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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제209사-(화 4조 상) 傷(상)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209사-(화 4조 상) 傷(상)

柏道 2019. 4. 6. 06:55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21 
 


그 자체로 화요, 또 재앙을 부르는
요소들 가운데 속임과 빼앗음, 음란에
이어 남을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해에 대한 교훈이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내용은 간단하다.
남을 상하거나 해치는 일은 악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하늘의 준엄한 심판을 제시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경고와 
위협이 통할까?
금방 생각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이러한 교훈은 구식이라하여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참전계경은 오늘날의 상황을 예측을 
못하고 더이상 통하지 않는 공허한
경계만 하고 있는 것일까?
한 번 진지하게 검토를 해보자.
 
第 209 事 禍 4條 傷
(화 4조 상) 傷(상) 
 
傷傷人也(상상인야)라
天怒惡人傷人(천노악인상인)하여
雷霆警之霹靂威之
(뇌정경지벽력위지)
惡之不回頭於利嫌界
(악지불회두어리혐계)니라
行不仁手段(행불인수단)이면
其陽傷陰傷(기양상음상)에
罰有輕重(벌유경중)이니라 
 
상(傷)이란
사람을 상해하는 것이라
하늘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악을보고 천둥과 번개로 경계하며
벼락으로 위협을 하느니라
악인이 이익을 좇아 못된 일에서
돌아서지 아니하고
어질지 못한 수단을 계속부리면
드러난 상처와 숨은 상처에 따라
가볍고 무거운 벌이 있게 되느니라 
 
남을 상하게 하면 하늘이 노하여
천둥과 벼락으로 위협을 할 뿐 아니라
경중을 가려 벌을 내린다는 말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학교 선생님을
통해 늘 들어왔던 훈계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러한 경계와
위협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이러한 가르침은 더이상 효력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이다.
여전히 이러한 교훈은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교훈을 주는 사람들, 즉
부모와 선생들이 이를 믿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스스로 더이상 이런 교훈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본인들이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외적인 현상'
으로서의 천둥과 번개, 그리고 하늘의
실제적인 형벌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기다려 본다.
그러다가 실제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망을 하고 기대를 잃어버린다.
왜 꼭 그런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같은 말이지만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왜
생각하지 않는가?
마치 예수가 구원자로 왔다고 하니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다가 실망하고 분노한 군중들 같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
메시야가 처음이든, 재림이든 이 세상에
와서 공의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다시 와도 2000년에 예수가
왔을 때와 꼭 같은 반응을 할 것이다. 스스로의
의식틀 속에 갇혀있는 한 하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늘은 천둥과 번개로 우리를 경계한다.
남을 상하게 하면 우리의 양심에 천둥과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요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양심이 굳어져서 전혀 찔림이나 죄책감도
못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즈음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할지 모른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잘못이다.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지 남을 상하게 하고
해친 사람은 철저하게 보응을 받는다.
외형적으로 금방 나타나지는 않을지라도
죄를 범하는 순간 바로 심판은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남을 때리거나 쳐서 그 몸에
상처를 내게 되면 반드시 그 증상이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하늘의 법칙이다.
요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옛날보다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실력이
좀 나아진 것 뿐이다.
그러니까 양심이 무디어진 것도 아니고,
두려움이 없어진 것도 아니라 단지 안그런척
할 뿐이다.
사실 율법적인 형벌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는 낮은 의식이
있어서 그에 따른 법이 나오고 벌이 나온
것이지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다.
그 증거를 제시하겠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8)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 자체로 이미 심판이
임했다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은 바로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문제이지, 진리는
변함없이 그대로다.
오늘날 잘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감옥에 가두는 이유는 사실은 그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충분히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러한 법이
시행되고 있을 뿐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형벌이 가해지지 않으면
공의가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사실은 안해도
되는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남을 때리는 순간 자신을
때리는 것이요, 남을 괴롭히는 것은
사실 자신을 괴롭히는 짓임을 모두가
깨달을 때 비로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정 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적어도
분노와 심판을 하나님께라도 온전히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고스란히
그 후유증을 자신이 치러야 한다.
이 말도 사실 조심스럽다. 잘 못 이해하면
세상에 법도 정의도 필요없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사람에게는 위의 모든 말을 취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