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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제260사 -遵戒(준계)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60사 -遵戒(준계)

柏道 2019. 4. 15. 22:37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72 
 
내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사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인데도 내가 사랑하는 것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괜히 미워진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도 질투하는 분으로
묘사하고, 예수도 성전 안에서 과격한 
행동을 한 것 같다.
이는 단순한 성향이나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여럿 중에 이것을 더 좋아하고,
저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차원이라면
이런 마음을 일으킬 이유도 없고 오히려
그런 마음이 부정적인 질투와 고집이
된다.
절대적인 것, 그러니까 이유나 변명이
통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바로 그러한 배타적인 것에 '진리의
말씀'이 들어간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문제는 너무 추상적이며
다른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나
태도를 가지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난 행위, 즉 
오랫동안 진리로 존중되어 온 경전을
받들어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고 삶에 
실천하려는 모습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만일 이런 모습이 약하다면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어리석고 게으르다는 판단을
피할 수가 없다.
특히 거기서 인생의 모든 지혜와 능력,
사랑의 근원을 발견하고 누리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책망이
일어난다.
요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세상살이에 온통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을 보면 무척 화가난다.
그런 좋아하는 일, 바쁜 일이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이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바울도 그러지 않았는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第 260事 福 4門 和 2戶
(복 4문 화 2호) 遵戒(준계) 
 
遵守也(준수야)요
戒參佺八戒也(계참전팔계야)라
新衣者主整(신의자주정)하여
惟恐濫䄛(유공남루)하고
新浴者主潔(신욕자주결)하여
有恐汚穢(유공오예)하나니
遵戒如主整主潔
(준계여주정주결)하여
顧勤而無放怠(고근이무방태)면
人和神亦和(인화신역화)하고
神和天亦和(신화천역화 )니라 
 
준(遵)은 지키는 것이요
계는 참전계경의 8리 366사 계율이라
새 옷을 정연하게 입은 사람은
옷이 낡아질까 조심하고
새로 목욕을 정결하게 한 사람은
몸이 더러워질까 조심하느니라
계율 지키기를 그와 같이
정연하고 정결하게 하여
부지런히 살피고 게을리 하지 않으면
사람의 조화에 신령 또한
조화를 이루고
신령의 조화에 하늘 또한
조화를 이루느니라 
 
천부경이나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지혜와 계율은 종전의 여러 종교가 취해 온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지금까지 종교의 율법이나 계율은
'신상필벌' '권선징악'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니까 신을 중심으로 그에 거역하는
인간에게 벌을 주고, 순종 잘하는 자에게
복을 내린다는 그런 차원으로 요구되었고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옥으로 보내지는 위협도 신에
대한 잘못, 즉 죄 때문에 가게 된다.
그런데 우리 민족 종교의 가르침은 초점이
다르다. 물론 모든 종교들도 근본적으로는
그런 방향성을 취하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분명히
신 중심이다.
천부경이나 삼일신고를 연구해 보면
그 취하는 방향이나 태도가 다르다.
물론 외적으로는 하늘을 경외하고, 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자 창조주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초점은 철저히 '인간'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신이 자기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영광이자, 멋이다.
신이 자기를 높이라고 하고, 자신을
섬기기를 강요한다면 이미 그 신은 자격
미달이다. 뭐가 부족해서 인간들의 영광을
구한다는 말인가?
진정한 신은 자신이 지은 피조물, 특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그를 양육하며 돕는 것이
마땅하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모든 삶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인간 부모도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전능한 아버지가 우리 자녀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영광을 구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모든 율법과 계율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함이요, 우리의
영광과 행복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 계율이 엄하고 중한 이유도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이다.
철없는 아이들은 부모가 공부하라, 착하게
살아라, 나쁜 짓은 하지마라는 등의 말을
잔소리로 듣거나 자유를 금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지혜로 깨닫고 나면 그런 모든 것이
자녀를 위함이요, 자녀의 행복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알게 되어 스스로 열심을
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이다.
이에 동의하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된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계율을 즐거워
하여 묵상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지혜로운 자의 삶인지, 아니면
이를 부담으로 여기고 싫어하여 멀리
제쳐두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고
있는지 말이다.
참전계경의 계율들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밝히는 빛과 같고,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보석들과 같다.
따라서 그 가치를 아는 자들은 한 말씀,
한 교훈마다 새옷을 입고 목욕을 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할 것이요, 혹시 그 
가르침에 소홀하거나 누락, 또는 어긋날까
조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애를 쓰게 되면 자연스럽게 삶에
조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 조화로움이
주위로 흘러나가 세상이 조화와 균형으로
아름답게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는 신령계까지도
감동을 시켜 그들까지도 도전을 줄 것이요
이러한 인간과 신령의 조화는 하늘에까지
미쳐 그 영광스러움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제발 경전의 말씀에 시간을 쓰고,
마음을 다하며, 삶을 투자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