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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제294사 -恐失(공실)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94사 -恐失(공실)

柏道 2019. 4. 17. 17:41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06  
 


예수의 비유 가운데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비유를 대하면 보화에 눈이 번쩍하여
온통 마음을 거기에 빼앗기고 만다.
마치 보물섬 이야기처럼 듣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은 예수의
비유가 '천국'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세상의 물질적 성공이나 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이해할 만한 요소를
찾은 것이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보화'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지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찾기 어렵게 감추어지는 것은
뻔히 보고도 그 가치를 모르는 경우다.
그러니까 수천억원의 가치가 있는 
운석이나 다이아몬드 원석이라도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철저히 감추어져
있게 된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 내다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말처럼 눈이
가린 자들에게는 메시야가 눈 앞에 있어도
철저히 감추어져 있고, 천국이 내려와
있어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예수의 의도를 모르고
죽어서 가는 천국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그런 자들에게 천국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
예수가 이땅에 온 것 자체가 하늘이 임한
것이요, 예수의 진리가 전파되는 곳이
하늘의 뜻이 임하는 곳인데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비유를
읽고, 들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이나, 죽어서 가는 천국을
꿈꾸고 있으니 어찌 답답한 일이 아닐까?
이미 그들은 스스로 알고 있다.
자신들이 말하는 천국은 이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안다. 그렇게 좋다는 천국을
그 누구도 빨리 가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라.
그러면서도 '저 좋은 천국'을 말하고
있으니 누가 그 말에 속겠는가?
이미 성령이 우리 몸 안에 거하심과 하늘의
뜻이 온 땅끝까지 울려퍼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는 곳은 동화속의 나라보다 더
황당하고 허망하다.
 
第 294事 報 2階 重 2及
(보 2계 중 2급) 恐失(공실) 
 
恐失者(공실자)는
恐失其善也(공실기선야)라
認善如寶(인선여보)하고
認惡如盜(인악여도)하며
恒恐失寶於盜(항공실보어도)하여
抱寶自保(포보자보)하고
一心鎭盜(일심진도)하며
不近寶室(불근보실)하면
可領其福(가령기복)이니라 
 
공실(恐失)이란
선함을 잃을까 두려워 함이니라
선함을 보물처럼 여기고
악함을 도적 같이 여기며
항상 도적에게 보물을
잃을까 두려워 함으로
보물을 품고 스스로 보호하고
일심으로 도둑을 진압하여
보물이 있는 곳에 가까이 못하게 하면
가히 그에 합당한 복을 받게 되느니라 
 
진짜 보화는 물질적인 보석 따위가 아니다.
모든 경전이 가르치듯 우리 본성속에
내재된 착함, 지혜로움, 거룩함, 사랑등이
진정한 보석들이다.

이러한 것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재물과 보석, 즐거움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정신없이 따라
다닌다. 그나마 보는 눈은 있어서 변치
않고 오래간다는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제대로 된
눈이 아니다. 
금방 썩는 것이나 영원해 보이는 보석들도
물질세계에 속한 것이고 보면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다. 우리의 시간으로 보기에
하루와 수억년의 차이가 크지만 시공을
초월한 영적 차원에서는 그 길이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진정한 보물은 우리의 선한 양심이요,
인자한 마음이며,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비심이다. 이러한 것들이 영원하며
우리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주고
우리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로 꾸며

준다.
그런데 어리석음과 악에 물든 사람들은
썩을 것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해치며,
선한 양심을 버린다.
물건을 약탈하고 빼앗가 가는 도적을 막기
위해서는 최첨단 방범시설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소중한 양심과 본성은 쓰레기통에
주저없이 내 팽개쳐 버린다.
진정 지혜로운 자들은 반대로 한다.
만일 내 양심을 더럽히고, 선한 본성에 해가
된다면 아무리 소중하고 귀해 보이는
물질이라도 단호하게 버릴 수 있다.
심지어는 육신의 목숨조차 초개처럼 내
던지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가치와 보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와 세상에 증거한다.
이러한 보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 세상의 욕심에 어두워
지게 되면 점점 영적인 것에 대한 의식은
약해지게 되고 그로 인해 영적인 곤고함은
더 심해지게 된다.
세상의 보물은 비유이다.
소중한 것을 품에 품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내면의 가치를 그렇게 품고
보호하라고 일깨운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역설이 있다.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품에 꼭 안고
간직하려는 바로 그 물질적 보물... 그런데
진정한 보물인 선함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내 던져 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보화가 진정한
보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참된
보화를 얻고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진리의 말씀 한구절을 위해 피같이 귀하게
생각하는 돈을 내어 놓을 수 있는가?
그것도 적은 돈이 아닌 큰 돈을 말이다.
또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명예와 자존심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당할
자신이 있는가?
그러니까 아예 부자가 될 생각을 하지
말고, 자존심과 명예 따위를 쌓고 높이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