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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연구 1/ 서론, 1 장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여호수아

여호수아 연구 1/ 서론, 1 장

柏道 2019. 6. 6. 15:47


여호수아 연구 1/ 서론, 1 장

        

개 관
 
여호수아는 구약 역사서에 속하는 책으로 가나안 땅 정복과정(1-12)과 그 땅의 분할 및 정착 과정(13-24)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신세대에 의한 가나안 땅 정복의 역사는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가를 자세하게 보여주어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서가 됩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의미요, 바로 예수의 이름의 히브리어식 호칭입니다.
 
1. 저 자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호수아라는데 큰 이의가 없지만 여호수아의 사후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가 다 여호수아의 기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갈렙의 헤브론 정복기사(15:13)나 옷니엘의 드빌 정복 기사 (15:15-19), 그리고 단 지파의 레센 정복기사(19:47)등은 여호수아 사후에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의 죽음 기사(24:29-31)과 뒤를 이은 엘르아살의 죽음 (24:33) 등도 여호수아가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들 기사는 다른 사람의 기록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러한 내용들은 후대의 가필로 말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여호수아가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24:26)
 
2. 기록 연대
 
여호수아서의 기록 연대는 BC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다윗 시대에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서 쫓겨 났는데(삼하 5:6-9) 본 서에는 아직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15:63) 다윗시대 이전이요, 옷니엘의 드빌 정복 기사(15:15-19)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사사 옷니엘 이후 기원전 12세기 이전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내용은 여호수아의 생전이며, 여호수아서 전체가 편집된 시기가 이 시기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본서는 역사서이기 때문에 저자나 기록 연대 등보다 본문의 내용 자체가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로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중심 주제
 
본서의 중심 주제는 가나안 정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이 마침내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취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증거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악한 세상에서 건져내셔서 마침내 여호수아를 통하여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하나님의 구원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 개인의 구원과정으로 연결해 보면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한 스스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을 뿐 아니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 구원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일차적인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이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의미인데 모세 자신이 물에서 건져낸 바 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세상을 상징하는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것이 일차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절에 이 내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 악한 세대악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차적인 구원은 먼저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일이었습니다. 디도서에서도 이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2:14) 마찬가지로 우리를 건져내는 구원이 먼저입니다. 이러한 건져내는 구원이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 이루신 구원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는 죄사함에 대한 강조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핵심이 유월절과 홍해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예표요, 홍해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는 일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이 여호수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같은 여호수아가 등장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구원을 완성토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한 구원은 건져냄의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복함의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죄를 속하고,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받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와 싸워 이기고, 악한 것들을 제거하는 구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4)고 하여 깨끗하게 한 후에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세상으로부터, 마귀의 정죄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의 31개성을 정복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은 이러한 정복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신 것이 출애굽이요 광야생활입니다. 그러나 이 정복에 참여하여 구원을 성취할 믿음은 소극적인 믿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졸라대기나 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도무지 교훈을 얻지 못하는 세대는 이 구원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이루는 자들은 믿음의 세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해 나갈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체험하는 그런 실제적인 정복이 있는 자라야 진정한 구원을 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아의 성이 하나 하나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두려움, 불안, 의심, 시기, 다툼, 욕심....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나갈 때 이러한 정복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구원... 이제 우리는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런 위대한 정복의 대열에 동참하는 축복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생각,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는 정복대열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자세가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는 핵심입니다. 여호수아를 불러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확신의 권고말씀이 세번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여호수아서를 공부하는 내내 이 확신을 마음에 깊이 새기심으로 놀라운 승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1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의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40년간이나 백성들을 인도해 오던 모세가 죽고 새로운 지도자로 여호수아가 세움을 입었습니다. 모세로부터 안수를 받고(34:9)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여호수아는 오랫동안 모세의 시종으로 모세의 지도력을 목격한 자입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위대한 선지자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게 했는지 매우 주저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신으로 충만케 하실 뿐 아니라(34:9) 말씀으로 세번이나 반복해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를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와 우리와의 관계를 먼저 정립하고 말씀을 숙고해 봅시다. 그래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대장으로 모시고 따름으로 승리의 영광을 체험하는 차원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적용을 하게 되면 매우 수동적인 자세가 되고 맙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여호수아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안에 모신 우리들 자신으로 보고 적용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동적으로 따르는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앞장서는 자세가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치르는 전쟁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이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직접 적용해야 합니다. 특히 신약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용사로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자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여호수아를 우리로 보고, 여호수아가 치르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우리 자아, 세상의 유혹, 마귀와 싸우는 싸움으로 보고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직책을 맡기실 때 그에 합당한 위치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4:9을 보면 모세가 안수할 때 지혜의 신으로 충만케 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성령을 지혜의 신으로 구체적인 특징과 더불어 묘사하는데 백성을 이끄는데는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던 것과 같이 백성을 인도하는데는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그 뜻을 삶에 잘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든, 가정의 지도자든, 혹 자신을 다스리는 자로 살든 가장 중요한 은사는 지혜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성도 개개인을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했던 것을 기억하면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모세를 이은 지도자로 세우시면서 먼저 가장 필요한 지혜의 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마귀와 싸우고 세상과 자신을 다스릴 자로 부르실 때는 먼저 지혜를 주십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여러분들은 이미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는 자만큼 지혜로운 자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아침 일찍 하나님께 나와 경배하고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이미 지혜로운 자들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스스로 이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존중하는 것 자체가 지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미 지혜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말씀을 읽지 않고 듣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가 지혜가 부족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말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제가 제일 안타깝게 여기는 일이 이것입니다. 이처럼 매일 아침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삽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도 권면을 하지만 여러분도 적극적으로 권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서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말씀묵상은 제쳐놓아서는 안됩니다. 특히 교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은 무엇보다 이 일에 최우선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데 소홀하면 교회는 시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도 무엇으로 성도들을 이끌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어쨋든 우리가 함께 성도들이 아침 한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아 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실 때 2절에서는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여 현재형을 썼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하여 현재완료, 즉 과거형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미래의 일인데 과거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언약이 확실함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4절과 6절에서는 “..너희 지경이 되리라”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고 하여 미래형을 또 사용합니다. 같은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현재, 과거, 미래형을 모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엿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현재, 과거,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며 미래의 일도 현재와 과거의 일처럼 여겨짐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영원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보았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함으로 이미 미래를 현재로 당겨서 체험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되면 미래적인 약속이 이미 과거의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재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산다면 무슨 차이가 있고 재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시간의 제약을 넘을 수있는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약속을 굳게 믿고 행하면 이미 미래의 것을 과거에 성취된 것으로 받아들여 지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했을 뿐 아니라 하늘에 앉힌바 된 체험도 할 수있게 되었습니다. 왜 이 복을 바울만 누리고 우리는 누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지금 여호수아는 아직 요단강도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이미 광야와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실제로 가나안 정복으로 이루어졌고 다윗시대에 완전하게 성취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임마누엘의 은혜로 무장을 시키십니다. 5절을 보면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늘 동행하시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라는 기가막힌 말씀이 들어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흔히 쓰는 말로 천하무적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군대 있을 때 무적해병이라는 말을 구호로 사용하였는데 사실 그 구호야 근거도 없고 사기진작을 위해 과장한 것 뿐입니다. 좀 잘한 것 몇가지 가지고 그렇게 큰소리 치는 것을 다들 애교로 보아주지만 사실은 교만한 말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무적이라고 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적세계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결코 우리를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의 족속들도 그들만의 힘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수호신이 있었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받은 말씀은 모든 신위에 뛰어난 신이신 하나님께서 네 편이 되어 도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여호수아를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편이 되신 여호와로 인해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 가운데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이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27:1-3)고 한 시편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체가 우리의 절대적인 안전의 보장이요 확실한 능력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절대적인 확신이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어떤 핍박과 환란이 와도 능히 견뎌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이 약속은 그저 주어진 약속이요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한다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잘못하면 떠나시는 분이 아니심을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흔들리면 뿌리채 흔들리게 됩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이루셨고, 죄사함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죄인되고 원수되었을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친히 스스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은혜가 우선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은혜를 받기 위함도 아니요, 구원을 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구원을 받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요 특히 우리 스스로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경찰을 보고 지레 겁을 내는 것은 범죄자입니다. 경찰이 좀 보자며 가까이 오기만 해도 겁을 내어 도망을 하는데 경찰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범법자로서 자책이 되어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경찰과 안면이 많고 또 자신이 철저히 준법하는 자라면 그럴 필요도 없고 오히려 반갑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고, 은혜 받았다는 증거요 우리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그 자녀됨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게 되면 은혜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마음에 평안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되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스스로 가책과 정죄를 받아 낙담하고 좌절하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늘 묵상하고 지켜 행할 때 더욱 확신이 강해지고 담대해져서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먼저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순종이요,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이 강해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강한 격려의 말씀으로 우리를 확신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6절부터 9절까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의 언약이 확실함을 증거함과 동시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가막힌 은혜의 복음을 말씀하셔도 듣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이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
아무리 하나님께서 증거를 보여주셔도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할 수 없습니다. 불이 내려도, 기적이 일어나도 의심하는 자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도 강제로 주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억지로 믿음을 강요하시거나 주입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듯 반복해서 강력한 권면으로 강한 믿음을 가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반복해서 묵상하고 새기게 되면 우리 마음 속에는 믿음이 싹트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7절에는 더 강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강화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스스로 굳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합니다. 9절에서는 더 첨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능력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우리는 늘 이 말씀으로 자신을 붙들고 굳건하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한번 같이 외쳐 봅시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극히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이 말씀을 녹음기가 자동으로 돌아가듯이 머릿 속에서 돌아가도록 하시고, 구호를 외치듯 늘 외치시며,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판에 새겨 늘 이 말씀이 찬란하게 빛이 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10 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11 진 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곧 바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여호수아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본문이 맨 먼저 나오는 반응이요, 37절에서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는 법을 말씀하시자 9절에서 곧 바로 순종하는 모습이 등장하며 14절 이하에서 그 순종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의 흐르는 물이 쌓여 서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열 두돌을 쌓으라는 지시에도 즉시(then) 순종하는 모습이 나오고(4:4), 할례에 대한 명령도 지체없이 시행됩니다(5:2-8). 위대한 여리고성의 함락과정도 보면 지체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시행됨을 볼 수 있습니다(6:1-21). 비록 아이성에서 실패로 한 순간 좌절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회복하는 역사를 나타내었습니다(7-8).
이처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신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되묻거나, 의심을 하거나, 다시 해 달라는 요구하는 일 없이 즉시 그 말씀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습관을 점검하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은 기도와 더불어 해야 한다는 생각과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밝혀 주신 것을 가지고 또다시 요구하는 그릇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예로 금방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듯이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은 복음의 핵심과도 같은 말씀으로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요 응답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약속을 몰랐거나 받기 전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옵소서, 떠나지 마시옵소서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드린 후 말씀으로 확실한 약속을 받았으면 다시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다시 함께 하옵소서기도를 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믿음이 약해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속히 벗어나야 할 습관이지 그 자리는 믿음의 자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성경에 다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내용을 보면 이미 성경에서 응답된 것이 매우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 믿음으로 구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곧바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보여준 것처럼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요, 우리의 삶에서도 곧바로 효력을 발휘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약속을 이미 받았습니까? 이미 하늘의 신령한 복과 죄사함, 자녀됨, 인침, 성령내주, 부활, 하늘에 앉힌 바 된 일도 과거의 일로 응답이 주어진 것을 우리는 바울의 증거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좀 의아한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듣고 진중에 두루 다니며 유사들에게 전달한 말인데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먼저는, “양식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 만나가 그친 것은 요단강을 건너 그 땅의 소산을 먹을 때였습니다(5:10-12).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한 때부터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양식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만나는 매일 먹을 양식이었고, 단지 6일째만 안식일을 위하여 이틀 것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평일에는 만나를 이틀치를 거두면 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은 어떤 양식을 준비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무난한 해석은 이미 앞에서 미디안과 바산왕 옥과 아모리왕 시혼 등을 정복하면서 획득한 전리품 가운데 곡식, 혹은 가축등이 들어 있었다고 보는 해석입니다(32). 어쨋든 여기서 양식을 준비하는 것은 만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준비물로서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는 삼일 안에 이 요단을 건너라고 했는데 사실 요단을 건너게 된 것은 삼일을 훨씬 넘어서입니다. 두사람의 정탐군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적어도 하루는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을 했습니다. 그리고 라합의 말을 듣고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산에서 사흘을 머물렀다고 되어 있습니다(2:22). 그 후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왔고 여호수아는 보고를 받고 또 삼일을 지난 후에 백성들에게 명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일주일은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에서는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하기를 삼일 안에 요단을 건너서 들어간다고 말을 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굳이 날짜의 정확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삼일이라는 날을 받아서 전달했다기 보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에 대해 확신했기 때문에 가나안 입성이 임박한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따라서 날수의 차이보다 여호수아의 확신에 초점을 두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성령의 체험을 하면 곧 예수님이 오실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울도 마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처럼 말했고,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예수께서 오실 것으로 예언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시행착오들이 발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날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본질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급박하게 재림하실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지 날짜를 주시려는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날에 대해서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게 해 두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날이 언젠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곧 재림하실 것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데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확립하십니다. 다급함이 없이는 긴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는 이런 급박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생생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12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13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4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15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이어서 등장하는 장면은 르우벤, ,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지시내용입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보면 아직 요단을 건너기 전에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 그리고 미디안을 쳐서 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21-32). 그래서 상당한 땅과 전리품을 획득합니다. 그런데 르우벤 족속과 갓 자손, 그리고 후에 므낫세 반 지파가 와서 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주기를 모세에게 요청을 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분배받지 않고 이 땅을 기업으로 얻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어떻게 너희만 여기에 머물려고 하느냐 하며 질책을 하자 이들은 부녀자와 유아들만 여기에 두고 남자들은 정복전쟁이 마칠 때까지 앞장을 서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래서 허락을 받아 그 지역을 기업으로 분배받게 되고 남자들은 함께 정복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32, 3).
본문은 바로 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약속대로 처자와 가축은 여기에 머무르지만 남자들은 요단을 건너 정복전쟁에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답을 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생각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심을 따라 변덕을 부리던 과거 선조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고, 가나안 정복 전쟁 가운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며, 또 약속을 모세와 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약속을 어기려면 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변하였고 믿음과 신실함으로 무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자신들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나서고 도리어 여호수아를 격려하며 나선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정복전쟁 마지막까지 앞장을 서서 전쟁을 치루었고 정복이 완성된 후 처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조화를 보게 됩니다. 아무리 지도자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앞서 나간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불신앙하며 따르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광야 백성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신실하고 유능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백성들의 믿음이 연약할 때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영도아래 있던 신세대는 바뀐 자들이었습니다. 믿음과 용기, 신실함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단체에 적용하면 영적 지도자와 함께 온 성도들이 믿음으로 화합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는 차원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불평하는 자들은 물러가고 긍정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믿는 일에 하나가 될 때 도리어 이들이 지도자를 격려하는 수준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이요 신실함의 증거인지 모릅니다. 지도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보이는 일 없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온전히 한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모두가 사는 길인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적용하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하라는 식의 메시지로 악용할 수도 있으며, 혹은 그렇게 적용하여 맹목적인 순종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모습은 어떤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된 결과로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외형적인 교회모임에 적용해서 이렇게 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이렇게 되는 비결로 보다 근원적인 부분에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 개개인의 영혼과 육신에 적용하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는 우리의 영혼, 즉 성령의 인도함과 지시를 받아 우리의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을 가리킵니다. 반면 백성들은 우리의 육신, 혹은 자아입니다. 모세의 영도하에 있을 때는 우리의 육신, 자아가 여전히 연약하고 무지하여 두려움과 이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영혼이 주도를 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인도를 해도 육신이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욕심으로 반항을 하고 거역을 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여러가지 훈련을 받아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요 자아의 옛습관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완전히 성령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자아가 일어납니다. 이전의 악습과 불신앙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된 자아가 일어난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이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의 게으름과 불평하는 습관, 세상적인 것에 애착을 가지던 그러한 습관이 영적인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습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세대입니다. 이 새로운 습관은 이이상 육신의 욕심을 따라 이기심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무엇이 진정 생명의 길인지, 자신을 위한 길인지 깨닫는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무능과 연약함에서도 벗어났고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담대함과 신실함으로 자신의 삶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능력을 소유하였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습관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영혼을 격려합니다.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우리의 육신이 이렇게 반응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제 육신의 목숨잃는 것을 두려워 마시고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가소서. 제가 철저히 도우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혼과 자아가 일치가 될 때 그 때부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겠다는 말씀의 의미도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과 혼(자아)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