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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연구 5/ 제 6장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여호수아

여호수아 연구 5/ 제 6장

柏道 2019. 6. 7. 13:47



여호수아 연구 5/ 제 6장

       

6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이제 우리는 성경의 기록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여리고성 함락, 그것도 돌다가 고함을 쳤는데도 그 튼튼한 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는 기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흥미진진한 내용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어린시절 교회에서 성경을 배울 때 이런 기적의 이야기는 마냥 가슴을 설레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늘 이러한 외형적인 사건 중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신앙을 따지는 차원을 넘어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이런 현상적인 기적을 보고 흥분하기 보다 기적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끄시는 방식을 깨닫는 것을 통하여 참된 기적이 무엇인지 알고 체험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신앙이 성숙해가면 갈수록 현상적인 기적을 소원하기 보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기적으로 체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실줄 믿습니다. 어릴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리고 만물과 인생에 대한 이해수준도 낮습니다. 그러다보니 무언가 신비하고 특이한 사건을 경험하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과정을 다 거쳤습니다. 잊어버려서 모르지만 갓난 아이에게는 매순간이 기적입니다. 모든 일이 생소하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에 날마나 매순간마다 경이로운 체험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느 정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이이상 신비한 것들이 아니라 평범한 것들로 변해버립니다. 그 신기하던 장난감도, 새로운 음식이 주는 경이감도 점점 평범해져 갑니다. 그러다가 사춘기 들어서서 한동안 연애감정때문에 한차례 큰 파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사실은 몰라서 그런데 기적의 원리가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억지로 할 때는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고, 사랑할 때 모든 것들이 다 달라보이고 좋아보이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깨달음이 참으로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화할 능력이 없으니 애태움과 고통, 방황의 기간으로 지내버리고 맙니다.
이 때 인생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여전히 채우지 못한 불만족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무언가 더 가지고 채움으로, 즉 환경을 바꿈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잘 넘기면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행복이 외부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뚜렷하게 나타나는 좋고 싫은 느낌을 경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예쁘다고 하는데 나는 보기가 싫고 있는 것도 역겨울까? 왜 남들은 별로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고 그 사람과 함께만 있으면 왜 그리 좋을까?” 여기에 귀중한 인생의 지혜가 담긴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결코 외적인 환경이나 남들의 평가가 나의 삶을 만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행, 불행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마음을 조절할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불안함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성장하면서 이 원리를 적용해 나갈 줄 알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히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주만물과 인생의 삶을 볼 때 반드시 그 속에는 설계자, 창조자, 주관자가 계심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못찾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인생의 한계를 많이 체험하게 되면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깨닫게 됩니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이 하나님의 섭리에 인생을 맡길 때 비로소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지혜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우리 기독교는 보다 긴밀한 인격적인 교제로 나아갑니다.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인격적인 만남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셨고 성령께서 지금도 그 일을 가능케 하시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엄청난 은혜를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만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헤맵니다. 그 불만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는 것은 이러한 불만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를 바래서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형편에 있는 자들을 이끄셔서 평안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을 마냥 들어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분명한 원리를 따라 행하시기 때문에 무턱대고 요구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역사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것도 분명한 원리와 목적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텍스트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교훈은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라도 흔해지면 기적으로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넜을 때 그리고 불기둥 구름기둥이 인도했을 때 그들은 환호 했습니다. 감격하여 찬양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3일 물이 떨어지고 물을 발견했는데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인 것을 발견하자 이전의 감격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통해 단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감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달이 못되어 또다시 양식문제로 불평이 나오고 맙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지자 굶어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전의 기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하나님은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만나를 하늘에서 내리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만한 기적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또 얼마나 감격하고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아시다시피 얼마 못가 이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불평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것을 좇아가면 반드시 봉착하게 되는 상황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래도 못 깨달으면 지속적으로 현상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불만과 좌절감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더 크고 자극적인 일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 과정은 불행과 고통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 기적을 체험한다 해도 일시적이고 금방 시들해지고 맙니다.
속히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더 큰 기적, 더 신비한 일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적에 들어 있는 원리는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신다는 것이 기적의 원리요 원동력인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면 기적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리고성 정복에 있어서 그 핵심도 바로 그것입니다. 7이라는 수가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친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여리고 성이든, 무슨 장애물이든 맥없이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원리가 강해지면 현상의 변화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기적이 있는 것이 당연한 차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모든 일을 기적으로 인식하는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니 기적이요, 지금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바로 기적입니다. 평범한데 무슨 소리냐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니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만나가 40년을 내려도 기적으로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그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금방 시큰둥해지고 생의 활기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기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매 순간 평범한 삶이 모두가 기적입니다. 이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기하게 큰 장애같은 일이 앞을 막아서도 간단하게 처리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렵고 쉬운일이 없습니다. 기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의 보기에 쉽고 어렵지 하나님께는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진 자는 큰 기적 작은 기적 따지지 않고 매 순간을 기적으로 삼으며 살 것이요, 사람들이 보기에 커 보이는 기적도 별로 놀라지 않고 체험하는 수준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누가 지혜롭겠습니까? 무언가 신기한 일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평범한 순간순간의 삶을 기적으로 체험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겠습니까?
 
이제 여리고성 함락 사건으로 돌아가 봅시다.
최근 고고학 발굴로 여리고성의 규모와 형태가 드러났습니다. 성 둘레가 약 600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그리 큰 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중으로 된 성벽 위에 3-4m정도 되는 석조 장애물을 설치해 두어서 벽을 무너뜨리고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으로 포위작전을 써서 고립화 시키는 전략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면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하여 반격할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곤란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장 1절을 보면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버티기 작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리고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내려와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구별해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작전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점령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승리를 그 손에 쥐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정복을 위하여 내리신 명령을 보면 특이합니다. 7제사장이 7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서 행합니다. 그러면 그 뒤로 궤가 따르고 무장한 군사들은 제사장들의 앞과 궤 뒤를 호위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한 바퀴씩 6일을 돌고 7일 째는 7바퀴를 돈 후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크게 외침으로 성이 무너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7이라는 숫자입니다. 7제사장, 7나팔, 7, 7바퀴 등 계속해서 7이라는 숫자가 등장하는데 분명히 어떤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6일 동안 성을 돌 때는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고 나팔소리만 내도록 하였다가 7일째 7번째 성을 돌 때 크게 소리질러 외치도록 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떤 뜻이 담겨있을까요?
먼저, 7이라는 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수는 완전 수, 성령의 수, 하나님의 수로 등장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이 7이라는 수가 자주 등장하는데 아시아의 7교회, 7촛대, 7사자, 7, 7나팔, 7대접 등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본문에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7이라는 수를 반복해서 등장시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이상한 방향으로 그 의미를 찾지 않아도 뚜렷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과 5:15의 말씀과 연결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표시를 나타내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친히 와서 내가 이 편도 저 편도 들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이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임을 증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구별하여 받으신 증거를 얻도록 7이라는 수를 통해 가시적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이 여리고성 정복과 밀접하게 연관된 신약의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여러모로 비슷한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특별하게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나 군대장관은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의 현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무장을 하고 칼을 들고 섰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으로 오신 주님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과 여러 증인들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군 사령관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군대장관이 한 말은 거룩한 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주로 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1:3).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확장임과 같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다음으로,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친히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사람은 지시를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가나안 정복전쟁의 주된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도 같은 맥락입니다. 복음 사역의 주인공은 성령이셨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증거되고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복음을 증거하고 성령의 능력을 행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성령행전이라고 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친히 전쟁을 하시는 사인을 먼저 주셨습니다. 7이라는 숫자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7제사장, 7나팔, 7일 등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전쟁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심을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을 통하여 보여주셨고, 방언 등의 표적을 통하여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증거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중 장벽으로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역사로 맥없이 무너진 것처럼, 바벨탑 이후로 도저히 소통되지 않을 것 같은 언어의 장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요 예표입니다. 가나안 땅의 모든 성이 그렇게 무너진 것이 아니듯이 항상 그렇게 한 언어로 통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여리고성이 함락된 후 그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이기심과 욕심의 성이 무너진 후 아무도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4:32). 온전한 헌신이 드려진 것입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요한 예표였고 모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리고성에서 아간의 범죄로 인해 환란이 임하고 그 집안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성령 강림 직후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로 성령을 속이려 하다가 심판을 받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신약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준엄한 심판이 행해진 것입니다.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14 그 제 이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16 일곱번 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여리고성 함락 과정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취한 포진을 보면 무장한 군사들이 전위로 앞장을 섭니다. 그 뒤를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고 뒤 따르며 그 다음 하나님의 언약궤가 진행하였습니다. 그 뒤를 또 무장한 군인들이 후위로 행진을 합니다. 백성들은 이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한 쪽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백성들은 어떤 전략이 시행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여호수아가 일찌기 일어나서 성을 돌라고 하니 6일 동안은 한바퀴씩 돌았을 뿐입니다. 아무 소리없이 지시만 따랐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성을 도는 동안에 일곱 제사장들이 나팔은 계속 부는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철저히 침묵하도록 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10)
사실 우리는 언제 외쳐야 할지 알고 있지만 당시 백성들은 언제 외쳐야 할 시점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여호수아의 명대로 성을 돌고 외치라는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호가 6일 동안 없었고 7일 째도 마지막 바퀴를 돌 때야 비로소 내려졌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확인한 바와 같이 작전기간 내내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 소리만 울릴 뿐 사람의 소리는 일체 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사를 행할 때 그 일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사람의 소리는 그 어떤 소리든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입에는 나팔이 들려졌고 그 나팔 소리는 힘차게 울려퍼지도록 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분명한 소리를 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차야 하고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 14:8)는 말씀처럼 나팔은 뚜렷하고 분명한 소리를 내도록 제작된 악기입니다.
동시에 나팔은 왕의 등장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도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19:13, 19),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실 때에도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라고 하여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주의 재림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목적으로 하고, 또한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와 행진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일체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말씀을 통하여 선포될 때에는 오직 경청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있다가 외치라는 지시가 내릴 때에 비로소 큰 소리로 외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낸 말들, 즉 불평과 원망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유난히 이들은 야단을 떨었습니다. 출애굽한지 얼마 안되어 홍해가 가로막히고 애굽군대가 추격해 올 때 이들의 입은 가만히 있지 못하였습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4:10-12)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온통 소음과 외치는 소리인데 불평과 원망 밖에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감격도 잠시 물이 없자 금방 또 원망을 합니다.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15:24)
양식이 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16:2-3)
악독한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행적을 보면 그 입을 열때마다 나온 것이 불평이요 원망이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박탈당하고 말았는데 그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이 입술로 범한 원망과 불평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신세대에서는 일체 말이 없습니다. 요단 강을 건널 때도 보면 일체 말이없고, 할례를 시행할 때, 그리고 유월절을 지킬 때도 일체 말이 없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뒤에 나오는 아이성 정복에서 실패한 후에도 그들의 입에서는 불평이나 원망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큰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람의 말이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거스리는지를 여리고성 함락을 통해 깊이 각인을 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 입술을 열면 쉽게 나오는 것이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냥 두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나팔 소리만 들려야 합니다. 나팔 소리는 승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의 눈과 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말씀만 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나팔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팔소리가 분명하게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나팔 소리로 내 안에서 그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에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나타날 것이며 어떤 어려움과 환란이 밀어 닥쳐도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일 수록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큰일났다고 외치거나 대책을 세운다고 수군수군하는 것은 불안만 가중시켜 결국은 온 공동체로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런 때일 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높이 선포되고 사람들의 말은 철저히 통제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관심 속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켜야 했지만 그렇다고 무관심의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외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항상 긴장하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칠 때는 주저없이 외쳤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비결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소리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만 크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높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은 깨어서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외칠 때를 준비하는 침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외치라, 나서라고 할 때 즉시 외치고 진격해 들어감으로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극한 시험과 환란도 이렇게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니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21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 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 하매 23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24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17절 이하에서 반복되는 말을 보면 바치다는 단어가 여러번 되풀이되며 강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하람사람이 어떤 물건을 사용하거나 오용하지 못하도록 따로 구분시켜 하나님께 넘겨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차원만이 아니라 아예 이 땅에서 없애버리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17절의 바치라는 말을 바쳐 없애버려라고 번역을 하였고 특히 21절에 나오는 멸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바치다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 때에 그 바치는 것은 땅에 남겨두지 않고 완전히 없애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땅에 남겨두지 않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불에 타는 것들은 모두 다 태워 없애 버렸습니다(24). 그러나 죽이거나 불로 태워 없앨 수 없는 것들은 구별하여 하나님의 전 곳간에 들였습니다. 이것들은 귀해서 따로 둔 것이 아니라 없앨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전 곳간에 둠으로 하나님께 드린 증거를 삼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하던 몇가지 답을 얻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남녀노소 뿐 아니라 모든 짐승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는지 그 답을 얻게 되고,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우리가 생각하듯 죄악의 뿌리를 근절하라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혹은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땅 위에 남겨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이런 차원에서 요구하셨습니다. 단순히 자식을 죽이는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시험 속에 죽여서 불태워 올리는 형식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삭을 온전한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시는 의식을 행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자식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할 수 있는가?”는 의문도 이렇게 풀리게 됩니다. 자식을 번제로 불에 태우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 초점이며, 원칙에 의거하여 죽여서 불에 태워 올리는 방식이 적용된 것 뿐입니다.
 
또 유월절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짐승의 초태생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했고, 아들 중 장자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34:19-20). 이 또한 애굽의 모든 짐승과 사람의 장자를 하나님께서 취해 가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은 남겨두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생명은 구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0:11이하를 보면 특이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계수할 때는 계수함을 받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수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 대로 반 세겔을 내어야 하였습니다. 이상하지요? 왜 수를 세는데 속전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윗왕의 계수로 인하여 재앙을 받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수를 계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세는 것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서 그들을 다 죽여 없애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속전 규례를 정하여 대신 반세겔을 내게 하심으로 그 의미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행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에게 주신 이 규례입니다. 만일 수효를 계수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 바 되어서 반드시 속전을 내어야 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고 계수를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다윗은 세가지 선택 가운데 한가지를 택하여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3일간의 온역으로 인해 7만이 죽는 큰 재앙을 맞게 됩니다. 사실은 7만뿐 아니라 모두 죽이게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멈추신 것입니다. 다윗이 거기서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재앙이 그쳤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구조사에 그렇게 진노하시고 엄청난 재앙을 내리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수효를 세는 자체가 하나님께 바침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여서 취하시는 반응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반드시 생명에 대한 속전을 내어야 했습니다. 혹은 특별한 경우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지기도 하였습니다. 사무엘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한나의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함에 따라 젖을 떼자 죽이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에서 평생 봉사하도록 드려졌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이 원칙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속전이 되셨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 2:6)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신 의미와 더불어 우리의 생명을 값으로 사신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반세겔 속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속전이 되실 것을 예표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을 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를 없앰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다는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give up). 하나님께서 취해 가신다고 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남겨두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신해서 드려질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생명의 속전이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의 속전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남겨두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명은 값으로 산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몸을 사신 이유는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 생명을 드리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몸과 삶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가 되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취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려진 우리가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몸을 취해 가 버리십니다.
 
우리가 헌신한다고 할 때는 이런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드리는 것이며, 불태워 완전히 이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속전을 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가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헌신되었다면 이이상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과정 속에 라합의 가족이 구원을 얻는 모습이 나옵니다. 라합은 원래 바쳐진 자들에 속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하고, 불태워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에게는 맹세로 얻은 구원의 보증이 있었습니다. 라합 자신이 생명을 걸고 정탐군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와 함께 한 가족과 친척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하는 현장에서 라합과 그 일가는 이끌어 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구원을 받은 대상에 대한 열거가 나오는데 사람으로는 라합과 그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족까지 포함이 되었고 또한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반복해서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22, 23, 25) 사람외에 가축이나 다른 짐 보따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달랑 몸만 빠져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호와께 바쳐진 것들 가운데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여서 태워야 했고, 그 밖의 물품들도 다 불살라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라합 한사람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물품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을 가족 중에 한사람만 믿어도 온 가족이 다 천국을 간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은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능하면 넓게 확장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라합의 부모나 형제, 그리고 친족들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좀 냉정하게 이야기 하자면 창녀 딸과 형제를 둔 그 집안이 뭐 그리 대단하였겠습니까? 그들의 삶은 아마 형편없었을 것이고 망나니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라합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최대한 확대되어서 적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날에는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만 불러도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가능하면 최대한 넓게 확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특징입니다. 비록 행실이 나쁘고 형편없는 삶을 사는 자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남들에게 까다롭게 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능하면 최대한 그 은혜를 확대하여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로 인해 막히거나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가족 뿐 아니라 친족까지도 구원을 었었고, 집안의 물품까지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렇게 폭넓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아간의 경우를 보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간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 중에 속한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된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발각이 되자 실제로 죽임을 당한 자들은 아간의 가족 모두였고, 짐승들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물품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졌던 것입니다.
7:24 이하를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치고 불사르고..”(7:24-25)라고 하여 아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한 것입니다. 원래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전을 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생명을 이 땅에서 유지하며 살도록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하나님께 바친 물건에 손을 댐으로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도록 하는 결과를 빚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36명의 생명을 잃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큰 낭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라합 한사람의 의로 모든 가족과 친족이 구원을 받은 반면 아간 한사람의 범죄로 모든 가족과 재산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은혜의 원리와 공의의 원리가 함께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라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동시에, 그의 자녀들에게서는 조그만 흠이라도 남겨두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관용과 은혜를 베풀어야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하고 또 하여 하나님이 완전하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힘쓰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요소는 남겨두면 그것이 심판을 받을 때 그와 연루된 모든 것들이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철저히 조심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이나 명예는 단지 그것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루된 것이 있으면 모조리 끌고 나가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리고성은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림으로 함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성들을 점령할 때는 이러한 방식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성도 그렇고 다른 성들을 점령할 때도 그 거주민과 그에 속한 물건들을 죽이고 불살랐지 성 자체를 허무는 방식을 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리고성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 자체까지 철저히 허물어 버리시는 역사를 통하여 여리고성을 비롯한 가나안 땅 모든 성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자신의 것으로 취하셨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본문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여호수아의 저주선언이 나옵니다.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하여 이 성은 다시는 중건되어서는 안됨을 확실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졌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시 이 성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저주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아합왕 때 벧엘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다시 견고한 성읍으로 재건하려고 터를 쌓다가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던 것입니다(왕상 16:34). 악한 왕 아합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극도의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어리석은 히엘이 일어나서 여리고 성을 쌓다가 그 저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계자는 막내아들을 말합니다. 기초를 쌓을 때에 맏아들을 잃고 성을 완공하는 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을 잃는다고 했는데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성을 쌓는 과정 중에 중간의 아들들이 차례로 죽고 마침내 막내아들까지 잃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그것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와 막내라는 것은 전 아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여리고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힌 자아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자아, 옛사람은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6-7)
우리의 자아, 옛사람, 죄의 몸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멸하여졌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속의 여리고성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멸하여진 우리의 옛사람에 대해서 멸한 상태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대로 둔다는 의미는 말씀대로 죽었다는 선언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의지하지 못하고 다시 우리가 살리는 일이 많습니다. 여전히 자아가 살아있는 것으로 인정을 하는 순간 이 자아의 여리고성은 다시 건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과 동시에 우리의 귀중한 것들을 잃게 됩니다.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치 기초를 놓는 것처럼 장자로부터 차자, 계자까지 잃게 됩니다. 먼저 확신이라는 장자를 잃고 다음으로 능력이라는 차자, 승리라는 셋째아들, 영광이라는 막내아들 등 인정하면 인정할 수록 잃는 것이 커지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결코 다시 세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처리하신 우리의 자아에 대해서는 결코 다시 인정해 주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너는 이미 죽었다이러한 선언과 함께 자아를 통하여 속이는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속아서 다시금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는 실패와 좌절, 두려움이 엄습해 올 것입니다.
 
반대로 자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자아에 속한 갖가지 욕심들과 불안, 두려움, 의심 등의 성들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면 완전한 정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장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셨듯이 우리 속에 있는 자아의 머리를 완전히 깨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오늘도 승리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여리고성 함락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함께 정리해 봅시다.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한 단계 깊은 적용이 필요합니다. 그저 표면적으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 같은 철옹성도 단숨에 무너뜨리십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러한 기적을 체험합시다라고 해 버리면 전혀 성경의 의도와 다른 쪽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리고 성 함락 역사는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고 그렇게 하신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120문도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간구의 기도가 아니라 기다림의 기도였습니다.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 주시옵소서하면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실패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의도, 하나님의 뜻은 제쳐두고 자기 좋은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만일 여리고성이 기도의 응답으로 그렇게 무너졌다면 왜 아이성과 다른 성들은 그런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 때는 그럼 기도가 부족했던 것입니까?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여리고성 함락 사건은 그냥 하나님께서 한가지 특별한 역사를 보여주신 것 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이렇게도 역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항상 마음으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끄시든지 항상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깊으신 뜻을 따라 행해 나가시며 준비된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능력을 체험하며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 여리고성의 교훈은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로 연결됩니다. 외적인 큰 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에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나으니라 (32:16)”고 함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힘쓸 것을 권면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생각이나 방식대로 되지 않음을 절실하게 자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그렇게 쉽다면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원리는 철저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접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믿음의 고백과 더불어 그 법칙을 적용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노력하는 것은 무모한 노력이고 헛고생이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