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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제333사 -玉帛(옥백)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333사 -玉帛(옥백)

柏道 2019. 4. 19. 22:45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45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는 각자의 책임이자
권리이다. 이를 소위 '세계관'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보는 눈을 말한다.
세상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모습이
달라질 수 있고,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져야 한다. 
특히 이 세계관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본인의 판단이요 결정이기 때문에 고유한
권리이다. 모든 주위 사람은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데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볼까?
혹자는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곳'으로 긍정적으로 볼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이와 정반대로
'죄악이 관영한 장차 멸망받을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 볼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인생이 무조건
밝아지고, 부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무조건 삶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판단과 견해에 대한 어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견해를 바탕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딱 부러지게 '좋다' '나쁘다'로
양분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다. 
무한한 아름다움 속에 끔찍할 정도로
흉하고 잔인한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가장 비참한 현장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지구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답은 '좋지만 좋기만
한 세상은 아니며, 나쁘지만 나쁘기만 한
세상은 아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좀 더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좀 더
나쁘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일 뿐 극단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각자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눈과 의식을 흔드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어떻게'에 집중하기 보다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좋은 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도대체 이 세상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고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너무 세상을 단순하게
본다. 그러니까 인생도, 삶도 단순한 '좋고
나쁨'의 잣대로 판단하고, 좋게 생각되는
것만 마구 추구하는 현상이 만연되어
있는데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6:25)는
말씀에 걸리면 끝장이다.
 
第 333事 應 2果 重 2形
(응 2과 중 2형) 玉帛(옥백) 
 
居華堂麗室(거화당려실)하고
藏金銀玉帛(장금은옥백)하며
商旅盈門(상여영문)하여
交易日繁(교역일번)하며
一世安樂(일세안락)하니
無是無非(무시무비)니라 
 
화려한 집에 살면서
금은, 옥과 비단을 모아두고
상인들이 문에 가득차서
교역은 날마다 번성해가며
한 평생 평안과 낙을 누리니
옳으니 그르니 시비도 없느니라 
 
진리에는 양면성이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속이 있을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속이 존재할 수도 있다.
진리는 이 둘을 모두 다 인정하고 포함한다.
따라서 겉과 속이 다르다고 잘못이라고
판단해도 지나치고, 겉과 속이 같다고 해서
진실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자의적일
뿐 진리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껍질과 속의 색이 같은 감이나 오렌지는
좋은 과일이고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수박이나 사과 등은 나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참전계경 333사가 말하는 이 복은 어떻게
해석을 내려야 할까?
만일 이 세상이 전부일 것 같으면 인간이
이이상 큰 복을 누릴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면
해석은 완전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솔로몬 같은 경우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다 누려 본 사람이다.
그는 위에서 제시한 것보다 훨씬 풍성함을
누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결론은
극도의 허무함이엇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그의 고백은 온통
헛되다는 고백 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과
풍요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복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복선이 깔려있고, 진리의 양면적
속성이 숨겨져 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누릴 것을 못누리든지,
누릴 수 없는 것을 소원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 대한 묘사가 위의 내용과
아주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황금보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성,
성문들은 항상 열려있어서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오가며,
거기에는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이
없다고 되어 있다(요한계시록 21장).
물론 규모나 그 영광은 비교할 수 없지만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가르침은 사실 이 땅에서
누릴 영광과 화려함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말씀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런 행복은 이 세상에서 힘써
선을 쌓고, 깊은 덕을 함양하는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하늘이 주시는 복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복을 누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쌓을 선이 여전히 남아있고,
베풀어야 할 덕을 기다리는 곳이 이처럼
많은데 언제 이 땅에서 이런 화려함과
풍성함을 누리겠는가 하는 말이다.
실제로 그 누구도 그런 행복을 누린 사람이
없고, 가장 근접하게 누렸다고 하는 솔로몬
같은 사람도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고백하는
마당에 누가 이 세상에서 이런 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특히 예수를 비롯하여 모든 위대한 성현들은
그 누구도 이런 복을 이 땅에서 누린 적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복을 누리려고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혹독하게 비판을
가했다. 그렇다면 엉뚱한 기대와 소망을
품고 살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점검해 볼 일이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기대하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에서는 그러한 복이 주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은 자극을
위한 맛보기일 뿐  진정한 행복과 누림은 
다음 세상, 즉 천국이라고 불리는 영적인
세계에서 주어질 것임을 알고 이 세상에서는
오직 선과 덕에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롭다. 그렇게 살면 다음 차원의 영광이
지금 눈에 보이고 손으로 느껴지는 듯한
체험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도 적용
된다고 할 수 있게 된다. 높은 차원의 감각,
그러니까 의식으로 감각을 만들어 내는
차원으로 올라가 이 땅에서도 이러한 영광을
누리고, 천국에서도 누리는 온전한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