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여호수아 연구 2 / 제2장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여호수아

여호수아 연구 2 / 제2장

柏道 2019. 6. 6. 17:28


여호수아 연구 2 / 제2장

            

2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 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6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이제 성경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기생 라합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라합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하면서 훌륭한 믿음의 행위로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구체적인 이름과 행위가 등장할 뿐 아니라(11:31) 야고보서에서도 그의 행위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의 행위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2:25).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등장하는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인이 바로 이 라합입니다. 라합은 그야말로 창녀입니다. 아주 천하게 여기는 그런 종류의 여인인데 어떻게 그녀가 위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또 믿음의 선진에 동참하게 되었는가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진술을 통하여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살펴봅시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치기 이전에 먼저 두사람의 정탐군을 보내어 여리고성을 살펴보게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들을 보낸 것은 어떤 지형이나 정세 등을 알아보도록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과거 모세시대에 자신이 친히 정탐군으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정세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도 보면 정탐군이 땅을 탐지하는 그런 일은 별로 하지 않고 오히려 기생집에 유숙하면서 여리고성 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해 오는데 대한 여리고 성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곳은 어두운 뒷골목이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술이나 환락에 취해서 도무지 정치나 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틈에 묻혀 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정탐군은 창녀의 집을 찾았고 거기서 묶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라합은 눈치를 채었고 주위 사람들도 쉽게 발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여리고성 전체가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라합의 말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특히 바산 왕 옥과 아모리왕 시혼을 죽인 일을 듣고는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공포로 벌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중의 사람들이 긴장을 하고 있었고 경계를 하는 중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발각이 되어 당국에 고발이 된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 주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을 라합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9-11)
라합의 이 말은 여리고 주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사실 요단 동편의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은 강한 왕이었고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진멸하였다는 소식은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송된 이스라엘의 정탐군들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자인 동시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사자라는 의미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진격해 올 것을 예고하는 신호가 되었기 때문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은 아직 본대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위험에 처할 때 도와줌으로 호의를 입을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 기회를 라합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배신해야 얻을 수 있는 구원이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결정을 라합은 한 것입니다. 반면에 정탐군들에 대해 당국에 보고한 자들은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선택한 자들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도전을 만나게 됩니다. 과연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까지도 배반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참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칫 극단으로 치우치면 나라와 민족보다 개인 구원이 우선이다는 식으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라합의 선택을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자로 보는 것은 아직 구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지금 라합의 상황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상황은 분명히 애국이냐? 배신이냐?”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은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니라 한가지 밖에 길이 없는 그러한 선택이었습니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 탄 상황에서 가까스로 구명대를 발견하여 그것을 취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배를 타고 여행하던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일 뿐입니다. 그녀는 정확하게 상황파악을 하였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해 오는 기세는 파죽지세로 여리고성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것으로 바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이럴 때 그녀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어떤 도리를 따질 상황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저없이 생명의 길을 택했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은 모든 도의와 체면, 도덕, 법 등에 우선합니다. 우리는 많은 미화된 이야기들로 인하여 그릇된 생각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숭고한 사랑이야기라든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희생, 혹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린 감동적인 이야기 등으로 인해 사람이 매우 고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삽니다. 머릿속으로 그런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다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존재가 된 것처럼, 혹은 비슷한 경지에 이른 것처럼 스스로 여기는 것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가미가제나 자살 특공대 등은 결코 나라나 민족을 사랑해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뇌되었고 최면에 걸려서 이용당한 꼭둑각시에 불과합니다. 마치 보상이 눈에 보이는 듯이 그들을 추켜 세울 때 영웅심에 의해서 스스로 그런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애국심이나 숭고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완전히 정신이 정상기능을 상실하여 이용당한 사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나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그런 사례도 본질적으로는 같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에 그래야 한다는 반복교육과 당연히 그래야지하는 의식의 반사작용으로 그런 행위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큰 화재나 사고가 났을 때 꼭 헌신적으로 구조활동에 동참하는 영웅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정말 다른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 그렇게 했다기보다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여 스스로를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들이 취한 것은 명예였습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 희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예는 세상에서는 매우 존귀한 것일런지는 모르나 영생을 위해서는 재물을 선택한 것이나 권력을 선택한 것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세상적인 영화를 택한 것 뿐입니다.
좀 심하게 몰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실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좀 성숙하여 생명에 대한 이해가 진지해지고 깊어지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위인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지 실제 생활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려 생명의 위기에 달하면 자식도 남편도 보이지 않는 것이 공통적인 본성입니다. 피난 중에 자식들을 버리고 간 부모들이 무수했다는 사실도 그를 증명하고, 성경에 나오는 아이를 잡아 먹는 이야기도 심한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생존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는 무슨짓이든 하는 것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짐승들이 가지는 본성입니다. 다만 용기가 부족해서 못하거나 수치심 때문에 소극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오직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구원도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고상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멋있게 구원받는 것만을 꿈꿉니다. 그러다보니 절박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앞서간 선배들이 보여주는 구원은 그리 고상하고 멋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구했던 것이었고, 오직 그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때 비로소 구원이 임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죽음 외에는 길이 없다는 상황에 도달해야만 참된 구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라합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살 길이 이길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 삼자로서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에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녀의 믿음이요 구원받는 지혜를 내게 하였습니다. 비록 절박한 위기가 임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이미 소식을 듣고 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구원의 기회가 왔을 때 붙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의 기회가 여럿이 보일 때는 아직 멀었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는 마음이 드는 상황은 아직 구원을 맛볼 때가 아닙니다. 참된 구원의 기회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선택의 기회가 없습니다. 단 하나 죽음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절박함이 생기고 필사의 몸부림으로 구원의 길을 찾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로 죽음의 냄새가 물씬 나는 상황까지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찾으면 그는 온전한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칩니다. 선택의 길이 없다, 이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뚫립니다. 영어도 그렇고, 재능도 그러하며, 진리도 그렇습니다. 필사적인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결국 피할 길로 도망가 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이 요구되고 우리로 할 수 없는 극한 상황, 즉 숨통을 누르시는 상황까지 몰아가실 때 비로소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합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생명의 길을 찾았을 때 그녀에게 그 길이 보였고 잡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면 생명이 보입니다. 무엇이든 생명을 걸면 살 길이 생기고 이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점검하고 지날 것은 라합의 거짓말부분입니다. 분명히 라합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정탐군을 알았으면서도 그들이 누군지 몰랐다”(4)고 했고,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겨 놓고도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다”(5)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참고로 한국의 유명한 신학자로 조직신학전집을 저술하셨던 박형용 목사님은 얼마나 정직하셨는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6.25당시에도 오죽했으면 사모님이 큰 아들을 숨긴 곳을 목사님이 모르게 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알면 인민군이 숨긴곳을 물을 때 발설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드님 되신 박아론 목사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설사 아들이 잡혀 가도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래야 할까요?
사실 우리도 많은 거짓말을 하고 삽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고, 성도간에도 굉장한 거짓말들이 오가는 것입니다. 미안해서 밥 안먹어 놓고도 먹었습니다라고 한다든지,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라고 하거나 혹은 마음에도 없으면서 자주 놀러오십시오라든지 모르고 하는 거짓말도 있지만 알고 일부러 하는 거짓말도 많이 있습니다. 누가 물으면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것도 사실은 거짓말이요, 마음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그런척하는 것은 사실은 속이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다 표현하는 사람도 없고, 욕심과 미움이 있다고 그대로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보고는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지 정직하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매일 매순간 거짓을 하며 살고 있는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그 기준을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라합의 거짓말에 대해서 두가지 의견으로 나뉩니다. 한가지는, 라합의 거짓말은 분명히 방법상에 있어서는 죄이지만 동기가 신앙적이었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가지는 라합의 거짓말은 믿음에 근거한 의로운 거짓말이기 때문에 죄로 볼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정리하면 한가지는 아예 이 거짓말이 잘한 것이라는 말이고, 다른 견해는 거짓말 한 것은 잘못했지만 동기가 옳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견해에 손을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차근차근히 분석을 해 보고 결론을 내려봅시다.
 
먼저, 라합의 거짓말은 잘못이지만 동기가 신앙적이었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다는 견해를 살펴봅시다. 만약에 이 해석을 지지한다면 일단 어떤 경우에든지 거짓말은 잘못이라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동기가 아무리 선하고, 결과가 좋아도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장점은 우리로 하여금 명료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그 자체는 율법을 어기는 잘못이라는 확실한 답을 제시함으로 우리로 보다 진지하게 우리의 언행을 살피도록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유추해석을 내림으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위험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 자신이 율법을 초월해 말씀하시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셨고,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셔놓고는 유아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을 자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안식일 계명을 스스로 어기시면서 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 문자적으로 꼬집는다면 하나님도 서로 상치되는 말씀을 많이 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원한 규례라고 하셔놓고는 그것을 바꾸신 적도 많고, 우리의 이해로는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해석은 명료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은 좋아보이나 자칫 하나님까지 비판하게 되는 교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라합의 거짓말은 믿음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아니라 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히브리서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라합의 행위를 훌륭한 믿음의 행위로 인정했을 뿐 거짓말에 대한 지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 자체를 믿음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옳고 그른 판단을 사람의 관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이라고 하면 신앙입니다. 우리의 보기에 아무리 거짓말 같고, 잘못되어 보여도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서는 차원입니다. 실제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도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 무시된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아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생각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요, 그것이 의였습니다. 또한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창조원리임에도 많은 구약의 선진들은 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것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체를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법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하게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초월하고, 양심과 사람들의 판단까지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수준은 매우 놓은 수준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요, 구원을 얻는 의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거짓말은 하나님이 거짓말로 인정하시지 않고 칭찬하셨다면 이는 칭찬받을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이를 자칫 오용해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책임을 질 각오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수준높은 것처럼 행세하다가는 스스로 올무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면이요, 위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해석을 더 좋아하고 옳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듣기에 좋기 때문에 아니라 이러한 차원으로 말씀을 보지 못하면 복음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자체가 우리의 이성을 거스리기 때문에 우리의 율법적인 기준을 가지고는 은혜의 복음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가서 은혜의 복음을 받을 수 있는 해석을 택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해석이 더 아름답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우주의 창조자요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권위가 존중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법 아래 매여있다면 결국 법이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말아 하나님도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이 해석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적절하고 실천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라합에게 있어서 정탐군은 생명의 줄이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과 기회였습니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법이나 도덕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법이요 도덕이지, 죽은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이 온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재물을 빼앗기고 순교를 하는 것은 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영적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라합에게는 따로 영생이 없습니다. 그녀의 목숨이 생명이요 구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도덕과 법, 애국심까지도 버렸습니다. 이를 초월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건강과 명예, 가족까지 희생하는 믿음의 선배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가족부양의 책임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이를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얻는다는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거짓말은 아무도 비난할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구원의 기회를 붙들었습니다. 이 자체가 믿음의 행위였고 생명을 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거짓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행위로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제 라합의 자신과 가족을 구원받도록 한 믿음부분을 점검해 봅시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라합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있었을리 만무합니다. 하다못해 일반적인 종교적인 도덕에 대한 지식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몸을 팔며 살아간다는 것은 가장 비천하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창녀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적인 도덕과 선에도 비난받기에 합당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에게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임하여서 이러한 믿음의 행위가 나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크게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의 역사임에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역사다라는 것은 나중에 고백할 일이고, 그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진지하게 살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여기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라합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전혀 인정할 만한 요소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하고 또 실제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도록 이끌었습니까? 이것은 그녀의 말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는 말을 합니다. 그녀의 고백을 잘 보십시오. “주실 줄을 아노라고 하지 않고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었다는 과거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것을 과거형으로 쓴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너 죽을 줄 알아라는 표현보다 너 이제 죽었다라고 함으로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 땅을 너희에게 주셨다고 함으로 여리고성의 멸망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를 홍해를 마르게 하고 애굽에서 나온 것과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죽이고 그 백성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재미있는 것이 홍해를 가르셨는데 라합은 마르게 했다고 합니다. 물론 바다를 가르고 땅을 마르게 하셨지만 라합은 아예 홍해물을 마르게 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인정할 것은 라합의 판단력입니다. 그녀는 비록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마르게 하고 나왔으며 강대한 아모리왕과 바산 왕을 죽이고 그 민족을 전멸시킨 후 지금 이리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이미 여리고성은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라합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자신을 보면 원수의 땅에 있기 때문에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진격해 오고 있는 여호와라는 신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상천하지에 하나님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죽은 운명이고 여호와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그녀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생명을 구원받는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으로 나아가는 첫번째 지식이요 지혜입니다.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살 길을 찾습니다. 아직 자신에게 무언가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미련이 있는 사람은 여전히 뭉기적 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향해 필사적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전히 무언가 미련을 가지고 주저하다가 결국은 멸망에 삼키우고 마는 것입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확신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미련하게 여리고 왕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믿는 신을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 멸망입니다.
이 두 지식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발견되는 지식입니다. 크고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고, 동시에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지식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이끄는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능력이 나타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야 우리의 죄악성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고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됨으로 자신과 가족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참된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모르면 자신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를 모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열어놓으신 그리스도를 필사적으로 찾지 않게 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 적용됩니다. 우리가 숨쉬며 사는 것도 우리의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이 살 길이라는 의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병이 들거나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상의 문제 등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만날 때 먼저 자신에게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고, 또 답은 다른 곳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으로 나아갈 때 아름다운 열매로 우리의 영혼에 맺힐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의 법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이를 개인에게 적용하면 자아와 영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에게서는 선한 것이나 기대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자아는 죽어야 하고 대신 영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는 철저히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죽어야 한다는 고백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비로소 활동을 멈춥니다.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하는데...”라고 하고 있으면 아직 살아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너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약하다, 힘이없다는 고백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영혼이기 때문에 살았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영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결국은 성령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선언, 영에 대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았다는 선언과 믿음이 우리의 삶을 생명과 승리로 이끌어 나갑니다.
 
이처럼 라합의 믿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과거가 어떠했든지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생명의 길을 보고 택하는 눈과 판단력,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와 가족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물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 가운데 들어 있었지만 그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이 이러하다면 우리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12(13)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이제 위기를 모면한 정탐군들과 그들의 생명을 구해준 라합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탐군을 살려준 댓가로 자신과 가족의 생명보존을 요구하는데 당당하게 나옵니다. 라합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하여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생명구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선대하여...”
먼저 생명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다음단계를 보게 됩니다. 라합은 자신의 목숨이 이미 죽었음과 구원의 길이 오직 여호와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다시말해서 참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 편에서 먼저 행동을 취했습니다. 단순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걸고 정탐군들의 목숨을 구해낸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당당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구원의 방식이요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구원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삶에서 체험하는 구원도 이러한 과정을 따르게 됩니다. 그럼 우리가 영적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선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았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쉽게 예수 믿고 구원얻으십시오라고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니다가 세례를 받는 것에는 그 어떤 위험도 따르지 않습니다. 누구도 생명을 위협하는 자가 없고 혹시 방해한다고 해도 그렇게 거세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목숨을 거는 과정이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얻은 구원이라 해도 가치가 없고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르게 인식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도 그랬지만 선교 초창기 우리나라에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확하게 라합의 구원과정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절망, 하나님께만 있는 소망,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걸고 그 구원의 길을 택한 행위... 이를 통해서 그들은 진정한 구원의 능력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과정 전체가 흐려져 버렸고, 심각하게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죽음과 심판에 대한 절망감에서도 아니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두려움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기 때문도 아니며 그러다보니 목숨을 거는 차원에서 취하는 행동이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지천으로 늘려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바나나가 그렇게 귀해서 맛도 정말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은 봐도 거의 먹지 않습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물 한모금은 그야말로 생명입니다.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만한 가치있는 것이지만 물이 흔한 지역에서는 물 좀 주십시오하면 아무런 요구없이 그냥 한바가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생명도 되고, 별 귀하지 않는 것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문제는 그 구원의 가치입니다. 옛날 생명을 바쳐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예수가 그야말로 생명이었고, 기쁨이며,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흔한 이름이요, 값싼 약속일 따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제시된 것이 적극적인 고난의 길로 들어서라는 명령입니다. 십자가를 스스로 지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목숨을 요구하는 상황이 아니면 자신의 평안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편하다고 느낄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목숨은 살아있어도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자가 매일 잔치나 벌이고 온갖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모습이 부러워 보일지는 모르나 아무도 그 삶을 가치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지루함에 빠져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해도 좋아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마약, 동성연애, 오락 등 갖은 자극적인 것을 다 해보지만 어느 시점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즐겁지 않은 그야말로 말초신경 마비단계에 오면 그는 삶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맙니다. 미치광이가 되든지 정신나간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한 것은 점잖은 고백입니다. 그나마 그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돌이켰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라도 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미쳤거나 자살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쾌락을 향하여 올라가면 이 길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인 고난은 스스로 버리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없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한자어 빈()은 나눌 분()과 재물을 의미하는 조개 패()의 합성어 입니다. 이 말은 재물을 나누어 준다는 뜻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 없어지는 가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것이요, 인생을 귀한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것에는 목숨의 위협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이러한 상황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과감하게 나누어 스스로 가난한 자리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땠습니까? 쌀밥 한그릇이 얼마나 소중하고 맛있었습니까? 그 때, 그 순간이 행복하지 지금 마음대로 쌀밥 먹는 것이 행복합니까? 귀한 줄을 모르면 소화불량에다 자꾸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데 이제 맛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 자신을 돌아보아도 이미 입이 모든 맛을 다 알아버려서 맛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부해졌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불행한 것입니다. 얼마나 맛있는 것이 많은데 맛있는 것이 없다니요...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과감하게 목숨을 거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더 주시옵소서의 수준은 넘어섰다고 해도 주신 것 감사합니다는 차원에서도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도 아직 목숨을 거는 행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야 합니다. “내어 놓겠습니다의 단계로 말입니다. 그 내어 놓는 것도 적당히가 아니라 목숨에 위험이 느껴지는 수준까지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의지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없으면 못산다는 말은 그만큼 약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잘 살 수 있어야 그것이 강한 것이고 잘 사는 것입니다.
물론 내어놓으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답은 분명합니다. 내어 놓는 만큼 은혜와 감격으로 채워집니다. 저도 돌아보면 어려운 자리로 내려갈 때 오히려 여유와 보람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가로 이사가서 어렵게 살 때 참 삶의 여유와 기쁨을 많이 맛보았습니다. 차가 한대밖에 없어서 버스를 갈아타고 다닐 때 흑인들과 부딪끼면서 그들의 사는 모습과 접할 때 내가 얼마나 복받은 자인가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한시간 일하고 8불을 받는 직장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가지고 집을 나서면 버스를 두번 갈아 탑니다. 그런데도 공장까지 못갑니다. 다행히 누가 태워주면 고마운데 없으면 약 30분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오면 일당이 64불입니다. 그래도 그 때 돈이 귀했고 소중했으며, 차가 아무리 똥차라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복인지 실감하였습니다. 보험이 없으니 소셜 시큐리티 오피스를 오가며 아이들 메디케어 카드 만들고, 영세민에게 주는 WIC프로그램을 통하여 아이들 우유 타먹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은혜인지 모르지만 여기로 오게 되었습니다. 생활비도 총액으로 따지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거기다 때가 되면 이것저것 들어오는 것도 많습니다. 얼마전에는 결혼식에 축도 한번 했더니 100불이 든 봉투를 주셨습니다. 1분도 안되는 축도가 약 이틀 고생하며 번 액수였습니다. 지금 당시와 비교하면 3배 가까이나 많은 생활비를 받아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때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집세, 차 페이먼트, 보험 등 다 떼고 나니 많이 받아도 쓰는 것은 당시와는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위기감을 종종 느낍니다. 이렇게 편하고 좋고 넉넉한데 왜 마음에는 그 때만큼 기쁨과 보람이 없을까? 물론 다른 부분에서 그 때보다 고생하고 수고하지만 어쨋든 지금 형편을 돌아보면 삶의 보람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은 사실입니다. “이게 과연 잘하는 것일까? 이것이 복일까?”하는 생각을 종종해 봅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안일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마음이 종종 들고 이것 저것 걱정하는 일들이 더 많아진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아이들 학교 문제도 그렇고, 생활에 대한 자신감도 그렇고... 어쨋든 도전을 받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마음을 비운 자가 행복한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믿고 받아들인다면 무엇으로 그 마음을 비운 것을 증거하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극심한 환란 가운데서도 넘치는 연보를 한 것처럼 우리도 과감하게 우리의 편안을 유지해 주고 있는 것들을 끊음으로써 오직 하나님, 그리스도만이 생명입니다는 믿음의 증거, 행위를 내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당당하게 생명의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라합은 아무도 없이 혼자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말이 쉽지 얼마나 두렵고 위험하며 가슴 졸이는 행위였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있어서 요구되는 목숨거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자아를 기쁘게 하는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죽이는 것이요, 안일과 욕심으로 향하는 마음을 난도질 해서 십자가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숨을 미워하는 일이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됩니다.
 
라합이 담대하게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자신이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 영생을 믿는 자라면 육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각오와 헌신을 통하여 증거됩니다.
라합의 당당함을 좀 더 살펴봅시다. 라합은 감히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정탐군들에게 촉구합니다.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13)
라합은 지금 자기가 믿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서 맹세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라합의 위대한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 속에 그녀의 하나님이 바뀐 것이 나타납니다. 비록 정탐군들로 하여금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고 있지만 이 속에는 여호와를 절대자로 인정하는 믿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어왔던 그 어떤 신보다 여호와가 뛰어남을 알고 그것을 이 말 속에 포함을 시키고 있습니다. 신뢰할 하나님이 바뀐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 숭배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을 내리시는 여호와를 보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 비로소 참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인하고 바알을 버리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가 쓰는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참 신, 전능한 절대자라는 일반명사입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여호와 중에 여호와가 참 신이요 전능하신 절대자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라합도 그런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참 신이요 절대자시다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맹세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바로 이 여호와의 이름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정탐군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비록 생명의 보호를 받아서 은혜를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도와줄 사람은 정탐군들이지만 라합은 그들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애를 쓴다고 해도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의탁하면 절대적인 보호가 됨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게 되면 그 누구도 범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라합의 믿음과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의탁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결코 해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도움이 되는 것들도 같은 원리에 속합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 재능 등도 이러한 원리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영어 단어 save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이 단어는 구한다는 의미가 있음과 동시에 저축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돈을 save한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돈을 아낀다, 저축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돈을 건져낸다, 구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떠 돌아다니는 돈을 건져내어 내 품안에, 내 창고안에 안전하게 보관합니다. 돈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돈은 동시에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배고픔에서, 헐벗음에서 우리를 구해내고,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함수관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정탐군을 구해주고, 또 정탐군의 말을 듣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구해주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역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이 정탐군을 구해낼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였듯이, 우리가 돈을 save할 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동시에 돈이 우리를 save할 때도 하나님께서 돈을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는 돈이나 재능, 권력 등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은 우상숭배요,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권면과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62:5-7)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엘리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도 섬기면서 바알도 동시에 섬기는 기회주의적인 삶을 삽니다. 필요에 따라 돈이 하나님이 되고, 자존심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숨도, 영적 생명도 다 불안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의 결론은 이렇게 납니다. 여호수아가 죽기전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과 두령들, 재판장, 유사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연설을 하면서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4-15)
이 말씀이 여호수아의 주제입니다. 라합을 통하여 보여주는 믿음의 본도 그렇습니다. 이방의 천한 창녀인 라합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 여호와를 선택하였는데 예수와 성령의 증거를 가진 우리가 여전히 세상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면 어찌 합당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우상은 다름 아닌 나의 자아요, 갖은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존심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목숨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실제로 따르는 삶은 자기 자신의 자아요, 자존심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해도 자존심을 내세워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통과한 생명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 판단을 다 내려놓고 그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면 두말없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따질 것없이 그저 순종하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증거입니다. 이 일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또한 믿음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자아와 자존심은 십자가에 죽었다고 선언함으로 그 힘의 근원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리 잘라내어도 그 뿌리에서 끝없이 올라오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자아의 근원을 잘라내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선언,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는 선언이 우리 입에서 확신있게 나올 때 그 뿌리가 제거됩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순종도 이러한 복음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나타나게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한가지 더 라합의 말 속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요소는 스스로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로 여기는 모습입니다.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하였는데 직역하면 우리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라입니다. 이미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는 고백보다 더 강력한 자기 인식입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서도 늘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이 의식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이미 죽은 것이다는 인식,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매일의 삶도 하나님 아니면 나의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는 필사적인 삶의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고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죽을 것입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예언도 없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날은 옵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당겨서 생명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면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서는 자존심도, 욕심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죽음을 바로 앞둔 자에게도 이러한 것들이 다 사라집니다. 얼마전 텔레비젼에서 암 말기로 죽어가는 환자를 방영한 것을 보았습니다. 젊은 여인이었는데 남겨두고 가는 자식에 대한 애착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만큼 경외감이 드는 순간도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절망을 주는 동시에 모든 집착과 욕심도 끊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생명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죽음을 집착과 욕심을 끊는 최선의 방책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욕심과 집착이 사라진 완전함을 체험하는 순간으로 맞아들인다면 얼마나 숭고할까요? 그리고 그 죽음을 미래에 두지 말고 매 순간 우리의 삶에 적용함으로 그런 완전함을 순간 순간 이룰 수 있다면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울까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나 봅니다. 매일 잠들면서 죽음을 연습하고 일어나면서 생명을 체험합니다. 또한 보다 훈련이 된 사람은 매순간 숨을 내쉬면서 죽음을 체험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생명을 체험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태어나면서는 들숨을 쉬고, 죽으면서 날숨을 쉬는데 우리의 매 순간 호흡이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체험인 것입니다. 매 순간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삶과 죽음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그 삶이 풍성할까요? 여러분도 이런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을 삶과 죽음의 연습으로 삼는데서 나아가서 매 순간 호흡을 그런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영생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14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17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21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라합의 구원요청에 대해서 정탐군들은 조건을 내세워 언약을 맺습니다. 자신의 일을 누설치 않는 조건으로 라합과 그 가족을 구원하겠다는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설치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라합의 마음이 변치 않도록 주지를 시키기 위함입니다. 20절에도 다시 누설하면하여 라합의 마음이 혹시라도 변하게 되면 이 모든 언약이 무효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실제로 그럴 위험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만일 여리고성의 병사들이 다시 찾아와서 라합을 위협한다든지 회유를 한다면 혹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생명을 부지할 생각으로 있었던 일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탐군들의 이 말은 라합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행위가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중한 판단력과 의지로 행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의 마땅한 책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생명을 얻은 자들은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충동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의 행위임을 증거해야 하는데 비록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핍박과 유혹이 온다 하더라도 변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하는 책임이 구원받은 자에게 있습니다. 만일 환란과 유혹이 밀려온다고 마음을 바꾸게 되면 그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요, 스스로 구원을 버리는 행위가 됩니다. 물론 라합에게서 보여지듯이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그럴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심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도록 경계할 필요는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성경은 계속해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라합은 심지가 굳고 확고한 결단력으로 자신의 믿음을 내 보였습니다. 그녀의 하는 행위와 말을 보면 얼마나 신중하고 지혜로운지 그녀의 믿음이 진실됨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을 통해 그들을 내려주고, 또 혹시 추격하는 자들을 만날까 산에서 삼일을 숨은 후에 돌아가도록 권면하는 것 등 그녀의 믿음이 확고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편에 선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적극적인 면입니다. 누설치 않는 것은 배반치 않는 것이라면 이렇게 정탐군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 주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과 유혹이 와도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행함으로 받은 구원의 확실함을 자신과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정탐군들로부터 보다 구체적인 계획이 전달됩니다. 자신들을 내려준 창에 붉은 줄을 달아매고 가족들을 다 모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십니다. 보다 명확하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라합이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을 듣지 못했다면 막연한 불안감에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분명한 지침을 들었을 때 그녀는 확신과 든든함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기초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간다는 정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주의 뜻을 행하기를 노력하면 주님은 반드시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구원경륜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미리 알고 편안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실제로 라합은 정탐군들이 가자마자 창문에 붉은 줄을 매 달았습니다.
 
이 붉은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한다고 학자들을 해석하는데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붉은 색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라합이 신속하게 정탐군들의 말을 순종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라합이 곧 바로 붉은 줄을 창에 매달았다는 것은 미래를 지금 준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비록 시간적인 여유가 며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붉은 줄을 창에 매달았다는 것은 그녀는 여리고성의 멸망을 확신할 뿐 아니라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증거합니다. 우리도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 우리가 죽어서 주님께로 갈 준비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과 영생의 소식을 접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마음으로 가득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이상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이나 우리가 주님께로 간다는 것이 두려움이나 아쉬움으로 남아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할 일이 많이 있어도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이 이 준비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날을 사모하며 모든 일에 우선적으로 믿음 준비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라합의 위대한 믿음의 행위를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라합의 믿음에 대해 총 정리를 해 봅시다.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전제로 하고 라합의 편에서 분석해 봅니다.
먼저, 전혀 여호와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멸시받는 창녀였던 그녀가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된 것은 그 마음 속에 자기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더라면 들려오는 소문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렇게 진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소식에 대해서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확고한 결정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홍해를 말리시고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이며 진격해 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식은 그녀에게 있어서 사형선고와 마찬가지 였습니다. 선고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은 목숨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생명을 구하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좀 더 뿌리를 캐고 들어가 봅시다. 그녀가 이처럼 생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와 두려움을 통해서입니다. 그녀의 인생은 사실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창녀로 몸을 파며 산다는 것은 그보다 비참하게 자신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의 관리에 철저히 실패한 삶은 수치와 자책을 낳게 되었고 본능적으로 생명에 반한 삶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이 심각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일깨운 것은 생명에 대한 애착입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는 배경을 보면 결국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에 대한 애착은 생명의 구원에 모든 관심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을 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약한 자, 죄인, 실패한 자를 부르신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 실패한 자들이 수치와 두려움을 알고 비로소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렬해져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참 생명을 찾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먼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가 우선됩니다. 실패한 인생, 부끄러움과 죄로 얼룩진 인생임을 자각하고 이런 삶을 산데 대한 심판의 두려움이 강하게 임할 때 비로소 생명의 길을 필사적으로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복음을 듣게 되고 즉시 생명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우편강도에게서 일어난 위대한 구원사건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빛이 비쳐들었고 그 빛을 잡은 것입니다.
사람은 관심있는 일에 생각과 힘을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로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의 삶을 보면 알게 됩니다. 육신의 것을 위하여 시간과 생각, 힘을 많이 투자하는 사람은 영생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시간적으로는 육신을 위해 많이 쓴다 해도 그의 생각과 관심은 온통 진리, 영혼, 하나님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정 우리의 생명이 육신의 생명으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그 생명의 소중함을 늘 생각하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생을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육신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을 알게 되고 오직 하나님께 속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이 필사적으로 생명구원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복된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합처럼 우리도 이미 우리 목숨은 죽은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영생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라합에게서 있어서 생명을 구하는 길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선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값싼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 가치를 아는 만큼 투자와 희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의 편에 속하는 것만이 생명을 구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고 과감하게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고백한다면 그 가치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모습으로 증거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생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이처럼 목숨을 건 자는 생명에 대한 당당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바뀌어 영생이 자신의 참된 생명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가 비로소 부활체를 얻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힌 일 없이 부활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을 가진다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번데기로 고치에 머물러 있는 한 나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번데기의 몸을 벗고 고치를 깨고 나올 때 비로소 나비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육신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내어 놓은 자는 삶 속에서 고치를 깨고 나오는 나비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고 육신의 몸을 벗는 순간 변화된 몸을 입을 것입니다.
넷째로,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에게는 믿음을 유지할 책임을 요구받습니다. 라합의 구원은 한순간의 믿음행위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누설치 말아야 하는 의무, 즉 자신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라합의 위대한 믿음은 수동적으로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행을 함으로 이 조건을 만족시켰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그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보다 효과적으로 믿음을 지키는 비결은 적극적인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에게 증거를 삼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보다 구체적인 미래를 보여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확신과 소망 가운데 준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합은 즉각 준비하는 믿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정탐군이 주고 간 붉은 줄을 즉시 매단 것은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을 의미합니다. 새생명에 대한 확신은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나타나고 즉각적인 미래를 위한 준비로 나타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바로 지금 이사할 준비를 하는 자들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준비를 바로 이순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라합에게 구원의 날이 실제로 임하듯이 우리에게도 영광스러운 천국이 홀연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라합 한사람의 믿음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구원을 받는 역사는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특히 바로 라합을 통하여 다윗과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 한사람의 믿음이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지 깊이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을 통해서 그야말로 인류가 구원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따르는 자가 돌아가도록 사흘을 거기 유하매 따르는 자가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만나지 못하니라 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마침내 정탐군들은 무사히 돌아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 특별히 라합의 구원사건을 정탐군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이전 모세 당시에 보냄을 받았던 정탐군들과 비교를 해 보면 우리는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당시 12명의 족장급으로 구성된 정탐군들은 40일을 두루 다니며 지형과 정세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읍과 거민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정찰하였는데 그들이 거하는 장소와 성읍들의 모양등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그 땅 실과를 가지고 와서 증거물로 제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들이라고 불리는 거인족 아낙 자손들이 있었고, 성읍은 견고하고 컸습니다. 당시 정탐군들의 보고는 객관적으로 정확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군들에게는 영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이미 여호와께서 그 땅의 수호신들을 쫓아내신 사실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빠진 것은 그 땅 거민들의 마음상태를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40년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식은 당시에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간담이 녹았을 것이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군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저 겉 모양만 보고 지레 짐작으로 스스로를 메뚜기같은 연약한 존재로 격하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정탐군들은 그러한 외적인 정세보다 주민들의 마음, 동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물론 이미 지형을 살핀 경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증거를 그곳 주민들의 반응에서 확인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합의 집으로 숨어들었고 과연 그들이 기대하던 답을 얻게 되었고 라합을 말과 행동을 통하여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형적인 모습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강한 성읍이나 거인족이 존재한 것은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달랐던 것은 거민들의 마음상태, 영적인 상태를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격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았다는 사실을 라합으로부터 확인하였습니다. 라합 한 사람의 확실한 증언을 통해서 정탐군들은 확신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4) 라합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세상에 대한 바른 안목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세상이 두렵습니다. 어마어마한 권세로 보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도 많고, 재능이나 지혜, 그리고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자들이 무수히 많은 것입니다. 정말 그들 앞에 서면 우리의 모습은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또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레짐작으로 외형만 보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는 스스로 움츠러들고 열등감과 좌절감 속에서 우리끼리 싸웁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느니 하면서 우리끼리 비난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없으니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권력을 접수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미 마귀는 왕좌에서 쫓겨났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의 두려움과 열등의식을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 버립니다. 우리는 약하고 연약하다는 의식과 세상은 강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합니다.
이러한 연약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먼저, 여호수아 갈렙처럼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를 영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입각하여 제 아무리 세상이 대단해 보여도 이미 통치권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담대하게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 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파악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사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열등의식, 죄책감 등으로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정말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신은 이미 패배해서 떠났기 때문에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능력과 권세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없이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권세로 그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매여있는 죄의 사슬과 두려움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거인 같고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같지만 실상은 허풍선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고 언제나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염려에 짓눌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실체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