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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59사-修敎(수교)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59사-修敎(수교)

柏道 2019. 4. 15. 22:34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71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되는가?'
이 말은 남악 회양선사와 마조와의 대화
중에 나온 말이다.
마조는 당시 좌선에 집착하여 앉은 방석이
일곱개나 닳아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맹렬하게 좌선에 집중하는 마조가
찾아왔을 때 회양선사는 '좌선을 무엇하러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답을
마조가 주자 회양선사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기왓장을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궁금해서 물었다.
'기왓장을 왜 숫돌에 가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럼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된다더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를 채찍질
하는가? 아니면 수레를 채찍질 하는가?'
이 말을 들은 마조는 크게 깨우침을
얻고 좌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바른
수행을 함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본질이 빠진 형식에 매인 것을 지적하는
아주 유명한 일화이다.
오늘날 종교와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보게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본질을 빠지고 껍데기 형식만
남은 생명없는 종교와 정치... 물론 말은
다들 생명을 말하고, 평화와 행복을
외치지만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어 보겠다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는
몸부림만 가득한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은 뭐가 다른가?
혹시 그들도 다른 쪽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촛불집회에 기대를 걸고, 또 그것을 통해
무언가 역사의 큰 획을 그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나
이런 질문을 해 볼 필요는 있다.
그렇게 촛불을 매주 밝힌다고 새 날이 올까?
만일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그렇게 온 새 날은 어떤 날일까?
정의로운 사회, 깨끗한 정치, 민주적인 절차, 평등한 세상...
유사이래로 이러한 이상을 실현해 낸 시기,
혹 그런 사회나 나라가 있었는지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할 때다.
안됐지만 예수도 이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촛불이 잘못되었고, 소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충정과 순수한
열정, 용기 등은 높이 살만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과
평화로운 집회 등은 큰 수확이요, 칭찬할 만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요,
막연한 소망일 뿐 냉정하게 자신의 동기와
결과에 점검을 해 보아야 한다.
경전은 항상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추은 겨울날, 춥고 어두운 나라에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만일 '네 마음에 촛불을 먼저 밝히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한다면 매우 기분 나쁘겠지...
비겁하고 무책임한 소리라고 큰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도 그런 입장을 취하다가 실망과
분노한 민중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언짢게 여겨진다면
그 반응 자체가 경전의 지혜를 무시한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이런 경전의 지혜를
존중 한다면 촛불을 밝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효과적인 마음의 빛을 밝히는
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질까?
아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은 항상 그럴 것이다.
내가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나의 눈과
의식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을 경전에서는 구원이라고
하고, 깨달음, 해탈이라고 한다.
촛불을 들고 안들고는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빛을 밝히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촛불은 못들어도 마음의
빛은 밝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세상대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가겠지만 나는
나대로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비록 세상이 그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第 259事 福 4門 和 1戶
(복 4문 화 1호) 修敎(수교) 
 
修者自修修也(수자자수수야)라
修人亦修也(수인역수야)라
修天道之道者(수천도지도자)는
敎昏人見明道(교혼인견명도)하고
敎惡人歸善道(교악인귀선도)하며
敎善人遷人道則
(교선인천인도즉)
功過於甘霈(공과어감패)니라 
 
닦음(修)이란
스스로 닦는 것도 수행이요
다른 사람을 닦아 주는 것도 수행이라
하늘의 도리를 닦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쳐서
밝은 도리를 깨닫게 하고
악한 사람을 가르쳐서
착한 길로 돌아오게 하며
착한 사람을 가르쳐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게 한즉
그 공덕은 가뭄에
단비가 쏟아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수행, 즉 닦는다고 하니 '마음을 닦는다'고
결론으로 가기 쉽다.
나를 닦는 것도 내 마음을 닦는 것이요,
남을 닦는 것도 남의 마음을 닦아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하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흐뭇해 할지 모른다.
맞다. 적어도 이 수준에 이르면 세상의
물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훌륭한 깨달음이요, 탁월한 지혜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다시 잘 보라.
경전의 위대함은 항상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간다는 점이다. 꼭 한 발 앞서고,
한 단계 더 높으며, 한 길 더 깊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인도해 나간다.
여기서 무엇을 닦는다고 하는가?
'수천도지도'(修天道之道)
'하늘의 도를 닦는 도'이다.
미안하지만 내 마음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아닌 '하늘이 도'를 닦는 것이다.
초점이 나를 바꾸겠다는 것도,
남을 변화시키겠다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도에 초점을 맞추고, 그 하늘의 도에
더 밝아지기를 바라며 온전히 그에
집중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내 마음이 닦이며, 주위 사람들을 닦아주는
일이 발생한다.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 내 마음에서 닦인
하늘의 도가 그를 일깨우고,
악한 사람을 보면 내 마음에서 역사하는
하늘의 도가 그를 책망하여 돌이키게 하며,
심지어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도는 그를 그냥 두지 아니하고 도를 실천하는
단계로 발전하도록 격려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의 도가 주도적으로 역사할 때
나도 시원한 물줄기를 얻는 것과 같고,
다른 사람들은 가뭄에 단비가 쏟아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하늘의 도를 성경에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 혹은 '성령'이라 한다.
그리고 우리로 오직 진리에, 성령에
의탁하며, 진리가 인도하는 대로, 혹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라고 깨우친다.
정확하게 오늘 이 가르침과 일치한다.
수혜자는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이 수혜를 얻게 하는 근본은
진리요, 도이며, 성령이시다.
그럼 나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