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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 68사- 知中(지중)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 68사- 知中(지중)

柏道 2019. 3. 16. 08:31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80 
 
약속의 중요함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성경도 구약과 신약으로 명하여
언약, 계약의 형식으로 우리와
교통하신다.


약속은 믿음을 가능케 하는 기본이요,
믿음이 산출하는 열매로
감각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시금 약속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공부를 이어간다.
이제 68사 신의 2단 약의 2부로 들어간다. 
 
信 2團 約 2部 (신 2단 약 2부)
제 68사 知中(지중) 
 
知中者(지중자)는
知就約(지취약)하여
有中道也(유중도야)라
旣約而被間而止(기약이피간이지)거나
厭苦而止(염고이지)거나
推移而止(추이이지)거나
聞虛信而止(문허신이지)하는 것은
皆非中道也(개비중도야)라
故知者自戒(고지자자계)니라 
 
'지중이란
약속을 이루는 길을 알아서
중도를 택할 줄 아는 것이라
이미 약속을 해 놓고
남이 이간으로 그만두거나
괴로움이라고 당하기 싫어
그만두거나, 미루다가 그만두거나
헛된 말을 믿고 그만두는 것은
모두 중도가 아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늘
스스로를 경계하느니라' 
 
놀라운 말씀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여기에 '中道(중도)'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혹은 '中庸(중용)'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 '중도' 혹 '중용'은
대단히 심오한 뜻을 가진 말이다.
중용은 '執基兩端(집기양단)'
그러니까 양 극단을 아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태도요 결정이다.
어정쩡한 것을 중도라 하지 않는다.
혹은 적당하게 상황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도 중도와는 전혀 상관없다.
양쪽 극단을 알아야 자신이 취해야 할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자리를 두려움없이,
거리낌 없이 취할 수 있다.
이 중도의 지혜는 사람이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양극단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성령과 일치가 되는 순간 자신에게 전달되는 지혜다.
이를 확인하게 되면 본문에서 말씀하듯이 이간질이나,
힘들기 때문에, 혹은 남의 말에
현혹되어 흔들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집을 부리며 독선적이 되거나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데로 가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는
자리가 바로 중도의 자리다.
남이 뭐라고 하든 간에,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지든 간에
자기 내면에서 비추는 빛과 지혜를 따라
그저 묵묵하게 그 길을 간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도 있고,
들지 않을 수도 있으며
환호를 받을 때도 있고,
돌이 날아올 수도 있다.
예수의 삶이 그랬다.
추호도 사람의 평가나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고,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도 당당하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아버지의 약속에 대한 신뢰였고,
그 뜻을 순종하는데 사용한 방법은
중도라는 기가막힌 지혜였다.
자칫 이 중도라는 것이 편리함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도 이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기에 이탈한 증거다.
그런 유혹과 두려움이 몰려와도
중도를 아는 자의 마음 속에는 항상
밝은 빛이 있어 자신의 갈 길, 행할 일을
비추어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그 자체로 이미
평안과 확신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양극단을 알고 중도를 취할 수 있는 지혜...
세상을 바르게 이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질이다.
그런데 중도를 모르는 자들이
중도를 모르는 자를 선택하여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주장하니
대립과 싸움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촛불을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전계경 같은 지혜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무지와 욕심을 발견하고 그마음에
진리의 불을 밝히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