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195사-(화 2조 탈) 奪(탈) -몸의 9구멍을 말한다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07
'몸은 보이는 영혼이요, 영혼은 보이지 않는 몸이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멋지고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의 의식이 점점 이원론을 넘어서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은 그에 큰 도움이 된다.
'몸'과 '영혼'이라는 이원성을 말하면서도 둘의 연관성이 분리시킬 수 없음을 들어 통일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영적인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와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물질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과 성질의 세계로 말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 보이는 세계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은 감당해 왔는데 그 기여한 공이 크다. 그런 가르침이 틀린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정이라는 것은 거치는 단계일 뿐 그 과정에 계속 머물게 되면 과정이 아니라 목표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과정으로 과정이 되게 하려면 말 그대로 지나가야 한다.
율법은 믿음이 오기 전까지만 필요했던 것처럼 믿음이 오면 율법은 그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다시 율법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많다.
믿음과 복음, 자유를 강조하다가는 방종으로 잘못 치우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율법으로 그런 오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일리가 있고 합당하게 들린다면 주장하는 자나, 그렇게 여기는 자는 모두다 아직 율법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 다시 이원론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무엇인가?
실컷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정죄가 사라지고 더 이상 심판이 없다고 해 놓고 또 다시 잘, 잘못을 말하면 심판이 없다고 한 것이 거짓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보고 '그러다가 다들 방종에 빠집니다. 율법을 다시 불러들여야 합니다'하면 하나님이 실수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소리인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러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다. 그러면 당연이 이렇게 말하며 대들것이다. '그럼 자유만 이야기해도 된다는 말이냐? 성경에도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사용하면 안된다고 하고,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느냐?' 참 똑똑해 보이는 소리다.
만일 그렇다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있다는 소리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가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빛'가운데 거하는데 뭣하려고 굳이 또 '어둠'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복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빛이 되고 어두움이 없는 세계로 통합이 되었는데 '또 어두움이 침투해 올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고 말한다면 그는 빛 안에 있지 않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전에 '어두움과 빛'이 있었던 이유는 빛의 존재와 의미를 밝히기 위한 목적뿐이었다.
어두움을 배경으로 해야 빛이 드러나니 빛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배경으로 어두움을 동원한 것 뿐이고 이제 빛의 영광과 본질이 다 드러난 상태면 또다시 어두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어두움이 없어진 상태인데 어두움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소리 밖에 않된다. 만일 여전히 어두움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아직 빛에 대해 모르고 있어서 좀 더 어두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종을 막기 위해서 다시 율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런 사람이 똑똑한 척, 수준 높은 척 방종을 이야기 하고 율법의 필요성을 들고 나온다.
빛은 사실 어두움의 배경이 필요없다. 어두움의 배경은 우리를 위해 필요했을 뿐이다. 우리가 빛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이상 어둠의 존재자체가 사라지며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어진다.
마찬가지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이이상 율법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방종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아직 어두움 속에 있는 증거다. 그런 사람이 온전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을 향하여 어두움을 조심해야 한다고 외친다면... 거 참 웃기는 상황이다.
第 195事 禍 2條 奪
(화 2조 탈) 奪(탈)
物慾蔽靈竅塞(물욕폐령규색)이니
九竅盡塞(구규진색)하면
與禽獸相似(여금수상사)하여
只有食奪之慾而已
(지유식탈지욕이이)하고
未有廉恥及畏怯
(미유염치급외겁)이니라
'물욕이 영을 가리면
통로가 막히나니
몸의 아홉구멍이 다 막히게 되면
짐승과 다를 바 없어서
오직 먹이를 빼앗는 욕심만 있고
염치와 두려움이 없어지느니라'
이 가르침도 아주 상식적인 내용이다. 물욕에 빠지면 짐승같이 되어 아무 못쓰게 된다는 이야기야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여전히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조심해야 한다' '물욕을 버려야 한다'는 식의 효과없는 가르침을 또 들어야 할까? '그만해라. 많이 들었다'할 만하다. 그러면서도 왜 또 이 가르침을 펴 드는가?
잘 관찰해 보면 이 가르침 속에는 우리가 주의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이 들어 있다. 이제껏 아무리 말해도 안되었던 이유가 이 속에 들어있고, 변화의 키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번 다시 읽어보라. 물질에 대한 욕심이 '영'을 가리게 되면 영의 구멍(통로)를 막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다들 안다. 물질에 욕심을 부리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영이 둔해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하다. '아홉 구멍'이 등장하는데 이 구멍은 몸의 9구멍을 말한다. 머리에 7, 그리고 아래에 2 내외로 통하는 구멍이 9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 9구멍은 그 자체가 물질이요, 또한 들락날락하는 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물질이다.
코로 들락거리는 공기도 물질이요, 눈으로 보는 것도 빛이라는 물질이며, 귀로 들리는 것도 파동이라는 물체이다. 비록 물질로 규정하기에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우리의 감각에
잡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냥 편리하게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막히면 우리의 영이 막혀서 모든 기능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은 육신과 아주 밀접하여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이 된다.
이제까지 이원론의 입장에서는 육과 영은 분리되어 있고 영은 선하며, 육은 천하고 악하여 죽음과 함께 분리된다고 말해왔다. 특히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도 영이 직접 하늘로부터 지혜를 받아
마음과 육체를 통제해야 올바른 삶을 살고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영혼은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로 막연한 느낌만 준다. 하늘이 알려 주어야 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짓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제까지 이렇게 가르친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의식이 영적인 것에 집중을 하여 그 감각이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면 분리된 상태로 헛바퀴를 돌게 되어 있다.
아무리 알아도 하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형국이니 변화가 안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때가 되어 연결고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몸의 9구멍이다. 이것들이 단순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관만이 아니라 또한 영혼의 변화와 성숙을 위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몸의 9구멍이 막히지 않고 잘 통하게 하면 영혼이 물욕을 극복하고 신성을 회복하는 길로 이끄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숨을 쉬어도 공기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운'을 끌어 들일 수 있고, 눈이 단순히 빛과 영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으며, 귀도 마찬가지요 심지어는 입과 생식기들도 그런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몸의 9구멍을 잘 관리하여 청결하고, 시원하게 해 보라.
그리고 의식을 사용하여 그리로 들락날락 하는 것 속에 숨겨진 영적인 에너지를 파악하고 활용해 보라.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숨이 단순한 숨이 아니라 영적 에너지가 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단순한 그림,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보고 듣게 할 것이다.
심지어 다른 구멍들도 마찬가지다.
[출처] 참전계경 제195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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