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55사-主恭(주공)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67
수준 때문에 가르침의 순서를 거꾸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바른 순서는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야 말이 달라지고 행동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데 의식의 변화를 어떻게
아이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행동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행동변화를
촉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전제가 들어있다.
'그렇게 가르쳐 봐야 소용없다'는
전제이다. 마음 자세가 바뀌지 않는한
말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오히려
부작용만 낳게 된다는 깨우침을 전제하고
임시로 이러한 방법을 쓰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통하여 기대하는
효과는 '변화'가 아니라 도리어 '무효'
즉 '불가능'을 당사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마치 율법을 주신 목적이 원래는 그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복된 삶을 살도록 의도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정죄'의
역할, 즉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상
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까 율법을 가르칠 때도 이를
전제하고 가르쳐야 한다.
'내가 아무리 행동변화를 가르쳐도 안된다.
그래도 내가 가르치는 이유는 이것이 옳음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이 방법으로는 변화가
불가능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효과가 없는
가르침에 기대를 걸고 의미없는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고 있을까?
그것은 당사자 조차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헛된 소망 가운데 헛수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라. 상식 아닌가?
생각이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나 행동을
무슨 재주로 바꾸겠는가?
따라서 아무리 행동을 바꾸라는 가르침을
해도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가 먼저
알고 시한을 정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헛수고를 하게 되고, 결국은
위선만 더하게 되는 흉한 결과를 내게 된다.
깨우친 자는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안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러한 방법을 쓰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안되는 것을
확신시키고 비로소 의식변화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본인이 진리로 인해 의식변화를 이룬 체험을
바탕으로 그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변하면 행동이 바뀌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행동을 바꾸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第 255事 福 3門 順 4戶
(복 3문 순 4호) 主恭(주공)
主恭者(주공자)는
主恭順也(주공순야)라
一動一靜(일동일정)에
必主恭順(필주공순)하여
視事如擧溢(시사여거일)하며
接人如佩重(접인여패중)하여
謹愼成信德(근신성신덕)하고
就收成譽德(취수성예덕)이니라
주공(主恭)이란
공순함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니라
행동 하나를 일으키고 멈춤에 있어
반드시 공순함을 중심으로 삼아
일을 대함에 가득 찬 물그릇을
드는 것 같이 하고
사람을 가까이함에 무거운
물건을 찬 듯 근신하게 되면
신뢰의 덕이 이루어지고
명예의 덕을 거두게 되느니라
이 가르침에서 쉽고 빨라 보이는 것은
'매사 행동을 공순하게 해라'이다.
그러니까 '예의바르게 말하고, 온순한
태도로 남을 대하라'는 어떤 외형적인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다.
'어른에게 말은 공손하게 하고, 집을
드나들 때는 항상 행선지를 알리고,
웃자리는 어른에게 내어 드리고....'
어린 아이에게는 이런 외형적인 행동을
먼저 가르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깨우침을 얻은 부모는 이러한
행위를 먼저 가르치지만 항상 기회를
엿보면서 의식에 도전하기를 시도한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틈틈히 가르쳐서 아이의 의식이
깨어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단순한 행동을 배우라고 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좋은 행동이
나올 수 있는지 원리를 깨우치려고 한다.
오늘 가르침과 같이 어떤 일을 만나면
'물이 가득찬 그릇을 들고 가듯이 신중하라'
고 가르치는데 지혜로운 부모는 실제로
아이에게 물이나 국이 가득찬 그릇을
한 번 들고 걸어보도록 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그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져서 모든 일에 신중하게 대하여
지혜롭고 예의바른 행동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을 대할 때에도 무언가
무거운 것을 몸에 차고 행동하는 것처럼
하도록 일깨우면서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해 보도록 할 것이다.
사람을 가볍게 대하지 말고 신중하고
진지하게 대하도록 하는 훈련이 이만큼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경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데 있다. 원리를 깨우치도록
하기 때문에 보다 지혜로와지고,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최선이 아니다.
가득찬 물그릇을 드는 것 같이, 무거운 것을
몸에 지닌 것 같이 일을 대하고, 사람을
접하라는 교훈도 거기서 머물면 안된다.
이 또한 이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보다 깊은
동인이 있다.
그것은 보다 깊고 본질적인 이치인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다.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강하면 이러한
공순함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한 단계 더 들어간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 진리로 들어가야 한다.
바로 우리 모두의 근원이 한 하나님이요,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자매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나머지 문제들은
힘들지 않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깊은 곳, 본질까지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보다 좋은 답이 없기에
모두가 이 깨달음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출처] 참전계경 제255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천지인 공부 > 참전계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전계경 제257사- 知分(지분) (0) | 2019.04.15 |
---|---|
참전계경 제256사-持念(지념) (0) | 2019.04.15 |
참전계경 제254사-禮貌(예모) (0) | 2019.04.15 |
참전계경 제253사-靜默(정묵) (0) | 2019.04.15 |
참전계경 제252사-安定(안정) (0) | 2019.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