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95사 -勉勵(면려)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307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경험을 해 보고, 그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가 잘 모르고, 경험이 없으며,
좋다는 확신이 서지 않고서는 아무리
권하려고 해도 힘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의 어떤 욕심을 채우기 위해
권하거나 설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눈빛이 이상해지고, 말투나 논리가
불분명하게 된다.
따라서 조금만 의식을 가지고 살펴
보게 되면 상대방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에
관심과 뜻이 있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선한 일에 확신을 가지고 권면하는
경우에는 모든 분위기가 다르다.
일단 진지하며, 눈빛에 빛이나고
말이 명료하며 확신에 차있다.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권면하고 설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은 반드시 효과를
내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진리의 힘이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먼저 본인이
인내를 가지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몇 단계 고비를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일들이 많이
있다. 외부의 유혹이나 위협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고 가까운데서
반대와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필수
과정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적인 시험은 사실
큰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진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내부적 시험,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좌절, 그리고 낙심 등이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가 그렇게 간절했던
이유도 바로 이 내적인 갈등과 고민에
있었다. 과연 이 잔은 피할 수 있는
것인지,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인지 그 문제를 두고 깊이 씨름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답을 주시지 않는다.
아니 이미 답은 예수 자신이 알고 있었다.
다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의심등이 최후의 시험으로 온통 그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의 피땀 흘리는 기도는 별다른
응답을 받아 내기 보다, 이미 받은 답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는 그 힘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었다.
기도의 본질은 어떤 외부적인 힘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빛이 강화되도록
한다. 그래서 기도는 진지하고 길어야
하며, 온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만 용기와 확신의 불꽃이 피고
급기야 활활 타오르게 될 것이다.
第 295事 報 2階 重 3及
(보 2계 중 3급) 勉勵(면려)
勉勵者(면려자)는
勉善而勵善也(면선이려선야)라
勉善而不振勵善
(면선이부진려선)하고
勵善而振更勉善
(려선이진갱면선)하니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可領其福(가령기복)이니라
면려(勉勵)란
선행에 힘쓰게 하며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니라
선행에 힘쓰나 떨침이 없으면
선행을 격려하고
선행을 격려하여 떨치게 되면
다시금 선행에 힘쓰게 하니
선하고도 선하도다
가히 그 복을 받게 되느니라
자신이 선행에 힘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바리새인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기는 안하거나, 위선으로
하는 척만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하라고 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과 위선은 금방
드러나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내면의 비난과 주위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항상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자기를 무시하지 말라고
명함에 온갖 경력과 직함을 다 올리며
이것 저것 이름 내는데는 다 끼어들면서
초조함과 비굴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권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한가지 뿐이다.
본인이 그 가치를 깊이 경험하고 지금도
그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을 때 비로소
남들에게 자신있게 권할 수 있다.
나보고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더러 있다.
좀 천천히, 수준을 좀 낮추어 달라는 것이다.
이해는 하겠지만 나 자신이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마치 중독에 빠지면 아무리 말려도
안되는 것처럼, 선한 일과 진리에 깊이
빠지면 잠시라도 소홀하거나 방심할
수가 없다.
자랑 같지만 약 20년 설교를 하면서
한번도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 혹은 남의
글을 베껴서 내것처럼 전하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항상 진지했고, 열정을 토했으며
최고의 긴장을 유지했다.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약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많이
나가 떨어지고 심지어 화를 내며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럴 때는 심히 낙심도 되고 좌절이
속에서 일어나 '꼭 이럴 필요가 있나'
싶다가도 예레미야의 고백이 떠오르고,
에스겔이 받은 소명이 나를 깨우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아무리 전해봐야 백성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조롱과 모욕을 주니 결단하기를
'다시는 선포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너무 커서 견디지 못하고 또 전하는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라...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에스겔 3:7-11)
내가 받은 소명의 말씀이다.
그러다보니 저항이 대단하다.
가장 심한 저항은 가까운데서 일어나고,
더 심한 시험은 내 마음에 일어나는 낙담이다.
때로 그 낙담의 강도가 심해지면 몸까지
앓아 누울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러면 또 잘난척 한다, 교만하다면서
비방하는 소리가 들리니 참 기가막히다.
그러나 늘 이김을 주시는 이는 구주시다.
아무리 낙담과 좌절이 일어나도 다시
진리의 말씀을 펴고, 묵상하면 순식간에
평화가 밀려오고 기쁨과 보람이 솟구쳐
오르니 아마 이런 맛 때문에 도를 닦고
진리를 전파하는 가보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늘 다시 마음에 새기고 나 자신과
주위 여러분들을 격려한다.
선을 행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권면하고
격려해야 한다. 이것만이 자신과 가정,
사회와 나라, 그리고 온 세계에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비결이다.
선을 행해도 떨침이 없고 효과가 없으면
중단하거나 포기, 혹은 비난하지 말고
격려할 일이다.
격려를 하여 선행이 빛이 나면 다시 또
다음 차원의 선행을 권면하여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자신과 남을 도와야 한다.
그런 모습이 진정 아름답고 선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기쁘게 한다.
[출처] 참전계경 제295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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