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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97사 -斥謗(척방)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97사 -斥謗(척방)

柏道 2019. 4. 17. 17:49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09  
 
나는 참 겁이 많은 편이다.
아마 모두들 속으로는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겉으로 용감한 척 해도 사람은
다 겁이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겁을 내고 산다.
하기야 그래야 또 두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재미가 있으니 나쁠
것도 없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마음이 상당히
불안하다. 차나 배를 타면 사고가 나도
땅이요, 물이니 생존할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비행기야 떨어지면 거의
전원사망이니 탈 때마다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내릴 때까지
마음을 졸인다.
그런데 어떤 통계를 보니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이 엄청나게 낮단다.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0.00000249%가
밖에 안된단다. 0.001%만 되어도
거의 0로 보는데 소수점 아래 0이
다섯개나 붙는다니 이거야 뭐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이 통계를 본 이후로 상당히 마음을
놓게 되었지만 그래도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1%는 적지 않은 수요,
확률이다. 그래서 사람은 99가지를
잘해도 한가지 잘못하면 바로 죄인이
된다. 율법은 그렇게 역사한다.
999가지를 잘해도 소용없다. 0.01%의
죄라도 죄인이 된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0.00000249%도
불안한 확률이 되며 실제로 그 확률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있고 보니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으면 결코 자유함을
얻을 수 없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선과 악을 가릴 수 있겠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들어오면 99%나 0.0001프로나
죄는 죄요, 죄를 지은 죄인이 되기에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율법 하에 있게 되면 그 어떤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와도 자유함을
얻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와서 인류의
모든 죄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했다고 하지만 이 진리를
확실하게 믿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이렇게 단정을 하는가 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는 '의와 죄'의
구분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여전히
그 입에서 '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는 아직 자유하지 못한 자임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의
의미는 '정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죄하는 법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율법의 기능 자체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에서는 '죄'를
전제로 하고 가르치고 있으니 아무리
말을 해도 다람쥐 쳇바퀴가 된다.
복음은 완전히 반대의 현상을 일으킨다.
100가지, 천가지 잘못이 있어도
한가지 의만 보면 구원을 베푼다.
그런데 그 한가지 의가 바로 '믿음'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입으로 '믿음' '신앙생활'등 입에 붙은
것이 믿음이라는 말인데 정작 그 의미를
알고 쓰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믿음은 '믿습니다'하며 침을 튀기며 
소리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 중요하다.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내용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다.
'그리스도가 구원하셨다. 이제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이 진리,
바로 이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곧 죽어도 죄인이요,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고백한다.
이러는 자체가 믿지 않는다는 증거인데
이것은 제쳐놓고 교회 잘 나가고,
헌금과 봉사 좀 하면 믿음이 좋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헷갈린다.
복음을 믿는 것과 죄책감이나 정죄에
대한 두려움은 양립할 수 없다.
여전히 정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믿음이 없다고 고백하고 복음에 대해
더 고민하고 연구할 일이지 공연히
다른 것으로 믿음을 가장하게 되면
오히려 기회조차 잃게 된다. 
 
第 297事 報 2階 重 5及
(보 2계 중 5급) 斥謗(척방) 
 
斥謗者(척방자)는
斥害善之謗也(척해선지방야)라
性僻見一善百謗斥之
(성벽견일선백방척지)하고
聞一善百謗斥之
(문일선백방척지)하며
甚則益於善而亦不縱
(심즉익어선이역부종)이면
天性之固也(천성지고야)라
可領其福(가령기복)이니라 
 
척방(斥謗)이란
선함을 해치는 비방을
물리치는 것이니라
성품이 좀 부족해도
한가지 선함을 보면
백가지 비방을 물리치고
한가지 선함을 들으면
백가지 비방을 물리치며
비방의 정도가 심해져도
선한 마음을 더할 뿐
비방을 따르지 않으면
천성이 견고함이라
가히 그 복을 받게 되느니라 
 
다른 것에는 부족해도 큰 문제가 안생긴다.
그런데 진리에 대해서, 복음을 이해하는
일에 부족하면 완전 망한다.
성품이 좀 편벽되면 어떠하며, 좀
괴퍅한들 뭐가 문제인가?
모두가 다 한 두가지 이상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을 다 아는데...
위의 가르침은 진리에 눈을 뜬 자에
대한 말이다.
빛을 보면 아무리 어두움이 난리를
부려도 빛을 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서 깊은 속에서 나온
선함을 보고 듣게 되면 그에 대한 비방이
아무리 많아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선함을 존중하고 그에 기대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진리가 우리에게 역사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 율법은 매우 까다롭다.
50%가 아니라 1%도 용납할 수 없다.
10000가지 가운데 1%면 100가지인데
율법은 백분율에 입각하여 보지 않는다.
100가지는 많고 크다.
적은 1%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많은
100가지가 보여서 악하고 악한 자로
보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하물며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현상이
10000가지만 되겠는가?
그러나 복음을 아는 자는 만가지, 아니
백만가지 잘못과 실수가 나와도
진리로부터 나오는 한가지 선행이
있으면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를 존중하게 된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99마리 양을
들판에 두고 한가지 잃은 양을 찾는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보통 이 비유를 길 잃은 죄인 하나,
불쌍한 사람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찾으시는 예수로 설명하지만 어딘가
너무 억지같은 느낌이 든다.
한마리 찾는다고 99마리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물론 목동에게 맡겨두고 간다고 덧붙이고
싶겠지만 비유 내용에는 그런 말이 없다.
그냥 내버려 두고 한마리를 찾는다고
나섰고, 찾게 되자 또 웃기는 일이 벌어
지는데 이웃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아니 잔치를 벌이면 또 양이나
소 등 몇마리를 잡아야 할 것 아닌가?
당연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비유는 그렇게 풀어서 안된다.
복음과 율법의 비유이며, 허상과 실상의
대조이다. 진리로부터 나오는 것, 그것이
길을 잃어 헤매고 있는 것 같은 우리 속의
선과 진리를 예수는 찾아 내어서 우리와
온 세상, 하늘에까지 알리고 자랑한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신성이 우리 속에 아주
작은 것만 있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어두움과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회복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되는 것
같이 들리지만 복음을 깨닫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 된다.
모래 속에서 사금을 캐는 사람이 금보다
모래가 너무 많다고 투덜대는 것을 
보았는가?
몇 톤의 모래 속에서 단 1그램의 금만
캐어 내어도 그는 기뻐하지 않겠는가?
주위를 잘 살펴보라.
가장 악해 보이는 사람에게서도 선의 빛이
혹시 나타나지 않는지...그러면 그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가 세리와 창기들에게서
소망을 발견한 것이다.
완전한 가짜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에서 폭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