 땅에서 제거하여 하늘로 올리는 형식을 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였고 불에 태워 하늘로 올렸습니다.
지금 아간의 가족도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그 자녀들과 가축들도 함께 죽였고 불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깝고 불쌍해 보이기도 하지만 법에 의하면 당연한 일이 됩니다. 바쳐진 물건을 취함으로 그들이 바쳐진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 법에 따라 그 가족이 모두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감사해야 할 것은 그 범위가 아간과 그 자녀로 한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위로, 옆으로 더 확대되었다면 훨씬 그 범위는 넓어졌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법의 위력을 보게 됩니다. 옛말에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천지는 인자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홍수나 지진, 태풍 같은 것은 선한자 악한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 진로와 지역에 있으면 화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이 가지는 속성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늘을 원망해도 소용없고 지도자를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생로병사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미 정해진 법이기 때문에 신앙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신을 찾고, 어떻게 하든 신의 도움을 빌어서 불운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또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을 쳐 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심적인 안정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런 현상은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아무리 제사를 잘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 이상하고 두려운 것이지 알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은 이렇게 함으로 운행이 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항거하여 정복하려는 태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이 순응하고, 수용하고, 조화를 이룸으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레니티 기도(serenity prayer)의 지혜가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수용할 수 있는 평정의 마음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특히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God may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that I cannot change, the cou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