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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연구 4/ 제 5장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여호수아

여호수아 연구 4/ 제 5장

柏道 2019. 6. 7. 13:45


여호수아 연구 4/ 제 5장

        

5
 
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요단강을 멈추게 하신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들과 대적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특별한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극도로 올려주었습니다. 당대뿐 아니라 대대로 전하고 기억할 위대한 역사적 유산이 된 것입니다. 반면 대적들에게는 그야말로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을 잃게 하는 효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이 소문이 얼마나 신속하게 전파되었든지 산지(아모리 족속)와 평지(가나안 족속) 할 것없이 가나안 땅 전역으로 전해졌고 그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가나안 7족속 가운데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만이 언급된 것은 이 두 종족이 대표성을 띨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산지와 평지에 거하는 족속들의 주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두 족속은 가나안 7족속 모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들은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식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서술을 자세히 보시면 오히려 그 우선적인 초점은 여호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 즉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우선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를 접했을 때 이들의 마음은 녹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녹는다는 것은 완전한 절망과 낙담을 말합니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한 점 용기와 소망이 남지않고 녹아 없어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을 모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은 그들로 하여금 정신을 잃게하였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영혼이 없어져 버렸다가 됩니다. 우리 말에 혼비백산했다는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일 것입니다. 완전히 넋나간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여 승리하는 원리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두려워하게 되고 굴복하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셨고, 성령 강림으로 인해 세상에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미 마귀와 세상에 대해서 완전한 능력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앞에서 패퇴하여 무기력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성령의 강림을 통해 보여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과 아름다운 삶의 변화를 보고 자신의 힘과 영화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이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대대에 이르며 결코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성령께서 오순절 오시는 것처럼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복되면 그 가치가 반감될 수 있고 영원함의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번으로 족하며 완전한 증거로 삼아야 합니다.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선언하며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기력해 진 것은 스스로 능력의 근원을 버렸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마귀를 무력하게 하는데 스스로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마귀로 하여금 미혹하도록 길을 열어두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행사와 회의, 프로그램들은 난무하지만 정작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마귀가 낙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뿐 입니다. 이 소식만이 그를 절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이 복음위에 서야 합니다. 철저히 서야 합니다. 그 어떤 미혹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세력을 쥐고 역사하는 세상은 성령의 강림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참 사랑과 능력의 삶을 이루는 것을 볼 때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각종 악한 영들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영혼이 없어졌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세상의 영은 사라집니다. 이기심과 탐욕, 시기와 다툼, 분쟁 등의 악한 영이 사라지고 사랑과 화합, 기쁨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4-47)
이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따라서 또 다른 기적을 구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러한 증거를 나타내시는 성령께 순종함으로 먼저 내 속에 있는 두려움과 탐욕의 영을 물리치고 성령께서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가정과 교회, 사회로 확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 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넌 후 곧바로 여리고로 진격하지 않고 행한 의식이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가 할례의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월절 의식이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내려진 명령(17:9-14)이었고, 유월절 의식은 출애굽 당시 10번째 재앙을 내리기 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진 규례(12)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유월절 의식은 시기가 되어서 지켜진 것을 볼 수 있는 반면 할례의식은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새롭게 행해진 의식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동안 행해지지 않고 있다가 새롭게 명령이 내려짐으로 소급해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 할례 의식이 어떤 것이며, 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넌 후 다시금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할례는 문자 그대로 자르는 예식인데 남자들의 성기 끝부분을 잘라내는 의식으로 요즘의 포경수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면서 남자면 누구든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으로 언약관계에 들어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90세가 되어서도 할례를 받았고, 이스마엘은 13살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남자의 성기 끝 표피를 자르도록 하셨을까요?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고대 근방지방에서는 이미 할례가 상당히 널리 퍼져있던 의식이라고 합니다. 주전 3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에서 할례가 언급되고 있으며 조각물들에서 할례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할례의식은 전통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이나 아랍국가에서는 할례의식이 공식적인 의례로 거행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바로 이 할례의식입니다. 이로보건대 이 할례의식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행해졌다면 그 독특성이 강조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할례행위 자체로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여성들에게도 할례가 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최근까지도 여전히 소녀들에 대한 할례의식이 행해지고 있어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금지하는 추세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으로 내려와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할례의 명령이 이방나라의 의식과 어떤 연관성은 있을지라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편적인 의식이 어떻게 특수한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살펴봄으로 할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한 규례로 제정되기 이전의 할례의식은 주로 금욕,” 혹은 신에 대한 헌신과 관련된 의식이었다고 봅니다. 남성의 성기는 그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요, 힘의 상징이며, 또한 쾌락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을 가진 성기의 표피를 자른다는 것은 사실 성기 자체를 자른다는 상징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후손들의 생명을 신에게 바친다는 표현으로, 또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즐거움을 모두 신에게 의탁한다는 표시로서 이러한 할례를 행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여성들에게도 할례가 행해졌다는 사실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세히 언급하기는 뭐하지만 여성들의 할례에서도 주로 제거되는 부분이 즐거움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신에 대한 헌신의 표시로 자신들의 생식기관을 드리는 표시로 할례가 행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심으로 이러한 할례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일방적인 충성과 헌신의 표시가 아니라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의 규례를 살펴봅시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2:9-14)
이 말씀을 보면 할례 자체가 언약에 속하며 동시에 언약을 살에 새기는 표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행한 의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일방적인 헌신과 충성의 표시가 아니라 쌍방간의 언약의 표시라는 점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두 인격이 대등한 입장에서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가진 신과의 의식은 맹목적인 복종입니다. 두려움에 기초하여 무조건적인 굴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이방인들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으시다고 일방적인 명령이나 지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 너는 이렇게 하라. 만일 쌍방 간에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기면 죽음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언약 속에 포함된 요소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언약을 어기실리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공정하게 느끼고 책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계약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스도.. 등과 맺으신 언약이 모두 이러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언약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 언약을 어기면 죽음이 선고되었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까지 구원을 이루셨고, 인간이 아무리 잘못해도 그 구원을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순종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통과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영원히 멸하실 수 없습니다. 징계를 통하여 돌이키게 하시고 순종하는 자리에 있도록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난과 연단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셔야 하고, 우리는 순종 안하고... 그러니 길이 없습니다. 매와 훈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의식 속에 들어 있는 의미입니다. 이방인들이 행하는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후 다시금 할례 의식을 행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새롭게 하는 의미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백성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순종 외에는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할례는 매우 번거롭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마취를 하고 잘 드는 가위로 양피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싯돌로 마취도 없이 행해야 하는 외과수술이었습니다. 이 할례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또한 낫는 기간도 최소한 3일 이상이 걸렸습니다. 이처럼 번거롭고 괴로운 일을 행하게 하신데는 그만큼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단체적인 할례를 행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할 때 10번째 재앙을 앞두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12:43-51). 그 때도 이스라엘 민족이든지 돈으로 산 자든지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듯 그 이후 광야에서는 할례를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1세대 외에 광야에서 출생한 2세대는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광야에서 머물도록 계획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1년에서 1년 반정도였기 때문에 이 할례문제가 그리 심각한 상황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 반역함으로 광야생활이 40년으로 늘어남으로 그만 모든 신세대가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다시금 할례를 행하도록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 할례가 의미가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외형적인 할례보다 내면적인 할례가 강조되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반복해서 마음, 혹은 입술, 귀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을 명했습니다(6:12, 30, 26:41, 10:16, 30:6, 44:7, 6:10). 이러한 외형적인 할례의 무용성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할례를 행했지만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데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 할례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고 결국 바울에게 와서 할례는 무용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다시는 어떤 외적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에 들어와서 할례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본질은 같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식은 다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새롭게 하였지만, 그리스도 이후에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하는 차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힘으로 행하도록 우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이요, 귀와 입술에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인데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사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참된 신자의 삶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할례는 세례와 구별이 됩니다. 오늘날 세례가 할례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홍해를 건너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이 구별되었고,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세례가 병행되었듯이 의미에 있어서도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예표된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세상에 대하여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에 씻음의 의미가 들어와 죄사함을 받은 것이 첨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믿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행하는 어떤 요소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자신과 세상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됨을 받아들이고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할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례 속에 이 요소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의 요소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종의 헌신, 이 두가지가 세례 속에 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것은 이 두 요소가 충분하게 설명되고 이해된 가운데 적용될 때 비로소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아도 그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요소가 약화된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처럼 그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언약을 새롭게 하고 마음에 할례, 귀와 입술의 할례를 받는 차원에서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헌신이 있어야 비로소 할례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요단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친 것이 정월 10일이었습니다.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고 할례를 행한 후 낫기를 기다릴 때에 정월 14일이 되어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유월절 규례가 나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12:43-48).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의 초점이 먹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에는 유월절 하면 어린양의 피가 먼저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를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의식이 깊이 각인 되어 있어서 유월절의 상징이 어린 양의 피에 더 강조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본문을 보면 오히려 피보다 음식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앞으로 지킬 유월절 규례를 이르면서 먹는 문제만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군은 먹지 못하리라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꺽지 말지며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12:43-48)
보시면 모두가 먹는 이야기입니다.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는 일은 출애굽 당시 10번째 재앙을 내릴 때 한번 밖에 없었습니다. 유월절의 초점은 먹는데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9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 유월절을 지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보면 피를 바르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먹는 이야기만 나오는 것입니다(9:11-12).
유월절 규례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이 나오는 레위기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정월 십 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 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23:5-6)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에 대해 말씀하시며 먹는 것에 초점을 두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22:15-16)고 하신 후 떡과 잔을 가져다가 성찬예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두주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유월절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월절의 핵심은 피를 바르는 것보다 먹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추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의 메시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린 양의 피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죽음의 천사, 즉 마귀로 하여금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대속적인 희생을 인정하셔서 우리를 받으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 효력은 진노를 피하도록 하심입니다. 그러나 유월절의 보다 본질적인 요소는 먹는 것에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 쓴 나물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의 의미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 성찬식도 그 본질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있어서 양식이 되고 음료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함을 받은 부분에만 지나치게 강조를 해 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죄사함을 받은 것을 중시한 것입니다. 물론 그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훨씬 적극적입니다. 심판을 면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먹어서 사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데서 그칠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으로 채우고 그것이 양식이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생명의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계획된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먹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시작(10번째 재앙)에 유월절을 먹기 시작해서 유월절을 먹는 것으로 마침내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서서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하자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시던 양식을 거두신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이상 특별한 기적을 통해 베푸시는 양식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중요한 진리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양식과 관련한 우리의 영적 성장과정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는 비록 수고를 하고 노동을 하였지만 그들이 먹은 양식은 얻어먹는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농사를 하고 가축을 길러서 거기서부터 양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체제 자체가 애굽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참된 자유가 없었고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얻어먹는 입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살 때, 혹은 믿는 자라고 하여도 여전히 세상에 매여 종노릇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때의 모습입니다. 그 때는 수고하고 노력을 하여도 얻어먹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한 것처럼 간혹 고기가마 곁에서 고기를 먹기도 하고, 마늘과 파, 부추 등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풍성함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 얻어도 그것이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직접적인 음식도 그렇고 정신의 양식이라고 하는 지식이나 경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다는 것 먹어보아도 시큰둥하고, 아무리 좋다는 것에 심취해 보아도 진정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그것들을 얻는데 요구하는 것이 너무 무겁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바쳐야 하고, 땀과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탄식하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참된 양식도 아닌 것을 겨우 고생해서 얻어먹고 사는 형편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아직 그리스도로 인해 채워지는 영적 양식을 얻지 못하는 삶의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택한 자녀들을 이러한 수준에서 끌어내십니다. 그리고 신령한 양식을 준비하셔서 우리로 하늘의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바로 그 출발점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유월절은 그 핵심이 먹는 것에 있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이 양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에서부터 끌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된 양식을 먹으며 참된 삶의 훈련을 시키시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마침내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맨먼저 부딪힌 문제는 물의 문제였습니다. 3일길만에 물이 떨어져 불평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라에 이르렀지만 쓴 물이어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뭇가지를 던지게 하심으로 그 물을 달게 하시고 물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한지 한달 만에 준비해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먹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양식과 물을 먹게 됩니다.
이 단계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1-32) 바로 이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수준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직업을 바꾸라는 말도 아닙니다. 원리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 전까지는 세상에 매여서 얻어먹는 수준에서 이제는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채움을 얻고 나아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영적인 양식을 풍성하게 얻는데로 관심을 기울이는 수준입니다.
먼저 유월절을 통하여 생명의 구원을 체험하고, 또한 유월절 양식을 먹음으로 새로운 차원의 음식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급작스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과도기가 있는데 어려운 상황과 더불어 넘어갑니다. 세상에서 가져온 것들이 떨어지면서 심각한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맞는 것입니다. 먼저 물이 떨어지고 다음에 양식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넜기 때문에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고 가서도 안됩니다. 이제는 나아가는 길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쉬워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의 먹고 사는 육신의 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일을 하지만 이이상 육신에 매여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채워주시는 양식을 먹는 차원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시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준도 여전히 얻어먹는 수준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이요, 영적인 양식이지만 수동적으로 얻어 먹습니다. 은혜로 그저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고, 말씀이 그러하며, 성령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돌보시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누누히 말씀드린 것처럼 이러한 기간이 1년에서 1년 반 정도로만 예정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나 끌었습니다. 그러나 만나와 물은 늘 공급이 되었습니다. 속히 다음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다고 해서 양식으로 끊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먹는 만나는 한시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수동적으로 받아먹는 수준은 한시적으로 계획된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서서 먹는 양식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서서 먹는 양식은 한마디로 빼앗아먹는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히 농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착한 후에야 직접 경작을 하였지만 정복하는 당시는 가나안 족속들이 해 놓은 것들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받은 말씀, 성장한 영적인 수준으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증거하면서 영혼도 취할 뿐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들도 취하는 것입니다. 물론 취한다는 표현이 좀 부정적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영적전쟁의 차원에서 볼 때 악한 사탄의 권세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요, 부정한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쓸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만나가 내리기를 그친 것은 하늘의 양식이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성령으로 말씀이 그 안에서 충분히 역사하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발휘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키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의 재물과 물품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정복과정입니다. 바울이 말한 신령한 것을 뿌리고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고전 9:11)이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원칙입니다(고전 9:14). 이러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와 영광이 나타나고 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한 삶의 보람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만나가 다시 등장하는데 요한 계시록에 나옵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하실 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2:17)라고 하여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인 만나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세상에서 이기는 자요, 믿음에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완성되는 것을 말하지만 미리 당겨서 체험할 수 있는 승리입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감취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두에게 그저 주었던 광야에서 먹던 만나와는 다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으며, 이기는 자에게 상을 베푸는 곳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천국에서는 생명수와 생명과일이 다시 주어집니다.
 
이상이 양식의 관점에서 본 우리의 삶과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어느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확인하셨습니까?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광야에서 40년간을 만나를 먹어도 칭찬받지 못합니다. 수동적으로 목사의 설교만 듣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권장할 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 속에 충만하게 채워서 스스로 그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고 사용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양식, 감취인 만나를 찾아서 먹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의 삶은 생명으로 풍성할 것이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것입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마침내 여리고 성을 향하여 진격합니다. 길갈에서 여리고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1-2마일 정도의 거리입니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살펴보기 위해 홀로 백성들 앞서 나아갔는가 봅니다. 그러다 문득 한 남자가 칼을 빼어든 채 그를 마주 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호수아는 놀랐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에게로 나아가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편이오? 아니면 적 편이오?” 그러자 칼을 빼어든 자가 말하기를 아니오 (나는 누구 편을 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오). 오직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지금 왔소라고 합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지금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이 칼을 들고 나타났는데 누구 편을 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지요.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싸움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하여 왔습니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뜻을 알고 질문을 다르게 합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등장한 것은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위한 것임을 여호수아는 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온 목적을 따라서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왜 대화가 이런 식으로 나아갑니까?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애초에 주셨습니다. 1:9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군대장관을 보내어 네 편이 되어 주겠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그 증거로 출현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것은 보다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바로 이 멧세지를 전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 말은 모세를 생각나게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기도 해서 가까이 가다가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같은 내용입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여호와의 사자나 군대장관 모두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모두 지금 섰는 그 땅의 거룩함에 대한 계시를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이 말씀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땅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시며 신을 벗으라고 하실까?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보다 강력한 메시지와 확실한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출애굽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지금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시내산을 하나님의 산으로 지정하시고 장차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증거를 삼으시겠다고 하셨고 실제로 그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거룩한 곳이니라는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적으로 보여주시는 표현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는 말은 단지 선 그 장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별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거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리고성과 그 주민은 하나도 거기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과 구별된 라합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거기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천국과 같습니다. 거룩한 천국에는 죄인이나 더러운 것이 존재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거룩한 곳으로 삼으심으로 거기에는 택함을 받아 구원함을 받은 자 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의 남녀노소는 다 죽어야 했습니다. 짐승들도 다 죽어야 했고 물품도 모두 하나님께 다 드려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곳, 천국과 같은 곳으로 삼으신 지역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그 지역은 거룩한 곳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리고를 성채 진멸하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곳의 물건을 취하지 말것을 명한 것도 바로 이 이유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범죄가 되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가 그처럼 심각하게 여겨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장과 7장을 보면 계속해서 바친 물건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여리고성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가 저주를 받을 것을 예언했고 실제로 그 예언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보게 됩니다. 만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면 우리에게는 훨씬 실감나고 감명이 클지 모릅니다. 보다 극적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이 땅은 거룩하다고 하심으로 아예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선언해 버리심으로 단숨에 처리를 해 버리셨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복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고 하심으로 한마디로 끝을 내 버리셨습니다. 더 말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물론 과정과 절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은 때로 그런 자질구레한 과정을 생략하시고 최종적인 선언으로 끝을 맺어버리십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다는 말씀으로 여리고는 순식간에 원수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화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는 말씀으로 순식간에 우리를 영광스러움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또 보여 주셨습니다. 한순간에 전면적으로 뒤집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에게도 때로 이렇게 역사를 하십니다. 모든 과정을 생략해 버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로 옮겨놓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체험은 그야말로 감격스럽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이로움과 함께 느끼도록 이끌 것입니다. 그 내용이 6장의 여리고성 함락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