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332사 -福重(복중)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332사 -福重(복중)

柏道 2019. 4. 19. 22:44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44  
 
'重'이라는 말은 '무겁다'는 말과 함께
'거듭하다'는 의미도 있고, '겹'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복이 쌓이게 되면 여러 겹으로 그 차원을
달리하여 나타나게 되는데 쌓은 사람은
점점 높고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가장 겉으로 나타나는 복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복이다. 물질화 되어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생명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복이다.
많고, 높으며, 편안하고, 맛나며, 향기롭고
짜릿하는 등... 이러한 감각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과 식물도 가지고
있는 감각이다. 심지어는 광물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 복은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좋아한다.
그러나 이 복에는 반드시 화가 동반하는
것을 얼마지 않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물질로 나타나는 것은 반드시
음양의 법칙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 위해서는 어두움이 먼저
있어야 하며, 배부름은 배고픔 없이는
느낄 수 없는 체험이다.
만족은 불만을 전제로 하고, 단 맛은
쓴 맛을 통해서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좋은 냄새를 맡기 위해서는 역겨운
냄새를 체험해야 하고, 짜릿함은
무미건조함을 배경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은 상대적일 수 밖에 없고
또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다.
특히 인간은 더 나은 것을 향하는
생명성이 어느 동물이나 식물보다 강하기
때문에 쉽게 식상하고 지루해한다.
그래서 더 많이, 더 높이, 더 강한 것을
원하지만 곧 그 한계를 만나게 된다.
물질적, 감각적인 것은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 그래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만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第 332事 應 2果 重 1形
(응 2과 중 1형) 福重(복중) 
 
福重則大榮(복중즉대영)하니
世有爵祿(세유작록)하고
富貴不絶(부귀부절)하며
英俊相承(영준상승)하여
門戶煥爀(문호환혁)이니라 
 
복이 쌓여 중한즉 영광도 크니
세상에서 벼슬과 복록을 받고
부귀가 다하지 않으며
영웅호걸이 계속 이어져
그 가문을 크게 빛내느니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어떤
복을 상상하는가가 그 사람의 수준이다.
만일에 여기서 말하는 복을 '더 많은 것'
으로 해석한다면 같은 종류를 더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그러나 '겹'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다른 차원의 복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물질적, 감각적인 차원을 넘어선 정신적,
영적인 복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복에 상대되는 것이 정신적
만족을 가져다 주는 명예나 권력 등이
아니다. 물론 굳이 나누고 싶다면 그렇게
나누어도 무방하다.
먹고 마시는 차원을 넘어 명예와 인기,
권력을 더 큰 복으로 보는 의식도 성장의
과정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차원에 머물게 되면 곤란하다.
한 단계, 아니 끝없는 차원으로 발전해야
진리의 가르침이 빛이 나는 것이지 고작
그런 정신적인 복에서 그치면 진리의
의도와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성경을 비롯한 여러 지혜의 경전을 보면
다른 차원의 복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세상의 명예와 권력도 사실은 먹고 마시는
차원에 들어간다. 진정한 복은 일단 '성령
안'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은
성령 안으로 들어간 상태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은 분명하지만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고차원적인 복과는
거리가 있다.
진정한 복을 추구하는 자는 '성령 안'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런데 이제까지 배운 것이 바로 이 진리다.
우리가 성령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선언하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하다.
진리는 '이미 우리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고 선언한다. 성령 안에 거하는
체험은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경험되는 증거인데 시간이 좀 걸린다.
왜냐하면 무지와 두려움, 의심과 욕심 등으로
그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러한 위대한
진리의 증거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진리가 어렵거나, 누가 못받아
들이도록 막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이 진리를 믿고 새겨서 마음이 맑아지는
현상에까지 도달하게 되면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당당함이 생기고, 평안함이 지속되며, 기쁨이
넘쳐 흐르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할 수 없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다음 차원의 복도 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원론의 물질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인식되고 누릴 수 있는 복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한꺼번에 다 알 수도 없고,
알아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복의 지향점은 바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수준이다.
여기에 도달하는 것 만으로도 영생의 복을
얻었다고 하며, 그 누구도 부럽지 않고
욕심과 불만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오늘 참전계경의 가르침의 본질은 바로 이
복을 말하고 있다. 다만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각적인 복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