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99사 -(보 3계 창) 剙(창)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11
공부를 안해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면 적극적인 반성은 곧바로
책상 앞에 앉는 일이다.
굳이 잘못한 일에 대해 용서를 받고
싶다면 진지하게 한 번 '잘못했습니다'
하고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가면된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으면 그것은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욕심과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양심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교묘하게 감추어진 교만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죄에 대한 회개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철저하게 죄를 회개
하는 것을 강조하고 본인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쓴다.
물론 양심의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반성할 줄 아는 태도는 칭찬 받을만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수준에서
머물고 더 나아가지 않으면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회개'를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면서 서로 경쟁을
하기를 누가 더 눈물을 많이 흘렸으며,
누가 더 참회의 고통을 많이 받았는가로
경쟁을 하게 된다.
한 때 효자됨을 증명하기 위해 불효에
대한 반성으로 자기 손가락을 불에 태운
자식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 습속이 확산되면서 한 손가락
태운 사람보다 두 손가락 태운 사람,
이런 식으로 점점 손가락 태우기 경쟁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자신에 대한
불효를 그렇게 제 손가락을 태우면서
참회하기를 바라겠는가?
신에 대한 정성과 믿음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이런 일을 서슴지 않고 경쟁을
해 온 것이 종교의 역사이고 보면 인간의
어리석음의 끝이 어디인가 싶다.
진정한 회개는 죄에 대해 반성하는 것보다
도리어 선을 행하는 것으로 증거하는
것이 훨씬 적극적이고 훌륭한 태도이다.
바로 그 멋진 지혜가 참전계경 299사에
아름답게 등장한다.
第 299事 報 3階 剙
(보 3계 창) 剙(창)
剙剙善(창창선)이라
蒸而去染者(증이거염자)는
蒸剙也(증창야)요
浣而去汚者(완이거오자)는
浣刱也(완창야)요
悔而去惡者(회이거악자)는
善刱也(선창야)니
脫身混㴍(탈신혼승)하며
洗心淸流(세심청류)면
可領其福(가령기복)이니라
창(剙)이란
선을 시작함이니라
물에 삶아 물든 것을
제거하는 일에는
삶는 것이 그 시작이요
씻어서 때를 제거하는 일에는
씻는 것이 그 시작이라
참회함으로 악을 제거하는 일에는
선행이 그 시작이니
몸의 혼탁함을 벗고
마음을 맑은 물에 씻으면
가히 그 복을 받게 되느니라
모든 것에 순서가 있을 뿐 아니라
목적이 있다. 순서를 어기는 것은
무지에 속하며 의미없이 정한 순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어리석음이다.
찌든 때를 제거하기 위해 종종 빨래를
삶는 것을 보았다.
순서는 먼저 빨래를 삶는 것이 얼룩을
제거하는 첫 단계요, 삶고 나서
찬 물에 헹구는 것이 다음이다.
씻어서 때를 제거하는 일도 마찬가지
순서를 밟는다.
이러한 순서를 어기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해 빨래를 삶고, 물에
씻는 것인지 그 목적에 대한 것이다.
그 목적은 '때를 빼어 옷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지 물을 데우는 것도 목적이
아니요, 물에 담그는 것도 추구하는
결과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국과 때를 빼어 깨끗한
옷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면 깨끗한 옷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추하다는 비난이나 조롱을 듣지 않는
더 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일단 빨래의
목적은 '깨끗함'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죄를 참회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목적은 선함을 위함이지
참회나 반성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선함을 이루려는 목표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되면 '누가 누가 참회를 잘하나'
경연대회에 말려 들어가게 된다.
종교인들 가운데 특히 이런 자들이 많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온통 죄 이야기
뿐이다. 맨날 죄 짓지마라, 회개를 철저히
해라, 죄를 지으면 벌 받는다....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사는지 모를
정도로 온통 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가만 보면 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죄를 안짓는 것이 선'이라는
식의 소극적인 가르침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선을 행하는 것이 죄를 안짓는 최선의
길'인데 이상할 정도로 죄를 안짓는
것에 과도한 집착을 하고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선을
행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신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좋고 당연하여 하는 것이지 무언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는 목적도 분명해야
위선과 외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악을 제거하고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러면 악이나 죄에 생각을 두지 말고
오히려 선을 향하여 일어나라.
소극적으로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기
보다 일어나 나가서 선을 행하는 것으로
자랑을 삼고 당당함을 함양하라.
교회 안에 궁상맞게 늘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고 있으면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까지 얹짢게 하며
젊은 이들을 다 내어 쫓고 막는 일을
하게 된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회개'가 모든 것의
답인양 부르짖고 있는데 답답한 일이다.
차라리 그렇게 모여서 부르짖으면서
시간을 낭비할 동안에 그 시간, 그 물질로
선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나은 지혜요, 칭찬받을 일이다.
다시 한 번 이 지혜를 마음에 담자.
최선의 회개는 지금 즉시 선행을 시작
하는 것이다. 그러면 죄는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어둠을 내어 쫓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다. 불을 밝히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어둠을 내어 쫓아야 한다고
떠드는 자들은 오로지 그 '떠드는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려는 자들이니 그 말에
이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출처] 참전계경 제299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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