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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245사-明白(명백)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45사-明白(명백)

柏道 2019. 4. 15. 21:29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57  
 
요즘 사람들은 '착하다'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온순하고 순진하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는 일이 난무한 현대사회에서 이런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한마디로 '속여먹기 쉬운 사람' 혹은 '이용해 먹기 좋은 사람'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언어의 부패 사례 중 하나이다. 분명히 '선'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속성이 있다. 순수하고 온유함도 마찬가지 선의 속성이다. 그러나 우유부단함이나 순진함, 유약함, 어리석음 등은 선의 속성이 아니다. 선에는 '용기'와 '당당함' '단호함'등의 속성도 다 포함한다. 그러니까 '공의'의 면도 모두 선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이상 '선하다, 착하다'는 의미를 따뜻한 기온에서만 찾아서는 안된다. 차가움과 냉정함 속에서도 선의 속성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쉽게 막 대하고 이용하려고 하지 말하는 뜻이다. 혹시 연약함과 우유부단함을 선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第 245事 福 2門 善 4戶
(복 2문 선 4호) 明白(명백) 
 
性善則部截丁寧
(성선즉부절정녕)하며
行決的歷(행결적력)하여
無猶豫進退(무유예진퇴)하며
無疑似左右(무의사좌우)하여
天理人事(천리인사)에
明白乎自然之間
(명백호자연지간)이니라 
 
성품이 착하면
맺고 끊음이 확실하고
행동을 결단함에 정확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머뭇거리지 않고
좌우가 다르지 않아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이
명백하며 자연스러우니라 
 
이 가르침에 나타나는 선은 다분히 '의'의 개념과 닮았다.
사실 '의'도 '선'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의'와 구별
되는 것은 '의'가 법정적인 개념이라면, '선'은 성품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의'에는 따뜻함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선'에는 따뜻함과 부드러움 같은
요소들이 반은 차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속성에 끌려 '착함'을 그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한 개념 더 끌어올리면 진정한 의미의 '선'은 '선과 악의 구별을 초월'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판단을 넘어서야 거기서 참된 선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향하여 누군가 '선한 선생'이라고 불렀을 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18:18)고 답했다.
물론 자신을 향하여 '선한 목자'라고 하기도 했지만 앞에서는 '절대적인 선'을 의미한
것이다.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사실 온전한 '선'이 나타날 수 없다.
예수가 '선한 선생님이여'하고 다가온 자에게 '나보고 선하다고 하지 말라'는
의미는 '네가 나를 선하다고 하는 것은 너의 이기적인 욕심에서 나온 판단이기 때문에
나는 그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선한 본성을 따르게
되면 남의 눈치를 보거나, 손익을 따지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후회나 자책 같은 것도 없다. 자신의 냉정한 판단으로 인해 상대방이
괴로와 한다고 해도 그에 대해 불필요한 동정이나 자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갑고 냉정해서가 아니라 선을 따라 행한 것이기에 뒤따라오는 후유증이 없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이 선한가를 확인하려면 바로 이 뒤따르는 증상을 점검해 보면 된다.
걸림이 없이 자연스러우며, 흐림이나 머뭇거림 등의 현상도 없다. 마찬가지로 후회나 자책등의
후유증도 나타나지 않는다.
산뜻하고 명백하며 당당하고 멋지니 남들 보기에도 아름답고, 스스로 자신을 보아도
대견스럽다. 자신을 대견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성품이 자신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 기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