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314사 -驟峻(취준)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26
장로교 교리 가운데 많은 비판을 받는
'예정론'(Predestination Theory)이란
교리가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사람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한 쪽은 하나님이 이미 구원하기로
작정을 했고(selection), 다른 한 쪽은
버리기로 작정을 하셨다(reprobation)는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말하면 '이중예정교리'
(Dual Predestination Theory)라고
하는데 '선택과 유기'(Selection and
Reprobation)의 작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선택과 유기에는 어떤 특별한 근거가
따로 없고, 이유도 없다.
인간의 머리로서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왜 그런 차별이 발생
하는지에 대해서 능히 설명을 하지 못한다.
불교에서야 '전생의 업보'(Karma)라고
설명을 하지만 이 또한 근원적인 설명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생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결국은 어느 시점에서
선과 악의 '분깃점'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 갈라지는 원인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오리겐이라는
유명한 교부나 기타 여러사람들이 이
예정론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전생이론'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설명은
근원으로 거슬러 들어가면 결국 같은
질문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예정론 교리는 마치 '운명론'(숙명론)
처럼 생각되어 심각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노골적으로 '사탄의 교리'라고
맹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난의 배경은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이
죄를 짓기도 전에 이미 버림받기로 예정
되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선한 하나님의
공의란 말인가?'하는 윤리적 문제가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예정론을 분명하게 주장한
칼빈(John Calvin)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일축해 버린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기를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하시는 주권적인
작정과 사역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따지는 것은 불경한 짓이다'라고 경고를
던진다. 그러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는데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로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로마서 9:19-23)
단호하고 분명하다.
피조물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는
논리로 입을 막아버린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주시니 피조물 된
인간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이해가
안되어도 잠잠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실까?
우리가 필요에 따라 물건을 만들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런 미련없이
갖다 버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하나님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구원할 자'와
'멸망받을 자'로 나누어 창조하고 그 정한
운명대로 가게 하셨을까?
쉽지 않은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답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답이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해서도 안될 일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 인생의 근본
문제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第 314事 報 5階 大 3及
(보 5계 대 3급) 驟峻(취준)
驟峻者(취준자)는
平居善良驟爲峻惡也
(평거선량취위준악야)라
良而做惡者無(양이주악자무)하며
善而做惡者亦無
(선이주악자역무)니라
其原心不良(기원심불량)하고
原性不善(원성불선)하여
輒行峻惡(첩행준악)하니
藏惡也(장악야)이라
可領其禍(가령기화)니라
취준(驟峻)이란
평소에는 선량하던 사람이
갑자기 험한 악을 짓는 것이니라
어질면서 악을 짓는 사람이 없고
선하면서 악을 짓는 자가 또한 없느니라
원래 마음이 불량 하고
원래 성품이 불선하여
갑자기 악을 저지르게 되니
이는 악을 숨기고 있음이라
가히 그 재앙을 받게 되느니라
앞에서 장황하게 '예정론'까지 들먹인
이유는 놀랍게도 이 가르침에 그런
요소가 나오기 때문이다.
원래 마음이 불량한 사람이 있으며,
원래 성품이 불선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정론 처럼 마음이나
성품이 이미 선과 불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착한 일을 함으로
마음이 착해진다는 원리도 있지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한다는 이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가 매우 어렵게
느껴지고, 혼란스럽게 하거나 자체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이성과
생각이 따라가지 못해서 하늘의 이치를
혼동하거나 오해를 하게 되는데 분명한
것은 진리가 상반되거나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자세는
무리하게 끼어 맞추거나,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진리는 점점 그 빛과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이끌어 갈 것이다.
선한 사람은 악을 저지를 수 없다.
사실 선한 성품을 가지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생각이나 말, 행동 모두가
선하고 아름답다. 물론 연약함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일시 악에 빠질 수
있지만 근본이 선하고 좋기 때문에
결국은 그 선한 본성과 마음을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평소에
착해 보이고, 좋은 사람 같았는데 갑자기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있다.
요즘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총기살인사건
이라든지, 연쇄 살인범, 묻지마 범죄 등이
바로 그런 예다.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고
한다. 평소에는 착실하고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참전계경의 지혜는 그 근원이
악하다고 판단한다. 마음과 본성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런 악이 숨어있다가 어느
시점에 표출된 것이라는 의미다.
예정론을 참고한다면 그러한 자는 이미
하나님이 '유기'하기로 작정한 자들이다.
예수도 이를 명확하게 했다.
가룟유다에게 대놓고 '마귀'라고 지칭했고,
외식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노골적으로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다.
그리고 '내 양은 나에게로 온다'
'내게 주신 자는 내가 다 찾는다'는 등의
말을 통해서 이미 자기에게 속한 자가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렇게 되면 금방 혼동이 온다.
아니 언제는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더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또 이렇게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악한
본성을 타고 난 자라면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노력
또한 이미 이렇게 양분되어 정해져 있다면
인간에게 도적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악한 본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거기에다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한 일 아닌가?
과연 이 대립과 모순을 어떻게 풀 것인가?
아쉽지만 항상 이쯤에서 중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리를 하면서 풀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혼란과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분명히 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의식은 그 답을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좀 더 높은 의식으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묵상등을 통하여 점점 의식을
상승시켜야 한다.
언젠가 이 문제를 즐겁고 재미있게 논할
때가 올 것인데 그 때를 위해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출처] 참전계경 제314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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