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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312사 -勘尙(감상)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312사 -勘尙(감상)

柏道 2019. 4. 18. 23:38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24  
 
보통 처음에 말을 안들으면 두 번, 세 번
거듭 말하면 들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몇 번 말해야 알아 듣겠느냐?'고
꾸지람 하면서 횟 수에 기대를 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횟수가 거듭되면 말을 듣고 고칠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실상은 그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사실 좋은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몰라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서이기 때문이다.
만일 몰라서 듣지 않았다면 한 번에 바로
깨닫고 '잘못했습니다'하며 돌이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대개 알면서도 욕심이나 자존심
때문에 고집을 부리며 악을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거듭
책망하고 경계할수록 저항은 더 강해지고
거역은 더 심해지게 된다.
특히 악한 일은 자신의 양심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지적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을 알지 못하고 한 번 말해서
안되면, 여러번 반복하여 책망하고
꾸짖으면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투사할 뿐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에 대한 꾸지람을 할 때는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동원해야 한다.
한 번 준엄하게 꾸짖어 그 영혼을
자극하여 일깨우는 효과를 내지 않으면
돕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악으로
나가도록 부추기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고, 능력이 없으면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으로 밀게 된다.
만일 그 대상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요
자식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잡는다고, 살린다고 하는 일이
도리어 더 악한 쪽으로 가게 만든다면
그보다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남을 향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그 어리석음에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처럼 자신은 진리의 간절한
깨우침에도 불구하고 그런 쓸데없는
잔소리를 계속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의 그 잔소리를 듣고
돌이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第 312事 報 5階 大 1及
(보 5계 대 1급) 勘尙(감상) 
 
勘尙者(감상자)는
懲勘而不改也(징감이불개야)라
一惡經懲(일악경징)하고
再惡經勘(재악경감)하나
猶不知改(유부지개)하여
終身做惡(종신주악)하면
狂惡也(광악야)라
可領其禍(가령기화)니라 
 
감상(勘尙)이란
혼을 내고 문책해도
고치지 않음을 말하느니라
한번 악에 혼을 내고
다시 범하는 악에 문책을 해도
오히려 고칠 줄 모르고
종신토록 악을 저지름은
악에 미친 것이니라
가히 그 벌을 받게 되느니라 
 
사람의 자존심은 상상 이상으로
고집이 세다. 좋게 보면 그러한
고집이 신념과 같은 속성이기 때문에
방향만 바르게 잡으면 선과 멋이
될 수 있지만 만일 고집으로 버티게
된다면 문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지독한 자아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들어보면 그 심각성을 좀
헤아려 볼 수 있다.
레위기 26장을 보면 정말 읽기에
민망할 정도의 끔찍한 징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만일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고 언약을
배반하게 되면 큰 재앙을 내려서
농사와 산업이 망하게 하고 전쟁을
통하여 고통의 징계를 할 것인데
그래도 청종치 아니하면...일곱 배나
더 강하게 징계를 행하겠다고 한다.
(26:18) 그런데도 또 듣지 아니하면
그 위에 다시 일곱 배의 재앙을 내릴
것이고(21)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그위에 또 다시 일곱 배의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하며(24), 그래도
거역하면 또 다시 일곱 배가 더해질
것이라 한다(28).
도대체 몇 배가 되는지 계산해보자.
7x7x7x7 = 2401
무려 처음 벌의 2401배나 더 심한 벌로
징계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말씀이다.
그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죄악을 벌하겠다는 의미도 있고,
동시에 하나님이 끝까지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 무시무시한 공의와 함께
지극한 사랑이 이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은 두려움과 동시에
복음이 된다. 그 누가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섭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은 결국은 하나님이 구원하고
마시겠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지독한
면이 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가 실제로
임한 시기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때이다. 그들은 실제로 어마어마한
징계와 형벌을 받아 절망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고 하시며 돌이키기를
명하셨다(이사야 22:12).
그 때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의외였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13)
정말 대단하다.
한 마디로 '배째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독한 것이 인간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어찌 하나님이 인간에게 질 소냐?
이렇게 지독하게 반항하고 거역하는
인간을 위하여 취하신 조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다.
인간은 벌을 주고 때려서 바뀔 존재가
아니심을 친히 아시고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시고
자발적으로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신
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사실 여전히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고 듣지 않는 이유는 이 깊은
사랑까지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모든 과정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돌이키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사실 우리가 전할 복음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전하는 자가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복음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있어야 하며 나아가 남들에게
삶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여전히 '위협과
공갈'이 들어가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사실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보이신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죽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불신자와 악한 자들을
향해 '당신들을 위해 내가 대신 죽겠다'는
자세와 삶의 증거를 내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 이야기처럼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외치고만 있다면 아직 자신도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2401배를 징치해도 돌이키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사람들을 단지 말로 깨우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 구제나 하고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는지
그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