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336사 -健旺(건왕)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48
'노력하는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머리 좋은 사람은 운 좋은
사람을 못 이긴다'는 말이 있다.
얼핏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천성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난
사람은 어렵지 않게 익히고 얻는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운이 따르지 아니하면 한순간에 쌓은
공이 허물어지든지, 그 공이 남에게
돌아가는 일들이 발생한다.
아마 이런 관찰을 통해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몇가지
중대한 결함이 발견된다.
첫째로, '이긴다'는 말의 의미이다.
무엇을 '이긴다'로 보는가? 만일 이 말이
외형적인 성공이나 성취를 말한다면
일리가 있겠지만 궁극적인 이김, 즉
인생의 행복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맞다고 할 수 없다. 만약에 '노력하고
공부하는 행위와 과정'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결과로 얻는 성취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오히려 게을러지거나 꾀를 부리며,
운이 좋다고 하여 기회만 엿보고 있는
삶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것이기에 이런 논리는 어긋나게 된다.
둘째로, '이기는 시점'을 따져보아야
한다. 어느 시점을 근거로 이긴다는
말을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인생의 전성기나 노년기의 성공을
말하는지, 아니면 영원한 인생을
의미하는지 점검해보면 이 말은
뒤집어지게 된다.
인생은 그 자체가 인내로서 이루는
끊임없는 성장과 성숙에 있기 때문에
머리 좋은 것이나 운 좋은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운이 좋은 것을
믿다가는 퇴보하기 쉽고, 머리 좋은
것을 의지하다가 정체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끌려갈 위험이 크다.
따라서 위의 말은 얼핏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냉철한 진리의 검증대에
세우면 무가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깨달은 자는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운이 좋은 것도 사실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라고...
우주 만물의 이치는 간단하다.
생명의 자라남처럼, 날과 달이
바뀌는 것처럼 꾸준함과 한결
같음이 진리요 도이다.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는 비결도
이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믿는대로 행해나갈 것이며, 믿음이
강한 만큼 인내와 꾸준함이 나타날
것이다.
第 336事 應 2果 重 5形
(응 2과 중 5형) 健旺(건왕)
運健時旺(운건시왕)하니
所禱皆中(소도개중)하고
隣和里頌(인화리송)하니
所信皆從(소신개종)하며
植木耕田(식목경전)하니
家道豊隆(가도풍융)이니라
운과 때가 함께 왕성하니
기원하는 바가 다 성취되고
이웃과 화평하고 온 마을이 칭송하니
믿는 바대로 이루어지며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니
집안이 풍요롭고 융성해 가느니라
선과 덕을 쌓고 쌓으면 운이 좋게
되어 있다. 그 이치는 간단하다.
높고 많을수록 확률이 높아지는 것처럼
선과 덕을 높이, 그리고 많이 쌓으니
하늘의 이치와 맞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슛이 많을수록 골의 기회가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고, 여러번 걸면 당첨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처럼 하늘이 정한
운도 아무리 인간이 알 수 없다해도
이치를 따라 운도 작용하기 때문에
선과 덕을 쌓는 일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운이 좋아야 한다면서 막연하게
운을 기다리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가
없다. 운수를 알면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된다. 운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으로 비유를 하자면 천국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침노하는 자들이
쟁취하는 나라'가 된다.
예수의 이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고 있다.
도대체 천국을 침노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믿고 있는데 무슨 나라 정복하듯이
쳐들어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맞다.
능동적, 적극적으로 쳐들어 가야 한다.
다만 그 침노하는 무기가 세상의 총칼이
아니라 선과 덕이라는 것이 다르다.
하늘은 거기 존재하고, 또한 여기 내려와
있다. 그러나 그 높이는 물질적인 높이가
아니요, 여기 있어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다만 하늘의 뜻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선과 덕을 쌓는 일에 힘을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되는 높이요, 저절로
느껴지게 되는 그런 차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 된다고 한 것이다. 만일 이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다면 지금 열심히 진리를
묵상하고 증거하며, 선과 덕을 행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제대로 검증도 안된
교리, 게으름만 조장하며 방심하게 하는
허망한 교훈 따위를 붙들고서는 '예수를
믿으니 죽으면 천국 들어가겠지' 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자임을 증거할 뿐이다.
굳이 야고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떻게 복음과 진리가 선을 강조하고
있는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선에 대한
열정과 실행이 약할 수 있겠는가?
그게 죽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기원하는 바가 성취되는 원리도 같다.
열심히 빌고 또 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의
의미는 비는 중에 일어나는 변화를 전제
하고 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욕심에서
빌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부터
높은 차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성을 다해 빌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니 욕심이 자리잡고 있음이 보인다.
자연히 빌기를 그치든지, 마음을 바로하고
수용과 감사함의 기도로 바꾸거나 한다.
정성을 다해 기도하다 보면 기도가 이렇게
바뀌게 되어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혹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말이다.
그러니 기도가 어찌 성취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삶의 자세와 내용이 바뀌게 되면
자연히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된다.
그에게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니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지혜롭게 행하니 따르고 싶어한다.
물론 예수 당시처럼 도리어 이를 시기하고
모함하여 대적하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예수가 그러한 일을 당할
때였기에 그렇지 항상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 의식이 깨어나고 있고, 분별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는
시기와 저항보다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직 그런 시기가
왔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머잖아 성인들이 통치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원시시대로
회귀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도를
땅에 실현하면서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늘의 천사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일이
이 땅에서 나무 심고 밭을 일구어 열매를
얻어 즐기고 누리는 것이라면 너무
지나친 억측이 될까?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지만 사실 따져
보면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이유가
훨씬 더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천사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 그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16)
이를 알지 못하니 온통 두려움과 욕심에
매여서 불평과 원망에 갇혀 산다.
무지가 가장 심각한 독이요 해다.
진리로 무지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출처] 참전계경 제336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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