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여호수아 연구 3/ 제 3, 4장 본문
여호수아 연구 3/ 제 3, 4장
3장
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 하니라 2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이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 전기가 마련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7절을 보면 특이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고 하셔서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결정적인 지도자의 위상을 확립한 것이 홍해를 건널 때였습니다. 그 전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사람들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 쓰시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보고 그들은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출 14:31하)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기 앞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같은 계기를 만드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가르는 기적을 행하도록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여호수아와 실제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목도하게 하시려는 의도이신 것입니다. 실제로 요단강을 건넌 후 이런 결과를 내었습니다. 수 4:14을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라고 함으로 마침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셔서 권능을 베푸시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오늘은 3:1의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부분을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여호수아의 습관을 한가지 보게 되는데 그것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뿐 아니라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도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는 묘사가 나오고(6:12), 아이성에서 처음 실패 후에 범죄한 자를 잡아낼 때도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공의를 시행하였습니다(7:16). 또한 다시금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아이성을 공격할 때도 일찌기 일어났습니다(8:10). 이처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부지런함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긴장하고 신속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새벽형 인간”이라는 책이 나와서 이목을 끌고 있는데 새벽기도로 시작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내용입니다. 아침 일찌기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묵상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그날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며 알차게 사는 비결임에 분명합니다. 특히 만나가 내린 시점이 새벽이었고 아침 해가 뜨면 스러졌다는 기록을 살펴볼 때(출 16:21) 새벽에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아 하루를 사는 것이 영적인 지혜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저녁을 맞이하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아침에 일어나면서 부활을 경험합니다. 아침 일찌기 힘차게 출발한다는 것은 부활의 생명을 충만하게 체험하며 누리는 삶이요 의욕으로 가득찬 삶을 나타냅니다.
요단강 가에서 삼일을 유숙한 후에 여호수아는 유사들을 통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립니다. 3절을 보면 먼저 레위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그 뒤를 좇을 것을 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좇는 것이 아니라 약 반마일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온 백성으로 언약궤를 충분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모두가 그 뒤를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시내산 이후 특별하게 제작된 성물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비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담겨져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숙영할 때는 회막을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지만, 행진할 때는 언약궤가 맨 앞서 행하면서 인도해 나갔습니다(민 10:33-36). 이처럼 언약궤가 앞서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을 앞장서서 인도하셔서 요단강도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가시적인 증거였습니다.
최초로 사람이 지음 받았을 때부터 최후까지 이 원칙은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임을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실패의 근본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실패한 것이 인생의 실패요, 여기에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고 받는 것도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바로 이 원칙에 순종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침일찌기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요 성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이요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를 하는 것은 또한 덧붙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은혜가 되든지 안되든지, 기도가 되든지 안되든지 따지지 않고 예배 하는 자체, 말씀을 듣는 자체,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인식하고 우리는 힘써 이 일을 행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변화와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삶을 앞에서 인도하실 때 우리 입장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성결”입니다. 5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하는 지시가 내려졌는데 몸과 의복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교통하기 때문에 외적인 성결을 무시해서도 안되고, 그것만 강조하는 것도 지나친 것입니다. 몸의 정결을 통하여 마음을 더욱 새롭게 할 수 있고, 마음을 정결케 하는 표시로서 몸의 정결을 동반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목욕재계 하여라”라고 번역했는데 몸의 정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몸을 정결케 함으로 마음가짐도 새롭게 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음에 분명합니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것은 마음자세를 가다듬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이 외형적으로 표현될 때는 모든 더러운 것을 제하고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종종 “몸의 단장품을 제하라”는 말씀으로도 표현되었는데(출 33:5,6) 이 “단장품”은 단순한 장식물이라기 보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어떤 장신구들을 말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호신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제한다는 것은 초점을 온전히 한군데 맞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씻는 것보다 여럿으로 나누인 마음을 가다듬어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성결의 우선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그리스도)께만 그 마음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문제입니다. 돈문제, 건강문제, 가정문제, 교회문제...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이 등장하면 이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끌어가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하나님, 말씀,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 자체가 시험에 빠지는 것이요,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시험이요, 하나님을 보지 않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쉽게 실패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그 문제로 온 마음이 모아지니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과 교회가 살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쉽게 이 초점을 놓쳐버립니다. 그리고 쉽게 부화뇌동하여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많으면 교회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 든든하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십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제직회를 통하여 저는 그런 모습이 매우 약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다음 한가지로 모아진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흐린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로 마음이 모아져도 그 마음이 흐리면 거룩함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거울을 닦듯이 마음의 흐린 부분을 씻고 닦아서 맑게 하나님께 비추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라디오 주파수로 예를 들자면 여러 채널이 있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한 채널만 남기는 것이 단장품을 제하는 차원입니다. 그리고 그 한 채널도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잡음을 없애고 맑은 음파를 잡도록 하는 것이 더러운 것을 씻는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가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기적과 영광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정리를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나타내실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히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등을 내려놓고 오직 빛과 등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뒤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성결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여러 우리의 초점을 나뉘게 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점이 맞추어진 후에는 그 초점이 뚜렷해지도록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온전히 집중함으로 말씀의 빛이 강렬하게 비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15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권위를 백성들 앞에 높이신 것처럼 이제 여호수아를 백성들 앞에 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요단강 물을 멈추게 하는 이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이끄심을 온 백성에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널 때와 요단을 건널 때를 비교해 보면 몇가지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가르시는 방식에서 차이가 납니다. 홍해를 가르실 때는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심으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벽이 되고 그 가운데로 길이 난 것입니다. 반면, 요단 강은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쪽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멈춤으로 인해 염해로 내려가던 물은 중단되고 흘러 내려오던 물은 쌓여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우기가 되어서 물이 많던 시기인데 그 많이 흐르던 물이 갑자기 멈춤으로 인해 한쪽 편으로 쌓이는 엄청난 광경을 연출하였습니다.
모세의 홍해사건은 성경에서 세례로 해석을 합니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라고 하여 바다를 통과하는 것은 그 물 속에 잠김으로 자신의 자아가 죽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물 사이로 통과하도록 하셔서 물에 잠긴 것을 의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힘으로 자신의 정과 욕심을 세상에 다 넘겨주고 자신은 그에 대해 죽었음을 외형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반면에 요단강을 건널 때는 이렇게 갈라지고 그 가운데로 건넌 것이 아닙니다. 밀려오는 물을 막아 버렸고 그로 인해 물이 멈추어 서 버린 형상을 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물결을 맞서서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말씀위에 굳게 선 믿음의 사람들은 이제 세상과 맞서서 싸워 이기는 자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6:11을 보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되어 있는데 표준성경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악마의 간계에 맞 설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KJV는 “Put on the whole armor of Go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against the wiles of the devil”로 되어 있습니다. Stand against입니다. 맞선다는 말은 바로 마주서서 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숙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나오는 차원에서 나아가 이제는 세상과 맞서서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와 그리스도의 의로 무장을 한 자에게는 그 어떤 세상의 물결도 침범하여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을 뿐 아니라 비로소 세상을 공격하여 정복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순서에서 차이가 납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바다 위로 펴도록 하셔서 물이 먼저 갈라지도록 하셨습니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 손을 물 위에 펴기만 했는데 물이 갈라진 것입니다. 반면에 요단강은 먼저 제사장들이 물에 발을 들여 놓아야 갈라졌습니다.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3:15하)
홍해는 하나님께서 먼저 갈라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널 때는 하나님께서 먼저 갈라주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들여 놓아야 했습니다. 그 때 물이 멈추어 쌓이기 시작했고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로 진행하여 그 가운데 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넌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맨 제사장들을 목회자나 교회 영적지도자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우리의 영혼이라고 해도 좋고, 새롭게 변화받은 마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기적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순종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크게 달라진 방식입니다.
4장
4:1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3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하라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 두 사람을 불러서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가운데서 돌 열 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
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 10 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치기까 지 요단 가운데 섰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 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 12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 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 사만명 가량이라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14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 1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16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
3장이 요단 강을 건너는 사실이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면 4장은 요단강 도하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초점에 맞추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미 3:12절에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택하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왜 택하는지 설명이 없었는데 4장에서 비로소 그 이유를 말합니다. 각 지파에서 1명씩 12명을 택한 이유는 요단강 도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모두 건너자 선발된 12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서 있는 제사장에게로 가게 하여 요단 강 바닥의 돌을 각각 한개씩 취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12개의 돌을 요단강 건너편 길갈, 유숙할 곳에 두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12돌을 쌓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강 가운데 12돌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듯이 강이 다시 흐르면 그 기념비는 물에 잠기게 됩니다. 혹자는 강 가에 쌓았다고 하지만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이 선 곳, 즉 강 가운데입니다. 따라서 강 가운데 세웠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 잠기는 것을 대비하여 다른 12돌 기념비를 요단강 건너편 길갈에 세우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사실상 기념비는 요단 강 안에, 그리고 길갈 이렇게 두군데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념비를 쌓는 목적은 후대에 역사적 증거를 남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혹시 누가 이 돌들이 무슨 뜻인가 물을 때 하나님께서 요단 강물을 막으시고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신 일을 증거하여 하나님을 경외케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자주 어떤 기념비, 혹은 기념물을 세워서 그것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삼도록 명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사실 법궤 속에 든 돌비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자체도 기념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과 보호를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회막을 짓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임재와 속죄의 가시적인 증거로 주셨고, 할례나 각종 제사와 절기 등도 바로 그러한 의미로 주어졌습니다. 그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사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책도 그런 기념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기록의 내용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함으로 참된 생명의 삶을 살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럼 실제적인 현장, 그리고 그 현장에 세워진 12돌 기념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이요,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6:26-27의 말씀처럼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즉 진짜는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요단 강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지만 바로 그 현장이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고 섰던 장소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 바로 우리의 마음 속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심으로 증거하는 우리 마음입니다.
예레미야의 새언약의 내용도 같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이 말씀을 믿고 우리 속에 살아계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기록된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시 12돌이 같은 모양으로 세워진 것처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밖에 세워진 12돌만 보아서는 정확하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열두 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때 체험한 사람들의 입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멈추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마른 땅을 건너게 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는 답이 전해지듯이 성령의 조명을 받은 자들이 성경의 참의미를 풀이해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조명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의미를 알기 어렵고 실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확신하는 자는 명확하게 말씀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고 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확신 가운데 참에 거할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19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마침내 요단 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칩니다. 길갈은 원래 있었던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붙이라고 주신 지명입니다. 그래서 5:9에서 그 이름의 의미가 나타나는데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는 영적인 뜻을 부여하여 “길갈”(굴리다, 벗기다)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굽의 수치가 요단강을 건너면서 마침내 제거되었다는 말씀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홍해를 건넘으로 애굽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이상 애굽이 추격해 올 수 없는 위치로 나온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세상과 결별을 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넌 것으로 애굽의 수치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언약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광야에서 40년이나 방황한 것은 도리어 수치를 더하기만 했습니다. 애굽과 이방 나라로부터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멸하시려고 애굽의 손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비난을 듣게 하였던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란 무엇을 말합니까?
노예로 지냈던 일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노예적인 의식이 애굽의 수치의 본질입니다. 단순한 노예로 지낸 역사적 사실보다 노예적인 의식에 매여서 늘 의존적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한 애굽의 수치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을 때 출애굽 세대들은 이 의식을 떼어버리지 못하고 결국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새로운 믿음의 세대가 일어나 요단강을 건넘으로 인해 이 노예정신과 불명예스러운 광야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꼭 같습니다. 감격 속에서 홍해를 건너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을 합니다. 말씀을 배우면서 점점 영적인 지식을 쌓아가고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완성이 아닙니다.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도 하고 말씀을 배우기도 하지만 삶에서 변화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옛습관이 나오고 연약함에 사로잡힐 뿐 아니라 불신앙적인 반응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여전히 노예의식, 즉 의존적이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허망한 광야생활만 연장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 수록 애굽의 수치는 더욱 커집니다. “광야에서 멸망시키려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욕심이 많고 더 나쁘더라”는 말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패턴의 믿음입니다. 전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의존심,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도무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두려움 때문에 그 입에서 불평과 원망만이 터져나옵니다. 그럴수록 “애굽의 수치”는 점점 더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속히 길갈에 도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이이상 애굽의 수치의 본질인 노예정신과, 열등감, 패배주의, 불평, 원망 등의 패턴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변화된 삶이 나타날 때 비로소 애굽의 수치는 사라지고 세상이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정하게 되어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요단강을 건너는 수준은 어떤 것입니까?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군소리, 불평, 원망”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수준은 늘 불안과 두려움으로 불평과 원망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지도아래서 요단강을 건너는 신세대로부터는 전혀 그런 요소들이 사라지고 신속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증거입니다. 우리 입술에서 변명이나, 불평, 탓 등이 싹 없어지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기적을 보아야 믿는 수준에서 나아가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수준으로 나가는 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수준입니다. 믿음이 앞서고 결과가 따라오는 패턴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너는 것은 세상과 단절을 나타내는 세례의 예표라면,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노예정신 같은 연약함과 단절을 나타내는 영적 성숙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해만 건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광야의 혹독한 연단과 훈련을 통과한 후 요단강을 건너는 영적 성숙을 이루어야 비로소 애굽의 수치, 즉 노예정신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이 보기를 원하고 그로부터 교회와 성도의 참 능력이 나타납니다.
[출처] 여호수아 연구 3/ 제 3, 4장|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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